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카페는 우리 둘만의 비밀 공간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11시가 넘도록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도 없고,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나갈 때
어떻게 알고 오는 건지 귀신같이도 택운 씨가 온다. 우스운 건 나는 택운 씨가 카페에 오는 것이 기다려진다는 것이다.
택운 씨가 핵직구를 날린 그 날 이후로 우리 사이게 큰 이변이 생긴 것은 아니다. 택운 씨도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고, 나 또한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없다.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것도 많고, 아직은 나도 그리고 정택운도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엔 사장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내일 유기묘 센터 가보려구요. 택운 씨 생각은 어때요? 두 마리 정도 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집에서 키울 거 아니면 그냥 아기 고양이 입양해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역시 그런가... 유기묘는 아무래도 신경을 더 써줘야 하니까요. 그럼 일단 카페에서 키울 고양이들은 입양해 와야겠다. 카페에서 막 사고 치거나 하지 않겠죠?"
"사고 쳐도... 귀엽잖아."
"아예 사장님한테 고양이 카페로 탈바꿈 하자고 얘기해 볼까요? 일개 알바생 주제에 너무 건방지려나?"
"걱정 마. 건방지게 안 보실 거야."
"정말?"
"응, 정말."
나는 어느새 당신이 주는 확신에 의지하게 되어버렸어요. 오로지 당신이 나에게 주는 확신이 나로써는 제일 안심이 돼요. 이를 어쩌면 좋아?
"별아"
"응?"
"...저번에 휴학..."
"..."
"그 얘기 다시 꺼내면 화낼 거야?"
"...아니. 화내긴요. 그 날은 당신이 정택운이라는 걸 몰랐었으니까."
"..."
"나랑 깊게 연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었잖아요. 근데 지금은 아니니까 괜찮아요."
왜 휴학했는 지 물어보고 싶은 거지? 내 말에 정말 궁금한 어린이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음... 휴학한 이유? 정말 별 거 아닌데... 아무래도 택운 씨는 내 과거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지금의 나조차도 그때의 나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너무 너무 걱정 되는데, 택운 씨가 걱정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거일 수도 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는 서울에 있지만 4년제가 아닌 전문대이다. 대학교를 오래 다니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럴만한 돈도 없었다.
사실 지금 휴학하게 된 것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대학생이라면 절반 이상이 고민하고 있는 등록금. 그게 내 첫 번째 이유다.
"택운 씨는 대학교 다닐 때 돈 걱정 해본 적 없어요?"
"아..."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잖아요. 등록금이라던가, 생활비라던가."
"미안..."
"뭐가 미안해. 내가 가난한 건 택운 씨 탓이 아닌 걸요?"
"..."
"그리고... 뭐...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이 무서워요."
휴학 후에 바로 알바를 다시 시작한 건, 내 트라우마에 대한 도전장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쳐놓은 울타리는 내 스스로 치워야 하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울타리를 허물기 위해 시작한 게 알바였다.
조금 더 사람을 많이 만나보고, 조금 더 많이 경험해 보면 조금은 허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근데 택운 씨. 택운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같아요."
나 요즘 다시 학교를 다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거든요. 모르겠어요, 그냥 택운 씨 덕분인 것 같아요.
***
"계속 그렇게 우울해져 있을 거야?"
"내가 우울해 보여요? 전혀 아닌데..."
지금 시간 밤 열한 시 삼십 분. 평소라면 택운 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재환이 오빠가 앉아 있다.
나는 괜히 오늘 데리고 온 작은 고양이들한테 온 신경을 쏟는 척 했는데 그게 오빠 눈에는 빤히 다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 뭐... 내가 요즘 자주 봐서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 지는 몰라도 그는 공인이니까 바쁠 수도 있는 건데 나 지금 왜 이렇게 시무룩 한 거지. 미쳤나 봐.
오빠가 카페 안에 발을 디딘 것은 고작 길어봐야 십오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거다. 어쩐지 걸음 소리가 익숙치 않았다.
그렇다고 물론 오빠가 반갑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정말로 전혀 아닌데... 그래도 우울해. 왜 이렇게 우울한 거야? 고작 하루 못 보는 것 뿐인데...
이 와중에 그냥 핸드폰으로 연락할 수도 있는 일을 굳이 재환이 오빠를 통해 간접적이지만 뭔가 직접적인 느낌으로 전달 받은 사실이 기뻤다.
꼭 택운 씨가 나를 신경 써 준 것만 같은 기분이다. 누군가가 나를 챙겨 준다는 기분, 꽤 오랜만이었다.
"다음에 볼 때는 다른 멤버들이랑도 다같이 보자. 다들 너 보고 싶어해."
"잉? 그럴 수가 있어요? 활동도 끝났고 이제 일본 가잖아요."
"우리 곧 팬싸 있거든. 공식 팬싸, 알지?"
"응, 알아요. 근데 나는..."
"티켓팅 실패했다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표정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갑자기 더 우울해졌다.
이번에 열리는 팬싸는 공식 팬들만 갈 수 있는 사인회인데 자리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며칠 전에 표가 오픈 됐었는데 나는 아주 맹렬하게 전사했다.
마치 콘서트 때가 기억나서 두 배로 허무했었던 것 같다. 사인회는 취소표도 안 풀리는데...
그때 생각에 우울의 구렁텅이에 기어들어가려던 찰나, 불쑥 오빠가 손을 쑥 내밀었다. 근데 그 손 위에는.
"...이게 뭐예요?"
"보면 몰라? 표잖아."
...그건 당연히 알죠. 근데 이거는...
"에녕이 너 준다고 진짜 피터지게 마우스질 하더라."
"..."
"그냥 초대권으로 줄 수도 있는 건데 그러면 다른 별빛들한테 불공평하잖아."
"어떡해... 나 진짜 지금 감동 받은 거 보여요? 표정에서 보여요?"
"형이 25년 살면서 처음으로 해본 티켓팅이라 자리는 별로야. 그래도 너는 올 수 있다는 거에 의의를 둘 것 같아서."
"나 막 이런 거 받아도 되는 거 맞아요?"
"그럼 설마 안 받으려고? 이건 환불도 안 되는 거 알지. 에녕 울지도 몰라."
장난스럽게 너스레를 떨어준 오빠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 듯 했다. 두 손으로 공손히 표를 전해 받고, 앞 면도 보고 뒷 면도 보고 요리조리 뜯어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가는 사인회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진귀한 보물 여기듯 하는 내 모습에 빵 터진 건지 카페 안에 오빠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퍼졌다.
그리고 오빠를 따라 내 입가에도...
"아, 근데 팬싸에 너 오는 거 나랑 에녕만 알아. 다른 멤버들한테는 비밀. 특히 택운이 형한테는 특급 비밀!"
사인회하는 곳에서 날 보고 놀랄 택운 씨 표정이 눈에 선했다.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아, 어떡하지. 엄청 기대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