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
: 03
“ 아 저 .. ”
“ 너 여자 만나니? ”
“ 그런 거 아니야. 빨리 가”
그럴 시간에 돈이나 더 벌렴, 이 안 좋은 집에서 나가고 싶으면. 비웃음이 섞인 말을 뱉으며 나를 지나쳐 길을 나서는 여자였다. 박지민은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 우리 엄마야, 좀 세지. 라며 하나도 안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다.
“ 음 어떡할까 ”
낮고 작은 박지민의 집에 들어와 앉았다. 박지민은 앞에 놓인 자퇴서를 보며 뜻밖에 고민하는 듯했다. 학교, 그만두는 거 아니었어?나의 물음에 근데, 막상 내 손으로 쓰려니 슬퍼서. 덤덤하게 말하는 박지민의 옆모습이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그래도 써야겠지, 라며 볼펜을 쥐고 자퇴서를 써내려가는 손이 조금 떨리는 듯했다. 애석하게도, 박지민 옆 벽에는 잘 다려진 교복이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박지민이 학교를 나오지 않는 데에는 순전히 오기 싫다는 이유라 생각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마지막 서명을 도장을 찍는 곳. 박지민의 손이 멈췄다.
“ 있지 ”
“ .. ”
“ 나는 왜 항상 나쁜 일만 있는 걸까? ”
장난이야. 박지민은 마지막 서명까지 마치고 다시 내게 종이를 쥐여주었다. 잘 전해줘, 네 옆에 이제 내가 없으니까 편하겠다. 박지민은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정말, 너 관둘 거야? 이 한마디가 어려워 내뱉지 못하고 그저 박지민만 쳐다봤다. 박지민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 걸까. 애꿎은 볼펜만 만진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 아르바이트 갈 준비해야겠다. 라며 박지민이 먼저 자리에 일어섰고 따라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지민이 발을 들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 같은 이 작은 집에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울음이 담겨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간에 놓인 TV 옆에 있는 이터널 션샤인의 DVD 한 장.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그 애, 박지민이 좋아하던 영화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 너무 꿈이 큰가?’ 박지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내 머릿속을 맴돈다.
“ 직접 와줘서 고마워, 너 생각보다 정이 많은 애구나? ”
“ 아 .. ”
“ 김여주 씨, 그 정 조금만 학교 친구들에게 나눠보세요 ”
“ .. ”
“ 그랬더라면 네게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을 텐데 ”
틀렸다. 나는 정이 많은 성격이라 말 한마디 안 해 본 친구에게 자퇴서를 들고 온 것이 아니다. 세 번의 계절 동안 내 옆에서 쉼 없이 말을 걸어주던, 반응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저 곁에 있어주던 박지민이기에 왔던 거다. 선생님의 부탁이라는 어쩔 수 없는 명목 아래 말이다.
“ 학교 다시 나오면 안 돼? ”
아, 진짜 미쳤다. 결국, 마음에 있던 응어리를 내뱉고 나서야 후회하는 나였다. 내 말에 박지민은 야, 너 내가 꽤 마음에 들었었구나. 역시 정이 많아. 라며 내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손을 내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다시 웃는다.
“ 미안 ”
“ .. ”
“ 학교 같은 거 .. 원래 흥미도 없었고 ”
보다시피, 나 양아치의 극치 아니냐? 그래도 네가 식당에 자주 놀러 온다면 놀아줄 생각은 있어. 장난스럽게 말하며 나를 배웅해주는 박지민이었다. 거짓말. 가득 슬픈 눈을 하고서는. 길을 나서며 저 집에 배여 있는 울음의 주인은 꼭 그 애의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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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받아 온 박지민의 자퇴서를 아직 선생님께 못 드리고 있다. 오늘 내로 줘야하는데 .. 결국 교무실로 향했다.
“ 저 선생님 이거 .. ”
“ 아! 지민이 결국 자퇴한다니? ”
“ 그런 것 같아요 ”
“ 졸업이 얼마 안 남았는데 ”
으유, 역시 양아치들이란. 선생님은 작게 말한다고 했으나 다 들렸다. 혀를 차며 자퇴서를 받아들며 수고했다, 여주야. 내 등을 두드려 주는 선생님의 손이 어쩐지 거북했다. 대충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갔다. 정말 졸업까지 넉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중에 두 달은 방학인데 .. 박지민은 자퇴한다. 반에 들어서자 처음으로 내게 반 친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야, 김여주가 박지민한테 자퇴서 갖다 줬다던데? 엥, 쟤 그냥 조용한 애 아니야? 몰라, 근데 박지민은 지금 자퇴하냐 아깝게. 야걘 그래도 안 이상해 저마다의 말을 내뱉으며 가십거리를 만들어낸다. 가끔 내게 박지민 진짜 자퇴한대? 라고 물어온 여자애들도 있었다. 나는 작게 응 이라고 대답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능 전 마지막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데 내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꽂힌 교과서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본 박지민의 교과서다. 이제까지 인식하지 못했지만 내 옆자리는 박지민이 학교를 나오지 않을 때부터 줄곧 빈자리였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빈 교실에서 조용히 박지민의 자리에 앉아본다. 교실은 적막했고, 박지민 자리에 앉는 나는 내 자리를 쳐다본다. 마치 나를 마주하듯. 누군가가 그랬다. 홀로 서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래. 이 자리에 앉아 내게 말 거는 박지민도 그랬을까? 박지민 자리에 있는 교과서를 대충 정리하다 보니 3학년 입학 첫날에 선생님께 제출하는 기본 정보 종이가 떨어졌다. 이름과 번호 특이사항 따위가 적힌 구겨진 종이. 그 틈 사이에 적힌 글자를 본 나는 재빨리 가방을 메고 박지민이 일하고 있을 식당으로 달려야 했다.
[이름 : 박지민
번호 : 010 ? 1234 ? 5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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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졸업식 날 부모님과 함께 사진 찍기 ]
남들은 희망 직업과 학과를 적는 칸에 진짜 소원을 적는 바보인 그 애를 붙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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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숨을 몰아쉬며 골목에 들어섰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샛노란 머리, 담배를 피는 건지 희뿌연 연기가 그 애를 감춰버린다. 놀라울 정도로 나는 박지민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 박지민 ”
“ 어.. 어 김여주? ”
“ 학교 .. ”
나와, 제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황한 박지민은 담배를 끄고 더욱 내게 다가온다.
“ 무슨 일이야, 김여주 응? ”
“ 두 달 만 다니면 돼 ”
“ 아 .. ”
“ 내가 이터널 션샤인 보고 와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도 말해주고 또 네가 말 걸어도 무시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학교 와 ”
왜 이렇게까지 본인을 붙잡는지 알 턱이 없는 박지민은 난감해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더욱 불안해졌다. 어쩌면, 나는 박지민 때문에 내 아픔을 마주 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반복된 외로운 일상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거라 생각해왔지만 단지 견뎌 내었던 것임을, 사람의 온기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임을. 그런 내게 거짓말처럼 박지민은 다가왔고 봄과 여름 가을이 떤 계절인지 알려준 내 세상에 구원자였다. 이런 박지민의 꿈과 슬픈 눈을 알게 된 이상 이 겨울에는 내가 너를 구하겠노라,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서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래.’
이젠 내가 그 손을 맞잡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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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허 석입니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전개된다고 생각 .. 하시나요 ?!
지민이가 여주에게 말을 걸고 다가가는 장면을 모조리 다 없애버리는 바람에
감정선에 있어 공감하는 부분이 어려우실 수도 있으실 것 같아요.
그런 것(?) 들은 추후 지민 번외로 엮을 예정입니다 호!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