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와 같이 이승현과 나와 여자는 어울리지 않는 만남을 가졌다. 시간이 갈 수록 녀석의 연애사를 들여다 보는 일에 흥미가 사라져갔다.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고 그들의 연애가 길어지자 내쪽에서도 지치고 말았다. 이제 관찰은 끝났다. 3년이였다. 별 말 없이 녀석이 돌아오길 기다린 것은. 그것이 면죄부가 될거라는 생각은 않는다. 바라지도 않는 종류였다. 하지만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인내심의 부족이였다. 우리 셋이 함께라서, 너무 좋다는 남의 속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던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리며, 이승현과 나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도중에 녀석이 뭐라 떠들었는지는, 잘 기억 나질 않는다. 그저 정리가 되지 않는 머릿속을 헤집으며,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애타게 찾아 헤맸다. 대체 무엇이였을까. 내가 바라던 결말은.
12층에 도착하고, 도어락을 열어 집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사물이 컴컴했다. 오로지 큰 창문을 통해 비춰지는 저녁 노을 빛만이 환하게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을 뿐이였다. 이승현은 부엌으로 가 물을 벌컥 마시더니,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옆으로 왔다. 노을이 되게 예쁘다. 난 말 없이 녀석의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승현아.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내 미세한 떨림을 느낀 이승현은 나를 바라보더니 금세 눈을 감았다. 나는 물에 젖은 그 입술에 천천히 얼굴을 마주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진동에, 주먹을 꾹 쥐었다. 미끄러지듯이 쇼파로 누웠다. 달뜬 녀석의 옷을 벗기고 입술을 마주했다.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로 어지러워져, 이성과 본능의 결계가 모호해졌다. 이승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아득한 밤이였다.
형, 소라는 좋은 여자야. 자는 줄만 알았던 이승현의 말이였다. 나는 이승현의 머릿칼을 정리해주던 손을 멈췄다. 그래, 알고 있어. 어리고 예쁘고 착하고 애교까지 많은 누가 봐도 좋은 여자였다. 난 그 맑은 웃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 나는…나쁜 놈이야. 이승현의 표정은 가늠할 수 없는 종류였다. 난 가만히 녀석의 얼굴만 들여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맞다고 긍정할 수도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이승현의 볼을 잡고 이마에 입술을 마주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내 말에 녀석은 웃으며 긍정의 뜻을 보였다. 우리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이승현은 잠에 빠진건지, 생각을 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이 더 지나서 녀석은 잠에 들기 직전인 내 손을 꽉 잡았다. 내가…소라를 버리면 안되는 거잖아. 그건 정말 더 나쁜거잖아.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내 손을 잡은 녀석의 손은 지나치게 따듯했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승현이 무엇을 바라고, 무슨 뜻으로 건넨 행동인지는 지금까지도 풀 수 없는 문제다.
헤어졌어. 씁슬한 웃음이 담긴 이승현의 말에 난 먹던 파스타를 내려놓았다. 뭐라구? 왜? 이유는 뻔히 알고 있었다. 나 때문이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흥분한 얼굴을 감추며 녀석에게 연신 되물었다. 왜 헤어졌는데? 이승현이 애꿎은 포크를 푹푹 쑤시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헤어지자네. 그런데 어차피 헤어질려고 마음 먹고 있었어. 솔직히… 영 아니였잖아. 나를 향해 웃는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떨리는 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가 아니였을까. 그 순간마저도 한참을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보았다. 시원스럽게 내려지는 답은 없었지만, 정확한 것은 이승현도 나와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였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은, 나일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드는 죄책이란 감정을 지우려 난 제법 애를 먹었다.
이승현의 말대로 여자는 좋은 사람이였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웠고 제 일에 열정이 넘쳤다. 이승현에게 더 걸맞는 옷은 내가 아니라 여자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내 행동에 영향을 주진 않았다. 이승현과 밤을 지샌 날, 잠이 들어버린 녀석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부러 녀석의 손에 쥐여진 핸드폰을 꺼냈다.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 질 수 있을까. 답지 않은 결심에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에 반비례하게 내 행동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회사에서 너네 사이 알아버렸어. 어쩔 수 없다, 소라야. 오빠가 막아줄 수 없어. 그냥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 할게. 내가…승현이를 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어. 여자는 애초부터 우리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오로지 여자의 직감이였다. 나와 따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세심히 신경 써 주고 있었다. 미안하다. 승현이한테는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 나 너무 잔인하지. 나의 물음에 여자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아니야. 괜찮아. 사실 다 알고 있었어.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걸 고민하고 있던 거였어. 오빠가 전화 안 했어도,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거야. 우습겠지만 나도 더이상은 견딜 자신이 없었거든. 연락은 하고 지네자는 우스운 요구에 난 짧게 대답을 했다. 과연 이러한 결말로 이끈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군가의 입장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답이였다.
이 회고록은 이렇게 끝이 난다. 얼만큼 덧 붙여질지도 모를 이야기고, 어떻게 바뀔지 모를 결말이다.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진짜라고 믿어도 좋다. 누군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는 진실되었으니 그 하나면 됬다. 이 글을 마치는 지금 까지도, 난 나의 행동에 일만큼의 후회를 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둘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둘은 헤어졌을거야. 결말은 같았을거야- 하는 죄에 대한 면죄부는 만들지 않기로 했다.
fin.
이렇게 허무하고 싱겁게 회고록은 막을 내립니다. 결말에 대한 왈가왈부는 하지 않을게요. 여러분이 생각하시기 나름이에요. 그럼 대사 하나 없는 지루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작품으로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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