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에에에에엥-,"
훌쩍, 코를 한 번 들이키고 도경수가 건넨 휴지로 얼굴을 벅벅 닦고. 휴게실에서 나는 아까 못 다 흘린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익,스..파이어..으아앙.."
"원래 치프쌤 그러는 거 알잖냐. 뚝, 해!"
"나도 얼,마나..얼마나 놀랐는데.."
끅끅거리며 아까의 상황을 되짚어보니 이것처럼 슬픈 드라마도 없다.
"나 오늘 오프 열흘만에 받았단 말이야아.."
"다시 집 가지 말래?"
박찬열의 물음에 나는 괜시리 더 서러워져서 다시 엎어져 눈물을 쏟았다. 내가 이게 얼마만에 받은 오픈데, 진짜 변백현 개새끼. 아까 스테이션 앞에서 나보고 집에 갈 생각 하지 말라고 아주 크게 선포했다.
"아까 못들었냐, 난 지나가면서도 들었는데."
"나 그 때 멘붕와서 치프쌤이 한 말 하나도 기억 안 나."
"쟤가 털리는데 왜 니가 멘붕이 와? 치프쌤이 그랬잖아. 옵저(관찰) 오더 안 내린 주치의의 전적인 책임이니까 니가 옆에서 시간마다 EMR 차팅해!"
도경수가 박찬열에게 치프쌤의 흉내까지 내며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고 박찬열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쟤는 내 옆에 있었으면서도 기억을 못해.
"나 괜히 그 옆 지나갔다가 불똥 튈까봐 휙 둘러갔잖아."
도경수가 아까의 상황을 회상하는 듯 입을 반 쯤 벌리고 천장을 쳐다본다. 그러곤 금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끔찍해, 하곤 중얼거린다.
"야, 그만 울어. 너 또 눈 부어있으면 치프쌤이 탈탈 턴다."
맞아, 또 그러겠지. 환자한테 눈물 보일 생각 말고 가서 세수하고 오라고, 이제 눈물로 봐 줄 시기 지났다고..아직도 학생 티 못 벗었냐고..박찬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나는 코를 흥-풀었다.
그 순간, 내가 코를 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치프쌤이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경수, 청진기 가지고 와."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본 치프쌤은 입을 떼려는 듯 하다가 바로 도경수에게 눈길을 주며 딱딱하게 말했다. 도경수는 바짝 긴장해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를 쭈뼛쭈뼛 치프쌤에게 내밀었고 치프쌤은 바로 제 귀에 청진기를 꽂고 청진기의 판을 톡톡, 손톱으로 쳤다.
치프쌤의 미간이 급격하게 좁혀진다. 저 새끼 저거 청진기 관리 제대로 안한 게 분명해.
"도경수."
"..예!"
"청진기 관리 안해?"
도경수는 이게 웬 날벼락인가, 하는 표정으로 치프쌤을 쳐다봤다. 분명 또 병동에서 도경수의 잘 못을 발견한 게 분명했다.
"SICU(외과 중환자실) 7번 베드. 무슨 환자야?"
"TA(교통사고)로 탈장 수술 환자.."
"그 환자 심박수 제대로 돌아온 게 언젠데 아직도 심박수 이상 체크해놨어?"
"..아,"
"청진기 관리를 이따위로 하니까 심장소리가 안 들리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니 청진기가 엉망인 걸 가지고 애꿎은 환자 SICU에 잡아놔? 매일같이 면회 시간만 기다리는 보호자 생각은 안해?"
도경수의 고개가 푹 숙여지고 치프쌤의 언성은 더욱 높아져갔다. 나랑 박찬열도 괜히 잘못한 것 마냥 눈치를 보았다. 어우, 변치프 성깔.
"너."
도경수를 지적하던 치프쌤이 날 손으로 가르켰고 나는 네?! 하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저,요?
"보호자 도착하셨다."
네, 넵! 치프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휴게실을 뛰쳐나왔다. 아까 그 코드블루 뜬 환자를 이야기 하는 것이었기에 뛸 필요가 없었음에도 난 무의식 중에 병동까지 뛰고 있었다. 이것도 직업병이야..
병실에 도착하니 환자의 아내분이 아까 그 환자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할머니이-,"
내 목소리에 시선을 위로 든 할머니가 내 손을 그러 잡으셨다.
"아이고..아가씨 선생.."
"아유, 많이 놀라셨죠."
"이 양반 심장이 한 번 멈췄다면서..."
나는 정말 저 세상 가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지 뭐요, 이 양반 보다 내가 먼저 가겠수..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리며 이어나가는 말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내 환자에게 온 코드블루, 이 할머니는 왜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내 손을 잡았을까.
"그래도.."
눈물 가득한 손으로 내 손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부여잡으며,
"그래도 살려줘서 고맙소..고마워요.."
멀쩡히 잘 뛰던 심장이 갑자기 멈췄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멈췄다가 다시 뛴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 할머니는 의료진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작년 이맘 때 쯤, 멀쩡히 뛰는 심장이 멈출 동안 느이들은 뭘 한거야! 하던 보호자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인턴이었고 나를 마킹하고 계시던 주치의 쌤의 환자였다. 그 날 보호자에게 멱살까지 잡힌 선생님은 병실에서 나오며 울분을 토하듯 말했다. 멀쩡히 뛰는 심장을 우리가 멈추게 할 이유는 또 뭐야!?
"이 몹쓸 양반, 안 그래도 바쁜 아가씨 선생 가슴 철렁하게 했구려.."
할머니가 나를 부르던 아가씨 선생-, 이 목소리를 듣고싶어 가끔 별 핑계를 만들어 할아버지의 병실에 들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앉아있던 할머니는 반갑게 일어서며 아가씨 선생 왔구려, 해 주시곤 했으니까. 나를 반기는 모습이 싫을 이유는 없었으니.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더 잘 봤어야 했는데."
"아유, 아유..그런 소리 말아요. 할미 억장 무너져."
결국 고백아닌 고백을 내 뱉은 내 앞에서도 할머니는 아프지 않게 내 등짝을 착착 때리셨다. 선생, 또 그 무서운 선생한테 혼나겠어. 얼른 가봐, 하는 할머니의 말에 난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못이기는 척 발걸음을 돌렸다.
"아, 아가씨 선생."
네? 하고 뒤를 돌아보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주머니에 쏙 들어오는,
"거, 맛나더라고."
비닐봉투가 쏘옥 들어왔고 내가 거절할 틈도 없이 할머니는 내 등을 떠밀었다. 나 진짜진짜 눈물 날 것 같아. 잘먹겠다고 꾸뻑 인사를 하고 병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안 봐도 뻔했다. 의국에 가서 비닐봉지를 꺼내보면 곱게 잘라진 과일이나, 잼이 듬뿍 발려있는 빵이나, 껍질을 깔끔하게 벗겨낸 땅콩이나.. 입원 기간이 길었던 할아버지 탓에 같이 병원 생활을 길게 했던 할머니는 내가 병실을 들를 때마다 먹을 것을 꼭 하나씩 쥐어서 보내시니까, 내가 말했었다. 할머니, 저 어차피 시간 없어서 못 먹어요. 할머니 많이 드세요. 그리고 그 다음 날 부턴 내가 집어서 먹을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된 음식이 내 주머니 속에 들어왔다. 이제 아주 거절도 못하게 내가 나가기 직전에 주머니에 넣는 스킬까지, 딸이 생각난다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그냥 못이기는 척 받기로 했다. 솔직히, 맛있기도 했고. 의국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고.
그렇게 훈훈한 마음을 지닌 채 의국으로 향하는데,
"이, 씨발!!"
스테이션에서 욕짓거리가 들려왔다.
"아니, 만 3세도 안 된 애를 Ped(소아과)에서 데리고 가지 왜 GS(외과)에서 데려가냐고!"
"ER(응급실)에서 GS로 올렸고, hernia(탈장) 의심되는 환자였어. 그건 GS 파트가 맞지."
"그렇게 따지면 브레인 데미지 온 환자도 NS(신경외과)로 죄다 돌리지, 왜!? 아주 Ped가 봉이지?"
"그래서 수술장 잡는다고 소아과로 콜 넣었잖아!!"
"콜만 넣으면 다냐!? 집도를 GS에서 하는데!? 난 내 새끼 너같은 새끼한테 못 넘겨, 이 개자식아!!"
"뭐? 개자식!?"
바락바락 악을 쓰는 김준면과, 거기에 받아쳐서 지지 않고 소리치는 변백현쌤이었다. 두 명의 지랄꾼이 모였으니 지랄이 안 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그 기대에 부응해 둘은 눈만 마주쳤다하면 지랄을 해대곤 했다. 지랄 곱하기 지랄이 아니라, 지랄의 지랄제곱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최대한 불똥이 튀지 않게 지나가려 애썼고,
"야!!"
나를 부르는 우리 김준면씨의 목소리에, 멈춰야 했다.
"..네, 쌤."
"가서 수술장 다시 잡아. 집도의 바꿔!!"
"..이미 프리오프(수술전) 준비 끝났는데요."
"캔슬하고 다시 잡으라고!"
아, 저 놈의 지랄병 진짜. 치프라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마음 같아선 오피스에 계신 교수님들을 죄다 끌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소리치고 싶었다. 교수님들, 이거 좀 보세요! 하고.
"지랄도 정도 껏 해야지. 남의 과 레지던트는 왜 건드려?"
김준면의 지랄을 받고 있는 고통스러운 내 앞에 우리 치프쌤의 방패막이 드리워졌고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쌤이 그냥 한 발자국 물러서서 김준면한테 집도 넘겼으면 됐잖아.
"니네 과 레지 전에 우리 집 막내다, 새끼야!"
그래. 김준면은 우리 병원 소아과 치프이자, 나의 친오빠였고 변백현이랑 김준면은 죽고 못 사는 대학 동기에서 병원 동기까지 이어진 사이였다. 변백현과 내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병원 사람이 김준면이었고, 난 아직도 김준면 성격에 변백현과 내 사이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저 지랄 맞은 성격에.
"여기가 집 입니까? 공과, 사. 구분 하시죠. Ped 쌤?"
변백현이 존댓말을 써가며 김준면 속을 박박 긁었고, 김준면은 골이 아픈 듯 뒷목을 잡았다.
"..시발, 공과 사 구분 조온나 잘해서 좋겠습니다. GS쌤?"
김준면은 반박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대신 가시가 파파박 박힌 말을 내 뱉고 나서야 뒤를 돌아 걸어갔다. 오늘의 일차 대전은 이렇게 종료됐다.
"뭐해? 부정맥 환자 EMR 차팅하러 가야지."
"..쌤은 집도하러 가셔야겠어요."
우리 오빠 그렇게 이겨먹었으니까, 결국 집도의는 쌤이 되신거네요. 하는 말은 꾸욱 눌러참았다.
"그럼, 아주 끝장나게."
주먹까지 그러쥐며 변백현 쌤은 결의에 찬 눈빛을 내뿜었다. 곧 펠로우 바라보는 치프 두명이 저러고 싶을까.
"응원."
"네?"
"느이 치프쌤이 Ped 무찌르고 집도하러 간다는데, 응원해줘야지."
멍-하니 치프쌤을 바라보는 나를 보고 픽 웃은 쌤은 그대로 뒤 돌아 수술장으로 향했다. 변치프쌤은 갭이 굉장했다. 이리왔다, 저리갔다. 그런 사람 앞에서 나는 갭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항상 휘청이곤 했다.
ㅡ
"시발, 진짜."
성공적인 수술이 끝났음에도 김준면이 욕짓거리를 내뱉는 이유는,
"애초에 Ped에 병동 분할 자체가 존나 쫌생이었어."
김준면이 내 새끼, 내 새끼, 거리던 그 환자가 소아병동으로 트렌스퍼(이동) 됐음에도 불구하고, 소아병동에 베드가 모자라 외과병동으로 내려온 탓이었다. 김준면은 회진을 돌 때마다 외과로 올라와야하는 상황이 되었고 아직 회복실에 누워있는 아이 옆에서 맘에 안든다는 듯 앞머리를 헤집었다.
"너는 왜 내려왔냐, 변백현이 일 안시키디?"
그 불똥이 나에게 튀었고, 나는 혹여나 간호사 쌤들이 들을까 싶어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니 새끼 우리 병동으로 데려가려고 왔다, 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술장에서 나온 변치프쌤이 마스크를 내리며 안경을 벗어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 꽂았다. 눈이 침침한지 눈을 몇 번 꽉 감았다 뜬 뒤 김준면과 내가 붙어있는 베드로 걸어온다.
"한 십분 있으면 깰거야."
변치프쌤이 다정하게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고 김준면은 그 손길을 경계하며 탁 쳐냈다. 둘다 유치해서 못봐주겠다 싶을 즈음 내 피디에이가 요란하게 울렸다.
"축하."
얄밉게 나를보며 웃음짓는 김준면을 상대할 시간도 없이 나는 피디에이 화면에 뜬 ER (응급실)을 향해 달렸다.
ㅡ
솔직히 쓰면서 ; 의사변백현이랑 갭차이 너무 심해서 저도 혼란스러웠던 것..1편 구독료 없앨테니 다시 읽고 오셔요.......넘나 오래되어서 다들 기억도 안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