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白日夢]
* * *
"나도…."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내 대답에 백현은 조금 놀란듯 눈이 동그래졌다. 귀까지 새빨개져선 나를 보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춥다, 이제 들어가자. 내가 몸을 조금 떨며 말하자 백현이 그, 그래! 하며 부산스럽게 일어났다. 병실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도 우린 조용했다. 마치 바람이라도 피운 기분이었다. 병실로 돌아와 내 침대에 눕자 백현이 뻘쭘하게 서 있길래 "가 봐." 하고 말했더니만 "정말 가도 되? 혼자 있을 수 있겠어?" 하고 내게 걱정되는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무슨 애냐. 옆에 분들 주무시는데 피해주지 말고 난 괜찮으니까 가 봐."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백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가 건네는 자켓을 받고는 내게 손을 건넸다. 내가 무슨 의미냐는 눈빛을 보내오자 조금 망설이던 백현이 말했다. 나 너 번호 몰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오늘 하루종일 확인도 하지 못한 핸드폰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백현이 핸드폰을 보고 탁자로 손을 뻗었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내, 내가 번호 알려줄테니까 너가 저장해."
"뭐야, 그런게 어딨어? 내 번호 얼른 저장해."
내 손에 붙들린 핸드폰을 억지로 뺏어가 버렸다. 주라고…! 내가 백현에게 소리를 빽 내지르자 당황한 백현이 멈칫했다. 야, 너 또 왜그래…. 나도 소리를 질러 놓고는 살짝 미안해졌지만 백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은 도로 내가 뺏자 살짝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그래도 아직은 너가 몰랐으면 한단 말이야…. 속으로 말을 삼키고 내 번호를 불러줬다.
"010-…."
남에게 나의 번호를 알려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백현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번호를 입력하는 듯 했다. "그럼 됐지. 이제 가봐-" 하고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버렸다.
"그래, 간다. 이따 연락할 테니까 꼭 답장해…."
"……."
곧이어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리고 병실문이 닫혔다. 이불을 걷어 손에 쥔 핸드폰을 확인했다. 역시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메시지함을 눌러 내용을 확인했다.
[ 학교는 왜 안와 씨발 ]
[ 변백현이랑 있냐 ]
[ 미친년아 진짜 죽고 싶어? ]
[ 좋은 말로 할때 전화 받아라 ]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타자를 눌렀다.
[ 미안, 병원이야. 입원했어. ]
그러자 문자를 보내기 무섭게 답장이 도착했다.
[ 주소. ]
눈 앞에 비친 두 글자에 조심스럽게 한 글자 한글자를 또박 또박 눌러 보냈다.
[ 아니, 안 와도 되. 입원비 대신 안 내도 되. 그리고 이젠 돈 필요 없으니까 그만 하자. ]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 날의 악몽이 되살아 나는 듯 했다. 숨이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온 몸이 쓰라리고 무서워졌다. 나는, 나는 다신 너에게 묶여 살고 싶지 않아…. 핸드폰이 손에서 진동하며 울렸다.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 버렸다. 무서웠다…. 눈을 감아도 계속 그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날은 나에게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될 것이다.
* * *
중학교 때의 일이다. 갓 중학교에 올라온 풋풋한 신입생이었던 나는 말이 없고 숫기가 없는건 지금과 별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처럼 많이 어둡고 사람을 피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주변에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말을 걸어주는 아이들은 몇몇 있었고, 그것에 충분히 만족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했던 반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미친 놈이야? 반장, 이거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되!"
"몇 천원도 아니고 20만원이라니…!"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반의 모범생 반장이었다. 학원비를 내는 날이라 가져온 돈인데 이렇게 찾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자신은 집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며 울먹였다. 반이 술렁였다. 범인을 잡으면 죽기 전까지 패야한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자, 합의 보지 말고 소년원에 보내 버려야 한다는 둥 여러가지 의견들이 오고갔다. 체육시간에 없어졌으니 범인은 우리 반이 아닌 다른 반 아이일 것이라고 아이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제 자리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던 반장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선생님께 먼저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다른 아이들도 그게 좋겠다며 어서 가보라며 반장을 부추겼다. 그 때였다. 뒷 자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거…."
우리 반에서 실질적으로는 반장보다 서열이 높은 아이었다. 김종인.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하나같이 김종인네 집에 초대받았던 아이들은 궁궐같은 집이라며 부러워했고 김종인은 그런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을 딱히 싫지 않아했다. 아이들의 시선은 김종인에게 쏠렸다. 그러자 김종인이 천천히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 돈 내가 줄게."
"……뭐?"
"그니까 없던 일로 치고 너도 그 돈으로 학원비 내면 되잖아. 나 괜히 가방 검사 같은거 하고 시간 버리기 싫어. 피곤해."
김종인의 충격적인 발언에 아이들은 입이 떠억 벌어졌다. 하긴 담임에게 말을 해봤자 이미 사라져 버린 돈을 되찾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교생의 가방을 검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종인의 말처럼 사실 일을 크게 만들면 골치만 아파질 것이 뻔했다. 구세주와 같은 종인의 말에 반 아이들은 환호했다. 뒷 주머니에서 한 눈에 보아도 비싸보이는 명품 지갑을 꺼낸 종인은 말없이 지폐 몇 장을 뽑아 반장에게 건넸다.
"미, 미, 미안해서 어쩌지…? 종인아?"
"괜찮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돈 관수 잘해. 쥐새끼같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학생 신분에 종인에게서 나온 돈은 실로 말도 안되는 액수였지만, 종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반장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와- 김종인 완전 멋지다!', '역시 김종인!' 반 아이들이 종인의 주위를 둘러싸고 종인에게 찬양에 가까운 말들을 내뱉었다. 어떻게 그렇게 착하냐, 너 없음 우리 집에 가지도 못할 뻔했다…. 엄친아야, 엄친아. 집도 잘 살지, 착하고 매너있지. 게다가 키도 크고 잘 생겼잖아. 하는 행동도 어른 스럽고…. 같은 반 여자 아이들도 하나 둘 모여 김종인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김종인을 쳐다봤는데 눈이 마주쳤다. 급하게 눈을 피했지만 괜히 마음이 찝찝했다. 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
"잘가, 도경수!"
"내일 봐!"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방을 들쳐메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라면 한 박스나 사 가지고 들어가야 겠다. 괜히 마음이 분주했다. 걸음을 빨리 해 교문을 지나치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도경수."
뒤를 돌아보았다. 피곤한 얼굴을 한 채 내게 다가오는 김종인이 보였다. 1년 가깝게 같은 반이었으면서 말을 한 번도 나눠 본 적 없는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오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고 김종인이 내 보이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위축돼 주먹을 꽉 쥐었다.
"얘기 좀 하지?"
...
어쩌다 내가 이 아이와 길을 나란히 걷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얘기 좀 하자며 내 옆에 서서 걸으며 10분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김종인이었다.
'빨리 집에 가 봐야 하는데…', 먼저 얘기를 꺼내려고 입을 뗐을 때였다.
"저…."
"돈."
"……."
"왜 훔쳤어?"
걸음을 멈췄다. 깜짝 놀라 주위에 누가 있는지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우리 학교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입에 침이 마르고 눈이 흔들렸다.
"그…, 그걸…."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갈라져 나왔다. 종인의 얼굴은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대답을 강요하고는 있었으나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투였다.
"뻔하지."
"……."
"너가 반에서 제일 늦게 나왔지? 주번이라 불 다끄고 나와야 한다는 이유로."
"……."
"왜 그랬어-."
입꼬리를 올려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속이 울렁였다.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다, 다 알면서. 왜, 왜…."
손이 덜덜덜 떨려왔다. 이제 난 정말 끝이다…. 종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고 어이 없다는 듯 크게 웃어보였다.
"뭐야, 지금 나 피하는 거야?"
"워, 원하는 게 뭔데 그래! 도, 돈이라면 금새 갚을 수 있으니까 시간을…."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네."
한 발자국 떨어져 서 있던 내게 다가오더니 나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원하는 게 돈은 아니고…. 나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같이 우리 집 좀 가자고. 나 심심하니까 나랑 좀 놀아주면 되…. 뒤에서 떠미는 종인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생각보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로션 |
안녕하세요 로션입니다..! (부..분량이 조금 짧나요?..ㅠㅠ..) 오늘은 종인이와 경수의 과거 이야기가 살짝 등장했습니다..! 이제 차근차근 과거가 들어나기 시작하네요... 아, 그리고 저번 편에서 많이들 오해하신 부분이 있는데요... 아직 백현이랑 경수와 완전한 사랑에 빠진 건 아닙니다ㅠ^ㅠ... 단지 7편에 그 키스를 통해 경수가 백현이를 향한 마음을 조금 열고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지, 사랑! 까진 아니예요ㅠㅠ..아쉽게도.. 그치만 백현이는 자길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겠죠...OTL.. 그리고 중학생의 종인이... 우리 순진한 경수를 꾀어 내네요ㅠㅠㅠㅠㅠㅠ으엉.. 암호닉 (비공개 외전 메일링 예정) 우유 백똥 낭랑찬혤 횬이 쇳대 토너 변기덕 꿋꿋 됴종이 카디공주 엘모 상꼬맹이 갱수 카디백의농노 피삭 부금 박찬열이빨 반했어 헬로 도경수 용가리 상츄 이니스프리 됴글됴글 지나가던나그네 용가리 님 감사드립니다! 하트하트 +) 암호닉은 언제까지 받을지는 몰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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