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W.템즈
지쳤냐고 물어봤을 때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피곤해? 그렇게 다정하게 물어봐도 아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정말 잠을 자는건지, 아니면 찬열의 물음에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자는 척 하는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조금 화가 날 것 같아서 차를 도로변에 세우고 백현이 앉아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현은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었다. 솔직히 백현을 데리러 오기 전까지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학교에서 뭐해, 아프잖아. 하지만 백현의 얼굴을 본 순간 찬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동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박찬열은 변백현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 예뻐하기만해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왜 화를 내. 찬열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백현아, 듣고 있지?"
".........."
"듣고 있는거 다 아니까, 형이 말 할게."
".........."
"형 걱정 시키지 좀 마. 늦으면 전화하고. 착하니까 백현이 지킬 수 있지?"
백현은 아무 미동도 없이 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찬열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동을 걸고 집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얼굴에 잘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편이라 찬열은 그저 백현의 생각을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지금 백현은 조금 심통이 난 상태인것 같았다. 어떻게 풀어주지, 애가 착해도 한번 토라지면 오래가는데. 찬열은 그렇게 생각하며 빨간불의 신호등을 그냥 지나쳤다. 감시용카메라가 이쪽을 보고 불을 번쩍한 것 같았지만 상관 없었다. 찬열은 미친듯이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새벽의 밤거리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가 있었다. 찬열은 얼른 샤워를 하고 나른한 몸을 침대에 눕혀 자고 싶었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품에 안겨서 새된 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아이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백현아 일어나야지, 찬열의 부드러운 음성에도 백현은 일어나질 않았다. 찬열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그냥 도어락을 풀고 백현을 침대에 눕혔다. 백현은 찬열이 한 팔로도 들 수 있을만큼 가벼웠다. 물론 찬열의 팔 힘이 다른 성인남성들보다 센 점도 있었지만 백현은 제 키의 평균 몸무게보다 거의 10kg이 적게 나갔다. 찬열은 입이 짧은 백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여러가지 음식을 차려놓곤 했지만 제 양에서 조금이라도 더 먹는 날에는 그대로 게워내곤 해서 속상한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찬열은 백현을 침대에 눕히고 교복을 벗겨냈다. 백현이 조금 칭얼거리긴 했지만 교복이 불편했기에 시간이 조금 지나자 찬열이 벗겨주는데로 얌전히 있었다. 찬열은 와이셔츠를 세탁물 바구니에 넣고 자켓과 넥타이를 드레스룸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백현의 가슴팍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백현은 예술고등학교를 다녔다. 피아노과, 백현은 말랑말랑하고 긴, 피아노를 치기에 아주 적합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찬열은 가끔 백현의 피아노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찬열은 백현의 방에 불을 끄곤 제 방으로 들어와 수트자켓을 벗었다. 그리고 와이셔츠와 수트팬츠를 입은 상태에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침대 옆 콘솔에는 제가 읽다가 덮어놓은 소설책이 보였다. 벌써 네번을 넘게 읽은 소설책은 읽을때마다 감회가 새로워 손에서 떼지 않고 다시 읽는 것이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소설책을 들어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제 목숨을 담보로 악당과 거래를 하는 장면이었다. 찬열은 뒷 페이지로 종이를 넘겼다. 악당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주인공은 악당이 내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한참을 읽던 중 백현의 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찬열은 깜짝 놀라 얼른 백현의 방 문을 열었다. 백현은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침대 밑에서 떨어져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백현아 뭐해."
"...씻을래..씻고 잘래..찝찝해.."
"씻고 싶으면 형 불러."
"..혼자 할 수 있어."
"고집은, 그럼 욕실 안까지만 데려다 줄게, 안에서 넘어지지마."
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열에게 팔을 뻗었다. 찬열은 백현을 안아들고 욕실로 들어가 변기커버를 내리고 백현을 그 위에 앉혀주었다. 백현은 저혈압이라 일어날때마다 이 소란을 피운다. 찬열은 한숨을 쉬며 백현의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씻겨줘? 백현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혼자 할게. 좀 씻겨달라고 해도 되는데, 백현은 언제부턴가 찬열의 도움을 받는것을 피하는 눈치였다. 찬열은 조금 섭섭했지만 욕실 문을 닫고 거실에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물 소리가 들렸고 20분 가량 지나자 조그맣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백현이 나왔다. 백현은 휘청거리는 걸음거리로 제 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찬열은 읽던 책을 거실 테이블에 내려다 놓고 백현의 방에 들어갔다. 백현은 젖은 머리에서 물기를 뚝뚝 흘리며 침대에 고개를 쳐박고 있었다.
"백현아 머리 말리고 자야지."
"귀찮아.."
"머리 안 말리면 감기걸려, 감기 걸리면 또 학교 못가는데?"
".........."
찬열의 말에 백현은 침대에 앉아 어깨에 수건을 둘렀다. 저도 머리를 말리지 않고 자는건 또 싫은지 다소곳하게 찬열의 앞에 와서 앉았다. 찬열은 드라이어를 키고는 너무 뜨겁지 않은지 확인한 다음 백현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물기에 젖어 검은 머리칼이 푸른 빛을 띄었다. 그 때문인지 원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얘보여서 찬열은 조금 안쓰러웠다. 백현은 축구도, 야구도, 농구도 할 수가 없었다. 피아노를 시작한 이유도 다른 남학생들처럼 스포츠로 스트레스를 풀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백현은 저혈압과 천식을 앓았다. 찬열은 백현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백현의 부모님에게 몇 번이나 당부의 말씀을 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약을 먹여줘야돼요, 네블라이저도 꼭꼭 가지고 다녀야 하고. 백현의 부모님은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찬열에게 중요한 사항들을 말씀하셨다. 찬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현이는 제가 잘 돌볼게요. 신뢰가는 찬열의 표정과 행동, 말투에 백현의 부모님은 비행기를 잘 타지 못하는 백현은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나셨다. 찬열이 백현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가 눈에 보여서인지 백현의 부모님은 쉽게 동거를 허락하셨다.
"백현아, 몸에 힘이 없어? 자고 싶어?"
"....응.."
"그럼 오늘 형이랑 잘까?"
"아니..싫어 나 혼자 잘래."
단호한 백현의 말에 찬열은 조금 섭섭해졌다. 찬열의 대답을 하면서 제 시선을 피하는 백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오늘따라 조금 땀을 흘리는것 같기도 하고, 호흡이 거친것 같기도 하고. 드라이어가 뜨거워서 그런가. 찬열은 백현의 턱을 잡고 제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백현은 놀라 눈을 돌렸지만 찬열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아프지, 백현이 지금 아프지. 백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찬열은 백현의 어깨에 둘러져있는 수건을 걷어내고 백현을 침대에 눕혔다. 백현은 겁을 먹은 얼굴로 찬열의 이름을 불렀지만 찬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찬열은 서랍에서 약과 네블라이저를 꺼냈다. 백현은 네블라이저를 연결하는 찬열의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것을 눈치챘다. 찬열은 지금 화를 꾹꾹 눌러참고 있었다.
"형..."
".........."
"찬열이형,"
"말 하지마. 형 지금 좀 화 났어 백현아."
찬열은 네블라이저를 작동시키고 물을 가지러 주방으로 나가버렸고 백현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찬열은 문 앞에서 그런 백현을 보며 마른 세수를 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던가, 혼자 저러고 있으면 누가 봐주는데. 찬열은 백현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백현의 눈을 마주봤다. 아까까지만해도 괜찮았는데 찬열을 보자마자 백현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찬열은 속으로 분을 삭히며 백현의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다가 다시 엇나가기 시작했다. 찬열은 얼른 백현의 네블라이저 작동을 멈췄다. 바로 외부공기를 마시면 쇼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작동만 멈췄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네블라이저를 정리해서 넣고는 찬열의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현을 품에 안았다.
"뭘 잘했다고 울어."
"......잘못했어..."
"뭘 잘못했어."
".........."
"말하지마, 입 다물고 제대로 숨쉬어."
백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찬열은 백현이 울자 한숨을 쉬었다. 백현은 찬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끅끅 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너무 심했나 생각이 들어 찬열은 백현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고 조금 음성을 부드럽게 낮췄다. 백현아, 형 봐봐. 울지마 우니까 혈압 점점 떨어지잖아. 찬열은 백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현은 잘못했어, 라는 말만 반복하며 찬열의 품을 파고 들었다.
"백현아, 형이 미안해. 울지마 응? 울지말자 우리 백현이."
"....형 미안해."
".........."
"미안해..."
잘못했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백현에게 찬열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잘 넘어갔는데 오늘따라 왜 아이에게 화 아닌 화를 냈는지 찬열 본인조차 궁금했다. 찬열은 백현의 입에 알약을 넣어주고는 물을 쭉 들이키게 했다. 백현이 기침을 해서 물이 수월하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약을 먹으니 백현의 눈이 점점 감기는게 보였다. 찬열은 백현을 침대에 눕히고 완전히 잠에 빠질때까지 손을 잡아주었다. 찬열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백현의 손에서 힘이 점점 풀리고 백현은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눈물을 닦느라 짓무른 아이의 연한 피부가 찬열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괜히 그냥 넘어가면 될 것때문에 아이를 울게 만들었다. 찬열은 한숨을 쉬며 제 방으로 들어가 책을 폈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찬열은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스탠드 불을 껐다. 하지만 여전히 눈 앞에 아른거리는건 백현의 우는 모습이었다. 속상해진 찬열은 베개를 한 팔에 안고 잠을 청했다.
열병 리메이크
열병 본편은 제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구요
이건 홈으로 옮기기 위해서 다시 쓰는 열병입니다ㅠㅠ
열병이 워낙 글체랑 이런게 초딩틱해서 여전히 초딩틱하지만
조금 수정하고 고쳐봤어요ㅋㅋㅋㅋㅋ
아마 열병 리메이크는 10편 정도 될듯!!
원래 열병에서 너무 급전개로 훅훅 지나갔던 부분들을 다시한번
다 다룰 예정이에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마블은 화요일 저녁에 올라와요ㅋㅋㅋ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