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완성 오르비스 8 |
8. 경기가 끝날 때 동안 종인은 한 골을 더 넣었다. 이번엔 중거리 슛으로 시원하게 넣은 골이였다. 종인은 불편한 교복바지와 때탄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도 잘만 달렸다. 그리고 거의 끝날때쯤에는 아쉽게도 한 골을 먹었다. 그렇게 총 2:1로 종인과 찬열의 팀이 이기며 경기가 끝났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운동장에 나와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학교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골대 앞에 서있던 찬열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종인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어깨동무를 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 하이파이브! " 종인은 대답없이 찬열의 손바닥을 치며 하이파이브를 받아주었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짝, 하고 찰진 소리가 났다. 찬열은 흥분하며 종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너 진짜 대박이였어. 와…. " " 딱히 한것두 없는데 뭐. " " 그게 무슨 소리냐! 두 골이나 니가 혼자 다 넣었는데. 대단해. 역시 내 친구. "
아오, 끈적거려 좀 떨어져, 새끼야. 종인이 징그럽다는 듯이 몸을 움츠리며 찬열을 떼어냈다. 어깨동무가 풀어진 찬열은 허공에 떠있는 제 팔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나쁜놈이네 이거. 둘은 익숙하다는 듯이 서로 티격대며 학교 현관을 향해 걸었다. 그때 찬열이 스탠드에 앉아있다 막 일어나는 경수를 발견했다. 교복바지에 묻은 흙을 탈탈 털고있었다. " 어, 경수다. " " ……. " " 아까 경기 보러오라고 했더니 진짜 왔네? " 찬열은 활짝 웃으며 종인의 어깨를 잡고 스탠드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경수가 일어나 교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운동장에서부터 걸어오는 찬열과 종인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어느새 앞에까지 다가온 찬열이 경수를 보고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왔구나!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마지막에 깔끔하게 2:0으로 이길 수 있었는데. 아까워. 찬열의 말에 경수는 그러게, 하고 대답했다. 짧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스탠드 서있던 여학생들이 셋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수를 뺀 둘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경기 시작부터 운동장을 지켜보고있던 애들이란 걸 경수는 알고있었다. 찬열과 종인이 온 이후부터 계속 쏟아지는 따가운 여자애들의 눈총이 불편했다. 자신을 흘끗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경수는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여자애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 서너명의 여자애들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자애들의 손에는 이온음료 두개가 들려있었다. 여자애들 무리는 찬열과 종인 앞에 서서 이온음료 하나를 찬열에게 건넸다. 수줍은 공기가 주변에 확 펴졌다. " 선배님, 더우신데 드세요. " " 어? 어. 고마워. " 찬열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음료수 병을 받아 들었다. 찬열의 손에 들린 음료수 병을 보고 여자애들 무리는 정말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걱정스레 어둡던 표정들이 확 밝아졌다. 그리고 그 여자애들 무리는 마지막 한개 남은 음료수 병을 들고 종인에게로 다가갔다. 찬열의 옆에 서있던 종인에게 여자애들이 한번더 음료수를 건넸다. " 선배님도 이거 받으세요. " " ……. " 종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여자애가 내민 음료수병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페트병을 든 손이 무안해질 쯔음, 종인이 말없이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종인의 반응에 음료수를 건넨 여자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점점 표정이 굳어가다 종인이 음료수를 받아들자 깜짝 놀라며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종인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이 무미건조했다. 여자애는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 오늘 골 넣을때 되게 멋있으셨어요. 정말! " " 으응. " 종인이 어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무성의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애들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정말 최고였어요! 그리고는 종인과 찬열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여자애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뒤를 돌아 걸어갔다. 그때 어떤 여자애들중 한명이 경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여자애는 경수를 빤히 쳐다보다 관심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뭐야. 기분나쁘게…. 경수는 무릎을 모으고 앉은채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있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고백…비슷한건가? 경수는 점점 멀어져가는 여자애들 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찬열을 저 여자애들에게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실거라도 사올걸, 왜 진작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경수는 후회했다. 찬열의 손에 들린 이온음료를 보니 괜히 시무룩해졌다. 딱보아도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으니, 이런 선물공세 쯤은 찬열에게는 일상처럼 익숙할 것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경수는 찬열이 지구를 돌고있는 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경수는 힘없이 반쯤 녹은 쭈쭈바를 입에 물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찬열이 앉아있는 경수의 앞에 섰다. 경수는 고개를 들어 찬열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등지고 서있는 탓에 눈이 부셨다. 찬열이 손가락으로 경수가 물고있는 쭈쭈바를 가리키며 물었다. " 경수야, 한 입만 먹어도 돼? " " 이, 이거? " " 응. " " 음료수는 안마셔? " 찬열은 여자애들이 준 음료수를 입에 대지도 않고, 제가 먹던 쭈쭈바를 달라고 했다. 쭈쭈바는 이미 자기가 입을 댔던 것이지만, 음료수는 뜯지도 않은 새것이였다. 게다가 목마를 때는 이온음료가 더 나을텐데 말이다. 경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 경수의 생각과는 달리 찬열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도 간단하게.
" 그냥 이게 더 맛있어보여서. 먹어두 되지? " " 어,어? 먹어. " 그렇게 말하며 찬열은 경수의 손에서 쭈쭈바를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경수는 찬열의 의외의 행동에 가만히 있다가 쭈쭈바를 내주었다. 찬열은 고개를 뒤로 젖혀 입을 대지 않고 쭈쭈바를 먹었다. 반쯤 녹은 시원한 내용물이 어렵지 않게 흘러나왔다. 경수는 찬열이 쭈쭈바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갑자기 시무룩해져있던 기분이 다시 풍선을 단것처럼 들떠올랐다. 어딘가 찬열에게 자신이 가깝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고, 또 특별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찬열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애들과는 다른, 그런 존재. 경수는 좀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감정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찬열이 입에 넣은 쭈쭈바를 꿀꺽 삼켰다. 이가 시리는 시원함에 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땀에 젖은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며 한입 먹은 쭈쭈바를 경수에게 건네주었다. " 아, 시원해. " " 그거 가지고 되겠어? "
경수가 웃으며 쭈쭈바를 찬열에게서 받아들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없던 환한 미소가 자신도 모르게 지어지고 있었다. 경수의 웃음에 찬열도 씩 웃었다. " 감질맛 나니 참 좋네. " " 그냥 너네 것 까지 사올 걸 그랬다. " " 됐어, 학교들어가서 물 마시면 돼. " 둘사이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대화가 오갔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둘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이였다. 종인은 그런 둘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딘가 찝찝하고 탐탁치가 않았다. 종인은 경수의 환히 웃는 얼굴이 자꾸만 거슬렸다.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눈매와 이를 드러내며 가볍게 올라가는 입술, 그리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손까지 모두 시선이 향했다. 조금은 굳은얼굴로 보이는 종인이 갑작스레 경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는 찬열과 경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나도 쭈쭈바 한 입만. " " 어, 어? " 갑작스럽게 걸어오는 말에 경수가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그게. 올려다본 종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찬열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닌 두 골의 주인공이였으니. 경수는 종인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물론 줄 수는 있지만, 다들 왜 이런 싸구려 쭈쭈바를 먹고싶어 하는거지? 경수가 손에 들고있는 쭈쭈바를 보며 생각했다. 이게 그렇게 맛있나. 딱히 엄청 맛있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그 사이, 종인은 잠시 우물쭈물하는 경수를 보며 재촉했다. " 박찬열만 주고 왜 난 안줘? " " ……. " " 게다가 난 네 짝인데 말야. " " 아니야, 너도 주려고 했어! " 경수는 화들짝 놀라며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저었다. 댕그랗게 커진 눈이 경수가 놀란 정도를 알려주었다. 종인은 그런 경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 그럼 한입만. " 종인이 경수의 손에서 쭈쭈바를 가져갔다. 입을 대지 않고 먹은 찬열과는 반대로 종인은 입구에 아예 입술을 대고 쭉, 빨았다. 옆에 있던 찬열이 말했다. 야, 경수껀데 드럽게 입 대고 빠냐? 찬열의 타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용물들이 센 압력에 강하게 빨려들었다. 점점 사라지는 내용물은 이내 바닥을 보였다. 종인이 몇번 쭉 빨고 나니, 쭈쭈바는 이미 빈 통이 되있었다. 종인이 아쉽다는 듯 쭈쭈바에서 입을 뗐다. " 어? 다 먹었다. "
종인이 경수에게 다시 쭈쭈바를 돌려주려다 멈칫했다. 경수는 다 먹은 쭈쭈바 통을 멍하니 바라보다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찬열이 왜 애껄 다먹냐고 구박을 했지만, 종인은 장난스럽게 웃었을 뿐이였다. " 아, 왜 애껄 다먹어! " " 이미 늦었어. " 찬열의 말에 경수는 안타까운 눈으로 종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많이 못먹은건데…. 경수의 조그마한 말에 종인이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경수의 얼굴을 보니 눈이 축 쳐져 울상이 되있었다. 그런 표정을 보고 종인은 애꿏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아씨, 이게 아닌데. 그런 얼굴을 짓게 하려던 건 절대 아니였다. 종인은 잠시 생각하다, 방금 전 여자애들한테 받은 이온음료를 경수쪽으로 내밀었다. 경수는 갑자기 내미는 이온음료를 보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 뭐야? " " 이거 너 다먹어. " " …내가 이거 받아도 돼? " " 쭈쭈바랑 퉁친다고 생각해. " " 그래도… 널 좋아하는 애들이 준거잖아. " " 나도…! " 종인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열었던 입을 닫았다. 삼켜진 말은 그대로 뱃속으로 사라졌다. " ……. " " …아니다. " 나도, 그 뒤의 말은 대체 무엇이였을까. 종인은 억지로 경수에게 이온음료를 넘겨주었다. 그냥 먹어. 종인의 강압적인 손길에 경수는 얼떨결에 이온음료를 받아들었다. 손에 잡힌 음료수병은 온몸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아마 저 여자애들은 종인을 위해 제일 시원해 보이는 병을 골랐을 것이다. 그런 세심한 정성들을, 간절한 마음들을 내가 받아도 될까. 어찌보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동경하는 입장에서 경수도 저 여자애들 중 하나였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그것을 받아주기를 기다리는 일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 찬열에게 무언가를 주었는데, 찬열이 그것을 다른사람에게 대수롭지 않게 넘겨준다면… 그건 정말 슬플 것이다. 그렇기에 경수는 선뜻 음료수를 마시지 못했다. " 그럼 이제 들어가자. 수업종 치겠다. " " 응. " 찬열의 말에 경수가 끄덕이며 일어났다. 두 손으로 음료수병을 꼭 쥔 채로.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경수의 손이 젖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온음료는 교실에 들어가서 종인과 같이 마시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경수의 맘도 편할 것 같았다. 찬열과 종인의 사이에 경수를 두고 셋은 나란히 교실로 들어갔다. * 어느새부턴가 셋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찬열이 종인의 자리에 자주 찾아오게 되면서 그 짝인 경수와도 말을 섞는 횟수가 많아졌다. 셋이서 같이 시내를 나간 적도 있었고, 급식을 먹을 때도 자연스레 같이 앉게 되었다. 자연스레 서로의 번호를 알게 되고 메신저로 시시콜콜한 잡담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항상 소극적이였던 경수의 태도가 조금씩 조금씩 밝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웃음이 많아진 것이다. 셋이 가까워진 데에는 전적으로 찬열이 큰 영향을 미쳤다. 원래 종인과 친했던 찬열은 말을 잘 붙이지 못하는 경수를 다정하게 챙겨주었고, 오히려 먼저 장난을 치면서 친하게 다가갔다. 오토바이 사건으로 조금 껄끄러웠던 일이 있었던 종인과 경수의 사이를 붙여주기 위해 열심히 입을 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셋은 큰 트러블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경수는 그런 찬열에게 정말로 고마웠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항상 자신을 챙겨주고 위해주는 그런 행동들 하나하나에 감동을 받았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찬열은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그런 모습에 처음 보았을 때부터 찬열을 동경하게 되었고,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오래된 친구관계인 찬열과 종인 사이에 끼게 된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이렇게 끼게 되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믿고 기댈 수있는 하나의 아주 커다란 지지대가 생긴 것만 같아서 든든했다.
시끌벅적한 쉬는시간을 틈타 찬열이 종인과 경수의 자리로 찾아왔다. 찬열은 자리를 비운 종인의 앞자리에 뒤를 돌고 앉았다. 수업이 끝나고 교과서를 정리하던 경수가 찬열을 보고는 슬몃 웃으며 말했다. 안녕. 찬열도 하이,라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종인의 목덜미를 콕콕 찔렀다. 책상위에 죽은듯이 고개를 널부러뜨리고 있는 종인이였다. 찬열이 손가락으로 쿡쿡 건드려도 종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얘 수업시간에도 이래? 경수야? " 찬열이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경수는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 수업은 나름 열심히 잘들어. 창밖을 자주 보긴 하지만. " " 흠, 그나마 다행이군. " 찬열이 말했다.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종인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그래도 종인은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찬열이 재미없다는 듯 에이, 하고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둘의 그런 모습들이 귀여워 경수가 핏 웃었다. 그때 갑자기 찬열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경수에게 물었다. " 근데 너 깁스 거의 풀때 다 되지 않았어? " 응. 내일 병원 가야돼. " 경수가 쑥쓰럽게 오른손에 감겨진 깁스를 슥슥 어루만졌다. 드디어 내일이였다. 거칠거칠한 붕대와 딱딱하고 묵직한 석고가 이젠 한몸처럼 익숙해질 참이였는데. 다음 날이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오른손이 가벼워 질것이다. 찬열이 깁스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말했다. 많이 불편했겠다. 경수는 아니 그냥 뭐…, 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 내가 같이 가줄까? " 찬열이 물었다. 너무도 친절하게 동의를 구하는 물음이였다. 내가 같이 가도 너는 괜찮겠니? " 그…, " " 내가 병원 데리고 가기로 했다. " 순간, 경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래' 라고 말할뻔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종인의 목소리에 막혀 경수의 그래, 는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찬열과 경수는 갑작스럽게 입을 연 종인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일어난거야? 기척없이 깨어난 종인은 언제 책상위에 널부러져 있었냐는 듯 대충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말했다. 종인의 목소리가 잠기운에 꽉 막혀 낮게 가라앉았다. " 그…때? " " 응, 그때. " 빤ㅡ히 눈을 맞춰오며 종인이 물었다. 그때, 그때가 언제지……. 아, 바로 그때였다. 찬열의 핸드폰을 갖다주러갔다 허탕을 치고온 날.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쭉 뻗은 직선도로와 하나의 선처럼 보이던 주황빛 가로등, 휘날리던 나무들, 그리고 큼직한 김종인의 등도. 모두 필름처럼 촤르륵 지나가며 기억이 났다. 그때 종인이 경수를 뒤에 때우고 집에까지 바래다주는 길에서였다. 당시 피곤했던 경수는 잠결에 종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 같이 가자. ' 그리고 정확히 무슨 질문이였는지도 모른채로, ' 그래…. '
자신은 대답했었다. 모든게 기억이 나긴했다. 당시 잠결에 희미했던 정신으로 한 대화였기에, 지금 생각하면 그게 꿈이였는지, 진짜였는지 헷갈렸다. 그래도 종인이 저렇게 말했으니 진짜이지 않을까 싶다.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생각..나. "
경수의 대답에 종인이 뿌듯하게 웃었다. " 그치? 박찬열? 내 말 맞잖아. " " 아……. " 찬열이 그런 종인을 벙찐 표정으로 보다가 갑자기 경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찬열의 커다란 눈이 경수를 향했다. 눈을 계속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워 경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 그게 종인이랑 먼저 가기로 했어서…. " "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 순간 찬열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풀어졌다. 착각이였을까? 경수는 찬열에게 미안해져 어쩔줄을 몰랐다. 사실 제가 잘못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찬열을 실망시킨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경수가 슬금슬금 찬열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 그래도... 진짜 미안. " " 에이, 네가 미안할게 뭐있어. 원인제공자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 그렇게 말하며 찬열은 웃고 있었지만, 조금은 시무룩해진 것 같기도 했다. 실망한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옆에 앉은 종인은 뭐가 좋다는 듯 혼자서 소리없이 킥킥 웃고있었다. 그런 종인을 경수가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웃을 기분 아닌데, 뭐가 좋다고 계속 웃어대는지 원. 경수는 속으로만 애꿏은 원망을 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찬열의 내리깔아진 시선. 그 시선이 좀처럼 잊혀지질 않아 마음속에 자꾸 딱딱한 돌같은 무언가가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 종인이 물었다. " 무서워? " " …조금. " " 지랄 말고. 너 떨고있잖아. " " 그, 그래? " 종인의 말대로 경수는 떨고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종인과 경수는 병원 로비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 로비를 돌아다녔다. 깁스를 한사람도 있고, 링거를 꽂고다니는 사람도 있고, 휠체어를 타고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이 정도 상처는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경수는 겁이 많았다. 순서가 다가올수록 자꾸만 긴장되었다. 이제 경수의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석고깁스는 전기톱으로 자른다고 했다. 깁스를 처음 해본 경수는 그 말을 듣고 까무러쳤다. 손을, 잘라? 전기톱으로? 물론 병원이니 손이 잘려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픔이 따라올 것만 같았다. 경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쉼호흡을 했다. 후아, 후아. 갑자기 종인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잡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아하하하, 하는 큰소리를 내면서 그야말로 빵 터졌다. 경수는 놀란듯이 웃고있는 종인을 쳐다보았다. 대체 얘가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종인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웃음의 열기가 가시지는 않은 것처럼 히끅히끅 웃었다. " 왜 웃어? " " 겨우 깁스 푸는데 쉼호흡하는 애가 어딨어. " " …그래두 무서운 걸 어떡해. " " 아, 진짜 널 어떡하냐. " " 너가 나 대신 풀어줄거 아니면 조용히 해. "
경수는 괜히 자신이 했던 행동이 부끄러워져 올렸던 손을 무릎위로 내려놓았다. 종인은 아직도 웃기다는 듯 얼굴에 웃음기를 없애지 않았다. 그러다 팔꿈치를 다리에 대고 고개를 푹 숙인 경수의 고개를 보려 고개를 숙였다. " 야, " " 왜. " " 같이 들어가도 돼? " " 몰라. " " 그럼 들어갈래. " 때마침 카운터에 있던 간호사가 경수의 이름을 불렀다. " 도경수 님,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 " 아, 네. " 경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간호사를 따라갔다. 종인도 경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치료실2라고 써있는 빈 방에 들어가니, 심장이 갑자기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침이 바싹바싹 마르고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딱딱하게 굳은 경수의 뒷모습을 보며 종인은 소리없이 웃었다. " 나 있는데 이깟게 뭐가 무섭다고 떨어. " " 안 떨려고 하는데 자꾸 떨린다. " 의자에 앉으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경수가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가 이것저것 의료용구들을 준비하자, 이내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경수에게 물었다. 크게 불편한데는 없었죠? 손 이쪽에 딱 붙이세요. 경수는 깁스를 한 손에 힘을 빼고 진찰대 위에 올려놓았다. 의사가 펜으로 깁스를 자를 곳을 대충 슥슥 긋고 조그마한 의료용 전기톱을 들었다. 크게 날카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기톱은 전기톱이였다. 갑자기 경수는 의자를 박차고 치료실을 뛰쳐나가고만 싶었다. 경수의 어깨가 들썩였지만 종인이 뒤에서 두손으로 잡아 꾹 눌러주었다. 어깨위로 느껴지는 손의 압력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뺐다. 전기톱이 소리를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칼날이 깁스의 표면에 닿는 순간, 경수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종인의 팔목을 세게 쥐었다. 지이잉-. 지이잉-. 전기톱의 칼날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석고를 갈랐다. 소리가 커질수록 종인의 손목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깁스를 푸는 일은 생각외로 참을만했다. 덜덜 떨리는 진동과, 마찰에 의해서 따듯함이 느껴지는 게 끝이였다. 눈을 찔끔 떠 깁스를 푸는 오른손을 보니 전기톱이 깁스의 한가운데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프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경수는 조금씩 마음을 놓아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종인의 손목을 잡은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빠졌다. 서서히 종인의 손목을 놓으려 했을 때였다. 종인은 반대편 손으로 경수의 손등위를 덮었다. 덕분에 경수는 종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경수는 자연스럽게 감겨오는 따듯한 손바닥에 종인을 올려다 보았다. 종인은 그저 깁스를 푸는 과정만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경수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세개의 손은 서로 얽혀진 상태로 깁스를 풀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깁스를 푸는 시간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의사는 전기톱을 빼내고 조심스럽게 석고를 분리했다. 그리고는 감겨있던 붕대도 풀자, 손등의 흰 살이 보였다. " 손 좀 쥐었다 펴볼래요? " " 네. " 경수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그동안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을 쓰려니까 묘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크게 움직임에 지장은 없었다. 의사가 경수의 움직이는 손가락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잘 붙은 것 같네요. 이제 가셔도 됩니다. " " 아, 네. 감사합니다. " 경수는 치료실을 나오며 계속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우와… 시원해. 모든 손가락이 움직여지게 신기했다. 손이 날아갈듯 훨씬 가벼워졌지만, 무언가 사라진듯 허전하기도 했다. 종인은 그런 경수의 손을 보며 물었다. " 안 아프지? " " 내가 있어서 그래. "
종인은 평소에 잘 짓지 않던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경수는 그런 종인의 얼굴을 보다가 픽, 하고 소리를 냈다. 깁스를 풀때 종인이 손등을 꼭 덮어준 것이 생각났다. 그 손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조금은 의지가 된 것 같아 고마웠다. " 응, 고마워. "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함께 경수는 활짝 웃었다. 경수의 표정을 보며 종인은 순간 멈칫했다. 그동안 항상 찬열의 앞에서만 보였던 얼굴이였다. 항상 경수는 종인의 앞에서 살짝만 웃거나, 시무룩한 얼굴, 입이 일자로 닫혀있는 그런 표정만 지어왔다. 그러다보니, 종인이 제대로 경수가 웃는 모습을 본건 처음이였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불순물도 없는 순수한 미소를 보자 종인은 갑자기 경수에게 참을 수 없이 미안해졌다. 종인이 경수의 천천히 오른손을 잡아올렸다. 반사적으로 손가락들이 움츠러들었다. 종인이 방금전의 장난스런 모습을 지우고 말했다. 그러나 너무 진지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 미안. " " 갑자기 왜…. " " 많이, 아팠지. "
두번째 사과였다. 종인은 곧게 펴진 두개의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 때문에, 이런 길고 곧은 손가락이 갑갑한 곳에 가려져있었다. 처음 커다란 붕대를 감고 왔을 때에는 아무일도 아닌 듯이 멀쩡했는데, 오히려 깁스를 푸른 뒤에야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과연 죄책감은 사라질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경수는 종인이 평소보다 조금 이상해진 것을 눈치채고 슥 손을 뺐다. 그리고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처음 깁스를 하고 종인을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많이 아팠지, 라고 묻는 말이 꼭 가슴을 푹 찌르는 것만 같았다. 왜 이제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작에 나왔어야 했을 말을 왜 지금에서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뒤늦은 사과에 왜 자신은 심장이 내려앉는지. 경수는 손을 숨긴채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 다 지난일이니까, 괜찮아. "
정말로 괜찮아보인다는 듯 경수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경수를 보며 종인은 어딘가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 넌 쓸데없이 괜찮아,라는 말을 너무 자주해. " " ……. " " 집에나 가자. "
둘은 병원 밖으로 나와 오토바이를 세워놓은 곳으로 걸었다. 날씨가 많이 풀려 그닥 기온차가 심하지는 않았다. 종인이 오토바이를 도로변에 세우자 경수가 그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헬멧을 쓰고 종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찬열의 집에 간 일을 마지막으로 종인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탄 것은 처음이다. 조금은 오랜만이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어느샌가 자신은 종인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자세에 익숙해져 있었다. 겨우 한번 경험한 일인데도 익숙해져 버리다니. 경수는 이런 자신에게 조금 놀라다, 말없이 웃어버렸다. 그때 종인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 오빠 등 넓지? " " 왜 오빠야! "
볼을 종인의 등에 기대고 있던 경수가 얼굴을 떼며 짜증을 냈다. 발끈하는 경수를 보며 종인이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웃음은 전염된다는말이 진짜였나 보다. 경수는 종인을 따라서 웃었다. 한참을 장난치던 둘은 서서히 웃음을 멈추었다.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리고 출발할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종인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허리춤에 감겨있는 경수의 손을 보았다. 종인도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에는 단단하고 무거운 석고덩어리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하얗고 가벼운 손가락이 허리를 감싸고 있다. 그 날밤의 느낌과는 아주 미묘하지만 확연히 달랐다. 종인은 숨을 한번 들이쉬고 이내,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오토바이의 바퀴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봄이 온것 같기도 하고….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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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렁넝입니다 전개가 조금 느린편이여도 이해 해주세요ㅠㅠ 겟팅 슬로모션~ 그런데 대체 암호닉이 뭔가요... 뭔가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인티에 글을 잘 안올려봐서 모르겠네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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