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여관 - 이방인
출격! 애증남녀!
0 4
그녀의 이유
"안녕하세요, OOO 초등학교 친구 전정국입니다"
아무도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전정국은 민윤기에게 통성명을 했다. 민윤기도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일단 알게 되었으니 예의상 가벼운 목례로 인사했다. 민윤깁니다. 민윤기답게 앞치레 없이 깔끔하게 제 이름만 말하니 얼떨결에 함께 앉은 박지민도 덩달아 박지민입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게 느닷없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민윤기에 미안할 뿐이었다. 과제하러 왔는데 이게 무슨 봉변인가. 나야 그렇다 쳐도 민윤기는 전정국과 박지민하고는 일말의 인연도 없는 걸. 아마 내가 아니었으면 평생 모르고 지낼 사이이었을지도.
초등학교 친구는 개뿔, 그놈의 친구, 친구, 친한 사이, 나 싫다고 한 게 누구더라. 농담 참 재밌네. 조금 빈정거리는 얼굴로 비스듬히 전정국을 바라본 나는 던지는 듯한 투로 말을 던졌다.
"꼭 내 옆에 이렇게 앉아야 돼?"
"왜? 하던 거 해"
아니 내 말은 저리 좀 가라고. 길게 말해봤자 그다지 들어먹지도 않을 것 같은 전정국에 티 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민윤기는 전정국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말하는 듯이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내가 알리가, 당장 옆에 와도 못 알아챘던걸요. 그저 나를 두고 떠나지 말라는 뜻으로 민윤기에게 멋쩍게 입꼬리를 올려 보이자 전정국이 들고 있던 컵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뭐 해? 아까 뭐 열심히 하던데 안 해?"
아, 한다구요. 우리 엄마도 나한테 과제하라고 재촉 안 하는데. 썩은 얼굴로 시선을 내려 노트북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얼른 다해버리고 집에 가버려야지 하며 억지로 긴 문장을 읽어나가려 하는데 전혀 진전이 없다. 읽은 문장을 또 읽고, 또 읽고. 몇 번을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시 문장의 첫 부분으로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숨을 길게 뱉으며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어지간히 하다 진짜로 선옥이한테 알아서 하라고 그냥 보내버려? 분명 한글로 쓰여있는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건 무슨 일일까.
당이 떨어져서인가.
역시 케익을 먹어야 해. 턱을 괴고 한참을 생각하던 내가 옳다구나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전정국이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는 내 손목을 잡고 말했다.
"어디 가게"
"케익 먹게 이것 좀 놔줄래"
그렇게 말하며 전정국의 단단한 손에 잡인 손목을 비틀자 순순히 힘을 풀어준다. 꼴에 컸다고 좀 세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전정국의 성장을 느낀 나는 떫은 표정으로 돈을 챙겼다. 그러자 나도, 나도 먹을래, 하며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전정국.
"뭐, 네 건 네가 사 먹어"
"누가 사달래? 나도 내 돈으로 케익 사 먹을 거야"
흥, 그래라. 괜히 한 방 먹은 기분에 말없이 케이크 쇼케이스 앞에 선 나는 세 종류 정도 되는 케익을 살펴보다 유리 위로 그나마 가장 무난하게 생긴 케이크를 찜하듯 가볍게 톡 찔렀다. 그리고는 한 발짝 옆으로 서서는 얼그레이 쉬폰 케이크 주세요, 하고 주문하는데 자기도 케이크 먹을 거라면서 케이크는 쳐다보지도 않는 전정국이 내 옆에서 알짱거린다. 잔돈과 영수증까지 알차게 챙겨 넣고 등을 돌리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전정국의 우물쭈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 저도, 얼그레이 쉬폰 케이크 주세요"
나랑 똑같네. 조금만 어렸어도, 조금만 더 친했어도 나 따라 하지 말라며 짓궂게 장난이라도 쳤을 텐데.
이런 생각하는 나도 참 푼수 떼기 같다.
>>출 격 ! 애 증 남 녀 !<<
W. 선옥
전정국의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로 돌아오자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하고 있는 박지민과 모니터에 곧 빨려 들어갈 듯 열정적으로 자료를 찾고 있는 민윤기가 나란히 앉아있다. 누가 보면 방금 치고받고 싸운 줄. 둘의 미친듯한 어색함에 나마저도 휩쓸려 조난당할 것 같다. 도저히 내가 어떻게 구제해줄 수가 없는 어색함이다. 게다가 대학생활 한평생 저렇게 열중하고 있는 민윤기는 처음 본다. 얼마나 어색했으면, 하는 안타까움도 잠시 노트북 모니터를 방패로 곧 잠에 빠져들듯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는 민윤기에게 말했다.
"열심히 자료 찾는 척하지 마세요, 선배"
"들켰네"
민윤기는 들켰네, 하며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굳었던 몸을 풀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 그냥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 이대로 이선옥한테 그냥 보내버리자"
"무슨 소리예요. 걔 너무 믿으면 안 돼요"
"하..."
하... 그 짧은 한숨에도 민윤기의 한탄과 집을 향한 열망이 열 배 정도 농축되어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얼른 집에 가고 싶을 것 같긴 하다. 내가 민윤기 동네에 과제하러 갔는데 과제하다가 난데없이 민윤기 여사친이라며 여자 두 명이 대뜸 우리 테이블에 앉아서 사담을 하면 썩 기분이 좋진 않겠지. 어색하고, ... 또 어색하니까. 그래도 아직은 못 보내준다는 게 현실이라는 점. 이것 참 안타깝게 됐습니다 하하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는 우리의 절망적인 대화를 훔쳐듣던 박지민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핸드폰을 내렸다.
![[방탄소년단/전정국] 출격! 애증남녀!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11/30/21/adaa80c0bfb7f6d63e5edf7f0be1e904.gif)
"아 둘이 팀 과제 하는 거였어요?"
그럼 지금까지 뭘 했던 거였을까요? 속뜻을 모르겠는 박지민의 질문에 그럼요? 하고 역질문을 하자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헤실 거리며 웃기만 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민윤기는 박지민의 얼굴을 보는 사람 다 무안할 정도로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 무슨 생각으로 질문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이 에헤이, 하며 손을 힘없이 휘적였다.
"무슨 그런 살벌한 소리를 해요. 저와 OOO는 그저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입니다"
"..."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커녕, 이번 학기만 지나면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그럴 사ㅇ..."
아, 나도 알겠다.
민윤기의 강력한 부정에 괜히 울컥한 나는 눈을 세모나게 뜨고 대꾸했다. 물론 그런 사이 아니지! 근데 무슨 부정을 해도 저렇게 오버스럽게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2학기 시간표도 모르면서, 2학기 때 같은 강의에서 마주치면 나 어떻게 보려고?
"선배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게 왜 살벌한 소리에요?
"살벌한 소리지, 이선옥이 여기 있었으면 저 말 듣고 웃겨가지고 바닥 굴러다닐 거다"
그건 인정. 바닥 하나는 깨끗해지겠네.
그래도 면전 앞에서 내 앞담화 까는 걸 들은 것마냥 기분이 썩 상쾌하진 않다. 선배라서 막 대들 수도 없고, 소금쟁이처럼 안 들리게 구시렁거리던 나는 그릇이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내 것까지 받아올 생각을 했는지 포실 포실하게 생긴 케익 두 조각 중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는 전정국. 내 돈으로 시킨 거지만 전정국에게 조금 감동할 뻔했다.
햄버거 주니어 세트를 시킨 유치원생 대하듯 전정국이 건네주는 포크를 받아든 나는 아무것도 없는 포크 머리를 입에 물었다. 나 포함, 우리 넷의 어색한 기류를 읽으며 포크를 까딱거리는 입장난을 하는데 언제 그걸 본 건지 전정국이 내 입에서부터 포크를 뺏어든다.
"왜"
"너, 다쳐 그러다"
남 이사, 나 다치는 게 무서워서 그렇게 나를 밀어 넘어뜨렸냐. 전정국에게 눈을 앙칼지게 떠 보이던 나는 손에서 포크를 뺏어 케이크에 꽂아 넣었다. 얼른 먹고 과제 끝내서 민윤기나 집에 보내야지 싶어 힐끔 앞을 올려다보는데 이제 보니 한두 시간 만에 민윤기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짙게 져있다. 이렇게 세월의 풍파를 단시간에 정통으로 맞을 수 있구나 싶다. 애써 모르는 척 얼음이 거의 다 녹아 밍밍해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손가락들 끝으로 다라락, 리듬감 있게 테이블을 치던 민윤기는 안절부절못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카페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괜스레 미안해지는 것이 그냥 지금이라도 집에 보내버릴까 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건지 노트북 모니터를 닫은 민윤기가 말했다.
"나 화장실 좀"
신나게 아이스티를 마셔대더만. 눈을 길게 깜빡거리며 갔다 오라는 눈짓을 해 보이자 조금 다급한 옆걸음질로 화장실로 향하는 민윤기. 갔다 오면 중복 자료 정리하고 선옥이한테 보내자 해야겠다. 아무래도 여기서 좀 더 하자고 하면 조약 볕에 말려놓은 감말랭이처럼 되지 않을까. 민감말랭이. 케익 한 입, 밍밍한 아메리카노 한 입 하며 천천히 열심히 모아놓은 글과 링크를 확인하는데 옆에서 조용히 있던 전정국이 온전히 세 명만 자리에 남게 되기가 무섭게 말문을 텄다.
"야, 솔직히 나는 반대야"
갑자기 반대라며 단호하게 멍멍이 소리를 지껄인다. 박지민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빨대를 물고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
"뭐가?"
"내가 진짜 친구라서 말해준다. 안 어울려"
"그러니까, 뭐가, 내 옷?"
도대체 누가 진짜 친구인지. 입고 있는 니트의 어깻죽지를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들어 보이자 전정국은 답답하다는 듯이 마구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할 거 아녀. 입으로 나온다고 다 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가 알 수 없는 전정국의 마음에 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하고 성질 아닌 성질을 부리자 화장실 가버린 민윤기의 빈 자리를 가리킨다.
![[방탄소년단/전정국] 출격! 애증남녀!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1/31/0/c71d86ab16efb21804fb6883657d348d.gif)
"너하고 저 사람 안 어울린다고"
박지민하고 짰냐?
입안에 남아있는 케익을 씹어 넘기느라 묵묵부답 무표정으로 있으니 내 대답을 재촉한다. 내가 OOO, 너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아직 그렇게 깊은 사이가 아니라면 한 번 다시 생각해봐, 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지는 않다니까? 뭐라고 대답 좀 해봐. 그런 전정국의 재촉에도 대답을 해주기 싫은 건 내가 변태라서 그런 걸까. 이미 나와 민윤기의 사이를 알고 있는 박지민은 전정국의 어이없는 질문에 자기가 다 짐짓 놀란 얼굴로 양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
민윤기가 지금 화장실에 간 게 이렇게 고마울 일이라는 건 아마 우리 조상님도 몰랐을 것이다. 이 소리를 들었다면 당장 집에 가야겠다며 가방을 챙겨 갔을지도. 대답 좀 해보라니까? 어? 하며 자꾸만 들이대는 부담스러운 전정국의 얼굴을 저리 좀 가라며 밀어냈다. 고분고분하게 밀려난 전정국은 내 손이 닿은 이마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 조금 텁텁한 입안에 마른침을 넘기던 내가 말했다.
"너는 팀플을 케미로 하니?"
"ㅌ, 팀 뭐? 케 뭐?"
"과제하는데 어울리고 안어울리고가 어딨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케익이나 먹어"
과제...? 하며 멍하니 계속해서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전정국은 미간 주름을 펴고는 포크를 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방금 전 망상병 뺨치는 헛소리는 조금 웃긴 모양인지 혼자 흐, 참, 허... 하며 피실피실 스타카토 붙은 실소를 터뜨려냈다. 얼마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전정국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 정상인 내가 붓다와 마리아의 마음으로 이 어린 양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수밖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아... 그래도 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전정국은 케익을 크게 퍼서는 박지민에게 건넸다. 그걸 또 입가에 홍차 크림을 다 묻혀가면서까지 받아먹는 박지민.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원래 주말에 알바하지 않나.
"지민 씨는 오늘 알바끝난거에요?"
"네, 끝나서 집에 가려는데 딱 정국이랑 만나서 온거에요"
"아"
"저도 과제 해야 하는데ㅎ, 오늘 여섯 시까지 제출이거든요"
엄지로 입가에 묻은 크림을 싹싹 닦아 먹던 박지민은 뭐가 마냥 좋은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섯 시...? 시간을 들은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는 중천에서 이제 조금씩 저물어가려는 해를 가리켰다.
"이제 다섯 시 다돼가는데...?"
"아, 다섯 시요? 괜찮아요"
"..."
"가 아니구나"
어떡하죠... 하며 바른 태세 전환으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박지민. 나보고 뭐 어쩌라고. 과제에 찌들어 사는 같은 입장에서 안타까워해줄 수밖에 현실을 탓하시든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도 모른다는 눈치를 주자 아프지도 않은지 주먹으로 제 머리를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한다. 그런다고 과제가 완성되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자신의 머리를 때려서 과제를 완성할 수 있다고만 하면 나는 양손 주먹으로 하루 종일 머리를 때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애써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던 박지민은 얼이 반 정도 빠져나간 얼굴로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치겠네, 정국아 나 먼저 갈게"
후다닥 순식간에 핸드폰을 챙겨서 카페를 빠져나가는 박지민에게 잘 가라며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전정국.
너는 과제 같은 거 없니?
"넌 안가?"
"지민이 형 간다고 해서 내가 꼭 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
응 그래 너 잘났다. 전정국은 어느새 케익을 다 조져버리고는 포크에 묻은 크림을 얄밉도록 쪽쪽 빨아댔다.
지금껏 모은 자료와 출처를 차례대로 정리하고 있는데 내 앞자리 노트북 모니터는 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변기통에 빠진 건지 똥 싸다 잠에 든 건지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는 민윤기에 머리를 긁적였다. 노트북 버리고 집에 갔을 리는 없고, 얼른 집에 보내버리고 싶은데. 팔꿈치로 옆에 앉은 전정국을 툭툭 건드렸다.
"야 너가 남자 화장실 한 번 보고 와주면 안 돼?"
"내가 왜"
"아니 이제 슬슬 끝내야 하는데 선배가 안 오잖아"
"오지 말라 그래, 안 오면 먼저 집에 가면 되지"
하여튼 옛날이고 지금이고 못돼 처먹었어 진짜. 전정국을 보면 왜 성악설이 존재하는지 마음 깊이 깨달을 수가 있다.
나라도 화장실 앞에 가서 민윤기의 이름을 불러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때마침 화장실 문이 열리고 민윤기가 젖은 손을 털며 나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얼굴로 자리로 오는데 왜인지 흐물흐물하니 기가 없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선배 변비에요?"
![[방탄소년단/전정국] 출격! 애증남녀!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3/04/19/8d01d2236e490125d31b7954a1bc9ca8.gif)
"남의 장 건강 함부로 묻는 거 아니다"
"근데 무슨 화장실에 하루 종일 있어"
"됐고, 여기 옆에 있던 친구는 어디 갔어?"
"여섯 시에 과제 제출인데 깜빡하고 있다가 방금 전에 갔어요"
"알만 하다"
그러며 천천히 노을 지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는 민윤기의 눈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노을이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저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집 떠난 지 열두 시간도 안됐는데 아주 향수병 걸리게 생겼네. 이제 더 이상 하기에는 나도 힘들고 배도 고프고 무리인 것 같아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선배 모을 자료 다 모았으면 집에 가서 글이랑 출처 링크 정리해서 제 메일로 쏴주세요. 제가 중복되는 거 정리해서 선옥이한테 보낼게요"
"... 그 말은?"
"가라구요"
"아싸"
가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싸 하며 곧바로 일어나는 민윤기. 세상에, 나는 이렇게 신나하는 민윤기는 오늘 처음 본다. 로또 당첨된 것도 아니고 그저 집에 가란 소리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간 여유로웠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내 눈앞에는 가방 챙기기 지니어스 민윤기가 보인다. 저 정도면 가방 챙기기 월드 챔피언도 가능하지 않을까.
처음 보는 모습에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으니 1분도 안되는 시간 사이에 빵빵한 가방을 어깨에 멘 민윤기가 빙글, 입으로 호선을 그렸다.
민윤기가 난 간다, 수고해 하며 인사를 하니 나 또한 안 받아줄 수가 없기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며 인사했다. 그리고 언뜻 전정국과 눈이 마주친 민윤기는 전정국에게 할 말이 있는지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이내 안녕히 계세요 하고 목례를 하니 전정국도 아 네, 들어가세요 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여러모로 참 재수가 없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는 민윤기가 잘 들어가는지 살펴보는데 전정국이 자연스럽게 내 반쯤 남은 케익을 먹으며 말했다.
"넌 안가?"
"가야지"
"조금 더 있다가도 되고"
"갈 거라니까?"
내 케익을 다 먹어치우려는 전정국의 손을 찰싹 거리며 때렸다. 그만 먹어, 그만. 그러자 입을 비죽거리는 전정국. 80퍼센트 정도 정리한 파일이 혹여라도 날아가 버릴까 다람쥐 도토리 숨기듯 파일을 노트북은 물론이고 USB에도 저장한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케익도 먹고 노가리도 좀 깐 거 같은데 이상하게 찌뿌둥한 몸이 영 가시질 않는다. 너무 피곤하네. 몇 차례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이 부웅- 하며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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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개론레퐅/영문학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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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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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다. 행여나 카페에 마우스라도 두고 간 건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지만 눈에 띌만한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민윤기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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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 아직도 옆에 있니 오후 5:09
오후 5:09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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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친구 무서웠어 오후 5:09
![[방탄소년단/전정국] 출격! 애증남녀!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3/04/19/a136e570de19be740647bc1be458891a.jpg)
니 옆에 앉았던 친구 있잖아 오후 5:10
오후 5:10 전정국이요??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그런거 같아
근데 그 친구 혹시 과거에
나하고 싸운적 있니? 오후 5:10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후 5:11 오늘 첨본거 아니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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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그렇거든
왜 자꾸 나를 쳐다보지
나한테 관심있나..... 오후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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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는 거야.
옆에서 끝끝내는 내 케익을 다 조진 전정국이 왜? 왜? 하며 관심을 가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너... 하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민윤기한테 관심 있니?라고 물어보기 민망한 나머지 됐다... 하며 싱겁게 입을 닫았다.
노트북을 챙기고 흑색 트레이 위로 차곡히 그릇과 잔을 올려놓으니 제가 반납하겠다며 한 손으로 트레이를 들고 가버리는 전정국. 별생각 없이 가방을 메고 먼저 카페를 나가려 하자 전정국이 재빠르게 같이 가자며 나를 뒤쫓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누구 기다려주고, 챙겨주고 하는 사이였나, 하는 마음이 컸던 나인지라 그저 느린 속도로 걸음을 걸었다. 내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전정국에게 큰 배려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정국은 뭐가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은 건지 입을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OOO, 너 진짜 매정하다. 어떻게 그것도 안 기다려주냐?"
"너 두 다리 멀쩡하게 있는데 내가 왜 기다려?"
"말 한 번이라도 져주는 법 없지?"
참 나, 내가 져주기는 왜 져준대?
전정국을 한 번 노려본 나는 옆에서 짖든 말든 내 갈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골목길을 걷고 꺾고 걷고, 어지간하면 떨어져 나가겠지 싶었는데 웬일인지 계속해서 날 따라오는 전정국. 분명 집으로 가는 방향은 다를 텐데 말이다.
"왜 따라와?"
"답답해서"
답답해서라는 의외의 대답에 힐끗거리며 전정국을 곁눈질하자 돌연 걸음을 멈춘다.
![[방탄소년단/전정국] 출격! 애증남녀!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3/04/19/9c2bc0ae137118136d6981d44259dc67.gif)
"내가 먼저 말할게, 일단 나는 너 안 싫어해"
"..."
"그러니까 이유라도 좀 알자"
"..."
"너는 나 왜 이렇게 싫어하는 건데?"
너는 나 왜 이렇게 싫어하는 건데?
그 질문에 나 또한 걸음을 멈추고 허, 하며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굳이 막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기가 막힌다. 그 간 전정국만 생각하면 퍼부어줄 말이 넘치고 넘쳐 어떻게 줄여야 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지금은 왜인지 단 한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다. 막상 전정국의 얼굴을 보니 머릿속이 원래부터 백지였던 듯 새하얗게 가라앉았다. 내가 화내야 할 상황 아니던가? 오히려 제가 화가 난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는 전정국을 마주 보고 말했다.
"너는 도대체 지금 와서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마주쳐도 무시하고 잘 지냈잖아?"
"다시 잘 지내 보자는 거지. 나쁜 거 아니잖아. 아무리 어릴 때라도 그때 너랑 이유도 없이 멀어지고 마주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찜찜했는데"
"이유도 없어? 전정국 너 지금 사람 놀려? 싫다고 욕하다 무시하다 친한척하다, 내가 네 개야? 네 마음이면 좋다고 다 받아줘야 돼?"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다소 화가 난 어투로 마구 쏘아붙이자 전정국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따금 저릿해오는 무릎이 얼마나 트라우마였는지 너는 모르지? 관심 가는 사람이 있어도 일말의 관심이라도 내비치면 혹여라도 너처럼 나를 싫어할까, 뿌리칠까 혼자서만 끙끙 앓던 내 어린 날은 모르지? 중학교 때, 마주칠 때마다 그날을 싹 잊어버린 것처럼 당당히 그 얼굴 들고 돌아다니는 네가 얼마나 미웠는지 모르지?
네 마음이면 좋다고 다 받아줘야 돼?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긴 정적이 일렁였다. 해를 등지고 있는 전정국의 얼굴에 느린 속도로 그늘이 져간다.
"야 내가 전정국, 너 때문에 교복 입을 때 치마 일부러 무릎까지 늘려 입으려고 했고 여름에는 반바지도 많이 못 입었어"
"... 어?"
"무릎 다쳤을 때, 엄마가 어디서 다쳐온 거냐 했는데 네가 나 밀어 뜨려 넘어진 거라고 말하기 싫어서 그냥 나 혼자 뛰다가 넘어진 거라 했고"
"..."
"누굴 한 번쯤 좋아해도 좋아한다고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어"
누군가가 날 싫어해서 생긴 흉터가 너무 보기 싫어서, 마음 아파서 그리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
고등학생 때, 수업 시간에 종종 딴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 잠깐 만약 전정국을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며 나름대로의 고민을 했었더랬지. 전혀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네. 그리고 그 고민이 틀렸었네. 전정국을 만나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하며 울 것 같았다. 우느라 제대로 말을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전정국을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
"어떻게 너는 이유를 모른다고 해?"
나는 이렇게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저리 좀 가라니까!'
'짜증 나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네가 나보고 저리 좀 가라며, 짜증 나니까 따라오지 말라며. 네 말대로 일부러 멀리 떨어져 다녔고 안 따라다녔어. 내가 너한테 나 다친 거 물어내라고 했어? 나는 아직도 그때 생긴 흉터 안고 있는데"
"..."
"도대체 너는 나한테 바라는 게 왜 그렇게 많아?"
전정국은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때맞춰 서늘한 바람이 나와 전정국 사이를 휘감았다. 해가 황혼에 이르렀고 구름은 숨을 죽였다.
전정국의 얼굴은 완전히 보랏빛 그늘로 물들었다.
*
그날 밤, 정국은 잠에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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