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세계
달감
01
짧았지만 다사다난했던 나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암울했던 그 날 밤을 기억한다.
두 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는 그 날 밤의 비극을 생생히 나타내주고 있었다.
공허한 눈을 한 채 멍하니 울음소리만 귀에 담고 있으니, 나도 따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울음소리가 앞으로 오랜 시간 그 두 아이에게 일어날 비극의 예고이자, 시작이자, 절규였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이 아이가 김태형의 세계를 밝게 빛내줄 거야.
그러니 이 아이의 이름을 '세계' 라고 하겠어.
천박한 아이니 성 따위는 필요 없다.“
그 아이가 그 날 밤 그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김태형'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세계'가 된 이유도 '김태형'이었다.
그 아이의 모든 것이 김태형으로 인해 결정되었다.
즉, 그 아이와 어울릴 한없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그 아이의 인생이 처참하게 망쳐진 이유도 '김태형'이었다.
"RM. 아무래도 저는 주인님을 사랑하나 봐요."
그럼에도 그 아이는 김태형을 사랑한다고 했다.
힘들게 마음을 정리했을 너를 달래기 위해 언제나 보여주었던 웃음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속으로 슬픔을 머금었다.
'김태형'은 '사랑'이 아닌 '증오'를 해야 할 사람이야. 너의 18년의 인생을 망친, 그리고 앞으로의 너의 인생을 망칠 그런 사람이야.
새하얀 두 볼 위에 번지는 핑크빛의 수줍음이 너무나 예뻐서, 너의 그 작은 행복을 짓밟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 가혹한 진실을 웃음 뒤에 숨겨야했다.
김태형의 세계. 01.
"주인님...."
태형과 벽 사이에 갇혀버린 세계가 애처롭게 태형을 바라보았다. 곧 세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왔지만, 소용없는 짓 인건 세계가 더 잘 알았다. 세계의 애절한 눈을 차디 찬 눈으로 몇 초간 응시하던 태형의 양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손 안에 갇힌 세계의 가는 손목은 깊은 자극을 받았다. 점점 깊어지는 고통에 세계가 얕게 '아'하고 신음소리를 내뱉고서야 태형의 입술이 세계의 입술을 덮쳤다. 이런 식의 밤이 찾아올 때면 세계는 태형이 화가 나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그저 태형이 화를 내면 세계는 온 몸으로 그 화를 받았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읍!"
단 1초, 태형의 입술이 세계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1초 뒤, 세계가 숨을 내뱉은 순간 태형의 입술이 세계가 숨을 마시는 걸 막았다. 그와 동시에 태형의 손이 세계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려 세계를 옆에 있던 탁자에 앉혔다. 태형의 입술의 바쁜 움직임이 계속되었고, 그 입술에 맞물려 있는 세계의 입술은 태형이 이끄는 대로만 움직임을 보였다. 능동과 수동의 주체가 확연히 구분되는 키스였다. 세계의 입술이 스스로 움직일 때는 숨을 쉬기 위해 태형에게서 도망갈 때뿐이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붙잡혀버렸지만.
이처럼 호흡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태형은 세계를 거칠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계의 혀는 달콤함의 맛을 느꼈다. 달콤함은 분명 태형과 이질적인 맛이다. 만약 태형이 달콤함이라면 그건 정말 위험한 달콤함일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그 달콤함이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거친 움직임으로 인한 고통을 잊기 위해 그 달콤함을 느끼려고 매번 애를 썼다.
태형의 손이 세계의 몸 구석구석을 훑다가 그 손이 허리에 다달아서야 입술을 땠다. 태형의 눈에 들어온 세계의 허리는 태형의 큰 손이 허리의 절반을 담을 수 있을 만큼 가냘팠다. 얇은 살 아래로 입체적으로 드러난 뼈의 딱딱한 촉감은 몇 번을 만져도 태형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 허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한 듯 태형의 시선이 세계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는 붉은 입술의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님..“
눈을 마주치자 세계의 눈에서 눈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한 눈물은 태형을 더 자극시켰다. 그 눈을, 그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태형은 언제나 그랬듯 무언가에 홀린 표정으로 세계를 들어 올려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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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눈꺼풀 안에는 순수한 눈동자가 담겨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세계의 얼굴이 약간의 주름을 만들며 살짝 찌푸려졌다.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 때문인 것 같기도 했고, 몸을 감싸고 있는 멍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잠결에 흐릿해졌던 어젯밤의 기억을 되찾은 세계는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계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 하얀 천 아래로 하얀 속살이 얕게 비추었다. 그 천을 붙잡고 절뚝거리는 세계는 꽤나 다급해보였다. 이 침대의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 뿐 이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자 복도를 가득 채운 하얀 연기는 태형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연기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세계는 위협을 느꼈지만 세계는 홀린 듯 연기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연기의 끝에 선 태형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세계의 붉은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여 태형을 불렀다.
“주인님...”
“네 방으로 꺼져.”
저렇게 차갑게 굴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다. 단 1초도 벗어나지 않고 세계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밤과 달리 아침이 되면 태형은 세계에게 단 하나의 시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세계는 그런 태형이 익숙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밤이 아닌 아침의 태형의 앞모습이 궁금한 마음이 조금은 들었지만, 마주볼 용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가 자신의 뒤를 지나칠 때 풍겨오는 향기에 태형이 살짝 고개를 돌려 세계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세계의 하얀 뒷몸은 겁에 질린 새끼고양이 같았다. 태형은 짧아진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 깊게 들이마셨다. 세계가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세계의 향기만 남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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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아가씨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다고 합니다.”
태형의 사무실. 책상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태형의 눈치를 보던 남준이 결국 입 밖으로 세계의 이름을 꺼냈다. 그 이름이 들려오자 안 그래도 좁혀져있던 미간이 더 깊게 좁혀지는 태형에 남준은 예상했다는 듯 들리지 않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사 더 넣으라고 그래.”
태형은 귀찮다는 듯 아예 눈을 감아버리며 대충 대답했다. 이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세계를 진단하는 주치의 지호에게 세계의 건강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몇 주간 전해들은 남준은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병이 아니라 정신이나 마음에 관련된 병이라고 합니다.”
“10년이나 집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제정신인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다시 한 번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남준에 감겨있던 태형의 눈이 떠지며 날카로운 눈매를 만들었다. 그 매서운 눈빛을 마주할 수 없었던 남준은 태형의 눈을 피해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모든 조직원들은 태형이 나타나기만 해도 벌벌 떨 정도로 태형을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이 조직에서 보스인 태형의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의 비서이자 오른팔인 남준 뿐이었다. 하지만 태형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할 때, 특히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태형의 특유한 섬뜩한 분위기는 남준조차도 태형을 마주하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
“RM. 넌 지나치게 그 애 걱정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어.”
“...”
“회사에선 일 얘기만 하자고. 네가 귀찮게 안 굴어도 충분히 짜증나는 일 많으니깐.”
남준은 더 이상 태형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회사에선 일 얘기만 하자고.’ 라는 태형의 말에는 두 가지 모순이 담긴 말이라고 남준은 생각했다. 첫 째, 세계는 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둘 째, 그렇다고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허락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언제 어디서 태형과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지만 남준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세계와 관련된 일들을 자신에게 모두 떠맡겨놓고는 어떤 보고나 상의도 못하게 하는 태형 때문에 남준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정말 세계가 죽어버리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는 건지,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어 남준은 또 옅은 한숨을 내 뱉었다.
다시 눈을 들어 힐끗 쳐다본 태형의 미간은 여전히 깊게 좁혀져있었다. 요즘 회사일이 잘 풀리지 않아 태형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태형의 좁혀진 미간 역시 회사일 때문일 거라고 남준은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태형의 머릿속엔 전보다 훨씬 가냘파진 어젯밤 세계의 허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남준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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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창밖으로 예쁜 소년이 지나갔다. 세계는 그를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 사이 소년은 사라져버렸다. 아쉬운 대로 두 눈을 감고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했다. 넓은 방, 하나의 창문. 세계에게 이 창문은 유일하게 남은 희망과 같았다. 영원히 나갈 수 없는 이 집 그리고 태형의 품에서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존재였다. 세계는 시간이 날 때마다 창문 앞에 서서 담벼락 너머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세계의 기억 속에서 만나본 사람이 태형과 주치의이자 선생님인 지호 그리고 가정부아주머니. 이렇게 딱 세 사람인 세계에게 사람구경은 가장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다 한 소년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이 골목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예쁘장한 미모의 소년은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어느 순간부터 세계는 매일 창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는 매일 그를 보면서 꽃향기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유리창을 뚫고 세계의 피부에 닿는 햇빛은 세계를 언제나 기분 좋게 했다. 어젯밤 태형의 침대에서 느꼈던 고통이 모두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따듯한 햇빛 덕분에 세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본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세계는 웃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세계가 눈을 떴을 때는 입꼬리가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까 사라진 줄 알았던 소년이, 매일 매일 지켜보고 있던 그 꽃 같은 소년이 유리창 바로 뒤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정국’
가슴에 달린 글자가 세계의 눈에 들어왔다. 소년의 이름인 것 같았다. 매일 어디를 가는 것인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등등 매일 소년을 지켜보며 세계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 가장 궁금한 것은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토록 궁금해 했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소년을 몰래 지켜볼 때 나왔던 미소는 나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세계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한건 꽃향기가 더욱 짙어졌다는 것 이었다.
소년이 가까이 있는 만큼 마주선 소년의 눈동자가 세계의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서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세계는 소년의 눈동자가 하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