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석의 예상대로, 루한과 함께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일은 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루한은 모두가 주목하는 이 상황에 익숙한 듯 계속해서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민석은 그다지 동요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길 가에서 속닥이는 건 약간 신경쓰였다. 오늘 밤에 또다시 인터넷에 사진이 퍼지는 건 싫었다. 찬열은 좋아 할지 몰라도.
민석은 옆에서 걷고 있는 루한을 힐끔거렸다. 햇살은 조각난 구름 사이로 스며나와 루한의 조끼와 워싱된 리바이스 청바지를 비추었다. 학생이라기 보다는 잡지 모델 같은 느낌이었다. 겉보기에 루한은 너무 깔끔해서, 아무도 그가 어젯밤에 클럽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지치고 창백해진 자신과 너무 비교 되는 것 같았다. 희미한 기억은 루한의 부드러운 피부에서 번진 아이라이너를 닦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민석은 루한의 시선을 느꼈지만 붉어진 얼굴을 들키기 싫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번에도 캠퍼스 가운데의 큰 건물은 많은 신입생들이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고맙게도 그들은 루한과 민석이 다가가자 양 옆으로 갈라졌다. 한 소녀가 루한이 자신의 옆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채자 소리 질렀다.
"오빠!"
그리곤 부끄러워 하며 학생들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가 도서관이야."
민석이 말했다.
"1층은 과학이랑 기술, 그리고 그 위는 사회과학부랑 딴 건 모르겠다. 4층은 음악학부야. 저기는 컴퓨터실."
민석이 루한의 뒷편을 가리켰다.
"저 벽에 기계들 보이지? 저기다 학생증 찍으면 프린트 할 수 있어. 책 대여랑 반납은 저 문 쪽에 스캐너 이용하면 되고. 이 층에 카페도 있어. 저 쪽 코너 쯤에."
민석은 어색하게 벨트를 고쳤다.
"커피 한 잔 할래? 난 지금 쓰러질거 같아서."
"숙취 때문에 그래?"
루한이 민석의 갈비뼈 께를 찌르며 놀렸다. 민석이 허리를 비틀러 작은 손가락을 떼어냈다.
"이제야 물어보네. 기운 차리게 할 만한 뭔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민석은 루한을 끌어당겨 책을 한아름 안은 학생들 사이를 성큼성큼 빠져나갔다.
손에 라테를 들고, 루한과 민석은 그들이 나타나도 별 반응이 없는 학생들 사이 창가 테이블을 찾았다. 민석은 그들이 고마웠다. 10대 소녀들에게서 나오는 끊임없는 꺅꺅소리가 지긋지긋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테이블에 앉아서, 루한은 안 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은색의 빛나는 무언가를 꺼냈다. 민석은 그것이 작은 술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한은 라테에 병의 내용물을 붓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아일랜드식 커피."
루한이 히죽거렸다.
"난 거짓말 안해. 아까 술 조금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너도 줄까?"
민석은 손으로 자신의 컵을 가렸다.
"아직 아침 10시 밖에 안됐는데!"
"그래서?"
루한이 민석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분 좋아 질텐데..."
민석은 고개를 젓고 컵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난 괜찮아."
한 잔 하고 싶은 유혹은 무시하기 힘들었지만, 민석은 정신을 붙잡았다. 카페인에 알코올까지 들어간다면 몸에 안좋을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작은 빵아."
루한은 컵을 들어 한모금 마시더니 만족한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었다.
"오늘 밤에 약속 있어?"
민석은 라테를 마시다 질식할 뻔 했다.
"오늘 밤에? 너 뭐 하고싶은 거 있어?"
"응. 아 내말은, 우리 어제 재밌었잖아 그치? 오늘도 같이 보내자고."
"너 스케줄... 그러니까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들 하고 보낼 그런 계획 없어?"
"빠오즈, 넌 걱정이 너무 많다. 내 스케줄은 내가 조정할 수 있어."
루한이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 덕에 민석은 루한의 까만 눈동자에서 자신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계획이 뭔데?"
그때 찬열의 목소리가 민석의 머릿속에 울렸다.
-루한의 새 장난감,
루한의 새 장난감.
"사실 오늘 밤에 공연 보러 갈거였어. 아는 동생이 밴드에서 드럼치거든. 되게 잘치는데. 너도...같이 갈래?"
"거기 바 있어?"
민석이 루한을 쏘아보았다. 루한은 장난스럽게 웃음지었다.
"농담한거야. 우와, 방금 니 표정 너도 봤어야 되는데 빠오즈. 완전 웃겼어!"
루한은 테이블 밑에서 발로 민석의 다리를 툭툭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근데 그거 재밌겠다. 나도 갈래!"
*
루한에겐 다행인지 공연장소는 술집이었다. 하지만 민석이 생각하던 이미지의 바는 아니었다. 스트라이프는 불량학생들이 점령한 영국 선술집 같은 느낌이었다. 나무가구와 푹신한 쇼파, 몇개의 당구대, 축구 게임을 위한 프로젝터와 낮은 천장이 공기를 아늑하게 만들었다. 찬열이 속한 인디밴드 어반 블랙 아웃을 응원하는건 민석과 종대가 첫째주 토요일마다 하는 고정 스케줄이었다. 그들은 무대 한쪽에서 공연을 했다. 거기서 2년동안 공연을 했는데,점점 다른 곳에서 공연 하는 일도 늘고 있었다. 여성 팬 무리도 자꾸 늘어나서, 모든 공연을 따라다니며 좋아하는 멤버의 이름을 불러댔다. 루한과 함께한 토요일도 다를 것 없었다.
훨씬 유명한 연예인이 객석에 와 있다는 것만 빼고.
저녁 8시 정각에 민석과 종대는 대학 입구에서 만나 스트라이프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종대와 민석은 가지고 온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했다. 이 밤을 이어가기에 딱 맞는 주제였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종대가 맥주병을 흔들며 말했다.
"형이 오늘 공연에 루한을 데려왔다고? 어떻게 했어요?"
민석이 웃었다.
"나도 몰라. 웃긴 거 하나 말해줄까? 여기 같이 오자고 한 사람 루한이야. 찬열이 때문에 내가 오자고 하려 했는데. 찬열이가 오늘 아침에 막 빌더라고."
민석이 한숨 쉬었다.
"요즘엔 이상한 일에 연속이야."
"알아요. 뉴스 기사로 봤어."
종대가 웃음을 터트리자 민석이 짜증스럽게 신음했다. 종대가 민석의 팔을 움켜잡았다.
"미안해요, 형, 말하고 싶었는데 형 이제 유명인사에요!"
민석은 종대에게 붙들린 팔을 비틀어 빼냈다.
"나 유명인사 아니야..."
민석이 중얼거렸다.
"물론 아니겠죠 형. 아니겠지." 종대가 비웃듯이 민석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루한을 여기서 만난다는 거야 아니면..."
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만나. 내가 주소 문자로 보내고 8시 넘어서 오라고 했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거야."
"문자 했다고? 이제 벌써 문자도 하는 사이에요? 우와."
"걔한테 내 번호 준건 너였어. 루한이 먼저 나한테 전화했잖아."
"아하."
종대가 웃었다. 그리곤 자신의 맥주병을 들어 민석의 것에 부딫히며 말했다.
"어쨌든, 일단 마셔요. 원샷!"
민석이 눈동자를 굴렸다.
"와, 너 루한만큼 나쁜자식이다."
그렇지만 민석은 종대가 고마웠다. 민석은 맥주를 들어 마지막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병을 내려놓았을 때, 민석은 스트라이프의 간판을 보았고 그 밑의 트릴비를 쓴 호리호리한 인영을 보았다. 그는 검은 벤츠에서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민석의 심장이 무거워지고 가슴이 조여왔다.
루한은 민석과 종대가 다가오며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끊임없이 달라붙는 여자들 무리를 무시하면서 그쪽으로 걸었다. 민석의 혀가 다시 한번 헛소리를 내뱉었다.
"왜 밤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거야?"
종대가 옆에서 쯧 혀를 찼다.
"안녕하세요. 김종대입니다."
종대가 루한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짱 메거진! 맞죠?"
"네, 저번주에 전화도 했었죠? 만나서 반가워요. 루한씨."
루한이 종대에게 맞인사 해주고 민석에게로 몸을 돌렸다.
"나름 안 튀게 하려고 노력했어."
"적어도 밤에 선글라스 끼오고는건 안 튀는게 아냐."
민석이 최대한 부드럽게 설명했다.
"여기선 아무도 너한테 신경안써. 그런 사람들 없어. 나 믿어봐."
루한이 씩씩대다가 머뭇거리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민석은 이번에도 루한의 야한 스모키 화장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민석의 기대는 빗나가 버렸다. 루한의 얼굴엔 아이라이너나 반짝이가 칠해져 있지 않았다. 대신에 반듯하고 자연스러운 베이비 페이스가 루한을 5살이나 더 어려보이게 했다. 루한은 사슴같은 갈색 눈망울을 네온빛 아래로 내리깔았다. 민석은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 경외감에 찬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어...저기요 민석이형? 우리 들어갈까?"
종대가 민석의 눈 앞에 손을 흔들었다.
민석은 건물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희미한 기타소리와 마이크가 체크되는 소리였다. 찬열과 그의 멤버들이 악기를 셋업하는 중일 것이다.
민석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우리...어...얼른 들어가자... 그래..."
민석은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루한이 붙잡은 팔꿈치가 신경쓰였다. 종대가 뒤따라 들어왔다.
찬열은 무대에서 자신의 드럼키트를 체크하고 있었고, 다른 멤버들은 앰프를 연결하고 꼬인 전선을 풀어내고 있었다. 어반 블랙아웃의 팬클럽은 이미 바에 들어와 멤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바 안이 점점 비좁아 지는 걸 보니 매년 팬클럽 수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바 안의 공기가 뜨거웠다.
루한과 민석, 종대가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조용해 지고 모두가 민석과 함께 들어오는 루한을 쳐다보았다. 민석은 루한의 뒤에서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유명한 한류스타는 무대에서 보다 그 아래에서 훨씬 위험해 보였다. 지금의 조심스러운 사슴 한마리는 무대에 섰을 때의 그와 너무 달랐다. 또 술마셨을 때랑. 민석은 선글라스와 화장, 그리고 술이 그저 패션이나 허세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느꼈다. 민석은 루한의 뒤에서 루한의 손을 꽉 잡아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부자들을 위한 빛나는, 고급 나이트 클럽이 아닌, 돈없는 학생들을 위한 곳이었다. 명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루한이 바로 어제 갔던 곳 과는 전혀 달랐다. 루한은 이곳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수근거림도 잠시 뿐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중국의 가수가 있다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어반 블랙아웃의 팬들도 루한보다 찬열이 드럼스틱을 찾는 모습에 더 집중했다. 민석은 그 모습에 감사함을 느꼈다.
"봤지? 괜찮다니까."
민석이 루한의 하얀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생각에 너 민낯이라서 못 알아보는 것도 있는거 같아."
루한은 그 말에 복수하듯 민석의 옆구리를 찔러 간지럽혔다.
"좋아. 거기 두분. 난 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따 무대 옆에서 봐요?"
종대는 그렇게 말하곤 손을 흔들고 관중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래서, 누가 네 친구야?"
루한이 밴드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다 친한데, 제일 친한건 찬열이. 저기 드럼 앞에 키 큰애. 나랑 같이 잡지 만들어."
민석이 밴드 멤버들 사이에 찬열을 가리켰다.
"쟤는 사진이랑 라이브 공연 리뷰 담당이야."
"걔랑 말하고 있는 애는 누구야?"
루한이 민석에게 기대며 물었다. 민석은 루한의 숨결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는 걸 느꼈다. 떨렸다.
민석은 목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백현이. 리드보컬이야. 쟤도 아이라이너 그리는거 좋아해. 너랑 비슷하다."
루한이 민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한마디도 안져 진짜."
루한이 웃었다.
"다른 애들은?"
"제일 작은 애는 베이스 치는 경수, 그리고 다크서클 진한 리드 기타는 쯔타오. 근데 그냥 타오라구 불러."
"쯔타오? 중국인이야?"
"응. 유학생. 한국어는 잘 못하는데 기타는 잘쳐. 제플린의 하트브레이커 연주하는거 들어봐야하는데. 너도 감동 받을걸."
곧 종대가 3개의 아이스비어를 들고와 하나를 민석에게 건냈다. 그 와중에 조명이 어두워지고 아이라인을 짙게 한 백현이 박수를 유도하며 마이크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백현이 소리쳤다. 사람들이 환호성으로 답해주었다.
"와, 반응 대박인데요! 실망시키면 안되겠어요, 그쵸? 종대야. 그 맥주 하나는 내꺼맞지? 야, 그냥 농담이야 그렇게 쳐다보지마! 알았어, 닥칠게. 이제 쇼를 시작해 볼까요!"
음악이 시작되자 홀 안은 환호와 비명으로 가득찼다. 찬열은 멋잇게 드럼을 쳤고 타오는 매혹적으로 기타를 연주했다. 소녀들이 홀이 떠나가라 소리질렀다. 어반 블랙아웃은 여기서 제일 어린 그룹이었고, 그들은 무대 아래에서도 친절했다. 백현은 멋있는 미소가 매력적인 남자였고. 노래를 부를 때 습관처럽 입술을 핥았다. 팬서비스 일지도 몰랐다. 민석은 경수가 노래를 더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경수는 주목 받는 걸 싫어했다. 반대로 백현은 나서는 걸 제일 좋아했다.
번쩍이는 조명과 감미로운 노래 사이로, 민석은 자신이 계속 루한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이었다. 루한의 완벽함에 질투가 나기도 했다. 루한의 작고 예쁜 코는 쭉 뻗어 긴 속눈섭 옆에서 끝났다. 그의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루한 자신은 아직 잘 모르는 듯 했다. 민석은 자신의 감정은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
루한은 이 혼란 속에서도 평화로워 보였다. 루한의 눈이 커져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작은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루한은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었다. 루한은 행복해 보였다.
민석이 루한에 귀에 대고 말했다.
"올림픽공원이랑 다르지?"
"응."
루한이 말했다.
"근데 그런게 여기를 더 멋있게 만드는거 같아."
루한이 고개를 돌리자 둘의 눈이 마주쳤다. 너무 가까워 민석은 루한의 턱에 흉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작은 흠이 루한을 더 완벽하게 했다. 민석이 한숨쉬었다.
그때, 민석은 처음으로 서로를 완벽히 이해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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