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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 03

 

 

날씨 때문에 밖은 아예 포화상태였다. 아수라장인 중앙 현관을 내려다보다 이미 저긴 글렀다고 생각하며, 승현은 바글바글한 뒷문을 나와 인적 드문 골목길로 들어섰다. 사실 말로만 골목이지, 한 두 사람 끼여 들어가는 골목보다는 훨씬 넓고 수월한 길이였다. 그러고 보니 항상 땡땡이를 칠 때마다 이 길로 도망가곤 했었는데. 회상하던 승현이 자신도 모르게 신발 끈을 밟고 휘청거렸다. 이상하다, 분명히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데 왜 이렇게 힘이 빠지는 거지? 승현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겹쳐지는 가로등을 보며 고갤 세차게 저었다. 불안하게 비틀거리던 승현이 결국 바닥에 우당탕 쓰러졌다. 부딪힌 돌바닥보다도 하늘에서 내리는 세찬 빗줄기가 더 아팠다. 움찔거리는 손가락으로 우산을 찾으려 더듬거렸으나 우산은 바람에 휩쓸려 이미 저 만치 날아가 있었다.

이마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일어나려 어깨를 들썩였지만 소용없었다. 가로등은 몇 번 깜빡이더니 천둥이 울자 그대로 꺼져버렸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승현은 덜컥 치미는 두려움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승현은 쥐 죽은 듯이 엎드려있었다.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촉감이 징그러웠다. 승현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캄캄한 골목길을 눈만 굴려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승현이 충혈된 눈을 감았다. 귓전을 때리던 빗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추위 때문에 덜덜 떨리던 몸도 열때문에 무거워지고 나른해졌다.

「일어나.」

단 한마디였음에도 불구하고, 승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가로 빗줄기가 스며들었다. 얼마나 잔 건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흐릿하던 앞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었다. 누군가 있었다. 그런데 그 형상같은 게 어둠에 먹혀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고 물으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끙끙대는 신음만 입에서 나왔다. 온통 비에 젖은 탓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온몸에서 나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환청이 아니었나? 승현이 힘겹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약한 빗줄기가 눈꺼풀 위로 떨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성난 기세로 내리던 비였는데, 조금씩 멎어들었는지 소낙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젠장, 그것보다 너무 추워서 죽을 것만 같다…. 승현이 발개진 코를 훌쩍이며 눈을 감았다.

“하….”

갑자기 승현의 몸이 들리는가 싶더니 등에 털썩 업혀졌다. 젖은 옷 때문에 몸이 두 배는 무거울 텐데도, 이를 악물고 승현의 양 허벅지에 손을 끼워 넣은 뒤 꽉 다잡는다. 승현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목을 감자, 어이없다는 듯한 실소가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묻혔다.
 
“누구야…”

잔뜩 쉰 목소리로 승현이 중얼거렸다. 대체 누군데 나를 이렇게 업고 데려가는거야. 승현이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뜨려 애쓰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계속 잠이 와서 견딜 수 없었다. 승현은 따듯하고 건조한 어깨에 기대 다시 잠에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환한 햇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승현은 팔꿈치로 몸을 일으키다 이마에서 떨어지는 물수건을 주워들었다. 승현은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집까지 어떻게 온 거지? 학교는…? 승현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다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민아는… 또 날 기다렸을 텐데.

승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계를 찾았다. 열한 시였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되새길 필요도 없이 승현은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 정리를 해줄 누군가 필요했다. 승현은 얼빠진 표정으로 휴대폰 폴더를 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현아?」

“엄마, 어떻게 된 거야?”

「너 진짜! 어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응?”

「지금은 괜찮아?」

“아니… 엄마, 나 기억이 하나도 안나.”

「밤까지 너가 안들어오길래 걱정되서 선생님이랑 친구들한테 전화 싹 돌리고, 응? 어제 비도 얼마나 많이 왔는데!! 얼마나…」

“……미안해.”

「지용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냐고.」

권지용? 승현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맞아, 어제, 아. 그래… 기억난다. 승현은 엄마의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다 받아낸 후 조심하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한 후에 가까스로 전화를 끊었다.

승현은 욱신거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하교길에 골목길에 들어섰던 것부터, 누군가에게 업혔던 기억까지 모두다 기억난다. 승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재우려 다시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모두 나중에 생각하고 싶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승현은 화들짝 잠에서 깼다. 땀에 젖어 찐덕거리는 이불에서 일어나 뜨끈한 등을 찬 손으로 슥 쓸어본다. 감기에 걸렸는지 목이 칼칼했다. 분명 무슨 꿈을 꾸긴 했는데 무슨 꿈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인 탓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다 문득 시계를 보니 다섯시였다. 몸이 정말 피곤하긴 했나보다, 이렇게까지 오래 잔 걸 보면. 새삼스레 감탄하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발을 한 발짝씩 옮길 때마다 온 몸의 관절이 불안하게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승현이 다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리에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였다. 오기로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켰지만 금방 풀썩 쓰러졌다. 승현이 캄캄한 방 안을 꺼림칙하게 둘러보았다. 캄캄하고 밀폐된 방에 자기 혼자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진다.

“엄마!”

일단 내질렀긴 했는데 이 캄캄한 방에 다 큰 아들이 다리 힘이 풀려서 쓰러져 있는 꼴을 보면 엄마가 기겁하실 것 같아 다시 다리에 힘을 준다.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린다.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갤 숙였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귓전을 빠르게 강타하고 있었다. 왜 내가 부르고 내가 무서워하는걸까?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그 틈으로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움직이지 마.”

권지용? 승현이 재빨리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만큼이나 헝클어진 머리에다 창백한 낯빛,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들로 보아 감기에 걸렸나,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승현이 칼칼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묻는다.

“감기?”

지용이 고갤 끄덕인다. 승현은 그제서야 어제 일을 떠올렸다.

“아, 어제. 고마워…”

“…어.”

“형…?”

순간 지용의 표정이 구겨지며 경직된다. 승현이 지레 놀라 억지로 일어서 방에서 빠르게 빠져나온다.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인거지. 아파서 맛이 가버렸나, 형이라니. 미친건가? 미친 게 틀림없다. 저런 자식을 형이라고 부르다니. 아니야, 날 구해줬잖아. 몇 번의 갈등을 겪으며 부엌으로 달려간 승현이 컵을 집어들었다.

“아, 다리…”

잘만 달리네. 물을 꿀꺽꿀꺽 삼키던 승현이 유달리 힘이 빠지던 왼쪽 다리를 살짝 흔들었다. 긴장이 떨어지자 으슬으슬 몸이 떨려온다. 젖은 티셔츠를 통풍시키던 손을 멈추고 팔을 감싸안는다. 어느새 컵을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추워.”

재빨리 새 컵에 따듯한 우엉차를 부었다. 거실에 보일러를 켜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뒤돌아 누워있는 지용의 뒷모습이 보인다. 승현은 문을 닫고 떨떠름하게 지용에게 우엉차를 건넸다. 자, 받아라. 내 감사의 표시다. 그러나 승현의 기대와 다르게 지용은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치워.”

조금 상처 받은 승현은 티내지 않고 컵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한참 휴대폰 게임을 하는데, 미약하게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 보니 지용이 내는 소리인 듯했다. 괜찮다더니, 왜 저러는 거야?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 지용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속눈썹이 심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입에선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들은 이불을 적실 정도로 양이 엄청났다.

뭐야, 갑자기 왜이래? 놀란 승현이 안절부절하다가, 일단 부엌으로 뛰어가 아버지가 서울에서 지어오신 한약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스트레스로 가끔씩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키셨는데, 그 때마다 이 약을 억지로 먹으시곤 하셨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지용의 신음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두려움에 겁을 먹은 승현이 잔뜩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왜, 왜 그래?”

승현의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용은 대답이 없었다. 괜한 두려움이 앞서자 온갖 상상이 다 떠오른다. 승현은 거의 소릴 지르며 지용을 억지로 일으켰다. 잠에서 덜 깬 지용이 도끼눈을 하고 승현을 노려본다. 승현이 충혈된 지용의 두 눈을 당혹스럽게 바라보며 한약을 손에 쥐여주었다. 순간 승현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지용이 한약을 승현의 어깨너머로 던져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말을 더듬던 승현이 일어나 한약을 주워왔다. 지용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벽에 머릴 기대고 탄식을 내뱉는다.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을 하고서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괴로운 목소리로 대꾸한다.

“줘도 안 먹을거야, 그리고 제발 나한테 신경 꺼.”

“뭐? 아니…”

“씨발… 야, 나한테 신경 꺼라고!!”

“허?”

기가 막히고 말문이 턱 막힌 승현이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아까부터 혼자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미쳤냐? 돌았냐!? 한참동안 반박할 거리를 찾던 승현이 자신을 깔보는 지용의 이죽거리는 표정을 본 순간 울컥 열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왜 안 먹겠다는 건데!!”

“허… 참.”

지용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만 흘리고 앉아 있어도, 승현은 아랑곳 않고 오기로 약을 들이밀었다. 지용이 삐딱하게 벽에 기대서 승현을 지겹다는 듯 응시했다. 악에 받친 지용을 받아주다 지친 승현이 결국 약을 내려놓았지만, 지용은 절대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입꼬리만 미약하게 비죽거릴 뿐이었다. 한참 동안 따가운 눈길만 주고 받던 승현이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라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안 먹겠다는 건데? 뭐 트라우마라도 있어?”

“허…… 그러는 너는 왜 그렇게 나한테 먹이려고 하는 건데? 약에 독이라도 들었냐?”

“…뭐?”

와, 뭐 이런 새끼가…!! 승현이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진정시키려 심호흡했다. 최대한 차분한 표정도 지어 보였다. 그래 봤자 지용에겐 더할 나위 없이 가식적인 얼굴로 보였다. 차분한 표정에 실패한 승현이 되는대로 인상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난 그냥 걱정돼서 약을 챙겨 준 것뿐이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야. 지금 당황스러운 건 나야. 아픈데 깨보니 집에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너는 이상…”

지용이 귀찮다는 듯 뒤돌아 누워버리자, 순간 화가 치민 승현이 충동적으로 그의 허리를 뻥 걷어 차버렸다. 악, 소리가 튀어 나오기 무섭게 승현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방에서 뭘 깨부수는지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지용이 잔뜩 성난 얼굴로 승현에게로 다가왔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지친 승현이 금방이라도 이성의 끈을 놓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지용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허리를 다잡았다.

“야… 너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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