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하나 투척. 단편일까요, 조각일까요. 나도 모르겠으니 우선 조각으로...
세레노 - I Will Sleep Hand in Hand
작고 또 작은 손들이 자신의 손가락 하나보다 훨씬 큰 건반을 누르는 모습은 생각보다 귀여웠다. 피아노 아래에 달랑거리는 짧은 다리도. 작은 방에 있는 거라고는 작은 창과 피아노. 피아노 위에 쌓여진 몇 개의 악보집 정도였지만 그 방은 금방 서툴면서도 어리숙한, 하지만 그만큼 활기한 음색으로 가득 채워지곤 했다. 가끔 시간이 남을 때면 제일 큰 방에 앉아 벽의 반을 차지한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뒤로 한 채로 피아노를 쳤다. 그러면 제 주위로 옹기종기모여 아는 동요라도 울리면 노랫말을 따라 부르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이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곤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내일 왈츠 꼭 다 가르쳐주세요!"
제 바지나 가디건을 꾹 쥔 채 초롱초롱거리는 눈빛으로 올려보는 여자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보내는 것으로 하루는 마무리 된다. 저녁반은 대부분 성인들이나 학생들이긴 하지만 그 시간은 자신이 책임지는 시간이 아니다. 조금 부족한 자리를 채우기 위해 고용된 시간강사들은 자신에게 짧은 인삿말을 던지며 금방 자리를 떠나버렸다. 이 건물 3층에 위치한 피아노 학원내에서 유일한 남자직원인 나는, 그때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저녁반 담당자들이 출근하는건 7시. 지금은 5시 45분. 약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동안 이 수많은 피아노들이, 그만큼 많은 방들의 공간 하나하나가 짧게나마 온전히 제 것이 되었다.
정직원이라는 건 때로 이렇게 책임감과 다음 사람과의 교대를 위해 남아야하는 의무가 생기곤 했지만 그건 절대 내 어깨를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사실, 이 시간을 꽤나 좋아했다.
오늘은 어느 방으로 들어갈까. 피아노가 가장 잘 손질되어 있는 슈베르트방? 아니면 제일 널찍한 방의 베토벤? 아니면...
"..."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피아노 방의 문이 열렸다. 모차르트방. 요즘은 이 방에 자주 들어오게 된다. 학원 내에 있는 피아노들 중에 음색은 좋은 편, 상태도 깔끔한 편. 방의 크기는 평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아직 조용한 곳을 둘러보다 뚜껑을 열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하얀 건반 위로 움직였다. 조금 경쾌하고 부드러운 음이 서서히 퍼져나가 온 방들을 물들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연주에 맞춰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긴 곡이 끝나고 사방의 모든 것의 소음이 모두 피아노음과 함께 가라앉았다.
짝짝짝.
열어놓은 창 위로 어디에선가 박수소리가 들렸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그 소리는 위층에서 나는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이 방에서, 이 시간에 연주를 끝내면 언제나 짧고, 뭉툭한 박수소리가 들렸다. 마치 제 연주를 잘 들었다는 듯이 조용히 울렸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얼른 방을 빠져나갔었지만 지금은 그저 익숙함에 작게 웃었다. 6시부터 위에서 영어학원의 강의가 시작이 된다.
종종 강의시간과 피아노 연주강의 시간이 겹쳐 충돌이 일어난 모양이었지만 그건 저녁반 사람들끼리 어떻게 잘 해결이 된 모양이었다. 오전이나 오후에는 안 하는 건가. 문득 궁금증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작했나보네."
창을 열어두면 위층의 강의소리가 얼핏 들리고는 했다. 가끔은 책상이나 의자를 끄는 소리도. 오늘은 위층에서도 창문을 열어놨는지 소리가 한층 선명했다. 나는 살짝 의자를 움직여 벽에 붙이고 다시 앉아 창 바로 아래에 기댄 채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지금 강의를 하고 있는 저 남자의 목소리가 제 피아노 연주에 답을 해주는 그 사람일까. 낮기만한 제 목소리와 달리 꽤나 허스키하다. 가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음색이나 소리에 예민해진 터라 남자의 목소리에 대한 특징은 쉽게 잡아채었다.
뭐야, 이러니까 나 스토커 같아.
이상해진 기분에 제 뒷덜미를 쓸어내리다가 일어났다. 의자를 다시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고 방을 나섰다. 다음 교대자가 오려면 아직, 50분은 남았다.
"..."
얼굴도 모르는 관객은 2주일 동안이나 제가 출근하는 평일 내내 꼬박꼬박 제 연주에 대해 박수를 보내왔다. 오늘은 어느 학부모의 말도 안 되는 생떼를 감당하느라 화가 난터라 평소보다 난폭한 연주를 끝낸 참이었다. 박수소리가 들리지 않아 괜히 멋쩍은 기분에 악보집들만 정리하는 사이 툭, 하고 무언가 창 틈으로 들어왔다. 종이... 뭉치? 설마 쓰레기를 버린건가 싶어 구겨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그러자 종이 틈으로 감싸여져 있었는지 사탕 하나가 떨어졌다.
"뭐야, 이거?"
꾸깃한 종이를 피자 노트를 찢은 거였는지 죽죽 그어진 선들과,
'기분 안 좋을 땐 단 게 최고.'
라는 문구가 씌여져있었다. 아, 위층에서 보낸 거였나. 자신의, 얼굴도 모르는 관객에게서. 제 손에 올려진 오렌지 사탕은 여기서 말하는 단 것이구나, 싶었다. 작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저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짜증은 절로 사라졌다. 다시 종이를 빤히 바라보다 반으로 접었다.
"글씨 되게 못 쓰네."
사무실 내에 있는 자신의 책상 한 구석에 있는 파일을 꺼내 종이를 끼워두었다. 그래도 위로를 받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영어학원의 학생인지 강사인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쯤은 무슨 상관인가 싶어졌다.
그 뒤로도 간혹 종이뭉치는 창문을 타고 제게 닿아왔다. 가끔 실수로 창틀에 맞아 떨어질 때면 제가 다 아쉽기까지 했다. 또 한 번은 창 옆에 있다가 이마에 맞은 적도 있다. 작게 짜증을 내면서 종이뭉치를 집어들었다가 딱 내용이 쓰레기 아닌데 신고당하면 어쩌냐는 내용이어서, 결국 또 웃어버렸다. 그 날 같이 감싸여진 것은 ABC 초콜렛이었다.
"비...?"
그런 하루하루에 익숙해졌던 어느 날, 날씨예보에 없던 뜻밖의 소나기가 쏟아져내렸다. 주위에서도 각자 가방이나 외투로 머리를 감싸고 뛰어가는 모습들이 늘어갔다. 큰일이네. 오늘 악보 챙겨가야하는데. 품에 안긴 악보들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쉴 무렵 누군가가 우산을 펼쳤다. 위로 올라가자니 여분의 우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 남자를 잡았다.
"저기요."
"네?"
"제가 우산이 없어서 그런데, 저기 편의점까지만 데려다주시면 안될까요?"
남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거기 가는 길이었다고. 악보를 외투 안에 넣고 우산 아래로 제 몸을 끼워넣었다. 생각보다 남자의 키는 컸다. 조금 떨어진 편의점까지 가는 5분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사교성이 넘치는 성격도 아닌지라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러고보니 처음 보는 남자였다. 원래 이 시간에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은 제가 학원에서의 경력이 쌓여가는만큼 많이 봐왔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확실하게.
"선생님이세요?"
"예?"
"악보, 들고계시길래. 피아노?"
"아, 네."
번뜩 고개가 들렸다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 삐죽 나온 악보를 봤는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작게 눈이 커지며 감탄으로 물들여진다. 그리고는 학원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건지, 아니면 저 못지않게 이 침묵을 견디지 못했는지 끊임없이 이것저것 물어봤다. 나름 성의있게 대답해주려 말을 고르고 고르며 답하다가 편의점에 도착했다.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이자 아니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뭐랄까, 정말 예의바르게 자란 사람이구나. 남몰래 속으로 감탄했다. 저를 대하는 말투부터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 그 짧은 순간에도 분명한 예의와 정중함을 담고 있었다. 문 바로 옆에 있던 우산을 골랐다. 이왕에 접이식 우산을 하나 사서 들고다닐 참이었다. 요즘 날씨 너무 이상해. 짧게 혀를 차면서 우산을 골라 캔커피와 같이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계산하는 사이 남자도 원하던 것을 골랐는지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리고 올려놓은 것은, 과일맛 사탕 봉지와 ABC 초콜릿 봉지 하나.
"영수증 필요하세요?"
"예? 아, 아니요. 버려주세요."
"네."
알바생의 말에 퍼득 놀라 고개를 젓고 우산을 챙겼다. 비닐을 찢으면서 힐끔 남자를 봤다.
"이제 집으로 가세요?"
"... 네."
맙소사. 왜 몰랐을까. 이 목소리는, 제 위층의 영어강사의 목소리와 똑같다. 그제야 훅 다가왔다. 이 남자가, 이 사람이. 위층의 영어강사이자 자신의 연주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그 뒤로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갔으면 됐을걸. 괜히 아는 척을 할까, 말까. 아니면 어떡하지. 저것도 다 우연이면? 근데 목소리도 제가 방에서 자주 들었던 그 목소리에 사는 것도 제게 던져주던 사탕과 똑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아는 척을 할까, 말까.
" 그럼 조심히 가세요. 악보, 안 젖게 조심하시고요."
각자의 우산을 들고 편의점 문 앞에서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 어떡하지. 말해야 하나. 마나. 입이 아직도 근질거렸다. 남자는 내가 고마웠다는 뜻으로 내민 따듯한 캔커피를 받자 고맙다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렸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래. 흔히 말하는 표현으로 질러버렸다.
"나는..."
"...?"
"사탕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도 그 쪽이 준 거는 다 보관하고 있어요."
"..."
"초콜릿은, 좋아해서 잘 먹고 있지만. 고마워요, 항상. 들어줘서."
아, 모르겠다. 질러버렸다. 남자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다가 그 표정에 조금씩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정말 표정이 풍부하기도 하다. 괜히 밝힌 것 같아, 역시. 차마 남자의 반응을 볼 수가 없어 그대로 우산 고마웠다는 말을 또 하며 고개를 한 번 더 꾸벅 숙이고 얼른 몸을 돌려 근처 지하철역으로 조급하게 걸어갔다. 저기요,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온통 열로 가득 차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 있었을리가 없었다.
찰박이는 소리가 멎고, 역에 도착해 우산을 접었다.
"아... 이런."
악보 끝이 조금 번져 물기가 번져있었다. 꼭 방금 전의 제 행동으로 놀라움이 번지던 남자의 표정과 닮아있어서 손으로 문질러대다가 제 머리를 헝클였다. 올해 최고의 바보같은 짓이었다.
다음 날에는 모차르트방으로 들어가 연주를 하지 않았다. 아예 사무실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있다가 저녁 담당자가 출근하자 교대하고 학원을 나섰다. 아, 쪽팔려. 아, 왜 그랬을까. 아직도 어제의 제가 했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 저를 괴롭혔다. 사탕 고마워요. 이정도만 했어도 좋았을 걸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은 왜 했을까. 보관한다는 말은 또 왜! 괜히 화가 나 계단을 쿵쿵 밟으면 내려왔다. 다행스럽게도 내일은 주말이니 그냥 다 잊고 쉬려고 했다.
그러니까,
"왔다."
이 남자가 건물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늘은 피아노 왜 안 쳤어요? 그... 항상 6시 되기 전에 피아노 치는 사람. 맞죠? 3층에서."
"그러면 그 쪽도 맞아요? 맨날 연주 끝나면 박수랑, 종이뭉치 던지던 사람. 사탕이랑."
"종이뭉치라니, 그거 쪽지였는데..."
어딜 봐서? 제가 받아온 모양은 누가봐도 부욱 찢은 종이를 마음대로 구긴 모양새였다. 그런 제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남자가 멋쩍게 웃으면 저를 내려봤다. 그리고는 다시 씩, 웃는다. 보조개가 깊게도 파이네. 무표정일 때와는 사뭇 다른 웃음에 절로 시선이 빼앗겼다.
"오늘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치시길래, 어제 이 시간에 퇴근하신 것 같아서 한 번 기다려봤어요."
"왜, 그렇게까지."
"항상 궁금했거든요."
연주만으로 사람 반하게 하는 게 과연 누구일까, 싶어서. 꽤나 낯간지러운 의미를 담은 말에 놀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시 열이 올라 정신이 없어졌다. 괜히 제 가슴팍이 간질거리고 무언가 얹혀진 기분도 들었다. 어색함에 손을 들어 제 가슴을 문질러도 나아지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이름이 뭐예요? 저는 김남준입니다. 4층 영어학원에서 강사일을 하고 있어요."
"저는, 민윤기입니다."
"그리고 3층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이시고요?"
"네."
"매일 5시 50분쯤에 피아노 연주를 하시고요."
"... 네."
"그리고, 그 연주가 끝나면 저한테 박수를 받는 분이기도 하고요."
"저 취조하는 겁니까?"
설마요. 짧은 웃음이 다시 퍼졌다. 그리고는 제게 손을 내민다. 얼결에 맞잡자 위 아래로 손을 흔든다. 아직 얼굴에는 진한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잘 웃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한 번 확인하던 남자가 정장 바지를 뒤적이다 잡고 있는 손을 풀어 내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돌렸다. 그 의미를 눈치채기도 전에 남자는 내 손 위로 무언가를 내려놨다.
조그만 초콜릿이었다.
"애써 준비했더니 왜 오늘은 연주 안 했어요. 아, 그리고 어제 커피 잘 마셨어요."
"그건..."
"내일, 또 기대해도 돼요? 피아노 연주. 그리고..."
당신과의 만남. 손을 꾹 쥐어 초콜릿을 잡았다. 느릿하게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얼굴에 웃음이 퍼져나갔다. 내일 여기서 또 봬요. 남자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하더니 조금 급한 걸음으로 올라가버렸다. 손바닥을 조금 따갑게 만드는 초콜릿 포장지가 느껴지지 않을만큼 정신이 없었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떨림을 내리누르느라 정신이 더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이, 현재 제 연인의 첫번째 데이트 신청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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