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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기도 전에 들려온 큰 소리에 상혁은 눈을 떴고, 상혁의 눈 앞에는 화를 내고있는 팀장님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연이 있었다. 바로 당장 스케줄이 있어서 때리지는 못하고, 화를 참아내지 못하는 팀장님을 보면서도 상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매니저형이 다가와 팀장님을 데리고 나가고, 그제서야 멤버들은 학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
팀장님이 아파트 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야 숨이 좀 트인건지 학연은 숨을 쉬었다. 택운은 그런 학연을 보면서 괜찮냐고 물어봤고, 학연은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휘청거리는 학연을 보며 놀란 듯 받치는 상혁의 손길에도 학연은 괜찮다며 손을 휘저었고, 학연은 대충 걸려 있는 옷을 껴입고 모자를 썼다.
여아이돌과의 열애설, 사진까지 찍혀버린 터라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 매체에서 소속사에 연락을 해왔고, 소속사는 겨우 돈으로 입막음을 한 것 같았다. 회사는 학연에게 책임을 모두 물었다. 헤어져라, 오늘 입막음에 쓰인 돈은 앞으로 너의 수익에서 빼겠다. 두 가지를 말하기 위해 아침부터 달려온 팀장의 정성에 학연은 웃음이 나왔다. 이런 날에도 학연은 개인 스케줄을 소화해야했다. 매니저와 학연이 내려간 숙소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3년동안 벌어다 준 돈이 얼만데, 소속 연예인한테 그것까지 받아 쳐먹으려고 하냐..씨발, 진짜 더러워서."
애써 밝게 웃으며 스케줄 다녀오겠다며 떠난 학연을 본 홍빈이 중얼거렸다. 예능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멤버들 대신 학연은 꾸역꾸역 스케줄을 소화해 냈었다. 학연이 예능에 한 번 나갈 때마다, 빅스의 음원 순위가 올랐고, 팬들은 점점 많아졌다. 멤버들은 활동기에 음악방송과 콘서트 준비가 끝이었지만, 학연은 온 갖 예능을 소화해내야 했다. 6~7시간의 녹화끝에 5분의 방송분량, 고작 그 5분을 위해 학연은 잠을 자는 대신 대본을 숙지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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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빅스 리더 N입니다! 오늘도 N과 함께.. 죄송합니다."
어제 밤부터 몇번을 읽고 중얼거리던 대본이었는데 머리 속이 새하얗다. 제대로 잠도 못 잔 상태에서 팀장의 질타까지 들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학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른다음 몇 번씩 고개를 숙이며 스텝들에게 죄송함을 말했다.
"네, 여러분! 오늘 게스트는 이제 막 떠오르는 신인 그룹이죠? 티니입니다. 다섯분 인사해주세요!"
한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리포터 역할. 10여분간의 짧은 인터뷰를 위해 몇십번을 연습했던 대본이었다. 일부러 분위기를 더 살리기 위해 애써 밝게 웃으며 겨우 녹화가 끝날 수 있었다. PD의 오케이 소리에 학연은 그제서야 물을 마시며 숨을 내쉬었다. 곧 바로 있는 스케줄에 얼마 쉬지도 못한 학연은 갑갑해진 가슴을 두드리며 벤으로 향했다.
핸드폰을 본 학연은 아무 연락 없는 폰을 보고서 문자를 보냈다. 그녀의 회사에도 연락이 갔을테니, 아마 알겠지만 그래도 뭐든 확실한게 좋았으니까. '다음번에 방송에서 보면 웃으면서 인사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그렇게 깊은 사이도 아니였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학연은 그저 쉴 공간이 필요했고, 같은 직종을 다니는 만큼 그녀와 자신은 서로를 위로 할 수 있었으니까. 단지 그것 뿐이었다.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시키고는 눈을 감았다. 매니저 역시 학연의 기분을 아는지 말을 걸지 않았다. 정적 속에 학연이 탄 차가 움직였고, 학연은 감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고, 터져나오는 소리에 학연은 고개를 숙이며 옷을 부여잡았다. 매니저는 그런 학연의 울음 소리가 묻히도록 노래를 틀었다.
다음 스케줄에 도착한 학연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낀 다음 차안에서 내렸다. 지하주차장이라 다행히 팬들이 없었고, 학연은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로 향해 화장을 고쳐받았다. 그리고 다시 학연은 빅스의 리더 N이 되어 방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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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집에 돌아와서 멍하게 앉아있다가 쇼파에서 잠들었을거에요. 택운이형이..아, 그러니까 레오형이 학연이형 업어서 방으로 데리고 갔거든요."
상혁이 전해주는 말에 하연은 기억을 되짚어봤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선배 기자였던 것 같다. 신나서 들어오는 선배 기자에게 무슨 좋은 일 있냐며 물었고, 선배는 하연에게 너만 알라면서 학연의 열애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냥 평범한 20대 커플 얘기인데 굳이 기사화 시켜야겠냐는 하연의 말에 뭘 모르고 하는 소리한다며 핀잔을 주는 선배 때문에 더 이상 관심 가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기사가 안나길래 그냥 묻힌건가 했는데, 이런식의 거래가 있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치사한 놈들."
글을 옮겨적던 하연의 말에 상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치사했죠, 기자들이나 소속사나. 고작 25살이었던 형을 가지고 장사를 했으니. 상혁은 답답한 듯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고, 라이터를 찾았다.
"여기."
하연은 상혁에게 라이터를 건내주려다 멈칫했다.
"나가서 피죠, 그래도 마지막으로 학연이 체취가 남은 곳인데."
하연의 말에 상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고, 하연이 뒤따라가 불을 붙여준 뒤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근데..기자님은 왜 학연이형을 이렇게 도와주시는거에요? 그냥, 다른 기사들처럼 학연이형 비난하는 기사 충분히 쓰실 수 있을텐데."
"기자정신 첫번째, 진실을 외면하지마라. 대학교 때 교수님이 늘 강요했거든요. 진실이 보이는데 외면하는 것은 기자 될 자격이 없다고."
"아.."
"그리고 치사하잖아요. 양아치들도 아니고, 사람이 죽었는데 그 말같지도 않은 옛날일 들먹이면서 한 사람 매장시키는거. 뭐, 학연이가 개인적으로 저를 좀 도와준 것도 있고.."
담배를 비벼끄면서 얘기하는 하연의 말에 상혁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긴 해요, 당사자도 아니면서 학연이형을 욕하는거. 들어가죠, 추운데.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열애설.. 그 일 있고 나서는 아예 방송 할 때말고는 웃지를 않았어요. 진짜 반쯤 죽은 사람처럼, 방송에서 1위를 해도 멤버들한테 마이크를 넘겨줬고, 진짜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기도 했고, 그때부터 멤버들하고 자주 트러블이 있긴 했죠. 서로 힘드니까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 할 수도 없고.."
"그때가 혹시 2015년에 멤버들끼리 불화설 돌았을 때..맞죠?"
"기억하시네요, 그래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재환이형었나? 택운이형이었나?"
"택운씨였어요."
"아, 맞다. 그때도 말 못할 사건이 있긴했죠."
이제야 기억난 듯 상혁의 말에 하연은 다시 타자를 두드렸다. 그 당시 탑급 아이돌로 성장했던 빅스의 불화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학연과 택운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저 소속사의 사실무근이라는 해명만 존재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