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두 번째. 길이 주의.
엠레스트 - 별빛나비
경매꾼들에게 잡힌 반인반수의 삶은 딱 두 가지.
만약 어린 맹수류나, 대형견 등. 개체 수가 더욱 귀한 것들은 무조건 VVIP들에게 먼저 보여서 팔리거나,
재벌들의 눈에 들지 못한 반인반수들은 실험실에 끌려가거나.
그리고 여자 반인반수들은 팔아야 할 상품을 공급해야 된다는 이유로 끌려가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가 사라지거나.
아마도 제 어머니는 마지막의 경우였을거라고 어렴풋이 제 무릎을 끌어안은 윤기가 생각했으면.
실험실에 들어온 토끼 반인반수들 중 가장 뛰어난 유전자와
약물반응에 대한 예민함이 돋보여 윤기는 나름대로의 대접을 받으며 지냈으면.
이런 대접을 받을바에야 그냥 혀 깨물고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작 죽으면 제 온 몸을 조각조각 해부할 자들이라는 것을 뻔히 알아 오늘도 마른 팔뚝을 내놓은 채
제 피를 한 팩의 양을 앗아가는 손길을 멍하니 바라봤으면.
그러다 어느 날 들뜬 기색이 연구소 안을 떠돌면 감흥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으면.
자신의 방의 밀실이 열리고
누군가가 휙, 하니 안으로 던져졌으면.
사나운 그르렁거림.
아아.
그런 거였나.
기어코 들여왔나보네, 맹수를.
그나마 여기 들락날락했던, 어느 날 보이지 않던 다른 아이들보다는 오래 보려나 싶어 윤기는 천천히
씩씩거리는 마른 등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꼴이 꼭,
자신이 처음 이 곳에 팔려왔을 때의 모습같아서,
고개를 돌려버렸으면.
저기, 여기 뭐하는 곳이에요?
...?
아, 제 이름은 김태형입니다! 아빠가 항상 먼저 이름을 밝혀야 된다고 했는데... 또 까먹었네. 미안해요. 어, 토끼씨?
어린 얼굴이지만 확실하게 흐르는 귀티. 아니, 그보다는 더 확실히 느껴지는 존재감.
너는,
늑대구나.
윤기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다 저를 바라보는 순하고 큰 눈동자에 잠시 숨을 들이쉬었으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으면.
여기는...
...?
지옥이야.
...
너에게는 그나마 덜, 지옥일까.
윤기의 말에 태형이의 얼굴이 굳었으면 좋겠다.
이름, 이 뭐에요?
알고 싶어?
네.
오래 살아.
...?
악바리 같이 참고, 견디고, 도망갈 틈을 노려. 그리고 도망치면...
...
그때 알려줄게.
내 어머니가 유일하게 나에게 남겨주신 것을, 내 이름을, 알려줄게. 그렇게 둘의 거래 아닌 거래가 성립이 되었으면.
어린 태형이는 후에야 윤기의 이 말이
도망칠 수 있으면 얼른 도망치라는 경고였음을
눈치챘으면 좋겠다.
그 중에서도 윤기가 제일 싫어하는,
무서워하는 실험은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
약물실험을 할래요.
안 돼. 오늘은 이걸 하는 날이잖니.
제발요. 차라리 약을 먹을게요. 제발, 제발.
나를 저기에 들여보내지 말아주세요.
윤기의 애원은 역시나 흩어져버렸으면.
또 다른 작은 밀실에 갇힌 채 윤기는 구석으로 가 공포심에 절로 튀어나온 귀를 꾹 누르며 덜덜 떨었으면.
문이 다시 열리고, 그 앞에는
유전자 실험으로 기괴한 모습의
고양이가,
나타났으면.
저를 향해 짖는 목소리에는 괴로움만이,
널 죽이겠다는 적의만이,
누군가를 향한 분노만이,
가득 했으면.
그 거북한 악의들을 온전히 받아낸 윤기가 어렸을 때부터 뭘 실험하려는건지 몰라도 반복되는 실험에
비명을 지르며
저리 꺼지라고 팔과 다리를 휘둘렀으면.
그러다 고양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제 살결에 그 소름끼치는 털이 닿았다고 생각될 즈음
실험은 끝이 났으면.
이 실험은 정말 대단해. 날이 갈수록 공포심이 커지고 있어. 이건 공중에 녹아든 약물이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소리라고.
저 실험체는 예전부터 정신력 하나는 기가 막혔지요. 그런데 그 정신력도 무너뜨릴 정도라면 일반인에게는 더 큰 영향을...
그러면 배합을...
실제 군사적 효력은...
실험은...
이 실험은...
성공적이야.
까무룩 정신을 잃어가는 윤기가 그 소리를 들으며 조소를 띄웠으면 좋겠다.
아니,
너네 같은 새끼들은
신이 만드신 실패작이고,
이 모든 짓들도 실패작일거라고.
정신이 들어요?
... 아.
눈을 뜨자 이제는 익숙한 태형이의 얼굴이 보였으면.
저를 걱정했는지 자신보다 더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담요자락을 꾹 손에 쥔 채로 울망울망거리는 눈동자에
윤기는 작게 웃어보였으면 좋겠다.
잘 있었어?
윤기의 인사에 태형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으면. 몇 번이고 괜찮냐고 물으면 윤기는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답했으면 좋겠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갈 수록 둘은 서서히 거리를 좁혔으면 좋겠다.
어깨가 닿고, 나중에는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에 들었으면.
가끔 실험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이 악몽이 악몽이라는 것을 알정도로 행복했던 과거가 떠올랐는지
태형이가 괴로움에 몸부림 칠 때면
윤기는 태형이의 손을 잡고 유일하게 제 어머니가 불러주셨던, 딱 하나 알고 있는 노래를 불러줬으면.
비록 그 음이 갈라지고,
형편없이 떨어져도,
태형이는 그 노랫소리에 안정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둘이 마주보고 누워서 태형이는 이 곳에 납치되기 전까지늬 생활을 윤기에게 천천히 들려줬으면.
그렇게 윤기는 태어나서 본 적도 없는 하늘을 상상하고,
태양을 상상하고,
별들을 상상했으면.
그렇게 점점 커가면서 둘만 남은 밀실에서도,
서로 실험실에 끌려갈 때면 시선을 마주하면서
오늘도 마주보고 잠에 들기를 기도했으면.
부디 그 애원이
닿기를 원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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