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손님들이 모두 빠지고 태환은 비로소 쉴 수 있는 시간을 맞이했다.
오랜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술에 취해 지루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내들을 상대하느라 온몸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머리에 올린 무거운 가채를 벗어내고 편안한 숨을 내쉬며 옷고름을 풀어내던 그가 누군가의 인기척에 손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월..아니, 태환. 오늘 고생했어. 이거 받으시게."
손님들에게 술을 몇잔 받아 마셨는지 한껏 눈이 풀려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여주인이 그의 앞에 주머니 하나를 내보였다.
짤랑 짤랑 소리를 내며 손바닥에 놓인 무게가 꽤 묵직한걸 보니 후하게 값을 치뤄주겠다던 약속을 지킨 모양이다.
손에 들린 주머니를 바지춤 깊이 찔러 넣고 고맙다며 웃어보이는 그를 바라보던 여주인이 태환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또...와줄거지? 자네 없으면 일이 안된다니까~ 우리 가게 최고 미인이잖아~"
그를 치켜세우며 살살 웃는 여주인의 속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자신의 어깨에 놓인 여인의 손을 떼어내며 태환이 피식- 웃어보였다.
"값만 잘 치러준다면야...또 오지요. 그나저나 이 일 말고 내가 하던 일이나 잘 챙겨줘요. 요새 일이 없어."
"어~ 그거? 당연하지! 그럼 그럼~ 내가 알아서 팍팍 밀어줄께. 나만 믿어~"
손뼉을 치며 걱정붙들어 매라는 여주인의 손에 벗어낸 저고리와 치마를 쥐어 주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은
태환은 밀실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자네~ 입술 지우고 가야지! 날도 밝아오는데 남들이 보면 놀라~"
아차 싶은 표정으로 여주인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든 태환은 입술과 얼굴에 잔뜩 발라진 화장을 지워냈다.
"이러고 나갔다가 단골 손님이라도 만났으면...어휴~"
장난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양팔을 쓸어내리는 여주인의 행동에 태환이 마주 웃어보이고는 여인의 손에
얼룩이 잔뜩 묻은 손수건을 쥐어 주었다.
화장을 지워낸 그의 얼굴은 어느새 아름다운 여인에서 고운 사내로 돌아와있었다.
입술에 남은 연지를 혀로 살짝 핥아 소매 끝에 쓱쓱 문질러 닦아내고 밀실을 나서자 그 뒤를 따르던 여주인이
다음 약속 시간을 조용히 속삭여 왔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보인 태환은 바래진 옷깃을 코밑까지 끌어올리고 서늘한 새벽의 숲길로 발을 내딛었다.
피부에 차갑게 닿아오는 새벽 공기에 솜옷을 바짝 당겨입고 숨을 내쉬자 그의 하얀 얼굴에 입김이 서린다.
웅크리고 있던 시린 손을 더듬어 바지춤에 넣어둔 묵직한 주머니를 손으로 매만지자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솜처럼 축 늘어지는 몸을 겨우 놀려 차가운 새벽 숲속 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딛는 그의 발걸음이..조금은 가볍다.
"나으리~이제 오십니까요?"
일찍부터 책방에 들려 여러권의 서적을 사온 그가 대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급히 달려오는 하인의 반색에 걸음을 멈춰섰다.
급히 전할 말이라도 있는지 마당을 쓸던 싸리빗자루까지 그냥 두고 달려온 하인을 바라보며 그가 짙은 눈썹을 찡그린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소? 왜 이리 호들갑이오?"
"좀전에 당상관 어르신 댁에서 사람을 보내 전언을 보내오셨는데.. 초경에 기방에 오시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요."
"기방..?"
기방이란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의 안색을 슬쩍 살핀 하인은 말을 마저 전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청루각이라 하셨습니다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오셔야 한다고..."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는 하인에게 알았다고 힘없이 대답한 그는 하인을 지나쳐 안채로 향했다.
주색을 빼면 말이 필요없는 당상관의 가시 돋힌 전언에 그는 힘이 쭉 빠져버렸다.
조선에 당도하여 몇번의 끈질긴 술자리 요구에도 이리저리 잘 피했건만 이번마저 거절을 했다가는 앞으로가
피곤해질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입해온 서적을 누마루에 올려두고 이마를 짚은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거절을 했다가는...피곤해지겠지."
술과 여자에 둘러 쌓여 지루하고 피곤한 시간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기다란 손끝으로 눈 주변을 살살 쓰다듬으며 흠..하고 숨을 내어 쉰 그는 짙은 곤색의 두루마기 자락을 뒤로 넘기고
누마루에 걸터 앉았다.
어느새 초 겨울이 다가왔는지 바짝 마른 나뭇잎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바닥에 나뒹구는 나뭇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구입해온 서적만 의미없이 뒤적였다.
오늘은 서적이나 탐독해볼까.. 일찍부터 책방을 다녀왔건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입꼬리를 내려 무표정한 얼굴로 손끝에 매달린 책장만 의미없이 넘기며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오후까지 늦은 잠을 청하던 태환은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켜 집을 나섰다.
해가 떨어지면 또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했지만 간만에 들어온 일거리가 있어 급히 나오느라 세수도 못한채
장터로 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터에 들어선 태환은 이리저리 치이는 사람들을 피해 한참을 걸어 중간에 위치한 비단 가게로 몸을 들였다.
"오랜만이오~"
밝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비단 가게 주인이 반색을 표하며 정리하던 물건들을 두고 그를 맞이했다.
"자네는 얼굴이 더 좋아졌구만~"
주인의 칭찬 섞인 인사에 대답 대신 빙그레 웃어보인 태환은 색색이 아름다운 비단들이 널린 좌판 한구석에 살며시
걸터 앉아 보따리에 담긴 옷감을 확인하는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요새는 일이 없소? 내가 입에 풀칠하기가 힘드오~ 일 좀 많이 주시오."
울상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어보이는 태환의 말에 비단 가게 주인은 허허~ 웃어보이곤 그의 앞에 옷감이 잔뜩 담긴 보따리를 내밀었다.
"일이야 생기면 당연히 자네를 주지! 자네 누이 손끝이 야물어서 손님들이 칭찬 일색이야."
"그렇소~?"
칭찬이 자자하다는 주인의 말에 보따리에 든 옷감을 확인하며 태환이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다른날보다 제법 많은 물량에 얼굴에 화색이 돈 태환은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기고는 비단 주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약속된 날짜에 가지고 오겠소. 일 생기면 언제든 불러주시오~"
"그려~ 그나저나 누이도 한번 데리고 오시오. 자네를 닮았으니 얼마나 예쁘겠소. 일도 잘하고... 중매나 서야겠소."
중매를 서겠다며 누이를 데려오라는 그의 말에 대답 대신 웃음으로 답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보인 태환은 서둘러 장터 길로 발을 내딛었다.
"누이라...흠~"
매서운 바람에 코끝이 시큰해져와 손바닥으로 붉어진 뺨을 쓸어내린 태환은 누이라는 단어를 곱씹다가 피식- 웃어버리곤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집으로 향했다.
이정도 물량이면 얼마나 되려나...
품안에 보따리를 바짝 당겨 안은 그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일을 마치고 받을 품삯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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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기다려주시고..반갑게 맞아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으셔서...
너무 행복하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진까지 반응이 좋아서 기분 짱입니다! ㅎㅎ
이번 '설화' 는 다른 연재글보다 조금은 길어질 것 같아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려고 합니다.
지루해질까봐..걱정이예요ㅠ
늘 재밌게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