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완성 오르비스 9 |
9. 요즘들어 아침에 티비속에 나오는 기상캐스터가 매일 하는 말이였다. 앞으로 꽃샘추위를 깨고 나온 포근한 봄날씨가 계속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점점 상승하는 기온은 아이들의 마이를 벗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두 가벼운 춘추복을 입고 다녔다. 마이로도 모자라 보기만 해도 두꺼운 패딩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던 때가 엊그제만 같았는데, 벌써 햇빛을 쬐는 몸이 나른해져만 갔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봄이 다가왔지만, 고삼의 중간고사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반 아이들의 어깨가 돌덩이에 꾹꾹 눌려갔다. 마치 찌부러져 뭉쳐진 초코파이처럼 말이다. 시험이 딱 일주일이 남은 시점이였다. 경수와 종인, 그리고 찬열은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있었다. 급식으로 나오는 반찬들은 역시나 그저 그랬다. 덜익은 김치나 멸치볶음, 된장국 같은 기본적인 음식. 딱히 맛있지도 않고 못먹을 정도로 맛없지도 않은 밍밍한 급식이었다. 하지만 야자때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많이 먹어둬야 했다. 셋은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밥을 꾸역꾸역 입안에 넣었다. 찬열이 입안 가득 밥을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 이제는 손 잘 움직이네? " " 되게 가벼워졌어. " 봐봐. 경수가 보란듯이 숟가락을 들고 힘차게 밥을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밥을 씹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찬열이 웃더니 종인에게 말했다. " 종인아, 경수 깁스 풀때 엄청 떨었지? " " 야, 말도 마. 얘 혼자서 손떨고, 쉼호흡하고 아주 지랄 난리도 아니였…, " " 내, 내가 언제 그랬어……. 오버하지마. " " 근데 다 사실이잖아. 안 그래? "
경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종인을 보았지만, 종인은 입을 가리고 킥킥 웃기만 했다. 경수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찬열을 보았지만, 찬열은 이미 고개까지 제껴가며 웃고있는 중이였다. 경수의 얼굴이 창피함에 벌겋게 물들었다. 아씨, 그걸 왜 말해갖구….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푹 고개를 숙이고는 스스로 볼을 만져보았다. 달아오른 따듯한 열이 손에 느껴졌다. 찬열은 그런 경수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그렇게 무서웠어? "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물음에 경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찬열은 턱을 괸채로 경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경수는 대답을 조금 끌었다. 옆을 흘끔 쳐다보니 종인은 묵묵히 밥만 먹고있었다. 바로 앞에 놓여진 급식판 속의 애꿏은 밥알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뭉쳐있는 아무 관련 없는 밥알들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 그게.... 옆에 누가 있으니까 그나마 덜 무서웠던 것 같아. "
그렇게 말하며 경수는 아무생각 없이 종인을 보았다. 종인도 경수의 말에 열심히 움직이던 숟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종인은 피식 웃었다. 가만히 있던 경수도 풋, 웃음이 터졌다. 그 순간 꽃이라도 핀듯 주변에 화사해진 공기가 흘렀다. 별일 아닌 말에 실실 웃는 둘을 보며 찬열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짧게 비쳤다 사라진 경수의 미소를 보며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바뀐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선 빛이 느껴졌다. 따듯하고 밝은 빛이. 그런 경수를 보며 찬열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했다. 그런 둘을 말없이 지켜만 보던 찬열이 입을 열었다. " 언제 너네 그렇게 친해졌냐? " " 어쩌다 보니? " 담담하게 말하는 종인의 표정에 경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병원에 갖다 온 후부터, 경수는 둘의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혼자만의 착각일까 싶었지만, 방금 전 종인의 말에 그것이 착각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정말로 친해진게 맞는걸까? 종인과 친해진다는 것은 찬열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된다는 일종의 허락 같은 것이였다. 마치 까탈스러운 시누이에게 인정받는 아내처럼. 그래서 처음에는 경수는 종인과 친해지고 싶었다. 딱 처음에는 그런 이유 뿐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종인은 찬열의 친구가 아닌 그냥 김종인으로써 경수에게 다가왔다. 원체 소심하고 익숙치 않은 사람에게 말을 잘 못붙이는 경수에게 종인은 물이 천에 스며들듯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더 강했지만, 이제 경수는 조금씩 종인에게 마음을 열어갔다. 빈틈없이 단단하고 견고하게 쌓여진 벽에 조금씩 금이 가고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경수는 혼자 소리없이 웃었다. 야, 김종인. 애를 이상하게 망쳐놓으면 어떡해. 찬열이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밥을 다 먹고,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마셨다. 달달한 설탕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다들 요구르트병을 하나씩 입에 물고 있을 때, 찬열이 요구르트를 비우며 말했다. " 우리 시험 끝나고 놀러나 갈까? " " 어디로? " " 바다? " " 야, 무슨 여름도 아닌데 바다야. "
종인이 다 먹은 요구르트 병을 식판 위에 던져 올리며 말했다. 바다는 별로라는 듯한 종인의 말투에 찬열은 띠꺼운 놈, 하고 표정을 찡그렸다. 그 사이에서 경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둘은 놀란 듯 경수를 보았다. " 내 생각엔 바다도 좋을 것 같은데……. " " ……. " " 바다 가본 기억이 잘 안나서... 아, 물론 싫으면 딴데 가자. 난 괜찮아. "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괜히 무안해져 경수가 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경수를 보는 찬열의 표정은 그야말로 헐, 하는 표정이였다. " 너 설마 바다 한번도 안가봤어? " " 있긴 한데, 되게 어렸을 때라서... 다시 가보고 싶어. " 찬열이 경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바다 찬성이지? 그에 경수가 결심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경수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찬열의 표정이 여유롭게 바뀌었다. 짝짝짝, 박수를 치며 마치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종인은 찬열의 그런 표정에 뭐야, 하고 그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야, 이대 일이다. " " 뭐가? " " 바다가 이겼다고. " 그리고 우리 경수가 가고 싶다잖아, 그치? 종인에게 대놓고 들으라는 듯 찬열이 말했다. 종인이 경수를 쳐다보자 경수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속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고 있을게 뻔했다. " 가고싶어? " " …응. " 종인의 물음에 경수가 조그만 목소리와 함께 끄덕였다. 정말로 가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게다가 두 사람과 함께라면 더더욱 가고싶다. 그런 경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한참 경수를 보고있던 종인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 …그러던지. " " 그럼 우리 시험 끝나고 바다가는거다. "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찬열의 미소와 함께 약속이 정해졌다. 흘러가는 일주일 동안 비가 오기도 했고, 날이 밝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 되었다. 경수는 문제집을 풀다가 말고 바다 가는날 비가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 물론 지금 코앞까지 다가온 시험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자꾸만 놀러갈 생각에 집중력은 삼천포로 새기 일수였다.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이 들때마다 경수는 찬열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뒷모습만 보아도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구나, 라는게 몸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경수도 힘을 내서 다시 샤프를 들었다. 열심히 문제집만 파는 찬열에 반해 종인은 창문을 보는 시간이 많았다. 공부하다가, 다시 창밖을 보고. 다시 몇분동안 공부하다가, 또 창밖을 보고. 특히 수업시간에 창문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자신쪽으로 돌릴때마다 경수는 제 행동을 의식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봐도 어쩔 수 없이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꼭 종인이 저를 보는게 아니더라도 그의 시야안에 들어오게 되니까 긴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이쯤 되니, 조금 궁금하다. 대체 무얼 보고 있길래 시도때도 없이 창밖을 내다 보는지. 혹시 좋아하는 애라도 보는 걸까. 저처럼 절절한 짝사랑이라도 하고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일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시험이 끝나는 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오히려 햇빛이 아주 쨍쩅하게 올라왔다. 그 말은 즉, 바다를 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 금요일이니, 바로 출발해서 하룻밤 자고난 후 다음날 다시 돌아온다는 간단한 계획이였다. 완전히 시험이 끝나고 반애들은 모두 각자 한숨을 쉬거나 앓는 소리를 내며 짐을 쌌다. 경수는 평소답지 않게 싱글벙글인 얼굴로 짐가방을 챙겼다. 입에서 노래까지 절로 튀어나올 지경이였다. 그동안 손꼽아 기다려온 바다 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경수는 벌써부터 두근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또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이 있었다. 오늘 친 시험지를 가채점 한 결과 의외로 점수가 매우 높게 나왔다. 그동안 많이 공부를 하지 못한 것 같아 바닥에 기어다니는 점수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였다. 특히 수리에서 찍은 문제가 다 맞았다는 기적같은 결과가 나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경수는 가방을 등에 맸다. 오늘따라 가방이 왜이리도 가볍게 느껴지는지 원. 짧은 종례가 끝나고 시험시간에 잠시 옮겼던 책상을 다시 원래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종인의 책상이 다시 경수의 책상 옆에 붙었다. 몇일 만에 다시 옆에 서게된 종인을 보고 경수가 헤, 웃었다. 종인은 어딘가 기분 좋아보이는 경수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 뭐가 그리 좋아? " " 오늘 바다 가잖아. " " 그렇게 좋아? " " 뭔가 되게 기대되는거 있지. " 가면 뭐하지? 물놀이? 근데 아직 춥지 않을까? 맛있는 것두 먹고 싶다. 먹을걸 싸가야 하나? 경수는 쉴새없이 종인에게 종알댔다. 경수가 바다에 놀러가는것을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는게 종인의 눈에 한눈에 보였다. 조금 흥분한 듯 평소보다 빨라진 말의 속도도, 눈을 맞춰오며 물어오는 섬세한 말투와 표정 모두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종인은 간질거리는 마음을 뒤로 하고 경수의 조그만 혼잣말을 들어주었다. 그때 찬열이 한손에는 빗자루와 또 한손에는 쓰레받이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언제나처럼 활기차 보이는 얼굴이였다. " 어, 찬열이다! " 경수가 찬열의 얼굴을 보고 화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 오늘 다들 안까먹었지? " " 응. " " 근데 미안한데, 나 오늘 청소라서 남아야 돼. " 쓰레받이와 먼지 묻은 빗자루가 찬열이 청소당번이란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찬열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담임이 마포까지 하래, 짜증나. 한눈에도 교실바닥이 조금 많이 더럽기는 했다. 널부러져있는 쓰레기와 복잡하게 놓여있는 책상들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찬열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 나 청소 끝날때까지만 기다려줘. " " 알았어. 먼저 나가있을게. " 경수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간다는 손인사를 했다. 종인도 먼저 간다, 하며 경수의 어깨를 잡아 끌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나오니 대부분의 애들이 집에 가고 없었다.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청소인 애들이 대부분이였다. 종인과 경수는 할일 없이 가만히 벽에 기대고 서있었다. 그러다 종인이 마킹할때 실수로 손에 진하게 묻은 싸인펜 자국을 발견하고는 잠깐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진하게 그어진 검은 선자국은 잘 지워지질 않았다. 물로도 벅벅 닦아보고, 비누칠도 해봤지만 희미한 자국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손을 씻는데만 시간이 조금 걸려버렸다. 완전히 싸인펜 자국을 지우고 복도로 나와보니, 가만히 벽에 서있던 경수가 보이질 않았다. 얘가 어디 간거야. 복도에 가만히 서서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경수는 보이질 않았다. 경수를 찾기위해 움직이려 발을 뗀 순간,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띵, 띵-. 각각 다른 음의 줄들이 몇 번 튕겨지는 소리가 들리다, 멈췄다. 그 순간 복도에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얼마 되지 않아 본격적인 기타연주가 시작됐다. 방금 전 줄을 튕기던 소리보다 더욱 크고 선명하게 이어지는 소리를 따라 종인은 발을 움직였다. 앞으로 걸어나갈수록 기타연주가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 처럼 더욱 생생하게 들렸다. 소리의 근원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종인의 발걸음이 3학년 5반 앞에서 멈췄다. 아마 5반 교실 안에서 누군가 연주를 하고 있는것 같았다. 종인은 살며시 교실 뒷문을 열었다.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의자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슬리퍼를 신은 작은 발이 박자에 맞추며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 모습이 메트로놈 같아 보였다. 나름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것 같은데, 과연 누굴까? 종인은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열린 문 앞에는 경수가 기타를 끌어안은채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활짝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종인과 경수가 마주했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있는 경수의 뒤로 햇빛이 몸을 감쌌다. 종인은 참을 수 없는 눈부심에 눈을 찌푸렸다. 윽.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실눈을 떠 앞을 바라보자, 마치 경수에게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종인은 한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걸어오는 종인의 모습에 경수는 특유의 놀란 눈을 했다. 어, 종인아…. 자동적으로 기타를 치던 손의 움직임도 멈췄다.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깔리던 기타연주가 끊기니, 무언가 빠져버린 듯 분위기가 삭막해져버렸다. 고요한 정적을 배경으로 종인은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에 앉아있는 경수의 앞에 섰다. 햇빛을 등진 터라 경수를 감싼 빛은 몸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말로만 듣던 후광인가. 터무니 없는 소리란걸 알지만, 순간 경수가 진짜로 빛을 내고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종인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이 아무것도 때타지 않고, 마냥 순수하게만 보였다. 몸에서 빛을 내는 일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몰라. 아마 너라면 말이다. 기타 줄을 어루만지는 경수의 손이 조심스러웠다. 숨기고 있던 걸 들킨 것만 같이 경수는 말을 웅얼거렸다. " 어, 그게, 그냥 들어와봤는데 기타가 있길래…. 한번 쳐본건데……, " " 기타 잘 치네. 듣기 좋다. " " 진짜? " " 더 쳐줘. 듣고 싶어. " 더 듣고 싶다는 종인의 말에 경수가 흠칫 놀랐다. 딱히 자신의 연주가 대단하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오히려 엉성하다면 엉성한 연주를 더 듣고싶다는 사람은 종인이 처음이였을거다. 아마도. " 배운지 얼마 안되서 많이 틀리는데. " " 그래도 괜찮아. " 진짜 잘 못치니까 기대는 하지마…. 자신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기타를 다시 고쳐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어서 연주를 시작했다. 기타소리의 조화로운 화음이 교실을 채웠다. 막상 연주를 시작하니 굳어있던 경수의 표정이 자연스레 풀어졌다. 집중하느라 숙여진 고개를 보는 종인의 얼굴은 웃음이 가득했다. 손으로 턱을 괴고 편한 자세로 경수에게 아예 시선을 고정시켰다. 귀로는 연주 하나만을 들었지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에 바빴다. 코드를 집느라 바삐 움직이는 왼쪽 손가락들과, 줄을 긁으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오른손, 박자를 타며 움직이는 슬리퍼를 신은 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눈썹을 다소곳이 내리깔고있는 온화하고 섬세한 표정까지 하나하나 봐야만 했다. 얼마나 평화로운 순간인가! 지나가는 일분 일초가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이리저리 움직였다. 과연 이런게 행복이고, 즐거움이란 것일까. 고등학생이 되고나서 가장 마음이 편안한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지금을 꼽을 것이다. 그렇게 짧은 연주곡이 끝났다. 몇 분채도 되지 않는 곡은 그 짧은 한순간에 삭막했던 교실의 공기를 모두 바꿔놓았다. 연주를 마친 경수는 창피하다는 듯 씩, 웃었다. 미소와 함께 종인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물음이 담겨있었다. 어때? " 잘했어, 멋있다. " 종인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의 기타치는 모습은 정말로 멋있었다. " 진..짜? 고마워. 그렇게 말해주니까 좋다. " " 다른거 연습한거는? " " 있긴 한데, 아직 덜 됐어." " 기대해도 돼? " 종인의 물음에 경수가 살짝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진짜 열심히 연습해올게. " " 나중에 꼭 들려줘. 꼭. " 경수의 당찬 대답에 종인도 작은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은 걸지 않았지만 약속이였다. 그만큼 종인은 정말로 다음 곡이 점점 기대되었다. 곡 뿐만 아니라, 기타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들도 마찬가지로. 의자에서 일어난 경수가 기타를 케이스에 주섬주섬 넣었다. 그리고는 지퍼를 꾹 닫았다. " 나 음악실에 이것 좀 갖다놓고 올게. 잠시만 기다려. " 종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뜻이였다. 경수는 그런 종인을 보며 피식 웃고는 커다란 기타를 양손으로 들고 교실밖으로 나갔다. 음악실은 한층 아래에 있다. 기타를 들고 복도를 걸으면서도 경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연주를 누군가 좋아한다는 사실에 괜스레 뿌듯해졌다. 비록 한 사람일뿐일지라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지금은 정말로 행복하다. 요즘들어 기분좋았던 나날들 중, 오늘이 바로 행복에 정점에 다다른 날인가보다. 저 밑에 닫혀있는 음악실 문이 보였다. 종인은 말없이 책상에 가만히 걸터 앉아 경수를 기다렸다. 교실 한곳을 차지했던 한 사람이 없어지니, 정말로 허전했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몇 분전의 영상이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졌다. 잔잔한 음악소리와 조금씩 움직이는 그의 모습들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저도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고, 그럴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요새들어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였다. 정신이 이상해진건가…. 종인은 한숨을 쉬며 책상위에 푹 엎드렸다. 그때 경수의 옆에 놓여있던 책상위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핸드폰이다. 아마 그건 경수의 핸드폰이였다. 종인은 호기심에 핸드폰을 덥석 집었다. 제 얼굴이 비치는 새까만 액정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딘가 만지면 안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인은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경수에 관해서는 더욱더 궁금했다. 홀드 버튼을 꾹 누르자 터치 잠금 화면이 액정위로 나타났다. 하얀 배경의 깔끔한 기본화면이였다. 그것마저도 단정한 경수다운 것 같아, 종인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도 암호나 패턴따위는 걸려있지 않았다. 종인은 아무생각 없이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터치 잠금을 풀었다. " ……박…찬열? " 순간 종인은 핸드폰을 든채로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종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째서 찬열의 사진이 경수의 핸드폰 화면에 떠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핸드폰 화면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건 분명히 찬열의 사진이였다. 그것도 찬열이 스스로 찍었던 셀카. 조금 떨리는 손으로 뒤로 버튼을 누르자, 바로 전의 사진 목록들이 떴다. 그 말은 방금전까지 경수가 찬열의 사진을 보고있었다는 소리였다. 폴더 안에 있는 사진들은 모두 찬열의 사진들이였다. 종인은 사진들을 선택해 한장한장 넘겨보았다. 작년 겨울방학때 찍었던 사진, 자신과 놀러갔었을때 찍었던 사진, 그후 부터 가장 최근 사진까지도 모두 있었다. 이 사진들은 분명… 찬열의 핸드폰속에 저장된 사진이다. 저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제가 알기론 찬열은 자신의 핸드폰을 남에게 잘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종인은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진을 계속해서 넘겼다. 그때 몇일 전 찬열이 핸드폰을 잃어버렸던 사실이 번쩍 떠올랐다. 그리고 그 핸드폰을 주운 경수와 만나서 갖다주러 간 기억이 났다. 혹시 그때 사진을 모두 몰래 보냈던걸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방법밖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 사진을 보내는 방법따윈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핵심은 '왜?'였다. 왜 경수는 찬열의 사진을 핸드폰에 모아두고 있는걸까? 왜 지금까지 찬열의 사진을 보고있었을까? 종인은 상단에 쓰여져있는 폴더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한번 조그맣게 읽어보았다. 'orbit' 궤도, 또는 궤도를 그리며 돌다. 오르비스라는 이름의 폴더는 오직 찬열의 사진만을 가득 담고있었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 도통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불길하다는 직감은 뚜렷하게 느껴졌다. 문득 종인의 눈앞에 경수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필름처럼 스쳐지나갔다.지난번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데려다 주었을때, 제 뒤에 탄 경수는 제게 꼬치꼬치 찬열에 대한것을 끊임없이 물어보았다. ' 너 박찬열 좋아해? ' 그런 경수에게 종인이 물었다. 경수는 절대로 아니라고 말했다. 그저 친구로써 그랬을 뿐이라고. 몰랐겠지만 매일 같이 경수가 웃으며 수업시간에 찬열을 흘끔흘끔 바라본다는 걸 종인은 알고있었다. 그 외에도 찬열이 대단한 것 같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의 말이, 찬열과 대화라도 할때마다 수줍게 웃었던 그 미소가, 축구를 할때 계속해서 찬열만을 쫓던 그 눈빛이, 모두 빠르게 머릿속을 미친듯이 헤집고 스쳐간다. 모든 것들이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대체 이게… 그저 친구로써 가능한건가? 종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알 수없는 감정들이 몸 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기분이 찝찝하다. 그때 교실 문이 활짝 열렸다. 해사하게 웃으며 경수가 교실로 들어왔다. 빨리 갔다왔지? 밝은 목소리가 울렸지만, 이미 가라앉은 분위기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어딘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경수가 종인에게로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 " 왜…그래? " " ……. " 종인은 대답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든지가 몇 분 전이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경수는 종인이 무언가를 뚫어져라 보고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자신의 핸드폰 화면이였다. 그것도 찬열의 사진으로 가득 메운 화면을. 종인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보고있었다. 대체 왜….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경수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마치 강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이였다. 종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경수의 눈을 보았다.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에 온몸이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웃고있던 종인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할 정도로 지금의 종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일자로 굳게 닫힌 입매가 입을 열었다. " 너, " " ……. " " 박찬열 좋아해? "
낮은 목소리가 유난히도 살을 떨리게 만들었다. 아무 감정없는 메마른 목소리에 경수는 엄청난 이질감을 느꼈다. 온몸으로 두려움이 덮쳐왔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 눈동자가 떨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을 쉴 겨를이 없다. 제가 알던 김종인은 여기에 없다.
" 박찬열 좋아하냐고, 내가 묻잖아. " " ……. " " 씨발. " 종인의 싸늘한 눈빛이 경수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아무 감정이 없던 것이 아니라, 꾹꾹 눌러 참아 느껴지지 않는 것이였다.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몸을 움츠렸다. 씨발, 하고 작게 읊조리는 종인의 목소리는 칼이 되어 경수를 찔렀다.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보이지 않는 피를 닦을 수도 없이 후회했다. 아아, 대체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잘못된거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두려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깨져버린 유리병은 다시 끼워 맞출 수가 없었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초(秒)가 흘렀다. |
| 잡담 |
하루에 두편씩이나 올리네욬ㅋㅋㅋㅋ 저는 감기가 걸려서 코나 찔찔짜고있고ㅜㅜ 힘들네유 다들 감기조심하세ㅇ요^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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