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이 지나갔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게. 하지만 나를 향한 수근거림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식당을 가도, 화장실을 가도 느껴지는 시선에 힘들어질 때면 백현선배가 토닥여주었다. 몇일 저러다 말거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오늘 회의 시작하도록 하죠." 오늘의 회의 내용은 기획부,영업부, 마케팅부 그리고 한중합작팀이 이번 중국에 내놓을 상품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상품으로 중국 시장 공략에 성공해야 한다며 회사에서는 떠들썩 했고 우리 팀 또한 야근이 잦았다.
"막내야 이거 기획부에 전해줄래?" "네" "아 그리고 이건 마케팅부, 이 자료 섞이면 큰일난다. 얼른 처리 해야 되거든" "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늦으면 안돼. 바로 갖다 줘. 늦으면 일 꼬인다~" "네!" 부 팀장님이 주신 서류 두 뭉치를 품에 안고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여사원들이 나온다. 그리고는 나를 보더니 조소를 띄운다. 뭐, 항상 있는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했다. 익숙해질 때도 됬는데 아직은 익숙해 지지 않았나 보다 가슴이 저릿한걸 보면.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탑승하자 내 뒤를 따라 탑승하는 여사원들. 기획부가 있는 사무실 층을 누르고 뒤로 물러섰지만 다른 사원들은 층수를 누르지 않는다. 기획부인가 보다. 띵동-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내리려 하자 뒤에서 우르르 나오는 여사원들, 어깨에 치여 그만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어머 미안해요." "그러길래 누가 앞에서 느릿하게 있으랬나." 그저 형식적으로만 들리는 사과와 나를 탓하는 말만 하고는 가버리는 여사원들. 여사원들을 원망할 틈도 없이 바닥에 널부러진 서류들을 쳐다보았다. 큰일났다. 이 자료 섞이면 안된다고 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얼른 자료를 주워 서류봉지에 담았다. 섞이면 안된다고 했는데 이미 자료는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내가 모은 자료가 아니었기에 자료의 내용도 정확히 모르고 전해줘야하는 시간도 점점 다가온다. 급한 마음에 대충 주워 담아 눈으로 훑어 비슷한 자료끼리 끼어 맞추고는 사무실로 들어가 기획부 팀장에게 전달해 주었다. 시간 안에 갖다 주긴 했지만 이리 늦게 주면 어떡하냐는 기획부 팀장의 한소리를 듣고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힘이 쫙 풀리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버튼을 누르려 천천히 단추에 손을 뻗자 사무실에서 들리는 한마디. '이거 뭐야 자료 바뀌었잖아!' 그 소리에 깜짝 놀라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자 기획부 팀장이 자료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이미 자료를 보내 일을 진행해야 할 시간이 지나 더 화가 난 듯 했다.
"자료 ㄱ ..." "당신 지금 뭐하자는거야!" "...." "일을 똑바로 해야할거 아니야! 자료 바뀌었잖아! 당신이 책임질 거야?" "...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될 일이야? 어!? 일이 꼬여버렸잖아. 지금 마케팅부도 일 시작 못하고 있을거 아니야! 마감시간 지나면 어쩌려고 그래!" "...." 기획부 팀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가끔 그의 침이 튀었고 화를 이기지 못해 종이를 내게 던졌다.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지 마. 울지 마. 기획부 팀장이 점점 열을 올려 내게 고함을 지를때 갑자기 내 앞이 깜깜해졌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보이는건 등. "자료 다시 정리 해왔습니다. 지금 자료 보내면 늦지 않을거예요." "...뭐야 당신은." "한중 합작 B팀 도경수입니다." "자료 이거 맞나?" "한시라도 빨리 보내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마감시간도 다가오는데. 그럼 이만."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경수선배는 내 손을 잡아채 기획부 사무실에서 나왔다. 일이 풀렸다는 안도감이 밀려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을때 나도 모르게 주저앉을 것 같아 경수선배와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내 어깨를 감싸 토닥여 주는 경수 선배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울컥해 급하게 눈가를 비빈다. "이제 해결 됬으니까 괜찮을거야." "... 감사합니다." "뭘, 어디 봐봐" "..네?"
자존심이 센 내가, 울었다는걸 들키키 싫어하는 것을 알아채 조심스레 내 턱을 들어올려 눈가를 만져보는 경수선배다. 눈가가 빨개진듯 엄지손으로 살살 쓰다듬어준다. 살짝 눈을 떠보니 눈앞에 바로 있는 경수선배 때문에 놀라서 경수선배의 손목을 덥썩 잡아버린다.
"선, 선배" "응?" "... 아, 저 그게 " 아차, 하고는 급하게 떨어지며 머리를 긁적인다. 귀가 살짝 빨개져 '미, 미안' 하고 중얼거리는 선배. 그 모습에 웃으며 빨개진 눈가를 톡톡 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 팀장님"
그러자 열린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향한 팀장님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