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모바일 (밤모드 이용시)
댓글
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이준혁 몬스타엑스 김남길 강동원 온앤오프 성찬 엑소
노란 딸기 전체글ll조회 1281l 4
등장인물 이름 변경 적용

 
 

[방탄소년단/김태형]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22 | 인스티즈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22

 

 

 

 

 

 

 

 

 

 

 

*** 

그날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보기 좋게 뺨까지 한대 얻어맞았고, 지금도 얼얼하네.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더욱 더러웠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되려 화를 내. 내가 분명 말했다. 다른 남자랑 말도 섞지 말고 쳐다도 보지 말라고. 그게 아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빠는 남자 아니냐고. 그도 분명 나와 같은 것을 달고 있을 텐데. 다 똑같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짼지. 근데 말야. 나도 질려, 너란 애. 나도 이제 슬슬 그 여자가 질리기 시작했단 말이다. 그리고 넌, 너무 못 해. 

참 웃겨. 자기들이 먼저 좋다고 나한테 붙을 땐 언제고. 끝은 꼭 저런 표정을 보이며 날 버린다. 이젠 하도 많이 찔려서 딱지라도 생긴 것인지. 별로 아프지도 않다. 그냥 그러려니. 또 그러는구나. 곧 내일이라도 난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고. 

이럴 때면 항상 듣는 말이 있었다. 괴물 같다는 둥, 무섭다는 둥, 집착이라 둥. 난 분명 아닌데 자꾸 그런 말들을 뱉는다. 내가 괴물 같냐고, 이게 어떻게 집착이냐고. 내 것인 사람이 다른 남자와 있을 때 화가 나는 것은 어떤 남자나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그녀들 잘못이라고. 그래서 화를 내고 데리고 나오면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 자신들 잘못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적어도 난 지금 사귀는 여자 말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 않는단 말이다. 내게 끈질기게 붙어도 따로 만나진 않는다고. 그래도 다가오면 어쩔 수는 없지만.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저 남자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줘도 난 상관없었다. 내겐 그 남자와 무슨 사이고, 뭘 하고 있었던 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저 같이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것이다. 나와 함께가 아닌, 그 새끼들과 함께였다는 것에. 아, 뭘 하고 있었느냐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보지 않았으니. 만약 보게 된다면, 내가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도 잘 모른다. 그러니까 절대 하지도, 들키지도 말라고. 


이번 역시, 무슨 괴물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 앞에서 멀어졌고, 난 잡지 않았다. 괜히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아서.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몹시 기분이 나빠진 김에 그녀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아서. 꽤 착하지 않은가. 알아서 자제할 줄도 알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실실 나왔다. 내가 뭘 잘못했어.

 

 


 

-

집안으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어차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차가운 바람만 들었다 나갔다. 몸에 열도 슬쩍 올랐고 좀 시키자, 그저 다리에 힘을 풀고 문 앞에 앉아있었다. 몇 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고 곧 멈출 줄 알았던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있는 층까지 오려는구나 느낌이 왔을 때, 더 나지 않아 그 소린 멈춰 섰고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반짝 들었다. 아, 나 지금 좀 무섭나. 마냥 이곳에 앉아있기도 심심하고, 뭔가 재밌는 것이 생겼다 싶었다. 당장 고개를 들어 크앙-! 더 놀래켜줄까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는구나. 다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꽤나 겁을 먹었네. 작아진 구두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마침 그 소리가 바로 옆에서 사라졌다. 끼익 끼익- 느리게 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어떻게 하나 반응이나 보자 손목을 확- 잡았다. 근데, 반응이 참 재밌는 게. 내가 무슨 벌레도 아니고, 기겁을 하며 털어내더라. 소리까지 지르고.  

어, 여자네. 

혹시나 했는데. 어떤 표정인지 구경이나 해보자며 고개를 들었더니 날 꽤나 만족시켰다. 아까 내 뺨을 후려치고 마구 내달렸던 그녀보다 더욱 겁에 질려선 곧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이라니. 와, 방금 내 눈도 피했어. 참 기분 더럽고 좋아. 

 

 


"저기요. 나랑 사귈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집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에이, 답은 해주고 들어가지 재미없게. 그 여자가 사라진 곳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하하- 웃었다. 오늘 진짜 좆같아, 기분. 

 

 

난 또 바로 옆에 여자가 살 줄은 몰랐지. 우리, 잘 지내보자고.

 

 

 

 

 

 

 

 

 

다른 여자를 꼬시고 있었다. 어제 내 뺨을 후려치고 도망가 버린 그 여자를 다시 잡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 질리는데 다른 여자를 찾아보자. 며칠 전에 내 번호를 따갔던 귀엽게 생긴 여대생에게 연락을 한 뒤 저녁까지 대접을 해주곤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집으로 데려가 오늘만에 끝을 내고도 싶었지만 너무 서두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보내주었다.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 참 싫은 거지.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근처 포장마차로 발을 돌렸다. 딱히 먹고 싶었던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 아주머니에게 알아서 달라고 했더니, 미끌거리는 꼼장어를 내왔다. 굽기 귀찮아. 아직도 꼬물거리는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날 뜨겁게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런 인기라니. 낮이나 밤이나 빼놓질 않는다.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상황 진짜 재밌네. 어제 그 여자였다. 자기가 먼저 쳐다봤으면서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는지. 내가 먼저 인심을 써주기로. 

그 여자 앞으로 가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했다. 왔는데 좀 봐달라고 불러도 몸이 더욱 움츠러들 뿐이었다. 설마 날 기억하지 못 하는 건가. 그날 너무 놀라서, 무서워서. 

 

 


"나 옆집에 사는데. 어제 봤잖아요. 기억 안 나요?" 

 

 


숙여진 얼굴로 입이 슬쩍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역시 날 기억 못 하고 있었네. 그리고 여자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어제 내가 너무 놀래켰나. 겁먹은 건가. 

 

 


"어젠 미안했어요. 내가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막 나갔네. 많이 놀랐죠?" 

"...." 

"내 말 들어요?" 

 

 


대답을 안 한다.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건지. 여전히 굳어서는. 내가 무서워서 저러는 건지, 부끄러워서 저러는 건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분명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었는데, 표정은 또 그게 아니니. 전에 이런 타입의 여자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자기가 먼저 호감을 표해서 다가갔더니, 잔뜩 부끄러워서 피하기나 하고. 아, 이 여잔 내게 호감을 표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런 여자들은 내가 조금 빠지고 천천히 들어가면 된다고. 

내가 일어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그 여잔 고개 한번 들지를 않았다. 땅에 꼿꼿이 박고서는. 꽤나 오래 걸리겠네, 싶었다. 하긴 지금 찌르고 있는 귀여운 여대생도 있고. 굳이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또 괜히 열이 받는 게. 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있지 않아 그쪽을 쳐다보니 언제 나갔는지 벌써 여자가 없는 것이다. 와, 지금 진짜 기분 나빴어. 분명 술병에 술도 가득 차있었는데, 나 때문에 급히 자리를 뜬 것이 확실했다. 아니, 열도 받았지만 언제 번개처럼 사라진 저 여자가 놀랍기도 했다. 뭐 저렇게 철벽이냐고. 나 같으면 술이 아까워서라도 그냥 앉아 있겠다. 

계산 안 하냐는 아주머니에게 다시 올 거라는 말을 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걸음은 또 뭐 저렇게 빠른지, 날 뛰게 만들었다. 

 

 


"잠시만요!" 

 

 


잘 가고 있던데, 내 목소리에 다시 몸이 깡통처럼 뭉개졌다. 쳐다라도 봐줄 줄 알았는데 고개도 안 돌려주길래 팔을 잡아세웠더니 이번엔 제 얼굴을 뭉갠다. 손도 올리려다 말고. 얘 왜 이래 싶었다. 분명 백프로 나 때문에 가려는 것이 맞으면서 아니라며 내 손을 치웠다. 거기에 대고, 네 너 때문인데요. 라고 하면 철벽으로 완전 무장한 갑옷이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하지만 여자의 입에선 아니라는 말이 나왔고 그 말에 오기가 조금 생기기도 했다. 열 번만 더 찍어 보자고. 만약 그렇게 말했으면 열 번이고 한 번이고 말려고 했는데. 

더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여자는 몸을 금방 돌려버렸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주자. 아까도 말했듯이 이런 타입은 급하게 돌진하면 꽝이 된다. 

조심히 가라며 혹시 나중을 위해 쓸데없는 오지랖의 한 마디를 던져주고 다시 포장마차로 향했다. 아까 그 여자가 남기고 간 술도 아깝고, 어묵도 남겼네. 죄다 쓸어 내 테이블로 가져왔다. 아주머니가 뭐 하는 거냐고 내게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라고 둘러대니, 아까 몇 분간의 합석을 보았는지 더한 말은 안 하셨다. 

그 여자가 남기고 간 소주 병을 들어 내 잔에 쪼르륵 따랐다. 잘 마실게. 딱히 돈이 아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돈 없이 자라 온 것도 아니고, 지금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여자가 먹었던 거라고 생각해서 가져온 것 같았다. 몰라,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근데 이 여자, 뭔가 조금 이상하다.

 

 

 

 

 

 

 

 

 

나는 혼자 밥 먹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안 먹었으면 안 먹었지. 그런 이유로 한참 간만 보는 중인 여대생에게 점심을 사줄 테니 나오라 했지만, 조별 과제가 있다나 뭐라나. 못 먹게 되었다. 아침은 원래도 잘 안 챙겨 먹었고 벌써 2시가 되어가는데 배가 너무 고픈 것이다. 당장 뭐라도 주워 먹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옆집 여자가 떠올랐고 나가는 소리를 못 들었으니 순간이동을 하는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집에 있을 것이다. 그런 확신으로 고픈 배를 눌러잡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뭐야, 근데. 분명 집에 있는 것이 확실한데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눌러도 나오질 않았다. 만약 자고 있다면 시끄러워서라도 일어났어야 하는데. 한 11번 정도 눌렀나, 이 여자는 내가 열 번을 찍어도 안 넘어올 여자인가 싶어 후- 짧게 한숨을 쉬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나는 배가 고팠다. 침대에서 꾸물꾸물 거리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어 편의점에라도 가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터지고 있는 쓰레기통이 보였고 기왕 나가는 김에 처리하고 오자 했다. 

난 생각보다 꽤나 바른 청년이었다. 그냥 모른 척 툭- 던져놓고 집으로 향해도 될 것을 이리 친절히 하나하나 분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님 일부러 시간을 벌고 있는 거던가. 이유가 어찌되었든, 착한 짓을 하는 건 맞으니 칭찬을 해달라.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간 건가. 아님 내가 갔을 때 화장실에 있었거나, 것도 아니면 정말 초능력자인가. 자꾸만 고개가 주위로 돌아갔다. 분명 나가는 것을 보지 못 했는데. 


그리고 여자는 집에 있었다. 

 

 


"집에 계셨네요?" 

 

 


집에 있으면서도 없는 척. 것도 내가 초인종이 고장 날 때까지 눌렀는데. 뭔가 좀 이상해. 하긴, 뭐 그러면 어떠리. 일단 어찌 되었건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자는 어딜 가려는 듯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안 되는데, 나랑 밥 먹어줘야 하는데. 

혹시나 하며 나가는 중이냐 물으며 그 여자에게 더욱 다가가면, 맞다며 짧게 대답하곤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까지 꽉 쥐었다. 눈은 처음부터 맞춰주지도 않았고.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건지, 아님 뭘 참는 건지. 얼굴은 그때와 같이 붉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일부러 배를 문지르며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여도 별 말이 없었다. 불쌍한 장화 신은 고양이 같았던 내 표정을 보긴 한 거야, 만 거야. 그 표정을 보았으면 당장이라도 같이 먹어주고 싶었을 텐데. 그렇게 고개를 박고 있으니 니 표정도 모르겠잖아. 

더는 입을 열어주지 않길래 그냥 포기해버린 것 같다. 그래도 일단 잘 가라며 손은 흔들어주었다. 덕분에 슬쩍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얜 좀 어렵다.

 

 


 

결국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침대에 벌렁 누워 핸드폰만 만지며 밀어두었던 답장들을 해주면 금방 또 저녁시간이 찾아왔다. 저녁은 또 어떡하지 싶을 때, 그 귀여운 아이가 저녁이라도 먹자며 연락을 해왔다. 그래야지. 얼른 멋스럽게 옷을 차려입으며 때를 봐서 오늘은 좀 더 나가봐야지 생각했다. 이쯤이면 나도 오래 참아주었다. 그 아이도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이 확실하고. 아니 그런 건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애초에 내가 좋다고 다가온 아이인데. 어쨌거나. 

근데 이 여자는 어딜 나가서 아직까지도 안 와. 몰라, 난 나가련다. 문을 닫으며 옆집을 한번 봐준 뒤 일층으로 향했다. 

와, 근데 어쩜 이러지. 대단한 우연에 박수를 보낸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고, 더 보아도 저건 그 여자가 맞았다. 왜 벌써 들어와, 시계를 슬쩍 보아도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시간인데. 이 여잔 남자친구가 없는 게 분명하다. 망설임 없이 발을 쭉쭉 내딛었고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저 죄인처럼 박혀있는 고개는 언제쯤이면 들어주려는 건지. 가까워지는 그때에도 숙여만 질 뿐 들리질 않았다. 난 계속 봐주고 있었는데 말이야 

다행히 한 번쯤은 고개를 들어주었고 그 사이 눈까지 맞춰주었다. 아무 말없이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나란 남자와의 식사시간을 놓쳐버린 것에 대해 무척이나 아쉽게 생각하라는 듯, 그렇게. 오늘을 시작으로 그 여대생과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생각이지만, 그래도 바로 옆집에 사는 이 여자를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는다는 뜻도 있었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일단 나는 그 귀요미를 만나러 떠나야 하고. 오늘 밤 내내 내 생각을 해보라고. 

지나치는 순간 여자의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뭐 때문이었는지. 내 미소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라고 그냥 생각하련다. 

 

 

어때, 내 생각 좀 했어?

 

 

 

 

 

 

 

 

 

며칠 동안 보질 못 했다. 그 여자. 집에 들어오는 모습도, 나가는 모습도 보지 못 했다. 집에 있는 건지,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 건지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그날과 같이 그 여자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눌렀다. 그때는 11번 만에 끝을 냈지만 더 넘어 20번은 누른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나오지 않았고, 이건 없는 척이 아니라 정말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도 했고. 뭐야, 이 더러운 버림받은 듯한 기분은. 어디 간 거지, 어디로 숨어버린 거지. 그냥 힘이 없었다. 간만에 재밌는 반응을 보이는 신기한 여자가 눈에 띄었는데 갑자기 사라지니 말이다. 

목표했던 대로 그날 내겐 여자친구가 생겼다. 저녁을 먹은 후에 바로 사귀자고 했고, 그 아이도 금방 좋다고 해주었다. 진도는, 별로 빼지 못 했다. 해봤자 키스 정도. 입맛만 쩝쩝 다셨다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여자 어디 갔냐고. 여자친구는 학생이기 때문에 학교에 가야 한다. 그럴 때면 별수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괜히 저 애를 골랐나. 학생도 아니고, 직장도 없는 나 같은 백수를 골랐으면 종일을 같이 있을 텐데 말이야. 나 요즘 꽤 목이 마르고 있는데. 

역시나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 하고 그저 베란다 앞에 서있었다. 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운명처럼 저 멀리서 그 여자가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 반가움이란. 뭐라고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수리를 맡겼던 고장 난 장난감이 다시 내게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사라도 해야지, 문을 벌컥 열었고 제 집에 들어가려던 그 여자는 순간 나와 마주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다 짜서 맞춘 거지.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다 다시 식어버리긴 했지만. 왜 기분 나쁜 표정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한번 맞춘 뒤로는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길래 내 고개를 숙여가면서까지 눈을 맞추려 해도 고집스럽게 시선을 치웠다. 제대로 눈을 맞춰준 적도 없어. 내가 싫은 건지, 아님 사람과 눈을 못 맞추는 건지. 기분 나쁘니 후자로 하겠다. 

여행을 갔다 왔냐 물어도 말이 없고. 얼굴을 자세히 보니 푸석푸석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몸도 축 늘어져있었다. 어디 아픈가. 여행을 갔단 온 사람치고는 힐링이 아니라 고문을 받고 온 사람 같았다. 

확실한 건, 만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여행을 갔다 왔는지, 나와 눈을 맞추기 싫은 건지 그런 것들은 다 모르겠고, 일단 확실한 것은 그거였다. 방금도 제 어깨를 잡은 내 손을 급하게 쳐냈으니. 생각이나 하고 쳐냈나 싶을 정도로 빨리. 나도 깜짝 놀랐네. 

내가 제 몸에 손을 댄 것이 기분 나빴던 것인지, 아님 자신도 모르게 나갔던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나와 눈이 마주쳤고 얼굴이 금방 시뻘게 지는 것을 보았다. 저러는 것을 보면 내게 아주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아님 얼굴을 왜 붉히겠어. 부끄럽고 떨려서 그렇겠지. 근데 하는 행동은 참. 애매하게 굴었다. 

손에 들려있는 봉지를 보았고 장을 봐온 것 같았다. 아직 밥을 안 먹은 것 같은데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하려 했더만. 몸도 피곤해 보이고 목소리도 힘이 없는 게. 그냥 쉬라고 하고 싶었다. 더 이상 말을 걸며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게다가 나 때문에 얼굴도 저렇게 불타오르는데, 같이 밥까지 먹으면 그게 입으로 들어가겠어 코로 들어가겠어. 내가 너 배려해준 거야. 

들어가서 쉬라 한마디 해주고 고픈 배를 살살 쓸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려는데 벨소리가 들렸고 얼른 문을 닫고 핸드폰으로 돌진했다. 내 귀여운 여자친구네. 내가 널 놔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 갑자기 휴강이 되었다고 얼굴이나 보고 싶단다. 얼른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향했다. 굶지는 않겠네. 

 

 

근데 너, 밥 좀 많이 먹으라고 하면 너무 오지랖이려나. 

 

 

 

 

 

 

 

 

 

내 여자에게 푹 빠져있었다. 며칠간 말랐던 목도 축여주었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 귀여운 것이, 밤에는 더 귀여워요. 자취를 하고 있는 아이라 자주 그곳에 있었다. 아, 요즘 내 집에는 잘 안 들어갔네. 내 옆집에 살고 있는 그 여자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뭐, 별로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리지 못 하고 있는 카드, 그 정도였으니까. 

기말고사라나, 수업이 일찍 끝난다고 했다. 그래서 깜짝 놀래켜주기 위해 학교 앞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멋있게 쫙 빼입고. 건널목에 서서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꽤 오랜만이네. 순간 반가운 마음에 손까지 흔들뻔했다. 하지만 난 지금 내 여자친구와 충분히 좋아서. 니가 지금은 필요 없어. 살짝 웃어주곤 그 여자를 지나쳤다. 그 순간 그 여자의 눈이 크게 떠진 것 같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하긴, 나완 상관없었다. 난 내 여자친구 만나러 갈 거야. 

 

 

적어도 오늘은 니가 필요 없어. 

 

 

 

 

 

 

 

 

 

방학을 해서 하루 종일 붙어만 있으려고 했더니 가족 여행을 간다는 청천벽력.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렸는지 모르겠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딱 헤어지기 직전까지 싸운 것 같다. 당장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하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국내도 아니고 해외로, 것도 몇 주씩이나 떠나 있는다는데 당연히 화가 났다. 불안하기도 불안했고. 거긴 뭐 여자들만 살아? 게다가 넌 무척이나 귀여운 동양인 여자인데 그 희멀건 놈들이 침을 흘릴 것이 안 봐도 뻔했다. 그런 이유로 가기 전날까지 주위 모든 것들을 파괴할 정도로 심하게 다툰 상태였다. 결국 좋은 감정을 품지 못 한 채로 여자친구는 비행기에 올랐고 몇 시간이 지나도 상태는 여전했다. 그러다 결국은 참지 못 하고 내가 먼저 그 아이에게 굽히고 들어갔다. 외로워서 못 살겠다고, 보고 싶어 죽겠다고. 당장이라도 날아가서 보쌈을 해오건, 따로 둘이 여행을 다니건 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화를 낼 테니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 항상 문자나 전화나 영상통화나, 내가 걸 때마다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우린 풀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싶은 얼굴을 보았다고 해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밤엔 어쩌라고, 밤엔. 쓸쓸해 죽겠다고. 잠으로 참아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여자친구가 여행을 떠난 뒤로는 거의 끼니를 거르고 있었다. 어쩌다 몇 번 날 탐내는 여자들이 불러내 밥을 사준 적은 있었지만 하루에 적어도 세 끼는 먹어야 한다는 거지 같은 뱃속. 다 채울 수가 없었다. 오늘은 휴일이고. 직장에 다니는 듯했던 그 여자도 오늘은 쉴 것이다. 밖에 나가는 것도 보질 못 했고. 역시 베란다 앞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직은 점심때가 아니니 조금만 더 있다가 찾아가야지. 

그러다 창밖에서 옆집 여자의 모습이 보였고 혹시나 어딜 나가려는 건가 싶어 몸이 덜컹했다. 다행히 그 여자는 분리수거를 하러 나온 것이었고 나도 얼른 고개를 돌려 쓰레기통을 확인했다. 평소엔 잘만 터질 것 같더니, 요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번데기처럼 살아서 그랬는지 텅텅 비어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김태형이던가. 그거라도 들고 밖으로 향했다. 

전과 다르게 더한 찬 기운이 부는 것은 내 착각인 건가. 아님 나한테 뭐 기분 나쁜 것이 있는 건가. 이유야 나랑 상관없고, 됐다는 그 여자의 말에도 난 굳이 다가가 분리수거를 도와주었다. 어차피 내 것도 할게 없다. 이 정도 가까이 왔으면 더 빨개져야 할 볼인데 평소보다 하얬다. 뭐야, 며칠 못 봤다고 그새 나한테 식은 건가. 아직 버리기엔 참 아까운 카드인데 말이다. 꼭 한번 쓰고 싶은데. 

좀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지금 여자친구는 멀리 나가있으니. 난 지금 여자친구가 채워주지 못 하는 것을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정도는 상관이 없다. 그냥 누군가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며칠 만에 난 꽤 외로워졌으니까. 날 탐내는 다른 여자들은 내 쪽에서 별로였다. 그중에 내가 담고 싶은 여자들은 없었다고. 근데 이 여자는, 그래 솔직히 관심이 있었다. 

김아미. 이름 하나 듣는 거 더럽게 힘드네. 내 이름을 먼저 내주고 또 몇 초간 기다려주고서야 그 여자의 이름을 받아냈다. 이쁘네. 형식적이지만 꼭 그렇진 않았다. 난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랬다. 아니, 무심하게 고맙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렇다고 생각하려나.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부르며 밥을 먹자 제안을 하자마자 시선을 떨구며 붉어지는 볼을 보았다. 저런 것을 보면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맞는데. 하는 말투나 행동은 그렇게 안 보인단 말이지. 참 헷갈리게 만들었다. 한번 더 밥을 먹자는 내게 뭐라 뭐라 뱉어낸 뒤 얼른 도망을 가버렸다. 내게 관심이 있다면 좋다며 더욱 얼굴을 붉혀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약속이 있다며 도망을 갔단 말이다. 약속이 있으면 있는 거고, 거절을 할 거면 하는 건데. 저렇게 도망을 가버리는 건 대체 뭐 때문인지. 벌써 여러 타입의 여자들을 만나보았지만, 여전히 여자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뭐가 문제야. 그리고 저런 타입의 여자는 전에도 한번 성공을 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아닌 걸로 밝혀지고 있었다. 저런 타입의 여자는 처음이야. 정보가 무척이나 부족하단 말이다. 

 

 

뭐냐고 저 여자는. 나도 분명 이상한 새끼가 맞지만 저 여자도 이상해. 자꾸 신경 쓰인다고. 

 

 

 

 

 

 

 

 

 

여자친구의 부재 때문인지. 매번 같은 이유로 하루에 몇 번씩 얼굴에 열을 내는 것이 질렸기 때문인지. 그런 거 같긴 하지만. 자꾸만 그 여자가 머릿속에 놀러 왔다. 안녕? 오늘은 밥 먹자고 안 할 거야? 난 오늘도 거절할 건데, 한번 해봐! 하면서. 누굴 약 올리는 거야 뭐야. 신경을 안 쓰려고 했지만 벌써 두 번이나 날 거절한 그 여자에게 화가 나려는 듯했다. 자기가 뭐라고 나를 거절해. 내가 어떤 놈인데. 내가 꽤 유명하다고. 인기도 엄청 많은데. 방금도 말야. 완전 예쁜 여자가 같이 밥 먹자고 연락이 왔어. 알기나 하냐고. 옆집을 향해 잔뜩 째려주곤 한껏 멋을 낸 채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그 여자가 지금 집에 있건 나갔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망할, 정말 밥만 먹고 헤어지냐. 다 큰 여자가 별로 늦은 시간도 아닌데 집에 가야 한다기에 침을 꿀떡 꿀떡 삼키며 하는 수없이 집에 데려다주었다. 이게 뭐야. 잔뜩 차려입은 것도 아깝게. 너무 오랫동안 목이 말라있어 오늘은 조금 못된 짓을 하려고 했다. 어차피 여자친구는 멀리 나가있고. 여자친구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못된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그래, 조금만 더 버티면 여자친구가 돌아오니까 참고 기다리자. 애써 위로를 했다. 

확실히 말하건대, 이번 것은 절대 내가 의도한 만남이 아니다. 이건 진짜 우연이라고. 그 여자였다. 제 얼굴의 두 배만 한 수박을 들고 낑낑거리는데. 그때 든 감정은 대체 뭐였을까. 반가움? 설렘? 기쁨? 아님, 화남? 짜증? 당황? 무엇인지 딱 잡아낼 수 없었다. 그저 그 여자를 빤히 쳐다보다보며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넌 뭔데 자꾸 신경 쓰이는 건데. 왜 그렇게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건데. 우연을 가장한 내 의도로 인한 만남이 대부분이었지만, 요즘 들어 꽤 자주 보는 얼굴이었다. 자주 보고 싶은 얼굴이기도 했고. 보통 여자들과 다른 이 여자의 마음을 뚫어보고 싶은 오기도 있었다. 호기심도 있었고, 관심도 있었고. 

어찌 되었든 지금은, 나쁘지 않다. 

와, 그렇게 먹는 사람 흔치 않은데. 당연히 아니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날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거나. 내 여자친구는 그랬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고. 수박에 설탕을 왜 뿌려먹냐고. 이상하다고. 그게 왜 이상해. 완전 맛있는데. 그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다. 잘 몰라서 그래.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뜻밖의 공감대가 생긴 것이 꽤 기분 좋았다. 머릿속에 그 맛이 떠오르기도 했고, 입꼬리가 쭉쭉 올라갔다. 맛있겠다. 

 

 


"그렇다고 꼭 나눠달라는 건 아니고-." 

 

 


꼭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이 큰 거 혼자 다 먹을 건 아니지? 나눠주러 오는 김에 얼굴도 한번 더 보고. 그때 방금 지었던 표정도 함께 가져오면 좋겠다. 갑자기 뒤를 도는 바람에 표정을 숨기지 못 했는지, 난 분명 보았다. 나를 보며 슬쩍 웃고 있었던 것을. 내게 한 번도 웃어주지 않더니. 뒤에서 그런 표정을 지어주고 있었다니. 참 귀엽지 않아?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이 맞지? 속으로 생각하면 아까보다 더욱 입이 찢어지는 것이다. 너가 뭐라고. 저 여자가 뭐라고. 실실 웃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좀 이상했다.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그렇게 떨리는 건지. 몸도 가볍게 떨고 있는 것 같았고. 뭔가 정신이 없는 듯했다. 금방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쌩-하고 타더니 구석으로 박혔다. 제 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딱딱하게 서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폐소공포증인가, 뭔가 뭐 그런 건가 싶었다. 올라가는 내내 그 자세를 유지하더니 우리 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또 쌩-하고 내려버렸다. 근데 또 웃긴 것이. 방금까지 그랬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관리에 들어가는 것이 참. 진짜 알 수 없는 여자라고. 이러니 내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고. 

집에 들어와 괜히 힘을 주었다며 옷을 다 풀어헤치고 깔끔하게 샤워를 했다. 내가 오늘 속옷도 참 예쁜 걸로 골라 입었는데 말이야. 입맛을 다셨다. 근데 이 여자는 언제 오려는 거지. 딱 두 가지다. 맛있는 수박을 들고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다면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이고, 끝내 우리 집 초인종이 울리지 않는다면 이 여자는 내가 찔러도 안 되는 여자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말리자는 것도 잊고 문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초인종만 뚫어보고 있었다. 울려라, 울려라. 시끄럽게 울려라. 

'띵동' 

나이스. 문을 바로 열었고 이제는 제 얼굴만 한 크기가 된 수박을 여전히 낑낑거리며 들고 있는 옆집 여자가 서있었다. 아니, 이제 보니 수박이 더 컸네. 

생각보다 커다란 수박을 보며 함께 먹고 갈 거냐 물었고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이미 두 번이나 나의 제안을 거절한 전적이 있는 여자였고. 이번엔 그렇게 큰 기대를 걸진 않았다. 그저 나에게 수박을 가져다 주러 왔다는 것만도 좋았으니까. 물론 다 이루지 못 하고 온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던진 말도 결코 아니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고, 지금도 채워지지 않은 나를 채우기 위해 던진 말이 아니란 말이다. 그냥 순수하게 던진 말이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랬다. 내 앞에 잔뜩 부끄러워하고 있는 이 여자가 너무 예쁘고 맑아 보여서. 차마 그런 생각도 하지 못 했다. 나를 위해 제 수박의 반이나 들고 온 여자인데. 그저 같이 마주 않아 수박이라도 먹었으면. 그랬다. 

그래서 그 여자가 아니라고 했을 때.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조금 아쉬웠다. 이제 문을 닫고 나면 이 얼굴을 또 못 보니까.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제 임무를 다 수행했다, 들어가라며 인사를 하는데도 난 버텼다. 내가 왜 먼저 들어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은데. 먼저 들어가라며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고서야 그 여자는 제 집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며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난 자리에 서서 그 문을 보았다. 몇 분을 그러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러지 싶었다. 저 여자가 뭐라고, 저 얼굴이 뭐라고 자꾸 보고 싶지. 여자친구가 없는 사이에 내가 너무 목이 말랐나. 이깟 수박이 뭐라고. 나를 찾아온 것에 왜 기분이 좋았냐고. 살짝 솔직해지자면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온 것보다 좋았다. 근데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야. 

뭔지 모를 감정을 정의 내리지 못 한 채 그 여자가 준 수박을 받아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넌 진짜 뭘까. 

 

 

하지만 오늘 그녀는 조금 예뻤다. 

 

 

 

 

 

 

 

 

 

그날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큰아버지께서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을 해오셨고 답지 않게 묵직한 분위기를 내내 가지고 있었다.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그런 기분. 뵌 지 좀 오래되었다. 벌써 일 년이 되어가는 건가. 달력을 보니 그쯤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연락을 해오셨을 때 그 기분은. 반가움과 약간의 두려움. 분명 좋은 소식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을 하신 것도 아닐 거라 생각했고. 저녁은 선약이 있으시다며 점심 약속을 잡으셨다. 난 저녁이 더 좋은데. 점심은 시간을 더 오래 끌기가 애매하단 말이다. 곧 회사에 들어가셔야 할 테고. 하지만 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알았다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와 식사를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일 년보다 더 되었지. 그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했다. 분명 난 좋았지만. 정확히 하면 큰아버지께서 입을 열기 전까지라고 고쳐 말하겠다. 거의 접시가 비워질 즘,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오셨다. 뭐, 별다를 것이 있냐고 늘과 같다고 대답했다.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큰아버지의 입에선 내 신경을 조금은 건드는 말이 나오고 만다. 아직도 그러고 사냐고. 그러고 사는 게 대체 뭘까요. 난 내 삶에 대해 잘못되었다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전에도, 내가 큰아버지의 댁에서 나올 때도, 석호가 제 어머니와 집을 나갈 때도. 내가 잘못한 적은 없었다. 그저 상황이,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 거라고. 

더 이상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큰아버지도 마찬가지신 것 같았다. 하던 식사를 멈추고 서로를 빤히 눈에 담았다. 못 본 사이에 주름이 많이 늘으신 것 같았다. 우리 아빠도, 아직까지 살아계셨으면 지금쯤 저렇게 주름이 파이셨을까. 마지막 기억으론 아직도 탱탱하고 멋있으셨는데. 큰아버지와 마주하고 있으면 꼭 아빠가 생각나서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살아 계신 것 같고, 나만 사랑해줄 것 같고. 하지만 우리 아빠와 큰아버진 너무도 달랐다. 

 

 


"많이 야위셨어요. 끼니 꼭 챙겨드세요. 다음에, 다음에 또 식사 같이 해요." 

 

 


결국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더 할 말이 있으셨을 텐데 무엇 때문인지 더 꺼내지 않으셨다. 단지 내 상태를 확인하러 부르진 않으셨을 텐데. 하지만 내 선에선 큰아버지와 오랜만에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 상관없었다. 끝이 매끄럽지 못 했다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데려다주신다는 말도 거절하고 고개만 숙였다.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꼭 다음에 또 연락을 해달라고.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했다. 

 

 


"태형아." 

"네." 

 

 


기사의 도움을 받아 차에 타시려다 말고 날 문득 부르셨다. 그리곤 또 다른 말이 없으셨다. 그냥 아니라고. 다음에 또 보자고. 

그러게, 대들지 말고 가만히 있을걸.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기분이 더 망가졌는지도 모른다. 큰아버지와의 만남 자체만으로는 좋았는데 괜히 내가 망쳐버린 건가 싶어서. 한참 동안 집으로 향하지 못 하고 거리를 돌고 돌았더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한 곳을 잡지 못 하고 돌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제야 발을 돌렸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고 처음엔 한적했던 버스가 퇴근시간과 맞물려 점점 터지고 있었다. 잔뜩 복잡한 머리에 복잡한 버스 상황까지 들어오니 곧 터질 것 같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꼭 감았다. 

눈을 뜨고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감은 눈앞 깜깜한 스크린엔 흐릿한 장면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하루 만에 부모님을 잃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 한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리에 앉아있던 날 말없이 안아주셨을 때, 그 큰 집을 혼자 지키고 있는 날 당신의 집으로 데려가 주셨을 때, 내게 소리만 지르던 석호의 어머니 앞에서 여전히 입을 다물고 계셨을 때, 석호가 저지른 일을 뒤집어쓴 나를 위해 학부모란 이유로 학교에 불려오셨을 때, 비가 무척이나 내리던 날 트렁크 하나에 짐을 눌러 담고 집을 나간다고 하자 역시 입을 다물고 계셨을 때. 그분은 항상 말이 없으셨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그건 날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그런 거라고. 그저 동생의 아들이 불쌍해서 의무감에 데리고 있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끝내 나오지 않길 바랬지만 결국 떠오른 마지막 장면은, 그런 내 생각에 확인 도장을 꾸욱 찍어주고 있었다. 그날, 그날은 꽤나 아팠다. 

얼마쯤 생각에 잠겨있었을까, 덜컹이는 버스 덕분에 뻑뻑한 눈이 한번 떠졌고,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필 왜, 하필 이때 니가 왜 거기에 있어.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모른 척할 거야. 모른 척하고 싶었다. 지금 심정으론 널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이미 덮치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로도 충분히 복잡했으니까. 

다시 꽉 누른 채 머리를 비우려 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그러다 옆자리가 비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금 눈이 떠졌다. 분명 나와 함께 내리겠지만 여자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마음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비우려 해도 자꾸만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그 얼굴은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닿아있었다. 설마 내 옆에 서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 내가 놀라기도 전에 먼저 놀라며 몸을 멈춰버렸다. 뭐 잘못한 거라도 들킨 사람처럼. 늘 그랬듯 나와 마주친 눈을 피해버려야 하는데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처음으로 몇 초간 나와 맞춰주고 있었다. 그때 마구 흔들리는 동공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좀 오래 맞추고 있는가 싶더니, 웬일로 그런다고 했어. 곧 다시 시선을 떨궈버렸다. 양볼을 또 붉게 익히면서. 

언제부터 탔는지 모르겠지만, 전에 보았던 곳이 회사 근처라면 버스에 오른지 꽤 되었을 것이다. 다리 많이 아플 텐데. 내 옆자리를 비워두고 여자는 앉지 않고 망설였다. 왜, 왜 딱 버티고 서있는데. 앉으라는 내 말에도 뭔가 불안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나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못 한데. 평소라면 손목을 잡아끌어 억지로라도 앉혔을 것이다. 내 옆에 앉기가 부끄럽고 떨려서 그러는구나, 하면서. 하지만 왜 그랬는지 그런 생각이 들지 못 했다. 그건 아까부터 반복되었던 어린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현재의 기억 때문일까. 

 

 


"내 옆에 앉기 싫구나." 

 

 


그런 결론이 나왔다. 자꾸만 날 괴물이라 부르던 석호의 어머니, 그러니까 전 큰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려댔고. 더 이상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너도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싫은 걸까, 더러운 걸까, 무서운 걸까. 

어쭙잖게 변명을 하려는 것이 내 기분을 더 뭉게놓았다. 그저 큰아버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말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옆에 앉아주지. 

버티지 못 하고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그 여자를 그 버스에 버려두고. 못된 짓이란 거 알고 있는데. 잘 알지도 못 하고 내 멋대로 해석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냥 오늘 내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그래서. 너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 더 화내고 싶지 않았거든. 이미 며칠 걸을 양을 몰아서 걸었지만 난 다시 다리를 움직이며 괴롭혔다. 찬바람을 쐬면 조금 나아질까. 뭔가 조금 잊혀질까. 바람에 날아갈까. 

 

 

짙어지는 니 생각마저 날아갈까. 

 

 

 

 

 

 

 

 

 

여자친구가 여행에서 돌아왔고 그 아이가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우린 깊어지고 있었다. 전에 계획했던 대로 하루 종일 붙어 있기도 했고, 어딜 가든 함께. 너무 좋았다. 그 아이가 떠나있는 동안 허전했던 마음을 넘치도록 채우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뻤다. 누구도 주고 싶지 않아. 나만 간직하고 싶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예뻤다. 아무것도 아닌, 날 항상 피하기만 하던 그 옆집 여자가 뭐라고.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나 지금 내 옆에 이 아이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너무 좋으니까. 그래서 그날은,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학원에 가야 한다기에 아쉽지만 집에서 끝날 시간만을 세고 있었다. 곧 여자친구가 학원에서 나올 시간이 되어갔고 마중을 나가기 위해 집을 나서고 있었다. 꽤 오랜만이었다. 그날 버스에서 마주친 뒤로는 한 번도 보질 못 했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끝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후에 쓸 카드로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 했다. 전날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여지라도 남기기 위해 잔뜩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이번엔 깔끔하게 지나쳐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난 지금 너보다 훨씬 예쁘고 귀엽고, 게다가 날 좋아해 주는 내 소중한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까. 

정말 아무 표정도 없이, 쿨하게 넘어가 주려 했더니만. 그 여자의 입에선 '남자'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순간 내 다짐은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나도 모르게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이 여자가 다른 남자랑 만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 앞에 멈춰 서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가며 잔뜩 구겨져 있는 미간을 누른 채 그 여자를 지나쳤다. 그래도 내 다짐의 반은 성공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은 찌그러졌지만 잘 지나쳤다고. 대체 어떤 남자를 말하는 거냐며 따져 묻지 않았다.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니까.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어떻게 알고 날 불러 세우는 것이다. 분명 난 간심히 참고 있다고 했는데. 그 여자의 목소리에 누르고 있던 어떤 감정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 여자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낚아채 대체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귀를 가져다 댔다. 

 

 


[야, 듣고 있냐? 토요일 2시라고. 알겠지? 남자 나온다고 안 나오지 말고! 우리가 너네 회사 근처로 갈게. 거기가 제일 편하지, 너? 김아미, 듣고 있어? 야!] 

 

 


더 듣고 싶어도 내 가슴팍을 밀어내는 여자 때문에 그것도 못 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더 들었다간 화만 더욱 날 것 같았고. 너 지금 소개팅하려는 거야? 내가 뭐라고 화를 내냐 싶겠지만. 내가 들이댈 때는 그렇게 철벽을 치면서 밀어내더니, 소개팅 따위나 받고. 화가 날만도 하지 않나. 

열이 오르는 것은 난데 되려 자신이 얼굴에 열을 내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이것 봐. 나랑 잠깐 가까이 붙어있었다고 몸이 그렇게 반응을 하는데. 기분이 나빠 표정이 펴지질 않았다. 그래도 그날, 아무 죄도 없는 여자에게 멋대로 해석해 화풀이를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는데 말이야. 그런 생각은 죄다 구겨버렸다. 나 지금 몹시 기분 나빠 너 때문에. 내가 만지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난 굳이 그 여자의 손을 끌어와 직접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참 꽉도 쥐었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벌벌 떨며 빼내려 하는 것이 더욱 화가 나서. 

내 앞에서 씩씩대는 여자에게 뭐라고 한마디 더 참견하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찔러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맞아, 나 여자친구 데리러 가야 하는데.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발을 움직였다. 여자친구에 대한 생각이 나자 내가 지금 왜 그랬지 싶기도 했다. 저 여자가 다른 남자를 소개받던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머리를 잔뜩 헝클였다. 내가 왜 그랬지. 순간 왜 욱했던 거지. 여자친구에게 향하면서도 그 여자는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못할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통제가 되질 않았다. 

 

 

난 너한테 뭘 바라고 있는 걸까. 

 

 

 

 

 

 

 

 

 

일부러 데이트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이 맞다. 혹시나 마주칠까 봐. 아니 마주치길 바랐다. 그러다 만나면 안 되는 사람까지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랫동안 보질 못 했으니 설마 오늘이라고 만날까 싶었다. 정확한 약속 장소까지는 듣지 못 했으니 그곳을 찾아갈 수는 없고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쩌다 마주치지 않을까 한 장소를 정하지 못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너와 함께 걷는 길이 좋다며 여자친구를 끌고 다니는 것이 얌심에 찔리기는 했다. 미안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날 보며 방글방글 웃어주는 여자친구를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지만 난 꼭 그 여자를 찾고 싶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사실 마주하게 된다면 그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두지는 않았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 오늘은 꼭 그곳으로 가야지. 그 여자를 만나야지.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같은 장소를 몇 번이고 둘러보아도 어디에도 그 여자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오빠, 우리 오늘 뭐 할 거야? 계속 이렇게 걷기만 할 거야?"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간식을 바라는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렸다. 나는 오빠라는 말이 그렇게 좋더라. 그 아이를 보고 그저 한번 진하게 웃어주었다. 이제 포기하고 그만 가야 하는 건가. 싶을 때, 눈앞에 핸드폰을 붙잡고 급하게 약속 장소를 찾고 있는 듯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찾았다. 순간 너무 기쁜 마음에 얼른 달려가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어찌나 꾹꾹 눌렀는지. 옆에 여자친구가 내 허리를 꽉 누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럴뻔했다. 

아직 안 갔구나. 이제 가려는 거겠지. 마주친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 놓지 않았으니 그 여자와 마주쳤어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옆엔 귀여운 여자친구까지 덜렁덜렁 달고 있었고. 그래, 내가 뭐 어떻게 할 거야. 만나지 말라고 말릴 거야, 아님 저 여자를 데리고 도망쳐버릴 거야. 어찌 되었든, 첫 목표였던 여자와 마주치는 것은 성공했으니 끝났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다고 옆에서 찡찡거리는 여자친구도 있었고.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 여자를 지나쳐버렸다. 

한발, 두발. 골목을 꺾어 뒤를 돌아도 그 여자가 보이지 않을 때쯤, 이제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걸음이 멈추었다. 

 

 


"왜?" 

"미안. 오빠가 급한 일이 생겨서. 진짜, 진짜 급한 일인데, 까먹고 있었네. 우리 애기 배고픈데 어쩌지? 오빠가 미안해. 이따 오빠가 집에 맛있는 거 사들고 갈 테니까, 먼저 가있어. 알겠지?" 

"어, 어? 오빠!" 

 

 


그새 어디 멀리 가진 않았겠지. 항상 뽀송뽀송하던 이마엔 땀도 조금 맺혀있던데. 그렇게 급했던 건가. 뭐 얼마나 중요한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그렇게 서둘러. 얼른 뛰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자친구에게 한참 미안하고, 못할 짓이라는 거 잘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정말 나쁜 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가서 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내가 한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여자친구가 화를 내고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더 늦기 전에 잡아야 한다고,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쳤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난 그 남자를 만나러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던 것이다. 나 말고 다른 남자 만나지 말라고. 

한참을 헤매다 지친 것인지 아님 약속 시간이 조금 늦춰진 것인지 방금 전과 다르게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다. 아직 안 갔구나. 

 

 


"김아미." 

 

 


얼마 만에 다시 불러보는 이름이지. 꽤나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불러주질 못 했네. 앞으론 자주 불러줘야지. 내 목소리에 다행히도 가는 길을 멈춰주었다. 

안 가면 안 되냐고. 겨우 속에 있던 말을 뱉어냈는데, 그녀는 날 돌아봐주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 좀 봐주지. 난 지금 여자친구도 버려두고 널 위해 뛰어왔는데. 사람 욕심이란 건 참 끝이 없는 것이다. 처음엔 그저 마주치기만 해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러다 그녀와 정말 만났고 이렇게 잡으러 왔다. 내 부름에 발걸음을 멈춰주었는데, 난 지금 그녀가 날 돌아봐주길 바라고 있었다. 처음보다 많이 넘친 마음. 

안 가겠다고.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그것도 싫으면 그냥 날 보고 고개라도 한번 끄덕여주지. 욕심은 결국 끝까지 가고 마는 것이다. 만족을 하지 못 하고. 그저 그런 그녀가 야속했다. 여자친구까지 제쳐두고 달려온 것도 무안하게 한번 돌아주지도 않고. 그래, 조금 봐줘서 가겠다고 해도 좋아. 나 좀 봐달라고. 그래도 여전히 돌아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몸이 축- 떨어졌다. 내가 잘못 왔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 여자는 내가 잡을 수 없는 여자구나. 이미 떠나갔구나. 

 

 


"아, 내가 바보 같았다. 얼른 가요." 

 

 


바보. 병신. 끝내 놓쳐버린 것이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저 버리기 아까운 그런 카드로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를 한다 해도 이미 잡을 수 없는 걸.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뒤를 돌았다. 어쩌면 날 보며 붉어지는 볼 때문에, 숙여지는 고개 때문에 너무 자신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게 관심이 있을 거라고. 언제든 내가 내민 손을 잡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꽉 잡았어야 했는데.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그곳에서 멀어졌다. 

 

 

이런 거 처음인데. 내가 잡고 싶은 사람, 그게 너인데. 결국 놓쳐버린 걸까. 

 

 

 

 

 

 

 

 

 

 

 

 

 

 

 


 

암호닉

암호닉은 재업이 끝난 뒤 다시 받겠습니다.

 

통통 / 눈부신 / 태태 / 인사이드아웃 / 령아 / 초딩입맛 / 슙디 / 태형오빠 / 군주님 / 민트 / 태태이즈뭔들 / 이현☆ / 똥맛카레 / #RealV / 소녀 / 침을태태 / 김석진 / 거창왕자태태 / 개학전날밤 / 코코팜 / 슙숨 / 공감 / 태태야 / 슈탕 / 두부 / 딸기빙수 / 요정 / 카라멜 / 태형이안에♡ / 미니언 / 피카피카 / 침침 / 알라 / SAY / 이부 / 깨알 / 다람이덕 / 민피디 / 김치만두 / 태정태세 / 갈매빛 / 쌀떡 / 현지짱짱 / D.시걸O.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비회원139.64
세에상에.... 어떻게... 태형이가... 사람 마음 가지고 저렇게!!! 읽다가 화나서 하늘로 갈 뻔 했네요 ^ㅁ^... 흐규 슬퍼라...ㅠ
7년 전
비회원182.136
오랜만이에요! 역시..언제ㄴ읽어도 이거는 제 명작..ㅠㅠㅠㅠ
7년 전
독자1
태형이 시점으로 읽으니까 또 새로운 기분이네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가벼웠던 마음이 무겁고 짙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여ㅕ...
7년 전
비회원144.36
어... 태형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도 이젠 진심인것 같은데... 아니면 우리 여주 어쩌죠ㅜㅜㅜ
7년 전
비회원128.200
태형아..? 작가님 오늘 작가님 작품 처음보고 1화부터 지금까지 쭉 다 봤어요. 와!! 밤새서 다 봤어요
태형이 시점 전까지만해도 마음 아리고 많이 절절했는데..
여주에 대한 태형이 마음이 진짜인 거겠죠? 무언가 충격젹인 기분..

7년 전
독자2
이 새벽에 정주행했습니다...!태형이 시점으로 이 글을 보니까 또 다른 느낌이네여!진짜 너무 재미ㅛ어여 작가님ㅠㅠㅠ
7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분류
  1 / 3   키보드
필명날짜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 ss2_0715 1억05.01 21:30
온앤오프 [온앤오프/김효진] 푸르지 않은 청춘 012 퓨후05.05 00:01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1617 1억 12.23 02:39
이준혁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21 1억 12.20 02:18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1428 1억 12.19 01:40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1316 1억 12.18 01:12
안녕하신가!!!!!!!!!!!!25 1억 12.17 18:47
엔시티 [정재현/나재민] 호구를 자처 12 네오시리 09.15 11:15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1232 1억 09.03 23:07
이준혁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19 1억 08.21 02:13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1046 1억 08.19 01:43
제로베이스원 [제로베이스원] 제베원 홍일점 캐해 B7 콕콕 08.17 20:34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924 1억 08.17 03:29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818 1억 08.14 23:37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712 1억 08.09 01:45
제로베이스원 [제로베이스원] 제베원 홍일점 캐해 A8 콕콕 08.06 20:49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622 1억 08.04 00:33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520 1억 07.30 22:27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423 1억 07.28 22:03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320 1억 07.26 23:30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217 1억 07.24 01:17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_0122 1억 07.22 21:53
이준혁 [이준혁] 나는 마흔살 아저씨랑 연애한다_end12 1억 07.22 02:32
이준혁 [이준혁] 나는 마흔살 아저씨랑 연애한다_1419 1억 07.15 22:55
이준혁 [이준혁] 나는 마흔살 아저씨랑 연애한다_1312 1억 07.11 21:59
이준혁 [이준혁] 나는 마흔살 아저씨랑 연애한다_1219 1억 07.05 23:09
이준혁 [이준혁] 나는 마흔살 아저씨랑 연애한다_1112 1억 07.04 01:20
이준혁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15 1억 07.01 01:42
이준혁 [이준혁] 나는 마흔살 아저씨랑 연애한다_0919 1억 06.28 22:52
전체 인기글 l 안내
5/13 2:30 ~ 5/13 2:32 기준
1 ~ 10위
11 ~ 20위
1 ~ 10위
11 ~ 20위
단편/조각 인기글 l 안내
1/1 8:58 ~ 1/1 9:00 기준
1 ~ 1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