짧았지만, 체감 시간으로는 나 홀로 3시간이 넘게 흐르고 있는 듯한 기나긴 정적.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는 정택운은, 아주 약이 오르게도 변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새벽이 다 가도록 울어 눈이 퉁퉁 부어버린 저와 아주 다른 반듯한 모습에 학연은 갑자기 속에 천불이 이는 기분이 들었다. 오냐, 너는 홀가분하겠지. 들러붙던 놈 하나를 한낱 콜라캔 차듯이 차니까, 기분이 아주 째지시겠지.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다시피 하다, 학연이 먼저 까득, 어금니를 갈아 물고서 한껏 시비 담긴 어조로 물었다. 왜, 갈 길 안 가고? 툭툭 끊어 말하는 폼새가 비아냥거림에 틀림없어, 택운의 표정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미세하게. “보다시피, 얼굴이 엉망진창이야.” “…….” “이렇게 대놓고 까인 적이 처음이라.” 학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비딱하게 택운을 살짝 올려다 보았다. 택운의 입술이 미약하게나마 들썩였다.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 그것은 곧 머지않아 잠잠해졌다. 학연은 힘없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더 이상 원망을 퍼붓고 싶지도 않다. 저 싫다고 걷어찬 인간에게 미련을 가져봤자, 차학연 인생에 더욱 커다란 흑역사만 남길 뿐일 테다. 택운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지그시, 예전처럼, 저를 지켜보고 있다. 제가 말 하는 것을 조용히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그 때처럼. 다시 한 번 입술을 뜯은 학연은 더는 할 말 없다는 듯이,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닫으려 ‘했다’. “할 말 있다고 남으라 했더니.” “…….” “이러고 있습니까?” 차 대리님. 귀보다 코가 더 빨랐다. 나지막하고 나른한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달큰한 카라멜향이 먼저 맡아졌다. 어쩌면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유롭고, 나태롭기 그지 없는 맹수처럼. 생각을 채 끝맺기도 전에 뒷통수 쪽에서 바람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재환은 웃고있다. 등 뒤로 훅 끼쳐오는 온기에 슬쩍 뒤돌았다. 여전히, 문은 닫히지 않은 채다. 발소리가 몇 번 바닥을 울리더니, 이내 어깨에 큼지막한 손바닥이 얹어졌다. 고개를 좀 더 돌리자, 반듯하게 각잡힌 어깨를 지나 이목구비 또렷한 얼굴이 보였다. 입술이, 움직였다. 어쩐지, 사무실에서 딱딱하게 이야기 할 기분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러고는 웃었다. 또다. 목소리에 마법이라도 건 것 같은 묘한 기분. 그에 학연은 거짓말처럼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택운의 목울대가 두어 번 일렁였다. 저 남자. 입으로는 차학연을 향해 말하며, 맹수같은 두 눈은 한 치의 공백없이 저만을 바라보고, 아니, 노려보고 있다. 아침에,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학연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오전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손으로는 펜을 쥐거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면서 정작 생각은 다른 곳에 치우쳤다. 생소했다. 차학연이, 저 아닌 다른 이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은. 남들이 보면 아주 우습고 모순적이겠지만, 그랬다.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이 없어, 머리를 식히러 갈 겸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신이 내리는 운명은 참으로 교묘하고, 각박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거짓말처럼 차학연과 마주쳤다. 사실, 무의식적으로라도 조금은 기뻤는지 모르겠다. 무언가 말 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이 상황, 이 관계에서. “정택운씨, 맞죠?” “…….” “저번, 회사 옆 카페에서 만나지 않았었나.” 저번, 회사 옆, 카페. 단어들이 택운의 머릿속에서 툭툭 끊어졌다. 즐비하게 늘어지는 상황을 천천히 끼워맞췄다. 택운의 시선이 학연을 지나, 재환을 담아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생각해냈다. 코끝에 맡아지는 꽤나 익숙한 카라멜향. 그러니까, 회사 옆 카페, 카라멜 또라이. “……카라멜?” “이왕이면, 이름으로 기억해주셨으면 싶은데.” 그러고는, 기획개발 B팀장 이재환입니다, 라는 통성명을 입에 담고서 어깨를 으쓱이며 악수를 건네온다. 그저 인사치레인 악수일 뿐일 텐데, 어쩐지 갑과 을이 되어버린 상황 마냥, 불쾌했다. 심중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을 가진 남자 때문인지, 눈알을 도르륵 굴려대며 지켜보고 있는 차학연 때문인지, 택운은 알 수 없었다. “…기획개발 A팀장….” “압니다. 이름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때와 다름없이, 짜증이 나도록 여유로웠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학연씨와 업무에 대해 논의할 게 있어서.” “…….” “이만, 자리를 뜨도록 하죠.” 차학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다. 한참 그들의 등을 응시하고 있던 택운의 눈동자가 일순간 뒤돌았다. 걷고, 또 걸으며 답지 않게 입술을 짓씹었다. 저를 향해있던 학연의 시선이 단박에 이재환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어 택운은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맹수같은 두 눈. 재미있는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장난기 서린 눈매, 그 이면은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방대하게 이어지는 생각이, 차학연을 바라볼 때 누그러지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에 닿았을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불쾌해졌다. -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달디 단 디저트들이 이어졌다. 재환과 꼭 닮은 향을 품은 그것들을 보자, 학연은 갑자기 머리에 두통이 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뭐, 애도 아니고……. 학연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푸욱 내쉬자, 재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어디 아픕니까? 천진하리 만큼 상쾌한 목소리에, 학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아픈 건 아니고, 진이 빠져서요.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사그라졌다. 미리 예약을 해둔 것인지, 직원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에 착석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문득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보고있는 재환에게 물었다. 무슨, 할 말이었어요? 재환은 고개를 돌려 학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꼼질거렸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지켜보고 있자, 머지않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 재환이 씩, 웃었다. “카라멜.” “…카라멜이 뭐 어쨌다고….” “내가, 꼭 가지고 싶은 카라멜이 생겼어요.” 가질 수, 있을까요? 눈썹 끝을 늘어뜨린 채 묻는 재환을 빤히 응시하던 학연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업무에 관해 논의할 게 있다더니, 뜬금없이 자신의 카라멜 사랑에 대해 벙긋거렸다. 하물며 아까 정택운 팀장님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분위기가 꽤 좋지 않던데, 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건만. 아무도 모르게 혀를 쯧, 차고서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거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다른 곳을 향해 있던 시선이 학연에게 집중된다. 물론, ‘카라멜에 미친 당신으로서는.’ 라는 마지막 말은 참아냈다. “정말, 그럴까요?” “참, 나…. 어떤 대단한 카라멜이길래.” “그게, 아주 달콤하고, 새까맣고.” 새까맣다는 구절에서 물을 들이키던 학연이 발작하듯 컥컥댔다. 그러자, 재환이 눈을 휘어접으며 팍, 웃음을 터뜨렸다. 학연은 마음속으로 욕설을 작게 읊조렸다. 까맣다와 관련된 말을 들으면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곧 이어, 한참을 웃던 재환과 쪽팔림에 그만 웃으십쇼, 라고 소심하게 이야기하는 학연의 앞으로, 따끈한 음식이 놓여졌다. 눈물까지 훔치던 재환의 웃음이 그제서야 멎을 수 있었다. “차학연씨 덕분에 웃었습니다.” “밥이나 먹죠.” 거칠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썰어대는 학연에, 재환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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