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완성 오르비스 10 |
10.
핸드폰을 놓고 나간것이 화근이였다. 아니, 핸드폰을 놓고 나갔더라도 마지막으로 홈 버튼을 누르고 나왔더라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이 모든게 자신의 실수였다. 미치도록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바보같이 핸드폰을 왜 두고가서! 난 진짜 병신 중의 병신이다. 정말….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마음으로 자책만 할 뿐이였다. 뱅글뱅글.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고, 또 돌아다녔다. 심장 박동이 쿵, 쿵, 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정도로 경수는 긴장해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매서운 눈빛은 경수의 눈을 틀림없이 경수를 향하고 있었다. 경수의 눈동자가 초점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경수를 똑바로 바라보던 종인이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낮아졌던 눈높이가 갑자기 위로 올라왔다. 경수는 차마 종인을 바라볼 용기가 나질 않아 고개를 숙인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종인이 핸드폰을 경수에게로 내밀었다. 핸드폰 액정에는 보란듯이 찬열의 사진이 띄어져 있었다. 경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건네 받았다. 볼에 바람을 넣고 찍은 찬열의 셀카 사진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젠 종인에게 자신은 남의 사진이나 맘대로 훔쳐보는 스토커처럼 보일게 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사진을 보며 마냥 행복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왜이리도 원망스러운지.
경수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을 깨고 종인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 이 사진 대체 어디서 났어? 걔 핸드폰 남한테 잘 안보여주는데. 특히 앨범은. " " 그게…, " " 혹시, 핸드폰 잃어버렸을 때 몰래 저장한거야? " " ……. " " 대답 안하는 거 보니 진짠가 보네. "
무언의 긍정은 절벽의 낭떠러지 끝까지 밀어냈다. 경수를, 그리고 종인을. 둘은 모두 각자의 절벽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고요한 정적사이로 아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제가 무슨 말을 하던 지금 이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는거였다. 그저 종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무딘 가슴은 날카로운 말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음엔 무슨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지, 그저 눈을 꽉 감고 떨고만 있을 뿐이였다.
조용한 교실 안에 퍼지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종인의 목소리.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진 경수는 손에 땀이 날정도로 핸드폰을 꾹 쥐었다.
" 마지막으로 물을게. 설마 박찬열 좋아하냐? " " ……. "
" 사람이 말하면 대답을 해, 좀!!! "
소리치는 종인의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던 고요한 분위기를 깨부쉈다. 여태껏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터져나와버렸다.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종인의 말에 경수가 흠칫, 하고 놀랐다. 움찔하는 어깨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웠다.
종인은 잠시 숨을 골랐다. 갑자기 터져나온 감정들을 추스리느라 어깨가 쉼호흡에 맞춰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심장이 숨소리에 맞춰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지금 이순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수의 대답 한마디에 집중했다. 자꾸만 침이 마르고 애가 탔다. 경수의 대답을 들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설마…, 설마. 그럴 일은 없을거야. 그럴 일은 없어.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경수의 숙인 머리통을 보았다. 오히려 대답을 듣지 않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경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이 체념한 듯 입을 꾹 닫고있었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이내 경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에 있는 종인에게만 들릴정도로 아주 조그맣게.
" 응, 나 찬열이 좋아해. " " ……. " " 미안해. "
미안해, 라고 말하며 경수가 종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차마 종인의 눈을 마주칠 면목이 없었다. 종인은 고개를 돌리는 경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그만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재생되었다. 언제나 맑고 투명했던 눈동자는 지금도 밝은 빛을 내고있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더.
둘은 아무말도 하지않은채 가만히 서있었다. 경수는 고개를 숙인채 벌벌 떨었다. 결국…말해버렸다. 내가, 박찬열을 좋아한다고. 말을 내뱉는 것은 의외로 너무나 쉬웠다. 실제로 좋아한다고 입밖으로 내뱉은 적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것이다. '좋아해'라고 말할때의 기분은 너무나도 오묘했다. 마치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쉽게 튀어나왔지만 입에서 나온 자신의 목소리를 되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풀어졌다. 하늘위로 붕 뜨는 것처럼 정말로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리고 몇 초뒤 엄청난 후회가 물 밀려오듯 밀려왔다. 대체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런 말을 한거지? 무얼 바라고 이런 말을 한걸까, 나는. 그렇게 후회하는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그때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을 꼭 말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강력하게 들었다. 여기서가 아니면 절대 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간절한 생각이였기 때문일까. 당사자가 없는 고백에서 경수는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 서있었다. 그렇다 해도 두려움 보다는 설레이는 감정이 더 많았다. 물론, 종인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잠시동안 가만히 있던 종인이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허-. 경수를 향한 명백한 비웃음이였다.
" 박찬열을 좋아해? " " ……. " " 그래서 그렇게 남몰래 사진 저장하고, 맨날 그거보고 좋다고 실실 쪼개고, 말 걸어주면 좋다고 또 웃고, 하는 짓 하나하나 지켜보고. 그것 때문에 존나 스토커 같은 짓이나 하고다녔냐?! " " ……. " " 설마 너가 그럴리는 없겠지 했는데… 진짜. 너 원래부터 그런 애였냐고, 어?! " " 미안해. "
경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종인의 주먹을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경수의 그런 모습들이 제가 말한 행동들에 대해 모두 인정하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이라고 이런 말을 한게 아니였다. 차라리 그런게 아니라고 손사래 쳤으면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그동안 눌러 참고있던 것을 한번에 터뜨리듯이 불같이 화를 내는 종인이였다.
" 씨발! 그런 죽을 것 같은 표정 짓지마. 미안하단 말도 하지 말고, 고개 숙이지도 마. 진짜 죽을 것 같은게 누군데?!! "
버럭 소리를 지르며, 종인이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우당탕탕, 바닥을 울리는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의자가 뒤집어져 나동그라졌다. 갑작스런 큰소리와 함께 쓰러진 의자를 보고 경수는 흠칫,하고 몸을 사렸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낄정도로 무서웠다. 지금 이순간, 제가 알던 종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수가 크게 뜬 눈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종인의 표정은 어딘가 화가 나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왠지모르게 슬퍼보이기도 했다. 항상 건조하기만 했던 종인의 표정이 이렇게나 큰 변화를 보이는건 처음이였다. 경수는 힘없이 널부러진 의자를 한번 보고, 다시 복잡한 얼굴의 종인을 보았다. 곧은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았다. 어느것도 거칠 것 없는 종인의 시선은 빗나감 없이 경수를 향했다. 마주친 종인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처럼 보였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아주 작은 원 속에 어떤 무언가를 가둬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일렁이는 게 아닐까. 얽힌 시선 속에서 짧게나마 느낀 것이였다.
" 차라리 아니라고 부정을 하란말야. 그게 아니라고, 네가 잘못 안거라고, 모두 오해라고! " " ……. " " 그렇게라도 했다면 난 다 덮어줄 수도 있었어. "
끝말을 나지막하게 내뱉는 종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참지 못하는 화때문인지, 아님 그 외의 감정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금방이라도 넘쳐 흐를듯한 애절함이 얼굴에 서려있는 종인이였다.
덮어준다? 대체 무엇을?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님, 친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대체 어디까지 덮어줄 수 있다는 걸까. 경수는 종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기에 더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모두 사실인데 내가 어떻게 아니라고 말해…. " " 너, 진짜…! " " 다 맞는 말이야. 네가 말한 것 처럼 사진 모으는 스토커 같은 짓 하고다니고, 몰래 훔쳐보고, 혼자 상상도 해봤어. 틀린거 하나도 없어. " " ……. " " 내가 너에게 이 모든게 아니라고 말한다는 건, 내가 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거야. "
경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작게 떨리는 목소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영영 한번도 고백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다고 해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싫었다. 그렇게 하는건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순백색을 띈 자신의 사랑을 더럽히는 짓과 같은 거였다.
종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하- 하고 웃었다. 그렇게도 박찬열이 좋아? 너무 좋아 죽겠어서 아니라 하기도 미안해? 순식간에 종인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 그래, 니맘대로 하던가 그럼. " " 무슨.. 소리야? " " 모든 사람들한테도 다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거 아냐? 틀린거 하나도 없다며. " " 뭐? " " 아, 물론 니가 좋아하는 박찬열 한테도. "
찬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사고회로가 멈춰졌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돌아갔다.
순식간에 그때의 상황이 머릿속에 하나의 시뮬레이션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경멸에 가까운 시선으로 벌레보듯 나를 바라보는 그.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나. 친구도 아니고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닌채로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는 우리. 그리고 가끔씩 그는 나를 향해 혐오스런 비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더러워.
상상만 했을뿐인데 심장이 저 아래쪽 밑바닥 끝까지 추락하는 느낌이였다.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정신없는 와중,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등이 빛을 내며 긴급상황을 알렸다. 입술이 저도모르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건 안돼. 절대로.
차갑게 말하며 종인이 교실밖으로 나가려 뒤를 돌았다. 뒷모습을 보이며, 찝찝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려 할때였다.
" 잠깐만! "
본능적으로 튀어나간 경수의 손이 덥썩, 종인의 교복셔츠 뒷자락을 붙잡았다. 무언가 잡힌 느낌에 걸음을 떼던 종인이 그자리에 멈춰섰다. 옷자락을 꾹 붙잡은채로 경수가 한발짝 다가섰다. 뒤돌아보지 않는 모습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런 뒷모습에 경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정리되지 않은 흐트러진 목소리가 무작정 튀어나왔다.
" 그, 그건 안돼. "
뒤돌아 꿈쩍않고 서있는 넓은 등은 대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경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난 찬열이랑 어떻게 해보겠다던가… 사귄다던가…, 그런 생각 해본적 한번도 없어. 그냥 나혼자 속으로만 떠올리고 좋아한거야. 아무한테도 말할 생각 조금도 없었어. 그건 정말이야, 믿어도 돼. "
비록 이쪽을 보고있지 않더라도,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빛은 간절했다. 구질구질하게 구걸하는 것처럼 보여도 종인이 제 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었다. 경수는 간절한 만큼 종인의 교복자락을 더 힘주어 꽉 잡아쥐었다.
" 생각해 봐. 나같은 애가 그럴 수 있을리가 없잖아……. "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경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이내 툭 떨어졌다. 역시나 변함없는 당연한 현실을 입밖으로 내뱉은것 뿐인데,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껴버렸다.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냉정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머릿속에 되새기는 순간, 너무도 슬퍼졌다. 갑자기 북받쳐 오른 감정들에 참았던 눈물이 수도꼭지가 열린듯 한꺼번에 왈칵 쏟아져나왔다.
" 너도 지금 내가 비겁하고, 가식적이고… 더러워 보인다는거 알아. 날 이해해달란 말 안할게. 나한테 욕해도 좋고, 마주치기 싫으면 아예 무시하고 모른척해도 괜찮아. 딴 사람들 시선이나, 게이새끼라고 손가락질 당하는거쯤은 견딜 수 있어. 근데, 그런데... "
경수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토해내듯 힘겹게 말했다.
" 찬열이한테만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만은……. " " ……. " " 그렇게 버림 받는건 싫어. "
절대로, 흐… 싫어, 흐윽…. 흐느끼는 목소리는 종인에게, 경수 자신에게 말했다. 지금 이순간 가장 하고싶었던 말이다. 제일 간절하게 바라는 나의 소원. 그건 단지 그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였다.
경수는 소리없이 울었다. 그러나 표정은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서럽게 울고있었다.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은 멈출 생각이 없는듯 처량하게 바닥으로 낙하했다. 툭, 투둑.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겨누고 있다해도 너만은 총을 들지 않는다면, 아마 그것만으로도 나는 꿋꿋이 버틸것이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찬열이한테만은 말하지 말아줘. " " ……. " "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찬열이… 좋아해서 미안해… 흐흑. 네 가장 친한친구 내가 탐내서 미안해…, 미안해. 다 내 잘못이니까…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종인의 뒤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자락을 꽉 쥔 경수의 손가락 끝이 악력에 하얗게 질렸다. 마침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내버렸다. 나는 진심을 외쳤고, 간절히 빌었고 또, 애원을 했다. 이제 남은 건 종인의 결정뿐이였다.
" ……. "
짧고도 긴 정적이 흘렀다. 경수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종인은 대답은 커녕, 가벼운 고개조차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난걸까? 조금의 미동도 없는 뒷모습을 보며 경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주 조금의 기대마저도 모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젠.. 정말 끝이다. 정말로.
이런 생각이 들자, 경수는 그렇게도 간절하게 올려다보던 고개를 힘없이 땅으로 툭 떨구었다. 그와 동시에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 자국을 남겼다. 짙게 찍힌 점같은 눈물자국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눈 앞이 깜깜했다. 긴장하고 있던 온몸에 힘이 빠지니, 꽉 쥐고있던 경수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지며 경수는 자연스럽게 잡고있던 옷을 놓았다.
그 때였다. 힘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무기력한 손이 공중에서 탁, 막혔다. 어느 순간 재빠르게 몸을 뒤로 돈 종인이 자신을 잡아놓고 있던 경수의 손목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탓에 커진 눈으로 경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발딱 들었다. 그 순간 경수를 바라보고 있던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경수를 보며, 종인은 아직도 조금은 화난 표정을 짓고있었다. 아직도 화가 난 것 같아보였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가 대체 뭣때문에 이러는 걸까.
종인이 경수의 손목을 잡은 손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그리고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 나 너 그렇게 생각 안해, 절대로. " " 뭐? " " 그럼 나도 친구 좋아하니까 비겁한거고, 남자 좋아하니까 더러운 건가? "
잡힌 손목이 아프다고 생각할때 쯤, 종인이 두 손으로 경수의 양 어깨를 턱, 붙잡았다. 한순간에 종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바로 입술을 부딪혔다. 읍…! 몸을 실어오는 종인의 무게에 경수가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종인은 경수의 발자국 만큼 앞으로 걸어가 밀어세웠다. 그 충격에 의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키스는 계속 되었다. 얼떨결에 뒤로 밀려나다보니 경수의 다리에 책상이 닿았다. 책상을 손으로 잡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지탱했다.
맞붙은 입술이 서로 겹쳐진 상태로 종인이 경수의 아랫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마치 아랫입술이 불에 데인 것 마냥 뜨거웠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머릿속이 과부하가 걸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만 서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건 종인의 날렵한 콧대와 쌍커풀라인이 보이게 내리깐 눈 밖에 없었다. 뜨거운 혀가 경수의 입술을 스쳤다.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지만,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입술에서 부터 번진 열에 온몸이 더워졌다. 책상을 짚은 손에 땀이 차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럴때마다 어깨를 잡은 종인의 손이 경수를 단단하게 붙잡아주었다.
어떻게 보면 짧고, 또 긴 시간이 흐르자 붙어있던 입술이 아쉽다는 듯 천천히 떼어졌다. 둘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서로의 입술에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순식간에 타올랐던 열기의 여운이 가시질 않은 듯 숨을 골랐다. 경수는 여전히 토끼눈을 하고 믿기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종인을 보았다. 내가 대체 무얼한거지……? 제어가 되질 않는 심장과 이상야릇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래야 차릴 수가 없었다.
어깨를 잡은 종인의 손은 경수가 조금씩 떨고있는 것을 느꼈다. 종인이 고개를 살짝 숙여 경수와 눈을 맞췄다. 떨리는 눈이 저를 바라보고있다. 당황스러워 하고있는 건 충분히 알지만, 이젠 더이상은 감출 수가 없다. 이제야 깨달아 버렸으니. 결심한듯 한번 쉼호흡을 하고 종인이 말했다.
" 나 너 좋아해. " " …어? " " 이제서야 알았어. "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온건지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종인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그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종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훨씬 더 부드럽고 안정된 목소리로.
" 그리고, 울지마. " " ……. " " 미안해. "
멍한 얼굴로 대답않는 경수를 보며 종인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경수의 어깨를 힘없이 놓았다. 떨어져나간 손에 잡혀있던 어깨가 가벼워졌지만, 오히려 마음은 무거워졌다.
종인은 가차없이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교실에 덩그러진 경수는 종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방금 전 발로 차여 바닥에 굴러다니는 의자도 보았다. 교실 바닥에 햇빛에 생긴 검은 제 그림자가 홀로 서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진정이 되니, 모든 것이 현실로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방금 전 일은 모두 꿈이 아니였다. 그 속에서 가장 생생히 느껴지던 건 울지마, 라고 말했던 목소리였다. 그 따듯하고, 부드러운 위로 속에서 경수는 평소에 알고있던 종인을 보았다. 너무나도 그리웠던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니 또 다시 울컥해졌다.
경수는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너무나도 서러워서, 그 울지 말란 소리가 그렇게도 슬퍼서 울고 또 울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갑자기 찬열이 생각났다. 찬열을 좋아하는 건 여전히 맞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버렸다. 오히려 싫어하고 증오했으면 나을텐데, 너는 왜 하필 나를, 나를….
경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주워들었다. 찬열의 사진이 띄어져 있는 액정에 약간의 금이 가있었다. 해맑게 웃고있는 찬열의 얼굴이 깨진 금에 갈라진 것 처럼 보였다. 경수는 갈라진 금을 없애고 싶은 마음에 깨진 액정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눈물에 번져 흐려졌다. 그렇게 좋아하는 찬열의 웃는 사진도, 방금 전 애달픈 얼굴을 하던 종인의 모습도 모두 흐려져 보였다. 경수는 깨진 액정을 문지른 손가락으로 조금 부어오른 입술을 매만졌다. 전혀 반대되는 상반된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딱딱한 액정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듯한 입술의 감촉이.
더이상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실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청소를 끝낸 찬열이 복도에서 걸어왔다. 경수를 발견한 찬열은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뛰어왔다. 경수의 앞으로 뛰어온 찬열은 해맑게 웃으며 신난다는 듯 말했다.
" 경수야, 나 청소 다했는데 종인이는 어디…… "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는 경수의 행동에 찬열은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자세히보니 경수가 조금씩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울고 있었다. 깜짝 놀란 찬열이 말했다.
" 너 설마……울어? "
평소처럼 찬열은 너무나 자상하고 따뜻하게 경수를 대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도저히 찬열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직까지는 내가 저를 좋아하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알게된다면 이런 행동은 영영 볼 수 없겠지. 그리고 제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더더욱 찬열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어 경수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눈물을 훔칠 수록 얼굴은 더욱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결국 경수는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바다 가야 하는데…… . 마지막까지 나는 참 나쁜 애였다, 진짜.
" 찬열아, 나 오늘 바다 못 갈 것 같애… 미안해… 정말, 미안해……. " " 뭐? 김종인도 없어졌는데, 무슨 소리야? "
경수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찬열의 옆을 지나쳤다. 정말로 경수는 평소답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찬열이 뛰어가 경수의 팔을 잡아 돌렸다. 굳어진 표정으로 찬열이 진지하게 물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렸다.
" 대체 무슨 일이야. " " ……. " " 무슨 일 있던거 맞지, 그치. "
부들부들 떨고있는 경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려 찬열을 보았다.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은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찬열은 그런 경수를 보며 흠칫 놀랐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울고있을 줄은….
" 찬열아, 이것 좀 놔줘... 제발. " " ……. "
경수가 다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순간 찬열은 경수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뜻이기 때문이였다. 경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으려 했지만 눈물 고인 눈은 너무나도 힘겨워보였다. 경수의 그런 우는 얼굴을 보자, 찬열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딘가 사연있는 애절한 눈빛에 찬열은 저도 모르게 스르륵 경수의 팔을 놓아주었다.
머리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약한 경수의 뒷모습을 잡고 싶었지만 찬열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뒤를 보이며 위태롭게 걷던 경수의 모습은 이내 계단으로 내려가며 사라졌다. 복도에 혼자 남은 찬열은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진심으로 경수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인지, 왜 우는 건지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눈물 고인 아스라한 표정이 자꾸 생생하게 떠올라 잊혀지질 않았다. 찬열은 한숨을 한번 푹, 쉬며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 뜯었다. 으으, 대체 무슨 일인데…! 정말. 마음이 미어진다는 게 아마 이런 기분일 거라고, 찬열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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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ㅠㅠㅠㅠㅠㅠ 오르비스가 이제 10편입니다 그동안 쟁여왔던 편들이 점점 바닥이 나고있ㄴ서여...앙대 서둘러 써야지ㅠㅠㅠㅠ 그럼 즐감해주세요~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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