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고의는 아니었지만
여러분들에게 호러물에 이어 찌통을 연이어 안겨드린 기분이 들어
한 번 써봤습니다.
세레노 - 소년이 소녀에게 보내는 편지
윤기의 열은 아주 천천히 떨어졌으면 좋겠다.
며칠동안에 완쾌한 건 아니지만 제법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정도는 되었으면.
알바를 마치고 온 남준이가 윤기가 자고 있는 것을 살펴본 뒤에 냉장고를 열어
오늘 식사는 얼만큼 했는지,
또 굶지는 않았는지 한 번 확인했으면.
저녁시간에 딱 맞춰온 터라 목도리와 외투를 벗어 내려놓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어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으면.
그 와중에 버릇이 나와 발로 문을 쿵 찼다가 혼자 놀라 윤기가 깼는지 살피고,
옷을 걸어놓다가 다른 쪽 옷이 그대로 밀려 떨어져 옷깃이 다 스치는 소리가 들리면 또 움찔했으면.
사실 윤기는 남준이가 현관문을 닫았을 때부터 얼핏 잠에서 깨어있었지만
모른 척 눈을 감고 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토끼야. 잠깐 일어나서 죽 먹고 자요.
저를 흔들지도 못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듣고 싶으니까.
그제야 느릿하게 눈을 뜨고 방금 잠에서 깬 척 남준이를 올려보면
윤기를 제 때에 깨웠다는 뿌듯함에 웃고 있는 얼굴이 바로 보였으면 좋겠다.
괜히 제 입꼬리도 올라갈 것 같아 멋쩍은 마음에 윤기는 늘어진 제 귀를 잡아 뺨과 입가를 가리고 일부러 투덜거렸으면.
... 죽 먹기 싫은데.
별 씹는 맛도 없는 그런걸 도대체 왜 먹어야 하는거야. 아파도 이는 튼튼해서 다 씹을 수 있는데.
또 죽이라는 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저를 조심히 일으켜서 침대 헤드에 기대게 해주고
등에 푹신한 베개를 대주는 남준이의 손길은 거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 예비용 테이블이 침대 위로 올라오고,
그 위에 남준이가 방금 데어온 희멀건 죽과 물이 놓여졌으면.
위에 당근이라도 썰어줄까요?
아냐. 그러면 더 이상할 것 같아.
감히 당근을 가지고 그런 실험을 왜 하는거냐며 윤기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으면
남준이는 그 얼굴이 나름 귀여워 작게 키득였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앞에서 턱을 괴고 얼마나 제 토끼가 죽을 잘 먹는지 확인했으면.
그 눈길에 손 끝이 떨리는 것 같아 윤기는 고개를 내리고 묵묵히 죽만 먹었으면 좋겠다.
몇 번의 손길에서 금방 입에 숟가락이 닿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면 남준이가 혀를 찼으면 좋겠다.
벌써 다 먹었다고 하는 거 아니죠?
배부른데...
보니까 점심도 잘 안 먹은 것 같던데. 나으려면 잘 먹어야 돼요. 줘봐요, 그거.
너 때문에 떨려서 못 먹는거잖아. 차마 제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한 윤기가 입술을 벙긋거리는 사이 숟가락을 남준이에게 뺏겼으면.
남준이가 남은 죽을 휘휘 저은 뒤 한 수저를 덜어내어 몇 번 불어내고
윤기의 입술에 숟가락을 대줬으면 좋겠다.
나 혼자 먹을 수 있어.
네. 그치만 내가 간호해주는 거니까 먹어요.
야.
이거 한 입 먹으면 초콜릿 한 조각.
... 치사하게 너 지금 먹을 걸로 딜하냐.
딜은 또 어디서 배워온거야. 하여튼에요. 이래야 먹을 거잖아.
... 한 상자.
다 먹으면 형이 좋아하는 그, 수제 초콜릿 가게에서 사줄게요. 한 상자로. 자, 아.
아...
결국 윤기가 입을 벌려 수저를 물면 남준이는 왜인지 제 가슴이 더 간질거리는 흐뭇함에 씩 웃었으면,
안 사주기만 하면 물어버릴거라는 윤기의 말에도 그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또 한 입을 먹여줬으면,
제가 양을 잘못 조절해 윤기의 입가에 살짝 흐르면 개의치않고 제 손가락으로 덜어 닦아내줬으면,
윤기의 귀 끝이 살짝 떨리면서 발갛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기어코 죽 한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윤기는 당당하게 손을 뻗어 초콜릿을 달라고 요구했으면.
그러면 남준이는 내일 사다주겠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면
윤기는 속았다는 듯이 귀를 세워 남준이의 팔이랑 손목을 툭툭 건들였으면 좋겠다.
남준이가 아프게는 또 때리지 않는 윤기의 행동에 웃으며 다시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었으면.
귀를 축 내리고 그 손길을 받던 윤기가
얼마안가 저녁을 준비하는 남준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애꿎은 베개를 몰래 꾹꾹 쥐었으면.
그, 여자애랑... 요즘 저녁 안 먹어? 일찍 들어오네.
아. 그게...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됐어요. 어차피 그 썸 깨졌어요.
깨져?
그러니까, 그냥 아무 사이 아니게 되었다고요. 원래 썸이란 게 그렇게 금방 깨지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남준이의 말에 윤기가 아... 하는 멍한 소리를 내면 남준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마저 제 저녁을 준비했으면 좋겠다.
누워있으라는 말에 순순히 침대에 누운 윤기가
품에 베개를 껴안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으면 좋겠다.
베개에 얼굴을 부비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면서 다시 기분좋은 배부름과 적당한 소음에 금방 잠에 빠졌으면 좋겠다.
그 잠에서 깨었을 때,
며칠간 계속 남아있던 열병이 완전히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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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자랑 |
귀여운 그림 감사합니다. 하트. |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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