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또 보건실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뜨게 됐다. 이물질이 들어간 것처럼 뻐근한 눈을 두어번 끔뻑이니 천장의 매립등을 가리고 동그란 얼굴들이 원을 그리며 쏙 쏙 등장했다.
"김도화 일어났다."
"도화! 괜찮아?걱정 많이 했어."
"간 떨어질 뻔 했잖아!"
이동혁은 아무 말도 않고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다가 물러났다.
♡
나는 몽롱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어났다. 이민형이 내 허리를 받쳐 주었다.
"머리 아파?어지러워?"
"아냐 아냐. 괜찮아. 고마워 민형아."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내 두 발이 내려오는 거에 맞춰 정재현이 슬리퍼를 가지런히 모아줬다. 고마워. 내가 말했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거울 앞에 다가가서 헝클어진 머리를 꼬리빗으로 빗으며 정리했다. 윗옷을 당겨 폈다. 치마 엉덩이 부분을 위에서 아래로 쫙 쓸어 내리고, 돌아간 치맛단도 당겨서 자릴 잡아주었다. 아까보다 훨씬 단정해진 내 모습을 보니 자신감도 더 붙고, 기분도 나아졌다. 김동영이 우리는 이만 나가보자며 이민형을 끌고 나갔다. 정재현이 내 어깨를 짚었다.
"좀 이기적일 줄도 알아라. 착하기만 잘해가지곤."
곧이어 정재현 역시 손을 흔들며 보건실을 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동혁을 에워쌌다. 내가 먼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되게,되게 드라마틱 하다. 보건실에 선생님도 없고, 아파서 누워 있는 애들도 없고..하하.."
"내가 다 내보낸건데."
"으어?"
"농담이야."
농담치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길래 진짜인 줄로 믿었다. 이동혁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벌였을 수도 있을테니까.
"미안해."
"야, 네가 뭐가 미안해..아니야. 너 때문에 쓰러진거 아니야."
"그거 말고, 벌써 두번씩이나 먼저 남한테 고백 받게 한거. 내가 했어야 했는데 남들 통해서 듣게 한 거. "
빳빳이 들고 있던 고개가 누군가 꼭두각시 삼아 조종하듯 뒷목부터 가볍게 툭, 하고 꺾여졌다. 우두커니 소파 등에 기대있던 이동혁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렇지만 나 당장 너에게 다시 말은 안 할거야. 난 지금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너한테 당당하지 못한 것도 있고."
푸른 심줄이 도드라진 이동혁의 손등을 바라보다가 나는 말없이 보건실을 나왔다. 문을 열자 그 옆으로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먼저 나간 삼인방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나는 애들을 지나쳐 교실 쪽으로 내처 걸었다. 한참 수업 중인지 복도는 분분이 날리는 먼지들도 가라앉아 바닥에 누워있었고, 반을 지나칠 때마다 선생님들이 강의하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쳐도 김동영은 모범생 행세를 할 때는 언제고 보건실 복도에서 죽치고 있던건지. 문득 나 혼자 살겠다고 교실로 올라온 것 같아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치사하다고 생각할까. 그렇지만 아까 전에는 정말 그 갑갑한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 소강한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내 머릿속은 폐허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듯 했다.
♡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윤리라가 더 셌다. 많이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결국 이끄는 대로 따라가줬다. 오늘은 윤리라가 무참히 부서져버린 날이니까.
"내가 한심해보이지. 우습지."
내 앞에선 늘 무람 없이 굴던 애가 잔뜩 쳐져서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내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냥 딱해보여."
"아. 하하. 그렇겠네. 너 지금 눈빛 되게 쌀쌀맞다. 닭살 돋네. "
윤리라가 팔뚝을 쓸며 옴죽거렸다. 분명 나보다 큰 키를 가진 윤리라인데 어쩐지 내가 윤리라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사실 네가 너무 밉고, 그래서 머리카락이라도 뜯고 싸우고 싶었는데, 너 막상 보니까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저 지금은 내가 너무 한심스럽고, 뭐하나 싶고 그래. "
아까 수업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에 대해 화가 나신 문학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내려가기엔 이미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렇게 가만히 서서 윤리라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촉박했다.
화장실에 들어오려고 문을 열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 황급히 나가는 같은 반 여자애들을 슬쩍 보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거지?"
"..어."
"느끼는 건데 태세전환 진짜 잘 한다. 그 점은 본받고 싶네. 그런데 나 네 사과는 아직 못받겠어."
윤리라의 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동혁 말처럼 말이야.
"지금은 적절하지 못한 시기인것 같아. 너무 일러. 내가 좀 쪼잔한 구석이 있어서 쌓인거 풀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거든. 그래도 사과해준거 자체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해. "
"..그래. 그리고 당분간은 아마 나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될거야."
윤리라가 둘이 같이 들어가는건 너무 웃긴 일인 것 같고, 자기는 나중에 들어갈테니 먼저 나가보라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윤리라 옆을 지나갔다. 결국 교무실로 내려가지 못했다. 복도에서 내다보는 바깥에서 나는 무참히 지고 있는 봄의 말로를 보았다.
본격적인 7월을 맞았다. 십팔년 살았으면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서울의 뙤약볕은 낯설게 따갑고, 반 애들의 눈총 역시 부담스럽게 따갑고, 윤리라는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된다더니 일주일을 학교를 내리 빠졌다가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마지못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리라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같이 놀던 애들에게도 외면 받았다. 그러고 보면 제일 잔인하고 교활한게 걔들 무리가 아닌가 싶다. 가차 없이 사람을 포용했다 내쳤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건 윤리라는 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화제의 인물 이전에 4반의 반장 이었기 때문에 애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일들이 잦았다. 본인도 많이 부끄러운지 전보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윤리라가 그저 가련하다.
"윤리라도 진짜 갔구나. 으, 전학 가고 싶겠다."
"내 말이. 존나 쪽팔려서 학교 어떻게 다니냐, 어휴, 남자가 뭐라고. 미쳐가지곤."
"야, 조용히 얘기해. 들리면 어떡해?"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뭐, 지가 이제 와서 어쩔거야. 싸대기 때리냐?"
윤리라가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 있으니 분명 저도 귀가 막힌게 아니라면 다 들렸을 것이다. 도리어 내가 화가 났다. 멍청한 기집애. 지가 나나 이동혁한테 잘못한거지 쟤네들한테 죄 지었어? 울화통이 터지려고 했다. 옛날 같으면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숨겼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변했고, 이전의 나보다 확실히 강해지고 생각하는 것 역시 견고해졌다.
"그래서 김도화는 이동혁이랑 사겨?"
"대단하다 쟤도 진짜. 윤리라 불쌍해."
"뭐가 불쌍하냐, 이 년이나 저 년이나 다 도토리 키재기구먼. 그것도 안 보이냐?"
나는 이전 수업 시간 교과서를 들고 일어났다. 사물함 쪽이 아닌 추잡스러운 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명의 책상에 교과서를 세로로 세우고 팔을 받친 자세로 앉아 떠드는 애들을 노려 보니까 찔리는 구석은 있는지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봤다.
"너네가 무슨 자격으로 윤리라 욕을 해?"
윤리라가 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윤리라와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으며 걔네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동혁이랑 사귀든 정재현이랑 사겼다 헤어졌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너네가 왜 나대냐고. 궁금해서 그래. 아까 나불댔던 그 자신감으로 다시 한번 말해줄래?"
"..저기, 미안해. 우리가 개념 없었어."
"실컷 사람 까놓고 사과할거면 앞으로 아예 하지를 마. 그리고 사과 받아야 할 사람 저기 앞에 한 명 더 있으니까 가서 바로 사과해줬으면 좋겠다. 니들이 양심이 있다면."
잘했어, 잘했어 도화야. 잘한 일이야. 사실 말을 하는 순간에도 혹시나 말을 더듬을까, 그 순간부터 다시 소심하고 자기 주장 피력도 못하는 옛날의 김도화로 돌아갈까봐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발음한다고 꽤나 공을 들였다. 사물함 쪽으로 가까이 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쾌쾌한 냄새를 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멋있으면 나 또 반하는데."
소리 없이 다가와 옆 사물함에 팔짱을 끼고 기댄 채로 정재현이 말했다.
"으우어! 놀래라. 갑자기 나타나지 좀 마. 간 떨어지니까."
"토끼는 간 꺼냈다 넣었다 할 수 있잖아요."
"..저 오늘부터 토끼 안 할게요."
내가 손바닥을 쫙 펼쳐 내밀어 보이자 웃음보가 터졌는지 정재현이 허리를 숙이며 몸을 들썩였다. 정재현 뒤로 다가온 이동혁이 그의 등을 찰싹 내리치더니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지금 누구 옆에 붙어서 웃고 있는거야?"
"하이고 참나, 그렇게 보기 싫으면 사귀시던가요."
"..나,나중에..아무튼 나중에..나 알아서 할거거든?"
이동혁의 얼굴이 그렇게 익어서 화르르 타는 모습은 그 애를 알고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새침하게 말하곤 잽싸게 자기 자리로 가 앉는 이동혁에 간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
정재현과 이동혁이 뭐가 아쉬워서 여름 방학에 굳이 굳이 학교를 나와서 보충을 듣겠느냐 싶더라. 정재현은 방학 동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해외 여행을 다닌다며 끊은 비행기 표를 보여주고는 방학 끝나고 꼭 둘이 사귀는 배아픈 꼴 좀 보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떠났다. 같이 방학 때 물놀이 계획 짤 땐 언제고 혼자 치사하게 떠나냐며 버럭 하니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우리와 같이 물놀이 하러 갈 방학은 남겨두었다며 달랬다. 그렇게 정재현은 정말 가버렸고 이동혁은, 집에서 경영 수업 듣기 싫다는 핑계를 대며 보충을 함께 듣게 되었다. 김동영은 학원을 핑계로 아예 빠졌고, 이민형은 그냥 싫다고 뺐다.
그러니까 이건, 나랑 이동혁이 방학 보충 기간동안 절대적으로 둘만 남았다는 말이다. 진짜 어떡하면 좋으니. 이동혁은 은근, 아니 정말 공부를 잘했다. 진짜 안하게 생겨가지고는 전교 10등 안에는 무조건 들었다. 이동혁은 그게 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엄하셔서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무조건 이태용 보다 잘나야 한다고. 아버지의 자격지심이 자기에게로 붙은 거라고 하며 씁쓸하게 웃는데 이동혁이 정재현에게도 말 안한다던 자기 개인사를 나에게 말해주는 걸 보고 나란 존재가 엄청 깊이 침투해 있구나를 느꼈다. 그러면서 섭섭하게, 뻔히 서로 좋아하는데도 사귀자는 말도 안 하고. 물론 내 쪽에서 해도 되지만 그래도 리라도 먼저 들었는데, 나도 받고 싶었다.
이동혁은 굳이 너무 쉬운 난이도라 안 들어도 될 법한 것까지 내가 듣는 다는 이유로 신청해서 들었다. 대학교 수강 신청 하듯이 우리끼리 경쟁해서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담는 시스템이라 인기 있는 과목은 치열하지만 운 좋게도 나와 이동혁은 모두 다 같은 과목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입학하기 전에는 학생들의 여름 방학 보충학습 독려를 위해 스포츠 수영 이라는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는데 소수 과목이라 못 듣는 애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이번에 다시 개설됐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 나와 이동혁은 수강 신청을 완벽하게 클리어했고. 학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동네 주민을 위한 휘트니스 센터가 있는데 거기 근처에 그렇게 크진 않지만 수영장도 있었다. 국제 표준 규격의 딱 절반만한 크기의 풀이 있는데 우리 학교가 거기를 빌려서 스포츠 수영 수업이 든 금요일에는 거기로 등교를 했다.
첫 수업 전날 목요일 밤에 나는 몰래 김동영 면도기로 제모를 열심히 하다가 들켜서 얻어맞기까지 하며 신경을 썼다. 달라붙는 수영복을 지나치게 신경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면 잘 보이고 싶은 이동혁 때문이다. 그러나 당일 탈의실에 가서야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쳤다.."
바로 다듬다가 잘못 깎아 모나리자가 된 내 눈썹이다. 엄마가 해준다고 할 때 눈썹 문신 할 걸 그랬어.. 설상가상으로 수모를 쓰니 얼굴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완전 못난이가 돼버렸다. 쓰러지고 싶다...그러나 수업은 들으러 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바닥만 보고 걸었다. 이동혁 옆에 서서 강사 선생님이 오시길 기다리며 이마에 손을 계속 짚고 있었다. 이동혁이 어디 아프냐고 자꾸 얼굴을 들이밀고 물어와 나는 더 철통 방어 하며 아니라고 했다. 생각보다 소년스러운, 평평한 이동혁의 배에 자꾸 눈길이 갔다. 이동혁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복근 꼭 만들거라며 배를 가리며 말했다.
"왜, 지금 딱 여려보이고 좋아보여."
"그런 말도 할 줄 알고,내가 너한테 많이 누그러졌지?"
"아니야. 무서웡.."
나도 모르게 귀여운 척을 해버렸다. 그러려던게 아니었는데, 창피한 나를 두고서 이동혁이 눈이 사라지게 웃었다.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에도 눈썹에 신경 쓴다고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강사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곤 똑바로 하라고 지적을 하셨다. 오늘은 숨쉬는 법과 물장구 치는 법, 물에 뜨는 법까지 배우는게 목표였다. 어릴 때 배워 놓은게 있어서 살짝 지루했다. 나 같은 애들을 위해 강사 선생님은 각자의 레벨을 테스트 하시고 옆 라인으로 넘어가 하고 싶은 영법으로 여섯 바퀴를 천천히 돌고 있으라고 시키셨다. 이동혁도 이전에 다 뗐다며 나와 같이 옆으로 넘어갔다. 나는 되도록 정면에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이동혁 옆에 붙어 있으면서 말이라도 걸어온다 치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살짝 돌려 말했다. 찰방거리는 물결이 나와 이동혁 사이를 넘실거렸다. 간간히 미끌거리는 감촉으로 맞붙는 이동혁의 팔뚝 그 살결에 몸에 전율이 일었다. 입 밖으로 꺼내면 분명 변태 취급 받겠지만, 살이 맞대는 간지러운 순간이 무한 반복 됐음 좋겠다.
"별주부 없어도 수영 잘 하네."
"흥, 그런 농담 재미없거든?"
"치."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그냥 이동혁을 귀여워해주고 싶은걸까.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감히 지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온순한 호랑이가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이펫의 이중생활에 나오는 스노우볼 정도.
"이동혁.너 되게 변했어."
"어디가?"
"전보다 ..음..덜 무서워졌어. 이빨 빠진 호랑이."
이동혁 옆에 있던 남자애가 출발했다. 옆으로 한 칸 이동하며 이동혁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너라서 약해지는 것 뿐이야. 네 앞에서만 종잇장처럼 펄럭이는 거고."
그리고 넌 사각사각 날 오려내는 거지.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며 눈만 빼꼼 내밀고 물 속으로 숨었다. 기분 좋아서 벌어지는 입을 감추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날 그만큼이나 좋아하면서.
이동혁 앞에 있던 애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자 이동혁이 헤엄칠 준비를 했다. 나에게 물을 한번 튀기더니 눈썹 좀 그만 신경 쓰라고 말하곤 바로 잠수했다. 내 얼굴은 하도 이런 일이 많아져서 이제 빨간색이 본래 자기 옷이라고 주장하게 되는건 아닐까 싶다. 금세 10m 선을 넘는 이동혁을 보고 수경에 물을 적셔 엄지로 문질러 닦아낸 뒤에 고쳐 썼다.
머리 속만 말리고 나와도 햇빛이 워낙에 강렬해서 머리는 금세 건조됐다. 눅눅해진 옷을 탁탁 털어서 입고 눈썹을 열심히 그린 뒤에 입술도 좀 만들어주고 나오자 이동혁이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입술을 내밀었다.
"드라이기 기다린다구 늦은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믿어줄게."
"아씨, 미워."
"나 별 말 안했잖아. 미워하지 마아."
말꼬리까지 늘리니 원래 본성이 이런거고 학교에서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말마따나 대수롭지 않은거라 진작에 풀렸지만 일부러 빠르게 걸으며 새초롬하게 굴었다.
"어어? 빨리 걷는다 이거야?"
빨리 걷기는 달리기로 변질이 되었다.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순간 왜 달리고 있지 하고 현타가 찾아왔다. 그러나 발이 멈춰지려면 더 멀리 달리며 늦춰야 했다.
"거 참 더럽게 잘 토라지고 더럽게 귀여운게 더럽게 빨리 달리네. "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때마침 발이 멈춰졌다. 뒤돌아 보이는 이동혁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아무래도 잔뜩 준비하고 거추장스럽게 하는거, 내 적성에 안, 맞나봐."
나 역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내쉬며 어느새 흐른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다가온 이동혁이 내 얼굴을 감싸 들어올렸다.
" 너, 지금 귀 바짝 솟았어. 알아?"
"알아."
"지금 내가 너 꼬시고 있는 것도 알아?"
이동혁의 숨결이 내 입술로 옮겨붙었다. 나는 그 허리를 양 팔 벌려 끌어안았다.
방아 그만 찧고 넘어 와 토끼야.
끝났습니다
재업도 완결이 났습니다. 종이호랑이 재업까지 함께 고민하고 달려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저는...진짜 이제 언제 돌아올 자 모르겠네요. 선물이라고 재민이 대전해도 남겨놓고, 주말 내내 글잡에 제 글만 여러개 올려놓긴 했다만.. 치사하고 나쁜 문달이지만 잊지는 말아주세요 흑. 럽미럽마 사랑 안 할 수 없눈 마크와 짱친 정우는 포기하지 않을게요. 글삭 걱정은 혹여나 마시라구!!
안녕 깜찍이 사자
좋은 조언가 친구 민형이두 안녕
Paper Tiger, Scissors Rabbit
w.문달
결국 또 보건실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뜨게 됐다. 이물질이 들어간 것처럼 뻐근한 눈을 두어번 끔뻑이니 천장의 매립등을 가리고 동그란 얼굴들이 원을 그리며 쏙 쏙 등장했다.
"김도화 일어났다."
"도화! 괜찮아?걱정 많이 했어."
"간 떨어질 뻔 했잖아!"
이동혁은 아무 말도 않고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다가 물러났다.
♡
나는 몽롱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어났다. 이민형이 내 허리를 받쳐 주었다.
"머리 아파?어지러워?"
"아냐 아냐. 괜찮아. 고마워 민형아."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내 두 발이 내려오는 거에 맞춰 정재현이 슬리퍼를 가지런히 모아줬다. 고마워. 내가 말했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거울 앞에 다가가서 헝클어진 머리를 꼬리빗으로 빗으며 정리했다. 윗옷을 당겨 폈다. 치마 엉덩이 부분을 위에서 아래로 쫙 쓸어 내리고, 돌아간 치맛단도 당겨서 자릴 잡아주었다. 아까보다 훨씬 단정해진 내 모습을 보니 자신감도 더 붙고, 기분도 나아졌다. 김동영이 우리는 이만 나가보자며 이민형을 끌고 나갔다. 정재현이 내 어깨를 짚었다.
"좀 이기적일 줄도 알아라. 착하기만 잘해가지곤."
곧이어 정재현 역시 손을 흔들며 보건실을 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동혁을 에워쌌다. 내가 먼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되게,되게 드라마틱 하다. 보건실에 선생님도 없고, 아파서 누워 있는 애들도 없고..하하.."
"내가 다 내보낸건데."
"으어?"
"농담이야."
농담치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길래 진짜인 줄로 믿었다. 이동혁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벌였을 수도 있을테니까.
"미안해."
"야, 네가 뭐가 미안해..아니야. 너 때문에 쓰러진거 아니야."
"그거 말고, 벌써 두번씩이나 먼저 남한테 고백 받게 한거. 내가 했어야 했는데 남들 통해서 듣게 한 거. "
빳빳이 들고 있던 고개가 누군가 꼭두각시 삼아 조종하듯 뒷목부터 가볍게 툭, 하고 꺾여졌다. 우두커니 소파 등에 기대있던 이동혁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렇지만 나 당장 너에게 다시 말은 안 할거야. 난 지금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너한테 당당하지 못한 것도 있고."
푸른 심줄이 도드라진 이동혁의 손등을 바라보다가 나는 말없이 보건실을 나왔다. 문을 열자 그 옆으로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먼저 나간 삼인방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나는 애들을 지나쳐 교실 쪽으로 내처 걸었다. 한참 수업 중인지 복도는 분분이 날리는 먼지들도 가라앉아 바닥에 누워있었고, 반을 지나칠 때마다 선생님들이 강의하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쳐도 김동영은 모범생 행세를 할 때는 언제고 보건실 복도에서 죽치고 있던건지. 문득 나 혼자 살겠다고 교실로 올라온 것 같아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치사하다고 생각할까. 그렇지만 아까 전에는 정말 그 갑갑한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 소강한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내 머릿속은 폐허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듯 했다.
♡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윤리라가 더 셌다. 많이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결국 이끄는 대로 따라가줬다. 오늘은 윤리라가 무참히 부서져버린 날이니까.
"내가 한심해보이지. 우습지."
내 앞에선 늘 무람 없이 굴던 애가 잔뜩 쳐져서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내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냥 딱해보여."
"아. 하하. 그렇겠네. 너 지금 눈빛 되게 쌀쌀맞다. 닭살 돋네. "
윤리라가 팔뚝을 쓸며 옴죽거렸다. 분명 나보다 큰 키를 가진 윤리라인데 어쩐지 내가 윤리라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사실 네가 너무 밉고, 그래서 머리카락이라도 뜯고 싸우고 싶었는데, 너 막상 보니까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저 지금은 내가 너무 한심스럽고, 뭐하나 싶고 그래. "
아까 수업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에 대해 화가 나신 문학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내려가기엔 이미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렇게 가만히 서서 윤리라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촉박했다.
화장실에 들어오려고 문을 열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 황급히 나가는 같은 반 여자애들을 슬쩍 보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거지?"
"..어."
"느끼는 건데 태세전환 진짜 잘 한다. 그 점은 본받고 싶네. 그런데 나 네 사과는 아직 못받겠어."
윤리라의 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동혁 말처럼 말이야.
"지금은 적절하지 못한 시기인것 같아. 너무 일러. 내가 좀 쪼잔한 구석이 있어서 쌓인거 풀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거든. 그래도 사과해준거 자체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해. "
"..그래. 그리고 당분간은 아마 나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될거야."
윤리라가 둘이 같이 들어가는건 너무 웃긴 일인 것 같고, 자기는 나중에 들어갈테니 먼저 나가보라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윤리라 옆을 지나갔다. 결국 교무실로 내려가지 못했다. 복도에서 내다보는 바깥에서 나는 무참히 지고 있는 봄의 말로를 보았다.
본격적인 7월을 맞았다. 십팔년 살았으면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서울의 뙤약볕은 낯설게 따갑고, 반 애들의 눈총 역시 부담스럽게 따갑고, 윤리라는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된다더니 일주일을 학교를 내리 빠졌다가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마지못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리라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같이 놀던 애들에게도 외면 받았다. 그러고 보면 제일 잔인하고 교활한게 걔들 무리가 아닌가 싶다. 가차 없이 사람을 포용했다 내쳤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건 윤리라는 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화제의 인물 이전에 4반의 반장 이었기 때문에 애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일들이 잦았다. 본인도 많이 부끄러운지 전보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윤리라가 그저 가련하다.
"윤리라도 진짜 갔구나. 으, 전학 가고 싶겠다."
"내 말이. 존나 쪽팔려서 학교 어떻게 다니냐, 어휴, 남자가 뭐라고. 미쳐가지곤."
"야, 조용히 얘기해. 들리면 어떡해?"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뭐, 지가 이제 와서 어쩔거야. 싸대기 때리냐?"
윤리라가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 있으니 분명 저도 귀가 막힌게 아니라면 다 들렸을 것이다. 도리어 내가 화가 났다. 멍청한 기집애. 지가 나나 이동혁한테 잘못한거지 쟤네들한테 죄 지었어? 울화통이 터지려고 했다. 옛날 같으면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숨겼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변했고, 이전의 나보다 확실히 강해지고 생각하는 것 역시 견고해졌다.
"그래서 김도화는 이동혁이랑 사겨?"
"대단하다 쟤도 진짜. 윤리라 불쌍해."
"뭐가 불쌍하냐, 이 년이나 저 년이나 다 도토리 키재기구먼. 그것도 안 보이냐?"
나는 이전 수업 시간 교과서를 들고 일어났다. 사물함 쪽이 아닌 추잡스러운 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명의 책상에 교과서를 세로로 세우고 팔을 받친 자세로 앉아 떠드는 애들을 노려 보니까 찔리는 구석은 있는지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봤다.
"너네가 무슨 자격으로 윤리라 욕을 해?"
윤리라가 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윤리라와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으며 걔네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동혁이랑 사귀든 정재현이랑 사겼다 헤어졌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너네가 왜 나대냐고. 궁금해서 그래. 아까 나불댔던 그 자신감으로 다시 한번 말해줄래?"
"..저기, 미안해. 우리가 개념 없었어."
"실컷 사람 까놓고 사과할거면 앞으로 아예 하지를 마. 그리고 사과 받아야 할 사람 저기 앞에 한 명 더 있으니까 가서 바로 사과해줬으면 좋겠다. 니들이 양심이 있다면."
잘했어, 잘했어 도화야. 잘한 일이야. 사실 말을 하는 순간에도 혹시나 말을 더듬을까, 그 순간부터 다시 소심하고 자기 주장 피력도 못하는 옛날의 김도화로 돌아갈까봐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발음한다고 꽤나 공을 들였다. 사물함 쪽으로 가까이 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쾌쾌한 냄새를 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멋있으면 나 또 반하는데."
소리 없이 다가와 옆 사물함에 팔짱을 끼고 기댄 채로 정재현이 말했다.
"으우어! 놀래라. 갑자기 나타나지 좀 마. 간 떨어지니까."
"토끼는 간 꺼냈다 넣었다 할 수 있잖아요."
"..저 오늘부터 토끼 안 할게요."
내가 손바닥을 쫙 펼쳐 내밀어 보이자 웃음보가 터졌는지 정재현이 허리를 숙이며 몸을 들썩였다. 정재현 뒤로 다가온 이동혁이 그의 등을 찰싹 내리치더니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지금 누구 옆에 붙어서 웃고 있는거야?"
"하이고 참나, 그렇게 보기 싫으면 사귀시던가요."
"..나,나중에..아무튼 나중에..나 알아서 할거거든?"
이동혁의 얼굴이 그렇게 익어서 화르르 타는 모습은 그 애를 알고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새침하게 말하곤 잽싸게 자기 자리로 가 앉는 이동혁에 간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
정재현과 이동혁이 뭐가 아쉬워서 여름 방학에 굳이 굳이 학교를 나와서 보충을 듣겠느냐 싶더라. 정재현은 방학 동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해외 여행을 다닌다며 끊은 비행기 표를 보여주고는 방학 끝나고 꼭 둘이 사귀는 배아픈 꼴 좀 보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떠났다. 같이 방학 때 물놀이 계획 짤 땐 언제고 혼자 치사하게 떠나냐며 버럭 하니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우리와 같이 물놀이 하러 갈 방학은 남겨두었다며 달랬다. 그렇게 정재현은 정말 가버렸고 이동혁은, 집에서 경영 수업 듣기 싫다는 핑계를 대며 보충을 함께 듣게 되었다. 김동영은 학원을 핑계로 아예 빠졌고, 이민형은 그냥 싫다고 뺐다.
그러니까 이건, 나랑 이동혁이 방학 보충 기간동안 절대적으로 둘만 남았다는 말이다. 진짜 어떡하면 좋으니. 이동혁은 은근, 아니 정말 공부를 잘했다. 진짜 안하게 생겨가지고는 전교 10등 안에는 무조건 들었다. 이동혁은 그게 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엄하셔서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무조건 이태용 보다 잘나야 한다고. 아버지의 자격지심이 자기에게로 붙은 거라고 하며 씁쓸하게 웃는데 이동혁이 정재현에게도 말 안한다던 자기 개인사를 나에게 말해주는 걸 보고 나란 존재가 엄청 깊이 침투해 있구나를 느꼈다. 그러면서 섭섭하게, 뻔히 서로 좋아하는데도 사귀자는 말도 안 하고. 물론 내 쪽에서 해도 되지만 그래도 리라도 먼저 들었는데, 나도 받고 싶었다.
이동혁은 굳이 너무 쉬운 난이도라 안 들어도 될 법한 것까지 내가 듣는 다는 이유로 신청해서 들었다. 대학교 수강 신청 하듯이 우리끼리 경쟁해서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담는 시스템이라 인기 있는 과목은 치열하지만 운 좋게도 나와 이동혁은 모두 다 같은 과목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입학하기 전에는 학생들의 여름 방학 보충학습 독려를 위해 스포츠 수영 이라는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는데 소수 과목이라 못 듣는 애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이번에 다시 개설됐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 나와 이동혁은 수강 신청을 완벽하게 클리어했고. 학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동네 주민을 위한 휘트니스 센터가 있는데 거기 근처에 그렇게 크진 않지만 수영장도 있었다. 국제 표준 규격의 딱 절반만한 크기의 풀이 있는데 우리 학교가 거기를 빌려서 스포츠 수영 수업이 든 금요일에는 거기로 등교를 했다.
첫 수업 전날 목요일 밤에 나는 몰래 김동영 면도기로 제모를 열심히 하다가 들켜서 얻어맞기까지 하며 신경을 썼다. 달라붙는 수영복을 지나치게 신경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면 잘 보이고 싶은 이동혁 때문이다. 그러나 당일 탈의실에 가서야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쳤다.."
바로 다듬다가 잘못 깎아 모나리자가 된 내 눈썹이다. 엄마가 해준다고 할 때 눈썹 문신 할 걸 그랬어.. 설상가상으로 수모를 쓰니 얼굴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완전 못난이가 돼버렸다. 쓰러지고 싶다...그러나 수업은 들으러 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바닥만 보고 걸었다. 이동혁 옆에 서서 강사 선생님이 오시길 기다리며 이마에 손을 계속 짚고 있었다. 이동혁이 어디 아프냐고 자꾸 얼굴을 들이밀고 물어와 나는 더 철통 방어 하며 아니라고 했다. 생각보다 소년스러운, 평평한 이동혁의 배에 자꾸 눈길이 갔다. 이동혁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복근 꼭 만들거라며 배를 가리며 말했다.
"왜, 지금 딱 여려보이고 좋아보여."
"그런 말도 할 줄 알고,내가 너한테 많이 누그러졌지?"
"아니야. 무서웡.."
나도 모르게 귀여운 척을 해버렸다. 그러려던게 아니었는데, 창피한 나를 두고서 이동혁이 눈이 사라지게 웃었다.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에도 눈썹에 신경 쓴다고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강사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곤 똑바로 하라고 지적을 하셨다. 오늘은 숨쉬는 법과 물장구 치는 법, 물에 뜨는 법까지 배우는게 목표였다. 어릴 때 배워 놓은게 있어서 살짝 지루했다. 나 같은 애들을 위해 강사 선생님은 각자의 레벨을 테스트 하시고 옆 라인으로 넘어가 하고 싶은 영법으로 여섯 바퀴를 천천히 돌고 있으라고 시키셨다. 이동혁도 이전에 다 뗐다며 나와 같이 옆으로 넘어갔다. 나는 되도록 정면에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이동혁 옆에 붙어 있으면서 말이라도 걸어온다 치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살짝 돌려 말했다. 찰방거리는 물결이 나와 이동혁 사이를 넘실거렸다. 간간히 미끌거리는 감촉으로 맞붙는 이동혁의 팔뚝 그 살결에 몸에 전율이 일었다. 입 밖으로 꺼내면 분명 변태 취급 받겠지만, 살이 맞대는 간지러운 순간이 무한 반복 됐음 좋겠다.
"별주부 없어도 수영 잘 하네."
"흥, 그런 농담 재미없거든?"
"치."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그냥 이동혁을 귀여워해주고 싶은걸까.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감히 지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온순한 호랑이가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이펫의 이중생활에 나오는 스노우볼 정도.
"이동혁.너 되게 변했어."
"어디가?"
"전보다 ..음..덜 무서워졌어. 이빨 빠진 호랑이."
이동혁 옆에 있던 남자애가 출발했다. 옆으로 한 칸 이동하며 이동혁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너라서 약해지는 것 뿐이야. 네 앞에서만 종잇장처럼 펄럭이는 거고."
그리고 넌 사각사각 날 오려내는 거지.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며 눈만 빼꼼 내밀고 물 속으로 숨었다. 기분 좋아서 벌어지는 입을 감추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날 그만큼이나 좋아하면서.
이동혁 앞에 있던 애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자 이동혁이 헤엄칠 준비를 했다. 나에게 물을 한번 튀기더니 눈썹 좀 그만 신경 쓰라고 말하곤 바로 잠수했다. 내 얼굴은 하도 이런 일이 많아져서 이제 빨간색이 본래 자기 옷이라고 주장하게 되는건 아닐까 싶다. 금세 10m 선을 넘는 이동혁을 보고 수경에 물을 적셔 엄지로 문질러 닦아낸 뒤에 고쳐 썼다.
머리 속만 말리고 나와도 햇빛이 워낙에 강렬해서 머리는 금세 건조됐다. 눅눅해진 옷을 탁탁 털어서 입고 눈썹을 열심히 그린 뒤에 입술도 좀 만들어주고 나오자 이동혁이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입술을 내밀었다.
"드라이기 기다린다구 늦은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믿어줄게."
"아씨, 미워."
"나 별 말 안했잖아. 미워하지 마아."
말꼬리까지 늘리니 원래 본성이 이런거고 학교에서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말마따나 대수롭지 않은거라 진작에 풀렸지만 일부러 빠르게 걸으며 새초롬하게 굴었다.
"어어? 빨리 걷는다 이거야?"
빨리 걷기는 달리기로 변질이 되었다.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순간 왜 달리고 있지 하고 현타가 찾아왔다. 그러나 발이 멈춰지려면 더 멀리 달리며 늦춰야 했다.
"거 참 더럽게 잘 토라지고 더럽게 귀여운게 더럽게 빨리 달리네. "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때마침 발이 멈춰졌다. 뒤돌아 보이는 이동혁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아무래도 잔뜩 준비하고 거추장스럽게 하는거, 내 적성에 안, 맞나봐."
나 역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내쉬며 어느새 흐른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다가온 이동혁이 내 얼굴을 감싸 들어올렸다.
" 너, 지금 귀 바짝 솟았어. 알아?"
"알아."
"지금 내가 너 꼬시고 있는 것도 알아?"
이동혁의 숨결이 내 입술로 옮겨붙었다. 나는 그 허리를 양 팔 벌려 끌어안았다.
방아 그만 찧고 넘어 와 토끼야.
끝났습니다
재업도 완결이 났습니다. 종이호랑이 재업까지 함께 고민하고 달려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저는...진짜 이제 언제 돌아올 자 모르겠네요. 선물이라고 재민이 대전해도 남겨놓고, 주말 내내 글잡에 제 글만 여러개 올려놓긴 했다만.. 치사하고 나쁜 문달이지만 잊지는 말아주세요 흑. 럽미럽마 사랑 안 할 수 없눈 마크와 짱친 정우는 포기하지 않을게요. 글삭 걱정은 혹여나 마시라구!!
안녕 깜찍이 사자
좋은 조언가 친구 민형이두 안녕
Paper Tiger, Scissors Rabbit
w.문달
결국 또 보건실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뜨게 됐다. 이물질이 들어간 것처럼 뻐근한 눈을 두어번 끔뻑이니 천장의 매립등을 가리고 동그란 얼굴들이 원을 그리며 쏙 쏙 등장했다.
"김도화 일어났다."
"도화! 괜찮아?걱정 많이 했어."
"간 떨어질 뻔 했잖아!"
이동혁은 아무 말도 않고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다가 물러났다.
♡
나는 몽롱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어났다. 이민형이 내 허리를 받쳐 주었다.
"머리 아파?어지러워?"
"아냐 아냐. 괜찮아. 고마워 민형아."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내 두 발이 내려오는 거에 맞춰 정재현이 슬리퍼를 가지런히 모아줬다. 고마워. 내가 말했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거울 앞에 다가가서 헝클어진 머리를 꼬리빗으로 빗으며 정리했다. 윗옷을 당겨 폈다. 치마 엉덩이 부분을 위에서 아래로 쫙 쓸어 내리고, 돌아간 치맛단도 당겨서 자릴 잡아주었다. 아까보다 훨씬 단정해진 내 모습을 보니 자신감도 더 붙고, 기분도 나아졌다. 김동영이 우리는 이만 나가보자며 이민형을 끌고 나갔다. 정재현이 내 어깨를 짚었다.
"좀 이기적일 줄도 알아라. 착하기만 잘해가지곤."
곧이어 정재현 역시 손을 흔들며 보건실을 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동혁을 에워쌌다. 내가 먼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되게,되게 드라마틱 하다. 보건실에 선생님도 없고, 아파서 누워 있는 애들도 없고..하하.."
"내가 다 내보낸건데."
"으어?"
"농담이야."
농담치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길래 진짜인 줄로 믿었다. 이동혁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벌였을 수도 있을테니까.
"미안해."
"야, 네가 뭐가 미안해..아니야. 너 때문에 쓰러진거 아니야."
"그거 말고, 벌써 두번씩이나 먼저 남한테 고백 받게 한거. 내가 했어야 했는데 남들 통해서 듣게 한 거. "
빳빳이 들고 있던 고개가 누군가 꼭두각시 삼아 조종하듯 뒷목부터 가볍게 툭, 하고 꺾여졌다. 우두커니 소파 등에 기대있던 이동혁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렇지만 나 당장 너에게 다시 말은 안 할거야. 난 지금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너한테 당당하지 못한 것도 있고."
푸른 심줄이 도드라진 이동혁의 손등을 바라보다가 나는 말없이 보건실을 나왔다. 문을 열자 그 옆으로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먼저 나간 삼인방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나는 애들을 지나쳐 교실 쪽으로 내처 걸었다. 한참 수업 중인지 복도는 분분이 날리는 먼지들도 가라앉아 바닥에 누워있었고, 반을 지나칠 때마다 선생님들이 강의하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쳐도 김동영은 모범생 행세를 할 때는 언제고 보건실 복도에서 죽치고 있던건지. 문득 나 혼자 살겠다고 교실로 올라온 것 같아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치사하다고 생각할까. 그렇지만 아까 전에는 정말 그 갑갑한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 소강한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내 머릿속은 폐허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듯 했다.
♡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윤리라가 더 셌다. 많이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결국 이끄는 대로 따라가줬다. 오늘은 윤리라가 무참히 부서져버린 날이니까.
"내가 한심해보이지. 우습지."
내 앞에선 늘 무람 없이 굴던 애가 잔뜩 쳐져서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내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냥 딱해보여."
"아. 하하. 그렇겠네. 너 지금 눈빛 되게 쌀쌀맞다. 닭살 돋네. "
윤리라가 팔뚝을 쓸며 옴죽거렸다. 분명 나보다 큰 키를 가진 윤리라인데 어쩐지 내가 윤리라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사실 네가 너무 밉고, 그래서 머리카락이라도 뜯고 싸우고 싶었는데, 너 막상 보니까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저 지금은 내가 너무 한심스럽고, 뭐하나 싶고 그래. "
아까 수업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에 대해 화가 나신 문학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내려가기엔 이미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렇게 가만히 서서 윤리라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촉박했다.
화장실에 들어오려고 문을 열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 황급히 나가는 같은 반 여자애들을 슬쩍 보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거지?"
"..어."
"느끼는 건데 태세전환 진짜 잘 한다. 그 점은 본받고 싶네. 그런데 나 네 사과는 아직 못받겠어."
윤리라의 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동혁 말처럼 말이야.
"지금은 적절하지 못한 시기인것 같아. 너무 일러. 내가 좀 쪼잔한 구석이 있어서 쌓인거 풀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거든. 그래도 사과해준거 자체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해. "
"..그래. 그리고 당분간은 아마 나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될거야."
윤리라가 둘이 같이 들어가는건 너무 웃긴 일인 것 같고, 자기는 나중에 들어갈테니 먼저 나가보라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윤리라 옆을 지나갔다. 결국 교무실로 내려가지 못했다. 복도에서 내다보는 바깥에서 나는 무참히 지고 있는 봄의 말로를 보았다.
본격적인 7월을 맞았다. 십팔년 살았으면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서울의 뙤약볕은 낯설게 따갑고, 반 애들의 눈총 역시 부담스럽게 따갑고, 윤리라는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된다더니 일주일을 학교를 내리 빠졌다가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마지못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리라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같이 놀던 애들에게도 외면 받았다. 그러고 보면 제일 잔인하고 교활한게 걔들 무리가 아닌가 싶다. 가차 없이 사람을 포용했다 내쳤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건 윤리라는 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화제의 인물 이전에 4반의 반장 이었기 때문에 애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일들이 잦았다. 본인도 많이 부끄러운지 전보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윤리라가 그저 가련하다.
"윤리라도 진짜 갔구나. 으, 전학 가고 싶겠다."
"내 말이. 존나 쪽팔려서 학교 어떻게 다니냐, 어휴, 남자가 뭐라고. 미쳐가지곤."
"야, 조용히 얘기해. 들리면 어떡해?"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뭐, 지가 이제 와서 어쩔거야. 싸대기 때리냐?"
윤리라가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 있으니 분명 저도 귀가 막힌게 아니라면 다 들렸을 것이다. 도리어 내가 화가 났다. 멍청한 기집애. 지가 나나 이동혁한테 잘못한거지 쟤네들한테 죄 지었어? 울화통이 터지려고 했다. 옛날 같으면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숨겼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변했고, 이전의 나보다 확실히 강해지고 생각하는 것 역시 견고해졌다.
"그래서 김도화는 이동혁이랑 사겨?"
"대단하다 쟤도 진짜. 윤리라 불쌍해."
"뭐가 불쌍하냐, 이 년이나 저 년이나 다 도토리 키재기구먼. 그것도 안 보이냐?"
나는 이전 수업 시간 교과서를 들고 일어났다. 사물함 쪽이 아닌 추잡스러운 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명의 책상에 교과서를 세로로 세우고 팔을 받친 자세로 앉아 떠드는 애들을 노려 보니까 찔리는 구석은 있는지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봤다.
"너네가 무슨 자격으로 윤리라 욕을 해?"
윤리라가 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윤리라와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으며 걔네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동혁이랑 사귀든 정재현이랑 사겼다 헤어졌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너네가 왜 나대냐고. 궁금해서 그래. 아까 나불댔던 그 자신감으로 다시 한번 말해줄래?"
"..저기, 미안해. 우리가 개념 없었어."
"실컷 사람 까놓고 사과할거면 앞으로 아예 하지를 마. 그리고 사과 받아야 할 사람 저기 앞에 한 명 더 있으니까 가서 바로 사과해줬으면 좋겠다. 니들이 양심이 있다면."
잘했어, 잘했어 도화야. 잘한 일이야. 사실 말을 하는 순간에도 혹시나 말을 더듬을까, 그 순간부터 다시 소심하고 자기 주장 피력도 못하는 옛날의 김도화로 돌아갈까봐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발음한다고 꽤나 공을 들였다. 사물함 쪽으로 가까이 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쾌쾌한 냄새를 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멋있으면 나 또 반하는데."
소리 없이 다가와 옆 사물함에 팔짱을 끼고 기댄 채로 정재현이 말했다.
"으우어! 놀래라. 갑자기 나타나지 좀 마. 간 떨어지니까."
"토끼는 간 꺼냈다 넣었다 할 수 있잖아요."
"..저 오늘부터 토끼 안 할게요."
내가 손바닥을 쫙 펼쳐 내밀어 보이자 웃음보가 터졌는지 정재현이 허리를 숙이며 몸을 들썩였다. 정재현 뒤로 다가온 이동혁이 그의 등을 찰싹 내리치더니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지금 누구 옆에 붙어서 웃고 있는거야?"
"하이고 참나, 그렇게 보기 싫으면 사귀시던가요."
"..나,나중에..아무튼 나중에..나 알아서 할거거든?"
이동혁의 얼굴이 그렇게 익어서 화르르 타는 모습은 그 애를 알고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새침하게 말하곤 잽싸게 자기 자리로 가 앉는 이동혁에 간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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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과 이동혁이 뭐가 아쉬워서 여름 방학에 굳이 굳이 학교를 나와서 보충을 듣겠느냐 싶더라. 정재현은 방학 동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해외 여행을 다닌다며 끊은 비행기 표를 보여주고는 방학 끝나고 꼭 둘이 사귀는 배아픈 꼴 좀 보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떠났다. 같이 방학 때 물놀이 계획 짤 땐 언제고 혼자 치사하게 떠나냐며 버럭 하니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우리와 같이 물놀이 하러 갈 방학은 남겨두었다며 달랬다. 그렇게 정재현은 정말 가버렸고 이동혁은, 집에서 경영 수업 듣기 싫다는 핑계를 대며 보충을 함께 듣게 되었다. 김동영은 학원을 핑계로 아예 빠졌고, 이민형은 그냥 싫다고 뺐다.
그러니까 이건, 나랑 이동혁이 방학 보충 기간동안 절대적으로 둘만 남았다는 말이다. 진짜 어떡하면 좋으니. 이동혁은 은근, 아니 정말 공부를 잘했다. 진짜 안하게 생겨가지고는 전교 10등 안에는 무조건 들었다. 이동혁은 그게 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엄하셔서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무조건 이태용 보다 잘나야 한다고. 아버지의 자격지심이 자기에게로 붙은 거라고 하며 씁쓸하게 웃는데 이동혁이 정재현에게도 말 안한다던 자기 개인사를 나에게 말해주는 걸 보고 나란 존재가 엄청 깊이 침투해 있구나를 느꼈다. 그러면서 섭섭하게, 뻔히 서로 좋아하는데도 사귀자는 말도 안 하고. 물론 내 쪽에서 해도 되지만 그래도 리라도 먼저 들었는데, 나도 받고 싶었다.
이동혁은 굳이 너무 쉬운 난이도라 안 들어도 될 법한 것까지 내가 듣는 다는 이유로 신청해서 들었다. 대학교 수강 신청 하듯이 우리끼리 경쟁해서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담는 시스템이라 인기 있는 과목은 치열하지만 운 좋게도 나와 이동혁은 모두 다 같은 과목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입학하기 전에는 학생들의 여름 방학 보충학습 독려를 위해 스포츠 수영 이라는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는데 소수 과목이라 못 듣는 애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이번에 다시 개설됐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 나와 이동혁은 수강 신청을 완벽하게 클리어했고. 학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동네 주민을 위한 휘트니스 센터가 있는데 거기 근처에 그렇게 크진 않지만 수영장도 있었다. 국제 표준 규격의 딱 절반만한 크기의 풀이 있는데 우리 학교가 거기를 빌려서 스포츠 수영 수업이 든 금요일에는 거기로 등교를 했다.
첫 수업 전날 목요일 밤에 나는 몰래 김동영 면도기로 제모를 열심히 하다가 들켜서 얻어맞기까지 하며 신경을 썼다. 달라붙는 수영복을 지나치게 신경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면 잘 보이고 싶은 이동혁 때문이다. 그러나 당일 탈의실에 가서야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쳤다.."
바로 다듬다가 잘못 깎아 모나리자가 된 내 눈썹이다. 엄마가 해준다고 할 때 눈썹 문신 할 걸 그랬어.. 설상가상으로 수모를 쓰니 얼굴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완전 못난이가 돼버렸다. 쓰러지고 싶다...그러나 수업은 들으러 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바닥만 보고 걸었다. 이동혁 옆에 서서 강사 선생님이 오시길 기다리며 이마에 손을 계속 짚고 있었다. 이동혁이 어디 아프냐고 자꾸 얼굴을 들이밀고 물어와 나는 더 철통 방어 하며 아니라고 했다. 생각보다 소년스러운, 평평한 이동혁의 배에 자꾸 눈길이 갔다. 이동혁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복근 꼭 만들거라며 배를 가리며 말했다.
"왜, 지금 딱 여려보이고 좋아보여."
"그런 말도 할 줄 알고,내가 너한테 많이 누그러졌지?"
"아니야. 무서웡.."
나도 모르게 귀여운 척을 해버렸다. 그러려던게 아니었는데, 창피한 나를 두고서 이동혁이 눈이 사라지게 웃었다.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에도 눈썹에 신경 쓴다고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강사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곤 똑바로 하라고 지적을 하셨다. 오늘은 숨쉬는 법과 물장구 치는 법, 물에 뜨는 법까지 배우는게 목표였다. 어릴 때 배워 놓은게 있어서 살짝 지루했다. 나 같은 애들을 위해 강사 선생님은 각자의 레벨을 테스트 하시고 옆 라인으로 넘어가 하고 싶은 영법으로 여섯 바퀴를 천천히 돌고 있으라고 시키셨다. 이동혁도 이전에 다 뗐다며 나와 같이 옆으로 넘어갔다. 나는 되도록 정면에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이동혁 옆에 붙어 있으면서 말이라도 걸어온다 치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살짝 돌려 말했다. 찰방거리는 물결이 나와 이동혁 사이를 넘실거렸다. 간간히 미끌거리는 감촉으로 맞붙는 이동혁의 팔뚝 그 살결에 몸에 전율이 일었다. 입 밖으로 꺼내면 분명 변태 취급 받겠지만, 살이 맞대는 간지러운 순간이 무한 반복 됐음 좋겠다.
"별주부 없어도 수영 잘 하네."
"흥, 그런 농담 재미없거든?"
"치."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그냥 이동혁을 귀여워해주고 싶은걸까.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감히 지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온순한 호랑이가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이펫의 이중생활에 나오는 스노우볼 정도.
"이동혁.너 되게 변했어."
"어디가?"
"전보다 ..음..덜 무서워졌어. 이빨 빠진 호랑이."
이동혁 옆에 있던 남자애가 출발했다. 옆으로 한 칸 이동하며 이동혁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너라서 약해지는 것 뿐이야. 네 앞에서만 종잇장처럼 펄럭이는 거고."
그리고 넌 사각사각 날 오려내는 거지.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며 눈만 빼꼼 내밀고 물 속으로 숨었다. 기분 좋아서 벌어지는 입을 감추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날 그만큼이나 좋아하면서.
이동혁 앞에 있던 애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자 이동혁이 헤엄칠 준비를 했다. 나에게 물을 한번 튀기더니 눈썹 좀 그만 신경 쓰라고 말하곤 바로 잠수했다. 내 얼굴은 하도 이런 일이 많아져서 이제 빨간색이 본래 자기 옷이라고 주장하게 되는건 아닐까 싶다. 금세 10m 선을 넘는 이동혁을 보고 수경에 물을 적셔 엄지로 문질러 닦아낸 뒤에 고쳐 썼다.
머리 속만 말리고 나와도 햇빛이 워낙에 강렬해서 머리는 금세 건조됐다. 눅눅해진 옷을 탁탁 털어서 입고 눈썹을 열심히 그린 뒤에 입술도 좀 만들어주고 나오자 이동혁이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입술을 내밀었다.
"드라이기 기다린다구 늦은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믿어줄게."
"아씨, 미워."
"나 별 말 안했잖아. 미워하지 마아."
말꼬리까지 늘리니 원래 본성이 이런거고 학교에서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말마따나 대수롭지 않은거라 진작에 풀렸지만 일부러 빠르게 걸으며 새초롬하게 굴었다.
"어어? 빨리 걷는다 이거야?"
빨리 걷기는 달리기로 변질이 되었다.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순간 왜 달리고 있지 하고 현타가 찾아왔다. 그러나 발이 멈춰지려면 더 멀리 달리며 늦춰야 했다.
"거 참 더럽게 잘 토라지고 더럽게 귀여운게 더럽게 빨리 달리네. "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때마침 발이 멈춰졌다. 뒤돌아 보이는 이동혁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아무래도 잔뜩 준비하고 거추장스럽게 하는거, 내 적성에 안, 맞나봐."
나 역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내쉬며 어느새 흐른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다가온 이동혁이 내 얼굴을 감싸 들어올렸다.
" 너, 지금 귀 바짝 솟았어. 알아?"
"알아."
"지금 내가 너 꼬시고 있는 것도 알아?"
이동혁의 숨결이 내 입술로 옮겨붙었다. 나는 그 허리를 양 팔 벌려 끌어안았다.
방아 그만 찧고 넘어 와 토끼야.
끝났습니다
재업도 완결이 났습니다. 종이호랑이 재업까지 함께 고민하고 달려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저는...진짜 이제 언제 돌아올 자 모르겠네요. 선물이라고 재민이 대전해도 남겨놓고, 주말 내내 글잡에 제 글만 여러개 올려놓긴 했다만.. 치사하고 나쁜 문달이지만 잊지는 말아주세요 흑. 럽미럽마 사랑 안 할 수 없눈 마크와 짱친 정우는 포기하지 않을게요. 글삭 걱정은 혹여나 마시라구!!
안녕 깜찍이 사자
좋은 조언가 친구 민형이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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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영이두!세젤귀 잘아토도 안녕
안녕, 안녕 재현아.
마지막으로 호랑아, 안녕. 안녕 이동혁.
안녕, 안녕 재현아.
마지막으로 호랑아, 안녕. 안녕 이동혁.
안녕, 안녕 재현아.
마지막으로 호랑아, 안녕. 안녕 이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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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메일링 받으신 분들은 있으실거예요 제가 보낸 외전 텍파들! 마무리는 외전들로 하시면 그뤠잇 할 것 같습니다 ㅎㅎ 그리고 공개외전 링크도 걸어놓을게요. 제가 쓴 건데 저도 포인트 안 내면 못 보는군요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