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십년이 넘어가는 그 옛날, 어린 시절의 내가 보였다. 꿈이란 걸 알았지만, 깰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쓰레기 같은 새끼.. 더러워! 더러운 피야!'
'아..허윽, 흐..잘못했, 아악! 흡, 흐으...그, 그만..'
'너같은건 죽어야돼, 너같은건...'
'아, 아악..!형..형 살려줘, 어딨어 형..,나 무서워...때,때리지 마세요, 아흐으..'
찢어질듯 높은 목소리. 귀가 아릴 정도의 날카로움.
힘없이 울부짖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 흐느낌. '형... 어딨어...? 흐윽, 아악!! 아, 하윽.. 그만..!'
처절한 외침에 머리가 깨질듯 하다.
살려주세요. 그만... 잘못했어요.. 제발.
귓속으로 웅웅거리며 파고드는 메아리에 구역질이 난다.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힌다..... '뭘봐, 걸래 새끼야.'
심장이 떨어진다. "헉...!" 눈을 뜨니 보이는건 익숙한 방의 천장.
순간 천장의 무늬가 흐릿해진다. "...컥..쿨럭! 커헉..컥,"
막혔던 숨이 터져나온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쉴새없이 쏟아지는 기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헉..허억..."
어지러운 머리를 간신히 들어 손으로 감싸 비틀거리며 앉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식은땀이 흥건한 것이 느껴져 오한이 든다. ".....흑."
주체가 안되도록 떨리는 몸을 팔로 감싸 웅크려봐도, 쉽게 진정할 수가 없다.
결국 흐느낌이 새어나와 더더욱 팔에 힘을 준다. 옛날 꿈을 꾸면 숨을 못쉰다.
죽어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숨을 쉬지 않고 발작을 하는데, 잠이 든 내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기 때문에 뒤늦게 찾아오는 호흡곤란과 기도의 압박감은 형상없는 누군가가 나를 목졸라 죽이려 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 꿈이 내게 남기는 것은 비단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다.
아직까지 떨리고 있는 손끝.
죽어버리고 싶다...
책상에 엎드려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흔든다. "야 우지호, 뭐하냐? 체육복 안갈아입어?"
...체육이구나. 어쩐지 어수선한 교실. 여자들은 교실에 남고, 남자들은 탈의실로 이동한다.
느릿느릿 체육복을 꺼내 팔을 끼워넣는다.
씨발, 귀찮아..
어차피 움직이지도 않을건데. 뭐가 그리 좋은지, 김유권은 연신 싱글벙글이다.
"왜 또 쪼개고 있냐, 넌?"
"저번주 수행 끝났다고 오늘 축구 한댔어!!"
"축구..?"
"엉. 아싸."
그래서 이렇게 신이 난건가.
공차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게 뭐가 그리 좋아. 땀범벅이나 되지. 절로 몸이 너저분해지는 그 운동에 죽고 못사는 김유권이 또 새삼 신기하다.
"다 입었어? 빨랑 와 빨랑!!"
"아, 씨발.. 그냥 교실에서 이론이나 하지."
귀찮은 마음에 느릿느릿 운동장을 향하니, 4월 초라고 제법 볕이 있다.
"자 뭐 공만 잘 챙기고. 하고싶은 거 하다가 제때 들어가라."
남자, 여자들에게 각각 공 하나씩을 툭, 던져주고 하품을 찍찍 하면서 교무실로 돌아가버리는
체육 선생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밝은 햇빛에 미간을 찡그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 우지호, 어디가?"
"스탠드. 깨우지 마."
"너 또 자게? 미친, 이리 안와?"
"씨, 씨발 왜이래 이새끼가."
체육복 끝을 부여잡고 나를 질질 끌고가는 김유권 때문에 당황해 바둥거렸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다.
"오늘 해준이 안나와서 팀 안맞아. 너 뛰어."
"뭐? 뭘뛰어 새끼야!!"
"뭐긴 뭐야. 우리들의 리그지."
뭔 개소리야...
"씨발 지금 나보고 축구를 하라고?"
"어. 같이 하자. 빨리와."
"싫어. 분명히 말했어. 놔, 안놔?"
"나도 싫어. 팀수 안맞으면 아이스크림 못건단 말이야."
이게 진짜....
정색을 하고 쏘아대도 오늘따라 부득부득 고집이다.
"맨날 스탠드 쳐박혀서 잠이나 쳐자니까 피부가 그래 허여멀건하지. 남자새끼가 말이야, 어?
"아 씨발 운동 안해도 튼튼하다고!! 너 제발 좀,"
"야.. 김유권. 싫다는데 억지로 그러지 말고 와."
통통하니 착하게 생긴 어떤 놈이 제대로 열받아 떽떽대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말한다.
"야, 니네가 몰라서 그래. 얘 운동신경 존나야 진짜."
존나긴 뭐가 존나야. "이새끼야 네가 나 운동하는걸 언제봤다고 이지랄,"
"쌈박질 잘하잖아. 이리와 얼른."
이 씨발놈이....
"...야.. 나 진짜 싫어 김유권."
"뭐가 그렇게 싫어."
"아, 씨발 진짜.. 여럿이 뒤엉켜서 땀범벅 되도록 뛰고 그런거,"
"원래 다 그러고 살아 들."
"뭐?"
"세상 너 혼자 사는것도 아닌데 어떻게 여럿이 부대끼는일 한번 없겠냐.
다 얽히고 그러면서 사는거지. 싫어할 일도 쌨다 넌." "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지금."
"왜 그렇게 불만이야. 너때문에 그러는거 아니야. 아이스크림 때문에, 어? 아이스크림 먹고싶어. 그래서 그래, 어?"
"......."
"하는거지? 하는거다?"
"....아..씨발..김유권."
"야!! 얘 한댄다! 아싸, 야! 빨랑 갈라봐!!"
좋다고 소리지르는 김유권의 웃음이, 오늘따라 그렇게 원망스러울수가 없었다.
그냥 굴러오는 공 차서 골대에 갖다 박으면 그게 축구지 씨발.
몇번 골을 넣으니, 아주 가관이다.
"야, 우지호!"
"우지호 패스!!"
말한번 안섞어본 놈들이 이름을 떽떽 불러싸고 지랄.
내 이름이 이렇게 많이 불린적도 없었다. 기분 나빠 이상해.
아 왜 나한테만 공이 오는데. 땀이 뻘뻘 나 들러붙는 체육복이 불쾌하다. "아오, 씨발 우지호 저거 튕길땐 언제고 존나 쏴대네!!"
팀이 갈린 유권이 땅바닥을 퍽퍽 차대면서 신경질을 낸다.
그러게 누가 끌어들이래, 새끼야.
상대편 골키퍼가 쩔쩔매는걸 보니 또 안넣기도 뭐하다.
공을 가진 내 앞으로 끼어드는 멀대 한놈.
실실대며 웃는게 짜증난다.
옆으로 몸을 틀자 따라붙는 모양이, 씨발 이게 어디서 몸빵을 하려고.
정신연령 낮은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상한데서 승부욕이 생겨나 멀대를 노려봤다. 뭐가 이렇게 느물거려. 김유권같이.
"와, 우지호 너 축구 진짜 잘한다."
바보처럼 우와, 하고 웃어보이는 이 멀대는 자기를 노려보는 내가 보이지 않는건지, 못본척 하는건지
어떻게 된게 정말 제대로 김유권과다. "성격도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른거 같네."
사람 앞에 두고 뭐라 씨부리는거야. 네가 내 성격을 어떻게 알아.
짜증이 치밀어 발을 툭, 움직여 왼쪽으로 몸을 트는데 멀댜거 순간적으로 움직인다.
또 막혔다. 이새끼 뭐하는 놈이야, 더워 죽겠는데 씨발.
"야! 안재효!! 진짜 뚫리면 안돼, 어? 진짜 안돼! 5대5야 지금!!"
저 뒤에서 찡찡대는 김유권의 고함이 들린다.
이 멀대 이름이 안재효인가.
"지호야, 축구부 들어와. 응?"
너도 그놈의 축구부냐?
왜 축구부 새끼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짜증나는 놈밖에 없을까, 생각하는데...
팍!!
"...아,씨..." 어느새 내 앞에 있던 공을 채가선 제 발 아래에 두는 멀대.
저 멀리서 김유권이 좋다고 질러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축구부를 왜 들어. 지금 이러고 있는것만도 빡치는데, 씨발."
더이상 얘기를 꺼내지 말라는 식으로 날카롭게 쏴붙이는데, 안재효는 멀쩡히 갸웃거릴 뿐이다.
"그래? 왜, 안재밌어?"
재밌을리가.. 땀범벅에, 지금 너하고 대화중인것도 짜증나.
일이 왜 이렇게 된거지. "음,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팀이 이기면 가입해." 뭐야, 누구 맘대로.
"싫어, 씨발 안한다고 분명 말했어." "또 싫어? 싫은것도 많네... 그럼, 너네팀이 이기면 가입하는걸로 하면 되겠다."
씨익, 재수없게 웃던 멀대가 순식간에 말도 안되는 소릴 내뱉더니 갑자기 몸을 튼다.
그러고는,
"..뭐..!"
팡,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안재효가 힘껏 찬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간다.
그 골대는 안재효 본인 쪽의 골대였다. 멍한 눈으로 안재효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골키퍼.
"아아아악!!!!! 안재효, 또라이새끼야!! 뭐하는 짓이야?!"
김유권이 경악에 차서 질러대는 소리가 귀에 박힌다.
당황해 멍청히 서있는 나를 보고 다시 환하게 웃은 안재효가 말했다.
"이겼다, 너네 팀."
- 자기 팀 선수가 대놓고 저지른 자살골에 어이없어하던 상대편 놈들은 곧 욕사래를 하며 돈을 모아 아이스크림을 사왔고,
열받아 빽빽대던 김유권은 안재효의 몇마디에 여직까지 싱글벙글이다. 교실로 이동하는 내내 거슬리는 웃음으로 일관하는 김유권. "씨발, 너 그만 쪼개."
"으헤헤, 너 축구부 들어온다며? 으헤."
"내가 거길 왜 들어가. 지랄하지마."
"에이, 안재효랑 내기했다며. 이기면 가입하겠다고."
씨발놈아, 그건 그새끼가 지멋대로,
"남자가 한번 약속을 했으면, 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지."
"씨발 목에 칼 박던가. 안한다고, 새끼야."
"에이, 할거면서."
"안한다고 했잖아!!" "죽어도 빚지는건 싫어하는 우지호가 약속을 안지키겠어? 설마."
"....이게 왜 빚지는거야. 그새끼가 맘대로,"
"어쨌든 약속했잖아. 네가 못막은걸 뭐 어떡해?
"......"
이새끼들이, 정말 확..
두놈이 서로 짜기라도 한것 처럼 상황 한번 엿같게 돌아간다.
"할거잖아, 할거지? 응? 우지호, 하는거지?"
얄밉게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 김유권을 몇대 때려주고 싶다.
오늘 나오는게 아니었는데.
김유권 등쌀에 축구를 하는게 아니었는데. 그 망할 승부욕으로 골을 넣는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런데 좀.. 좀 이상하다. 뭐야, 아까부터.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는데, 나를 보는 시선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야, 기집애들 너 쳐다보는거봐. 너 아까 골 막 넣을때 존나 멋있었,"
"씨발, 다 눈 안깔아?!?!!"
김유권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