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꿈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재환이 오빠랑 택운 씨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고,
나는 오빠의 차가 저 멀리 멀리 사라져 점이 될 때까지 망부석마냥 서서 보고만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내 집으로 들어선 나는 씻고 나온 뒤에도 괜히 청소기도 돌리고 빨래도 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왠지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게 다 꿈이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까 봐.
그 뒤로도 내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일어나서 알바 가고, 알바 끝나고 집에 오고. 단지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집에 가는 길에 일행이 한 명 더 늘었다는 거. 그리고 택운 씨가 오는 시간이 여덟 시에서 열한 시로 늦춰졌다는 거.
그때 재환이 오빠가 해줬던 말 그대로 나는 요즘 내가 얼마나 성공한 팬인지 나날이 느끼는 중이다.
"이렇게 매일 안 와도 되는데... 오늘도 늦게까지 방송 스케줄 있었잖아요."
"괜찮아."
"피곤하진 않아요? 보니까 살도 더 빠진 것 같던데."
"피곤해..."
"저 쪽 쇼파 가서 좀 자요. 내가 나갈 때 깨울게. 안쓰러워서 못 보겠어. 괜히 미안하기도 하구."
내 말에 좀비처럼 늘어지게 걷더니 쇼파 위로 쓰러지듯 눕는다. 안 와도 된다니까 와서는...
택운 씨는 정말 피곤했던 건지 눕고 얼마 안 되서 바로 잠든 것처럼 보였다. 어느덧 삼십 분이 흘렀고 분주하게 움직인 탓인지 마감을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손에 묻은 물을 대충 옷에 묻혀 닦은 뒤 조심 조심 택운 씨 앞으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잘생겼다."
천천히 관찰했다. 눈두덩이, 뺨, 콧날, 입술... 어느 곳 하나 모난 곳 없이 매끄럽다. 어떻게 여자인 나보다 더 예쁠 수가 있는 거래?
"택운 씨. 그만 좀 예뻐요, 나 그래도 여잔데 여자보다 더 예쁘면 어떡해."
"...네가 더."
엄마야, 깜짝아, 진짜!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그 상태에서 우물 거리듯 말하는 택운 씨 덕분에 심장이 밑으로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하고 물었더니 대답을 않는다. 이 남자 진짜... 자기가 대답하고 싶은 것만 대답하는데 선수야, 정말.
턱을 괸채 빤히 보는 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한 건지 몸을 뒤척인다. 내가 너무 불편하게 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택운 씨?"
몸을 아예 내 쪽으로 돌려 누운 정택운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특유의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창피해서 심장이 둥둥 뛰었다.
제발 이 소리가 나한테만 들리는 거이길, 둥둥 거리는 울림이 당신한테 전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는데,
"자꾸 떠네."
"..."
"너 말이야."
젠장. 택운 씨한테도 다 들리나보다. 왜 내 몸은 쓸데 없이 솔직한 거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쳐다보는데 그럼 떨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나도 너 보면 떨려."
"...네?"
"그럼 나도 너 좋아하는 거야?"
"..."
"좋아하니까 떨리는 거라면서. 그럼 나도..."
"무슨 소리ㅇ,"
"나도 널 좋아하는 거네."
***
분위기 굉장히 묘하다. 이게 다 정택운 때문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표정 보니까 장난같지는 않던데... 뭐야, 대체 뭐냐고!
나는 결국 아무 대답도 못한채 입만 뻐끔 거리다가 허둥지둥 일어나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나가자는 멍청한 말만 해댔다.
웃긴 건 택운 씨도 그 말 이후로 나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다는 거다. 겉으로 드러내지를 못하고 있을 뿐이지 지금 내 심정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다...
"별아."
"네?!"
미친. 나 왜 저렇게 화들짝 놀라는 건데. 이 멍청ㅇ하ㅓㅇㅎㄴ어아!!!!!!
"다 왔어. 집."
"아... 아,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마치 마이돌에서 상혁이와 택운 씨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어버버 거리며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했고, 너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뒤돌아 서는데, 네가 다시 나를 불러 세운다. 어두운 밤길, 가로등 불빛 아래 네 목소리가 나직히 울린다.
"내가 왜 피곤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매일 널 보러 오는 걸까."
"...내가 내려 준 라떼가 맛있어서...?"
"라떼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일주일 내내 먹을 정도로 카페인 중독자는 아니야."
택운 씨, 그거 알아요? 나 지금 택운 씨가 말 이렇게 많이 하는 거 처음 봐요...
"편지를 받으면 받을 수록 자꾸 신경이 쓰였어, 네가. 이유는 나도 몰랐고."
"..."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 안 한 거 아니야. 근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내가 네가 일하는 카페 안에 있더라."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 지 말하는 도중에 한숨 쉬듯 웃는데, 그 모습도 어쩜 그렇게 멋있는 건지.
밤 공기는 또 왜 이렇게 달콤한 건지. 당신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 기분 탓인 건지.
"만나니까 확실해졌어."
뭐가 확실해졌는데요?
"...네가 계속 눈에 밟혀."
"..."
"보고 싶었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택운 씨, 나는,"
"잠깐만. 내 말 먼저 들어 줘."
말 주변 없는 정택운이 이 정도까지 말하는데 모르는 건 정말 내가 호구란 뜻밖에 안 된다.
다행히 나는 호구 딱 전 단계인 건지 지금 택운 씨가 나한테... 뭘 말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근데 어쩌면 차라리 눈치 없이 호구처럼 모르는 게 나았을 수도...
"네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빅스 레오인지, 그냥 정택운인지 나는 몰라."
택운 씨도 바보구나. 내가 항상 편지 마지막 줄에 썼었잖아요.
"하지만 확실한 건, 난 네가 궁금해. 그리고 앞으로 숨기지 않을 생각이야."
"..."
"그러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줘."
"..."
"...서두르지 않을게. 약속 해."
빅스의 정택운도, 일반인 정택운도 참 많이 좋아한다고 내가 늘 말했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