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w. 워너워너
옹성우는 멍청하다. 그와 몇 달만 같이 지내봐도 알 수 있다. 그와 싸운 날이 지나면 그의 옹청미는 절정에 다다른다. 제딴에는 나 생각해준다고 하루종일 내 눈 앞에 보이지도 않는 거지만 종종 그게 더 나를 화나게 했다. 얼굴이라도 보면 화라도 낼텐데.. 나와 싸우고 그 다음 날이면 매번 다니엘을 스파이처럼 내 주변에 붙여 놓았다. 내 동태를 살피라는 거겠지 "좀 꺼져.." 나의 짜증에 다니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내가 원해서 하는거냐? 라며 오히려 역으로 짜증을 낸다. 저 게임 현질에 목숨 건 새끼.. 캐쉬 충전해준다고 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놈이다. 분명 옹성우는 이번에도 게임 현질로 다니엘을 설득했을 거다. 다니엘은 내 옆에서 닌텐도를 하면서 말했다. 야, 그냥 내가 불쌍한 애 하나 살려준다 생각하고 옹성우 좀 봐줘.. 니네 둘 때문에 나는 뭔 죄냐.. 옹성우 아주 똥 매려운 개새끼 마냥 하루종일 눈치보는데 진짜 개 패고 싶음 다니엘의 거침없는 언어 선택에 나는 망설임없이 그의 머리통을 세게 쳤다. 나의 행동에 다니엘은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뭐, 뭐 거리면서 말했지. "너 성우 패기만 해봐" "..허," "너부터 죽여버릴거야" "..아, 진짜 이 또라이들... 이럴거면 왜 싸우냐 니네" 다니엘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다. 존나 또라이들, 나만 정상이야 라는 말만을 반복하면서. 그래서 일까, 나와 성우가 싸운 다음 날 나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옹성우야? 내 질문에 다니엘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걔 아니면 내가 여기서 이 지랄을 하고 있겠냐? 다니엘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에는 스파이를 붙인다는 그 사실이 짜증나서 오히려 성우를 다시 만나면 더 화를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성우의 그 소심한 모먼트가 너무 귀여워서 괜히 강다니엘에게 성우에 대해 캐묻곤 했다. 야, 옹성우 아직도 내 눈치보냐? 응. 존나. 제발 니가 먼저 연락하셈, 하루 종일 니 얘기만 들어서 노이로제 걸릴듯. 성우의 영혼의 단짝 다니엘의 말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성우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 우리 좀 만날까 성우야 하면서. 모순적이게도 내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고 다니엘은 또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지. 성우에게는 결정적인 습관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습관들에 익숙하게 길들여졌다. 그래, 이 순간에 성우는 이걸 나에게 해줄거야. 거봐, 딱 해줬잖아. 성우의 행동을 보며 나는 괜시리 실실 웃었다. 그의 습관은 정말 사소한 것들 이였다. 뭐 예를 들면 문을 열고 지나갈때 뒷 사람이 다 들어올때까지 문을 바쳐주는 거? 식당에서 티슈깔고 수저를 놓는거? 아, 또 뭐가 있을까.. 아 맞다, 옹성우의 모먼트 중 내가 가장 반한 순간도 그의 작은 배려가 곁들여진 습관때문이였다.성우는 내가 무슨 이유때문에 슬퍼할 때에는 꼭 내 머리통보다 큰 무언가를 나의 머리 위에 턱, 하니 올려두었다. 나의 우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끔. 다 울어놓고 뒤 늦게 쪽팔려하는 나를 위해 생긴 성우의 특징이다. 기말을 망쳐 학교 스탠드에서 울 때는 성우의 마이가, 내가 정말 사랑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의 까만 후드 집업이, 수능을 죽 쓰고 하루종일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자괴감에 빠져 있었을 때에는 그의 야구 모자가 내 못난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가 내 얼굴을 가려주면 모순적이게도 나는 더욱 더 크게 울 수 있었다. 소리내서도 울어보고 숨이 가쁘게도 울어 보았다. 내 앞에 있는 성우와 나 둘 만이 있는 우주에 갇힌 거 같아서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울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성우 앞에서 되게 많이 울었구나. 왜 니 앞에서는 내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는 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너라서 그런걸까 성우는 멍청하다. 하지만 마음이 따뜻하다. 여리고 순해서 의외로 강하지 않다. 성우는 남 생각을 잘 해주고 정이 많다. 성우는 웃을 때가 정말 이쁘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 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한다. 나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그의 사랑을 가득 받고 살아왔음에 감사하다. "..." "..." 김재환과 나 사이에는 기나긴 침묵만이 이어졌다. 우리 둘 사이로는 빗방울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고, 초 여름의 새벽은 꽤나 어두웠다. 그의 행동에 나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뭐지, 이 익숙한 상황은. 이 야구 모자가 내 머리 위에 씌여진 후로는 내 눈에서 나오던 눈물도 쏙하니 들어가 버렸다. 익숙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순간의 아늑함에 그저 멍하니 한참을 가만히 있던 거 같다. 아, 나 왜 이러냐 새벽 속에서 김재환과 눈이 마주쳤고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나였다. "..아, 너도 옹성우야?" "..뭐?" 빗소리에 취한건지 아까 마신 술이 다 깨지 않은 건지 나는 익숙하게 그에게 물어봤다. 옹성우야, 그 말은 내가 다니엘에게 많이 했던 말이였다. 성우와 싸우고 다음 날이면 항상 내 옆에는 내 눈치 좀 봐달라고 성우가 붙여놓은 강다니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물음에 약간은 목이 잠긴 김재환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다시금 물어왔다. "아, 미안.. 아니 성우가 보낸거냐고 물어보려던 건데.." 여전히 구부정한 자세로 김재환을 올려다보면서 얼버부렸다. 김재환은 아무말없이 그런 내 눈을, 아니 모자에 잔뜩 가려져 보이지도 않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오는 건지 초면인 듯한 김재환에게 필터링없이 반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내 다시 존댓말로 정정하려고 하였지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그냥 나도 아닌 매우 알코올에 취한 내가 뭐 어때 동갑인데! 라면서 나의 노력을 무너뜨린다. "..." 그는 여전히 아무말도 없었다. 김재환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은 오로지 그의 알싸한 담배향과 내 구부린 키와 맞닿는 그의 손에 쥐여진 담배곽으로만 알 수 있었다. 김재환의 침묵에 나는 왜 때문인지 속이 답답해졌다. 응? 너도 옹성우야? 걔가 보낸거지, 맞지. 내 머리 위에 어색하게 씌여진 옹성우가 아닌 다른 이의 모자 때문인지 , 아니면 이 차가운 비 때문인지 나는 나도 모르는 어떤 이유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옹성우가 보낸거지 성우가 나를 벌써 잊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지금 이런데 너가 그러면 안되잖아. 인간의 심리는 무서웠다. 맹세코 혼자 죽을 수 없다는 물귀신같은 감정은 아니였다. 그냥,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사는 거 같아서 술김에 서러워진거다. 그래, 그냥 그런거다. 아니면 내가 너무 나쁜년같잖아. 낯선 김재환 앞에서 우악스럽게 눈가를 비비며 눈물 자국을 지워냈다. 나의 목표는 이뻐보이는게 아니라 눈물 자국을 없애는 거였기 때문에 더욱 세게 눈을 비볐다. 나의 재촉 가득한 물음에 김재환은 이내 대답했다. ..응, 그니까 가자.
혼자 가겠다고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김재환은 결국 나를 큰 길가 신호등까지 바래다 주었다. 와, 초면과 여기까지 우산을 쓰고 오다니. 어색함에 남 몰래 몸서리를 치며 그에게 우산을 건넸다. 고마워, 하지만 그런 나의 행동에 김재환은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밀어냈다. 너 쓰고가. 다시 부를 틈도 없이 그렇게 몇 마디 남긴 뒤 빗 속을 몇 발자국 내딛던 김재환이 다시금 우산으로 돌아와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볼펜을 꺼냈다. 보아하니 우리 학교 홍보용 볼펜인데 경영과 애들은 다 하나씩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건가, 쓸데없이 잡 생각만 머리 속을 채웠다. 저거 옹성우도 집업마다 들어있던데. "우산 돌려주고 싶으면 연락해" 그 모자도, 내 손바닥을 쫙 피더니 그 위에 급하게 볼펜으로 자신의 연락처를 갈겨쓰고는 내가 잡을 틈도 없이 머리를 가린 채 왔던 길을 다시 뛰어가는 김재환이다. 김재환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파란펜으로 쓰여진 그의 번호를 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새벽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하숙집으로 그렇게 좀비처럼 들어가 우산을 대충 꽂아 두고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옹성우, 죽일 놈... 그냥 괜히 옹성우를 욕하면서 잠이 들었다. 야 미친 개 미안해 죽을 죄를 졌다.. 나 새끼 어제 뭐 한거냐...? 진짜 미아냉ㅠㅠㅠㅠ 밥 살게 오빠가ㅜ 오전 10:26 아침에 눈을 뜨니 강다니엘의 톡이 나를 맞이했다. 오빠는 개뿔, 그의 톡에 실소를 터트리고는 휴대폰을 덮고 괜히 기지개를 쫙 하고 펴봤다. 그러다가 손등에 쓰여진 파란 무언가가 눈에 띄여 눈에 가까이 댔다. '010-1996-0527' 누구꺼지? 아, 그러다가 뇌리에 스치는 새벽녘 낯선 이가 그의 담배향이 떠올랐다. 김재환, 그의 번호였다. 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김재환의 검정색 야구모자를 바라보고는 다시금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아.. 김재환 우산도 줘야 되는데...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 죽겠다, 아주. 지난 일주일 동안의 나를 돌이켜보니 나는 너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울고 불고 후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미운 감정을 형상화 시키면 아마 나일거다. 7년의 감정을, 7년의 시간을 일주일 만에 지운다는 건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아니, 난 알고있다. 너를 지운다는 건 아직 나에게는 너무 벅차다. 그래서 8일 만에 결론을 내렸다. 나는 너를 잊으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저 내 시간 속의 너가 잠잠해지기까지 그저 묵묵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일상 속에서 너의 그림자가 보이면 그냥 잠깐 그리워하고, 외로워도 해보고. 우리의 시간이 내 마음 속에 너무 깊게 박힌 날에는 엉엉 울어도 보고, 그렇게 내 마음을 강요하지 않고 그냥. 그냥, 너를 내 마음에 묻어 두기로 했다. 그게 가능할련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해야겠다. 아주 바쁘게 나날들을 살아보아야겠다. 성우야, 내가 살아야겠다.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펴보고 옆으로 치워둔 자동차 면허 문제집을 꺼냈다. 이걸 누가 공부하냐고, 주변에서는 문제집까지 사가면서 열성을 쏟아 붓는 나에게 한 마디씩 했다. 그런가? 귀가 얇은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한 번을 안 펴보고 시험장에 갔다가 68점을 받았다지. 합격점수는 70점 부터인데. 그 날 이후로 면허를 포기하고 먼지 속에 쳐 받아 두었다. 오랜만에 활자를 머리에 담으니 눈 앞이 빙글빙글 돌지만 애써 정신을 다 잡으며 면허를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해서 받은 점수는 72점. 뭐, 남들은 공부도 안하고 90점은 가뿐히 넘긴다고 하지만 나는 합격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혼밥을 하는 습관도 들이고 있다. 옹성우가 내 옆에 있었을 때에는 혼밥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가 내 옆에 없으니 혼자 밥 먹을 날들이 나에게 아주 많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내가 이토록 혼자인 시간이 많았구나. 새삼 느껴질때면 괜시리 코 끝이 찡해지기도 했지만 머리를 내저었다. 물론 성우와 같이 갔던 식당은 아직 못 가지만. 맞다, 아르바이트도 하나 구했다. 효주의 권유로 얻게 된 알바는 비록 대타였지만 나름 꿀 이였다. 바로 실용음악 학원 카운터 알바다. 원래 효주의 사촌언니가 하던 알바였는데 여름 방학을 맞이해 두 달간 여행을 떠나 대타를 구해야 했다. 덕분에 방학을 아주 한심하고 딱하게 보내고 있는 나를 효주가 구원해준거다. 야, 숨 쉴거면 돈이나 벌어. 각박하게 살면 구남친 쉽게 잊혀진다. 라고 나를 윽박지르면서 안녕하세요.. 쭈삣쭈삣 카운터로 다가가 대타 뛰기로 한 사람인데.. 라고 말 끝을 흐렸다. 나의 말에 안경을 쓴 약간은 사납게 생기신 실장님이 빙긋 웃으시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문이 닫혀있는데도 연습실에서는 학원생들의 기타소리, 노랫소리, 드럼소리가 섞여 약간은 혼잡했다. 때때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학원비와 수업일 정도 등을 대답해주고 상담을 유도하면 그게 다였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건지 내가 능력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큰 고비는 없었다. 학원생들도 서글서글하니 나에게 이쁘게 인사를 해줘서 내가 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따금씩 들리는 목소리들은 내 마음을 일렁이게 하기 충분했다. 우리 나라에는 노래 잘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 학원에서 일한지도 어엿 일주일을 다 채워간다. 이제는 나름 아이들의 얼굴도 익숙해졌고 여유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학원에 거의 풀로 알바를 뛰기 때문에 모든 학원생들의 얼굴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의 얼굴과 노랫소리를 매치시킬 수 있을 정도니깐. 하지만 내가 저녁을 먹고 들어와 휴대폰을 노닥거리고 있을 때 쯤이면 들려오는 304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직도 본 적이 없다. 내 저녁시간과 저 목소리 주인공이 등원하는 시간이 겹쳐서 그런걸까. 굳게 닫힌 연습실 문 넘어 들려오는 수준급의 노래 실력에 멍하니 듣고 있던 게 한 두번이 아니였다. 그 304호 남자는 내가 커피를 사러나갔다 오거나 화장실 등을 갔다오면, 아니 내가 자리에 없을 때만 등원하고 하원한다니까. 물론 그가 의도한게 아니라 우연의 일치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내 단순한 호기심은 괜한 오기로 바뀌었다. "ㅇㅇ야 저녁 먹으러 안가?" 실장님께서 지갑을 챙기시면서 물어오셨다. 아, 오늘은 속이 안 좋아서요.. 실장님께서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해가면서 손사래를 치는 나를 딱하게 쳐다보시더니 서랍 안에 약이 있다고 말씀하시곤 원장님과 함께 학원을 나가셨다. 오늘은 꼭 보고 말겠다. 얼마나 노래를 잘 하면 저 연습실에는 보컬 선생님도 들어가지 않는거지. 그냥 정말 연습실 개념으로만 쓰는 거다. 실장님 말씀으로는 고등학교때 다녔던 애가 여기 와서 취미로만 노래를 부르는 거라고 하셨다. 잘 부르지? 실장님의 말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지. 당연하죠, 아까 뛰어가서 사왔던 삼각김밥을 뜯으면서 학원 문에만 온 신경을 다 쏟았다. 내 계산이 맞다면 이 시간 쯤에 들어오는 게 맞을거다. 삼각김밥을 한 입 물면서 삼각김밥 속이 참 비었다는 생각을 할 때 쯤 학원 문을 여는 큰 체구의 인영이 보여 다시금 신경을 집중했다. "어?"
검정색 기타 가방을 메고 학원에 들어오는 건 다름아닌 김재환이였다. 저를 보는 내 시선을 느낀건지 이어폰을 끼고 무표정으로 들어오던 그가 이내 빙그레 웃는다. 어, 안녕! 여기는 왜.. 아, 너 알바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봤다. 너 혹시 304호에서 연습해? 김재환은 304호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나 저기서 해 드디어 찾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그게 내가 아는 사람이라서,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김재환이라서 좀 놀라기는 했지만 "근데 내 우산 가지려고?" 놀라움에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김재환은 장난스레 웃으며 나에게 물어왔다. 아, 맞다. 그때 생각났다. 내 놀란 표정을 본 김재환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내 호의를 금방 잊어도 되는 거냐는 둥, 너 때문에 모자 하나 새로 장만해야 겠다는 둥. 물론 다 장난어린 목소리였지만 나는 괜히 죄책감이 들어 연신 사과를 했다. 아, 진짜 미안해.. 내가 내일 갖다줄게... "번호도 적어 줬는데.." 김재환은 여전히 밉지않게 투덜거리며 습관처럼 손가락을 카운터 데스크에 차례로 탁탁 쳤다. 그의 그런 행동에 잠깐 성우의 습관이 스쳐가 살짝 멍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진짜 미안해.. 내가 울상인 표정으로 그에게 답하자 재환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실실 웃으면서 물어온다. "그럼 퇴근 언제 해"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연습실까지 정리를 한 뒤 실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학원을 나섰다. 오늘도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아주 바쁘게. 뜻 밖의 김재환의 등장으로 더 정신이 없는 하루였어.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가며 왠지 모를 뿌듯함에 내 자신을 칭찬했다. 잘 살아가고 있다, 장하다. "저도 같이 가볼게요 쌤" 김재환은 큰 기타 가방을 자신의 등에 이고 실장님께 인사를 했다. 얘가 지금 내 옆에 왜 있는 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까 퇴근 시간을 물어봤고 대충 10시 쯤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9시 50분까지 연습실에서 나오지도 않더니 내가 퇴근하려니까 쏙 나온게 아닌가. 실장님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우리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둘이 뭐야, 아는 사이야? 실장님의 물음에 그냥 같은 학교 동기에요. 라고 대충 얼버부렸다. 우리를 쳐다보는 실장님의 눈빛을 무시하느라 꽤나 애썼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민망함이 몸서리친다. 이게 무슨.. "오늘 왜 이렇게 연습 오래했냐" 아까보다는 훨씬 서늘해졌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더위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여름밤이라서 그런가 여전히 길가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의 물음에 김재환은 커다란 기타 가방을 다시 고쳐 메며 답해왔다. "너랑 같이 가려고" 김재환은 정말 친화력이 좋은 아이였다. 낯선 사람과는 오래 말을 못하는 나인데 그런 나를 허물었으니. 사실 김재환이 성우와 다니엘의 친구이기 때문에 둘의 이야기를 할까봐 마음이 조금은 조마조마 했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김재환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실용음악과가 아닌 경영과를 가게 된 이유와 별 시덥지않은 일상 이야기까지. 김재환과 몇 마디 안해봤는데 어느 순간 친해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길 끝의 신호등까지 우리는 그렇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데려다 줄까? 그의 권유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내가 애냐, 됐어. 라고 굳건하게 거절했다. 사실 뭔가 좀 그런 기분이였다. 옹성우가 아닌 다른 남자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건 좀 아닌거 같았다. 그러면 안 될 거 같았다. 헤어진 지 어연 한 달 쯤 되가는데.. 그래, 사실은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하루 끝의 마지막 뒷 모습을 본다는 사실이 요즘 나의 루트는 하숙집, 알바, 하숙집이다. 정말 단조롭기 그지 없지만 뭐 나름 살 만하다. 수입도 꽤나 짭짤하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더라도 꾸역꾸역 참고 하는 중이다. 그냥 성우를 잊기 위해서 무작정 시작한 알바였는데 시간이 꽤나 흘렀고 어느새 상담 전화를 받을 때도 더이상 목소리를 떨지 않았다. 요즘 학원에서는 월 말 마다 개최하는 노래 평가를 준비하느라 한창이다.나는 지금이 여기서 일을 한 많은 날 들 중에 가장 바쁜 나날들이라고 생각한다. 매일을 월말 평가 신청자 목록을 정리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역시나 가장 먼저 제출한 사람은 김재환이였다. "너 진짜 나 노래하는 거 들으면 큰일난다."
김재환은 씨익 웃으며 나에게 신청서를 건넸고 나는 대충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환아 너 말이 다 맞아.. 나의 무성의한 대답에 김재환은 제 성에 안 차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데스크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고는 차례대로 탁탁 쳤다. 김재환의 습관적인 행동에 성우가 또다시 겹쳐보여 순간 멈칫하게 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너 그거 하지마" 나의 갑작스러운 말에 김재환은 턱은 괸 상태로 서류를 정리하던 내 손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이내 나와 눈을 마주쳐온다. 그거, 하지마. 옹성우 생각나 이 말은 차마 하지 못했지만. "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물어오는 김재환을 보며 그냥.. 이라고 대충 얼버부렸다. 그의 뒤에 신청서를 제출하러 온 한 여학생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거기에서 멈출 수 있었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김재환은 기타 가방을 고쳐 메고는 연습실로 들어간다. 나중에 봐, 알았어. 그에게 답하며 생각했다. 와, 학원생의 절반은 다 신청하는가 보다. 오늘도 진탕 일만 하겠구나. 남몰래 관자놀이를 짚었다. "들어가볼게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마지막까지 연습실을 정리하고는 실장님께 인사를 하며 퇴근을 준비했다. 실장님은 내일 드디어 고생 끝이네 ㅇㅇ씨. 라고 말씀하시며 빙긋 웃으셨다. 그러게요, 내일 드디어 월말 평가네요. 정말 드디어! 내 이마를 짚는 제스쳐에 실장님께서는 살풋 웃으셨다. "야. 가자" 학원 홀 의자에 떡하니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는 김재환을 보며 말했다. 어, 그래! 안녕히 계세요! 김재환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실장님께 인사를 하고선 앞서 걷던 나에게 바쁘게 다가와 발걸음을 맞췄다. "내일 나 보러 올거지?" "내가 너를 왜 봐" "너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아, 팩폭.. 나 연습 엄청 많이 했어, 김재환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근데 너는 그냥 취미로 다니는 거면서 왜이리 목숨을 거냐 신발끈이 조만간 풀릴거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김재환에게 물어봤다. 정말 그렇다. 김재환은 학원생들 중에 가장 노래를 잘 하는데 가장 열심히 연습을 했다. "음.." 김재환의 얼굴을 굳이 보지않아도 그의 표정이 눈에 훤하다. 뭐 보나마나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고 있겠지. 나는 그새 풀려버린 신발끈을 바라보면서 언제 멈춰서 묶는게 좋을까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나는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된다고 생각해." 사뭇 진지해진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김재환의 작지 않은 키에 목이 좀 버거웠지만 진지한 김재환은 처음이라서 뭔가 낯설었다. "그게 뭐든지간에," 예상치도 못한 그의 대답에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건 뭐 진로 상담인건가. 김재환의 눈빛 속에는 무언가 확신이 서려있었다. 김재환은 나를 내려다 보았고 나는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냥 길가를 거니는 제 3자가 우리 둘을 본다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눈을 피했다. 제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좋은 마음가짐이네, 나는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말했다. 신호등은 아직도 빨간 불이였다. 아, 지금이 바로 신발끈 묶을 타이밍이다 싶었다. 하지만 어깨에 올려진 크로스백을 고쳐 메며 허리를 굽히려던 그 순간, 내 옆에 서있던 김재환은 갑자기 자신의 큰 기타 가방을 벗고선 나에게 잡고 있으라고 하더니 이내 무릎을 굽혀 잔뜩 풀린 내 신발끈을 묶기 시작했다. 풀린 상태로 몇 걸음을 걸어서 그런가 하얀 신발끈 중간 중간에 검은 얼룩이 묻어있었다. 갑작스러운 김재환의 행동에 나는 그냥 그의 검정색 기타 가방을 꼭 잡은 채 김재환의 검은 정수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김재환은 마지막 매듭을 이쁘게 짓고선 나를 올려다 보고 물어왔다. 오늘은 너 데려다 줘도 돼?
삐비비빅, 초록불을 알리는 신호음이 시끄럽게 내 귓가를 울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초록색으로 빛나는 신호등을 쳐다보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초록불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쁘게 신호등을 건넜다. 김재환을 쳐다보기가 무서웠다. 이유는 모르겠다, 왜 나는 너의 뒷통수를 보면서 옹성우의 흑갈색 머리가 떠올랐는 지 모르겠다. 그거 알아? 너는 성우랑 참 많이 닮았어. 김재환의 눈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아서 눈동자를 굴렸다. 군중들의 바쁜 발걸음을 무표정하게, 하지만 아주 혼란스럽게 쳐다보다가 건너편에 서있는 익숙한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대답은 안 해줄거야? 김재환의 웃음서린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옆에 서있는 김재환 특유의 섬유유연제 냄새와 담배향이 내 코 주변을 일렁였다. 하지만 나는 내 옆에 있는 김재환의 냄새가 아닌 건너편에 서있는 너의 벚꽃 향 바디워시 냄새를 먼저 맡은 건 왜 일까. 삐비비빅, 초록불을 알리는 신호음이 여전히 시끄럽게 내 귓가에 울렸지만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호등의 카운트가 줄어갈수록 사람들은 더 빠르게, 더 급하게, 더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그 사이에 나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아니, 어쩌면 너의 시간도 멈춰진 거 같다. 가깝지 않은 거리를 두고선 한참을 너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너는 왜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거야? 왜 나를 모른 척 안하는 거야? ..너는 지금 무슨 생각해, 성우야.
건너편 옹성우의 모습에 나의 일상은 또다시 무너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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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ㅠㅠㅠㅠㅠ 자까에요ㅠㅠㅠㅠㅠ 그냥 너무 늦었죠ㅠㅠㅠㅠ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 으앙 ... 제가 큰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연재가 빠르지는 않겠지만 끝까지 함께 갈거니까 걱정마세요! 저번화에서 안준영ㅋㅋㅋㅋㅋㅋㅋㅋㅋ피디님..^^ 악의는 없었는데 하하. 우리 독자님들 몰입을 방해했다면 머리를 좀 박고있을게요ㅠㅅㅠ 너무 주먹이 근질근질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ㅎㅎㅎ... 아 그리고 암호닉이 중요한 거라고 하시던데,,, 나중에 한 번에 정리해서 받을게요!!!! 지금은 그럴 정신머리가 덜 되서 좀 여유가 생기면,,, 하지만 계속 신청해주셔도 괜찮아요! 이게 뭔 소린가.. 제가 요즘 잠이 모자라서 아무말 대잔치같기도 하고... 아!! 독자님들이 원하시는 성우ver 은 반정도 써놔서 마무리만 지으면 됩니당 호호 재화니랑 다녤ver 도 들고 올 예정이구용 !!! 저 댓글 하나하나 다 감사히 마음에 새겨서 읽고 있습니다ㅠㅠㅠㅠ 너무 큰 힘이 되요ㅠㅠㅠㅠ 진짜로 사랑해요 레알루 정말루ㅜㅜㅜㅜㅜ 오늘 새벽도 저와 달려주셔서 고마워요!!!!!!! bgm; 슬옹- 여름,밤 아 그리고 저번화에서 제 마음을 낙낙했던 댓글ㅜㅜㅠㅠㅠㅠㅠ 제가 구상하는 여주의 심정이 딱 저거랍니다ㅠㅠ 진짜 감동적인 댓글 많았는데ㅠㅠㅠㅠㅠ 다 저장중이에여ㅠㅠㅠㅠ 흐엉 독짜님들 평생 충성 충성,,, 7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