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학연 x 정택운
Goodbye summer 上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원식 휴대폰… 맞나보네. 목소리가 딱 김원식이다, 야. 번호 안 바꿨네?”
“누구세요?”
“몇 년 안 들었다고 내 목소리도 구분 못해? 야, 너무하다.”
“차학연…?”
“너보다 형이거든?”
“어, 어? 진짜 학연이 형이예요!?”
“그러면 가짜 차학연이겠어?”
왜 이제야 전화했어요! 그동안 어떻게 전화 한 통 안할 수가 있어요?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진짜 너무 한 거 알아요? 순식간에 쏟아져 내리는 잔소리를 학연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전부 다 옳은 말이라 뭐라 돌려줄 말이 없었다. 원식이 간신히 진정했는지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잔소리가 드디어 멈추자 학연은 작게 웃었다. 원식은 한국을 떠나오기 전이랑 하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미안. 학연의 짧은 사과에 원식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냈어요?”
“나야 뭐…. 그럭저럭 지냈지. 너는 잘 지냈어?”
“저도 뭐, 똑같죠.”
실로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학연은 한국을 떠나온 후, 부모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연락을 넣지 않았다.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서로의 안부를 물은 후,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고 나자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원식이 망설이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한국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학연의 입에서 당연히 제일 먼저 나왔어야하는 이름이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저기, 형.”
“말하지 마, 원식아.”
“…….”
“……응, 고마워.”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아무 말 없이 배려해주는 원식이 학연은 그저 고마웠다. 철없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원식은 그랬다. 잔뜩 술에 취해 엉엉 울며 정신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자신을 잡고 도닥여주던 그때의 원식이 생각나 학연은 한 번 더 중얼였다. 정말 고마워.
“형 진짜 답답하다.”
“하하. 나도 알아.”
“알긴 무슨.”
웃고는 있지만 입안이 씁쓸했다. 그런 학연이 눈앞에 훤히 보여 원식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척 하긴 했지만 사실 원식은 학연이 아무 말도 없이 훌쩍 한국을 뜬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잊어보겠다는 몸부림이었을테지만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아플 정도로 알 수 있었다. 학연은 무엇 하나도 있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건지 답답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서 힘들다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던 학연의 모습을 원식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보는 자신이 괴로워질 정도로 절절했던 순간들을 알고 있기에 원식은 학연에게 아직도 잊지 못했냐는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아, 맞다. 나 이 얘기 하려고 전화건건데.”
“뭔데요?”
“나 한국 들어가.”
지금 공항이야. 너 생각나서 전화했어.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줘라. 너만 알고 있어주면 좋겠어. 원식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학연의 말은, 한국에 들어오긴 하겠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고 만나지도 않을 거란 소리였다. 둘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지금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잖아요.”
“…….”
원식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고 학연은 생각했다. 말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리고 원식은 정확하게 그걸 꿰뚫어보았다. 아플 걸 빤히 알면서도 너무 묻고 싶고 듣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
“…원식아.”
“네.”
“택, 운이……. 운이는, 잘 지내?”
학연은 힘겹게 그 이름을 불렀다. 한국을 떠난 후 떠올리지 않으려고 그토록 애썼지만 결국엔 아직도 지우지 못한 채 가슴 한켠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름이었다. 3년 만에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까지 불렀던 것 마냥 익숙했다.
“얼마 전에 만났었어요.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그거면 됐어. 다행이다.”
딱 거기까지만. 원식이 다른 말을 더 하기 전에 학연은 선을 그었다. 학연은 더 이상 택운의 소식을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큰하게 열이 오른 눈가를 학연은 꾹꾹 눌렀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서 학연은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을 내다보다 눈을 감았다. 잊으려고 노력하고 애를 썼지만 끝내 잊지 못하고 남아버린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
“같은 학교여서 다행이다. 그치?”
“아니.”
“…? 내가 지금 대답을 잘못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 운아?”
“앞으로도 너랑 같이 있을 생각 하니까 귀찮아.”
“아, 왜에! 내가 너 공부시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응? 칭찬은 못해줄 망정!”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손에는 졸업장, 한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나란히 길을 걸으며 학연은 투덜거렸다. 나 진짜 힘들었는데 싫다고 미운 말만 골라하고. 흥이다, 흥. 학연과 택운은 성적 차이가 꽤 심했다. 학연은 날 때부터 머리가 좋았던 데다가 노력도 할 줄 아는 아이였고, 택운은 딱히 공부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노력할 생각조차 없었다.
둘이 사는 지역은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내신에 따라 갈 수 있는 고등학교의 레벨이 갈렸다. 학연은 가고 싶은 고등학교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택운과 따른 학교를 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학연은 매일같이 택운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해 닦달했다. 평소에도 교과서 필기를 보여주고 문제집을 추천해주고 어떻게든 꼬박꼬박 풀게 시켰고, 시험기간에는 하루 종일 옆에 착 달라붙어서 요점을 줄줄 외우게 시켰다. 택운은 귀찮아하면서도 학연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하지 않으면 학연과 떨어지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어릴 적부터 둘은 함께였고 그것이 서로에게 당연한 일이었기에 택운도 ‘함께’를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사실 같은 고등학교에 붙어서 기쁜 주제에 귀찮다는 말로 괜히 아닌 척, 싫은 척을 하는 택운을 잘 아는 학연은 솔직하지 못하긴, 하며 베시시 웃어버렸다. …진짜 너랑 같이 있기 싫다. 그 모습을 보며 택운은 조용히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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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있기 싫다더니.”
학연은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불안해하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택운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어버렸다.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입으로는 같이 있기 싫다, 귀찮다, 너 싫다, 하는 소리를 서슴없이 뱉어내는 택운이었지만 막상 자신이 곁에 없으면 저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이 귀엽다면 귀여웠다. 한참 살피던 택운이 드디어 학연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알기 쉽게도 안심하며 학연아, 하고 입모양으로 부르는 모양에 학연은 재빨리 택운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디 있었어?”
“나 잠깐 초등학교 때 친구랑 얘기 좀 하고 있었지. 걔도 여기로 왔더라.”
너도 이름은 들어봤을 거야. 같은 반이었거든. 나중에 소개시켜줄게. 학연의 말에 택운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택운에겐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애가 있든 없든 별로 상관이 없었다. 택운은 딱히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성격상 이사람 저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미 자신의 곁에는 학연이 있으니 딱히 친구를 사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택운은 관심도 없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신경쓰는 것 대신 학연에게로 따악 붙어섰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렸다가 미아센터에서 다시 만났을 때 같이.
“없어져서 놀랐잖아.”
“오구, 우리 운이! 나 없어져서 놀랐어? 외로웠어?”
“…….”
그랬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건지 택운은 입을 꽉 닫아버렸다. 대답을 듣기위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런 반응을 보면 괜히 더 놀리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안 외로웠어? 그럼 나 다시 가도 돼? 장난스럽게 묻고는 여전히 대답이 없자 정말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 마냥 학연은 등을 돌렸다. 택운은 당황해서 재빨리 학연의 옷자락을 잡았다.
“왜 그래?”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물었지만 택운은 말없이 학연을 바라보았다. 그냥 좀 넘어가주면 안되냐는 무언의 부탁임을 알면서도 학연은 그것을 무시한 채 자신을 꼬옥 잡고 있는 택운의 손을 떼어낸 후, 택운이 제 옷자락을 잡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의 쪽에서 택운의 손을 잡았다. 훤칠한 고등학생 남자 두 명이 손을 잡고 있는 꼴이 됐다. 주변에 있던 학생 몇몇이 이상하다는 듯 힐끔힐끔 시선을 주며 지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학연은 택운의 손을 잡은 채로 살살 택운을 구슬렸다. 말해봐, 운아. 왜 그러냐니까? 택운은 그런 학연을 얄밉다는 듯 노려보다가도 결국 고개를 푸욱 숙인 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너 없으면 불안해.”
그러니까 나 두고 갑자기 없어지지 마. 붉어진 귓가가 학연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더욱 뭉개져서 들려왔지만 학연에게는 택운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말을 하고 나서는 학연이 잡고 있던 손을 없어지지 말라고, 곁에 있으라고 말하는 것 마냥 붙잡아오는 손에 학연은 잠시 움칠했다가 이내 곁에 있겠다는 것 마냥 더욱 강하게 택운의 손을 쥐었다. 어느 샌가 학연의 마음은 택운의 귓가와 같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학연은 그 날 처음으로 소중하디 소중한 자신의 소꿉친구 정택운을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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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엑스와 엑소가 함께 부른 goodbye summer 들으면서 읽어주시면 더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