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거지같은 꿈을 또 쉽게 지워냈다. 변백현은 나만 보면 지겹도록 살갑게굴며 실실 웃는 놈이라 그런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야, 괜찮냐..?"
"아으.."
김종인. 그 새낀 진짜 상종도 못할 개새끼였다.
체육시간에 축구하던 놈이 어떻게 스탠드에 앉아서 쉬던 내 머리통에 공을 맞출 수 있단말인가.
바람 한 점 없는 온도만 추운날에! 빌어먹을. 욕이 턱까지 차올랐다.
"경수야!!!!!!"
안절부절 못하고 뛰어온 변백현이 날 양호실로 질질 끌어갔다.
아프긴 한데 , 그럴 정도는 아닌거 같은데. 오늘 이후 수업을 듣기는 싫어서 그냥 순순히 따라갔다.
"경수야 많이 아파? 어디 맞았어.. 응? 경수야 .."
양호실은 왜 담당선생이 없는건지 , 그 놈의 경수 , 경수.
나는 그 반쯤 갈라진 목소리가 여전히 불편해 눈을 감았다. 따듯한 침대에 누우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침대 옆 테이블에 있던 가방이 내게로 툭. 중심을 잃고 떨어졌을 때 였다.
언제 잠까지 들었는지, 창 밖엔 노을이 지고있었다. 여전히 양호선생은 없었다.
그 여잔 대체 일을 하는거야 마는거야? 조금 더 정신을 차려보니 뻗어있는 손 끝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로 변백현의 머리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다가 잠든모양이다. 그냥 가도 되는데...
나는 넘어진 가방을 들었다. 지나치게 가벼운 그 가방은 내 것이 아니였다.
그러고 보니 이건 뭐지? 나는 아무생각 없이 가방을 열었다.
열자마자 손바닥 보다 조금 더 큼지막한 파란 노트 한 권이 보였다. 다른건 별게 없길래 노트를 빼냈다.
나는 그 것이 판도라의 상자인지도 모른채로, 펼쳐 읽었다.
2009년 5월 9일
아무리 피곤해도 오늘은 날짜까지 꼭 적어놔야할 일이 생겼다. 난 오늘 첫 사랑에 빠졌다.
삐뚤한 글자가 웃겼다. 첫 장 부터 재밌네, 누군가 4년이나 전에 쓴 글이였다.
2009년부터 2013년 , 일기는 요 근래까지 누군가를 위한 사랑타령으로 가득했다.
상대의 이름은 없었지만 나는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소름이 돋아 한기가 흐르는 기분이였다.
꼭 그 속에 적힌건 변백현과 내 얘기같았으니까.
2012년 3월 21일
그애는 옆 반이 되었다. 짜증나지만 같은 고등학교에 온 것 만으로도 괜찮다. 점심시간마다 놀러가야지.
2013년 10월 17일
오늘도 웃으면서 인사했다. 여전히 씹혔지만,괜찮다. 돌아 누워 엎드린 모습도 귀여우니까. 나는 그 어깨를 감싸안고 싶었다.
2013년 11월 1일
김종인이 또 그 애를 놀리기에 나가서 헤드락을 걸었다.
더 맞아야해 저 놈은,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에 그렇게 사랑스러운 애는 절대 또 없을 것이다.
내가 사준 코코아를 받아들었을 때 나는 손에 있던 율무차를 다 쏟을뻔했다.
내가 코코아가 이렇게 부러운 날 이 오다니. 그 입술을 훔쳐보다가 변태가 된 것 같아서 말았다.
2013년 11월 5일
오늘은 문학 시간에 세워둔 책 뒤로 일기를 쓰려고 펼쳤다가 딱 걸렸다. 그 덕에 글을 읽었는데 , 꼭 내 마음같다.
나도 그 애의 곁에 머물고싶다. 그게 어떤 형태로든. 이걸 쓰는 손이 덜덜 떨린다.
사실 글 뒷부분을 그 애가 읽었가 읽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에 취해서 큰 일을 낼뻔했다.
글은 어떤 뜻일까 물어보기까지했다.
큰일이다, 자꾸 욕심이 커진다.
나는 더 읽지 못하고 노트를 접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경수야.." 눈치도 없는 변백현은 그 타이밍에 또 기막히게 일어났다. 부스스 고개를 들고 눈을 비비던 그 몸짓이 멈췄다.
"일어났... 어???" 내 손에 들린 노트를 보고 변백현이 굳었다.
"너 나 좋아하냐?"
"경수야 그거 읽.."
"너 미친거아니야? 안고싶어? 입술이 뭐 어째?"
"경수야 그게 …"
다급한 변백현의 말을 더 빠르게 받아쳤다.
"김종인이 맨날 미녀니 뭐니 지랄하면서 나 여자처럼 보는 이유가 너였냐? 끼리끼리 논다더니 너 그렇게 상종 못 할 놈이였냐고.
왜 김종인 걔도 남자 좋아한대? 나 좋아한대? 2009년이면 4년? 징그럽다. 변백현 무섭네. 무슨 생각으로 이딴거 쓰고 있었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서 폭포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너무 화가났다.
내 어깨를 잡은 변백현이 , 저가 더 혼란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경수야 진정해. 일단 그거 이리줘.."
"더러운 손 안치워? 진정? 이딴거 보고 진정하라는 말이 나와? 왜 아까워서 쓴 노트는 가져야겠냐?"
변백현은 크게 한 숨을 푹 쉬더니 제 가방을 들고 나갔다.
아직 내가 할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나는 그대로 그 발을 따라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까지 간 변백현을 따라가기 힘들어 나는 노트를 던져버렸다.
"내 말 아직 안끝났어!" 머리 끝까지 차오른 수치심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남자가, 날 보고 그런 생각을 가졌다니. 웃으며 매일 인사하던 변백현이 그런 마음이였다니.
내 손아귀 힘에 뭉개져있던 노트는 분명하게, 그의 발목에 부딪혀 떨어졌다.
그제서야 나는 조금 흥분을 가라 앉혔다. 그 4년의 시간을 한 순간 저렇게 구겨놓은 걸 보니 아무리 화는 났지만 이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트는 마구잡이로 내팽겨 쳐져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멈춰있는 날 향해 변백현이 돌아봤다.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꼭 그 눈이 흐리멍텅해서 날 보는건지 내 뒤를 보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변백현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빼냈다. 그리고는 망설임도 , 미련도 없이 눈 앞에서 라이터를 노트에 던졌다.
"도경수"
경수야, 가 아닌 도경수로 변백현이 날 부르긴 처음이였다.
낮은 목소리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나는 또 그 찝찝한 꿈 속에 와 있는 기분이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렇게 쉽게 타버리잖아. 이제 바람에 날려서 다 사라질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변백현의 목소리가 잠긴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바람이 안 부는 지금의 상황이 갑갑했다. 그의 4년이 눈 앞에서 1 분도 안되서 사라졌다.
아니 나는.. 꼭 그렇게 까진 하려던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차마 입 안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흐린 눈의 변백현은 곧 고개를 돌려 운동장에서 사라졌다.
나는 움직이질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두통이 몰려왔다. 집에가서 일단은 , 휴식을 취해야지.
그 날 밤은 한 참을 잠 못이루다 선잠에 잠깐 들었을 뿐이였다.
" 젖은 목소리로 제 이름 불러주신다면 .." 그 슬픈 목소리에 그 잠마저도 금방 깨어났다.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안색이 많이 안좋다 경수야, 오늘은 학교 쉴래?" 하고 다정히 물어오는 엄마의 말도 잘 들리질 않았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 등교했다.
변백현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김종인에게 변백현 번호를 물었지만 폰이 꺼져있어서 연락해봤자라며, 왠일로 변백현을 다 신경쓰냐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나는 막차 시간도 넘긴채 , 12시까지 혼자 교실에 앉아있었다.
변백현이 오길 기다렸다. 그 마음은 분명 당황스러운 것이였고, 남자가 날 보고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게 화가났다.
그렇지만 내가 흥분해서 너무했단 생각도 없지않으니 우선은 얘기를 하면서 , 관계를 좀 풀어나가고 싶었다.
"김종인, 변백현 연락 안돼? 얘 왜 이러냐 무슨일 있어?"
"폰 꺼놨던데요. 집전화는 없고"
"아휴.. 부모님도 안계신데.. 착실하게 잘 나오다가 갑자기 왜 이러지.."
교무실에는 작은 목소리들이 오갔다.
그는 열흘이 지난 오늘도 , 학교에 나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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