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집보다는 조금 더 높은 천장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색이었다. 느리게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떴다. 가슴 위까지 덮어져 있는 이불을 걷어내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데 온 몸에 힘이 없는 건지 모든 동작이 느리기만 했다. 살짝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켜 앉자 주위가 핑 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지러워…. 분명 가만히 있는데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지끈거리는 이마위에 손을 올렸다.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잠깐을 그렇게 있다가 슬며시 눈을 떴다. 주위를 살펴보려고 고개를 돌리자 목에 붙어진 거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즈가 붙어 있다는 걸 자각하자 그제야 오른쪽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기분 나쁜 느낌에 거즈 위로 손을 올리는데 방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물이 담긴 컵을 쟁반 위에 올린 채로 방에 들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 일어났어? "
" …누구세요? "
" 널 치료해준 사람. "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거즈 위에 올렸던 손을 움직여 목덜미를 만지작거리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만지지 마.
" 고정해둔 게 움직이면 상처가 제대로 낫지 않을 거야. "
" 아…. "
" 사과는 내가 대신 할게. 많이 놀랐지? "
" ……. "
" 동혁이가 아직 조절하는 건 어려워해서 말야. "
조절? 하고 되묻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겨 내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머리가 울리는 느낌에 살짝 찡그려진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물이 담겨있는 컵을 내게 내밀었다. 아마 계속 갈증이 날 거야. 물을 많이 마셔주는 게 좋아. 고기도 당분간은 많이 먹도록 하고.
남자가 건넨 컵을 받아들긴 했지만 섣불리 입에 가져다대진 않았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손에 쥔 컵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쓰러지기 전 기억을 곱씹었다. 김동혁이 날 집 안으로 끌어당겼고, 김동혁을 마주보고 섰고, 김동혁이 내 목덜미에….
" …대체 뭐에요? "
" 뭐가? "
" 김동혁 말이에요. "
겨우 짜내듯 나온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내 질문이 웃긴 건지 피실피실 웃음만 흘렸다. 나는 저 웃음이 꼭 김동혁이 웃는 모습과 같다고 생각했다. 잠깐을 그렇게 나를 보며 웃던 남자는 웃음을 살짝 지운 얼굴로 내게 답했다.
" 김동혁이 널 물었고. "
" ……. "
" 나는 그걸 막았고. "
" ……. "
" 내가 널 살렸어. "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된 거 같은데. 안 그래?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로 말을 마친 남자는 좀 쉬었다 가, 하는 한 마디와 함께 몸을 돌렸다. 남자가 방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남자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남자가 방 밖을 나가자 참고 있던 숨이 터져나왔다. 머리는 계속해서 지끈거렸고 다시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그게 충분한 대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런 답도 얻지 못 했는데 뭐가 충분한 대답이라는 거야. 분명 내가 쓰러진 곳은 김동혁의 집이었을 텐데 어째서 김동혁이 아닌 저 남자가 이 곳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인 건지. 가지고 있던 의문은 하나도 풀지 못 한 채로 늘어난 몇 가지 의문에 머리 속은 이미 엉망이었다.
잠깐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대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상이 핑 도는 듯한 느낌에 옆의 서랍장을 부여잡고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겨우 옆에 걸려있는 교복 마이와 가방을 챙겨들곤 방 밖으로 나갔다.
" ……. "
방 밖으로 나오자 마주한 건 김동혁이었다. 김동혁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문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때마침 방에서 나오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한 김동혁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 괜찮아? "
날 빤히 바라보는 김동혁의 눈동자가 검은 색이다. 참 어이 없게도 나는 이 상황에서 김동혁의 눈동자는 원래 검은색이었지, 하는 멍청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김동혁을 올려다보다가 늘 그렇듯 내가 먼저 그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현관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김동혁이 내 팔을 아프지 않게 잡아왔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함께 잠깐만, 하고 나를 불러오는 김동혁의 목소리에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김동혁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내 팔을 잡고 있는 그 아이의 손을 밀어냈다.
" 손대지 마. "
" ……. "
" …내일 학교에서 봐. "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곤 김동혁이 또 한 번 날 붙잡지 못하도록 빠른 걸음으로 그 집을 나왔다.
* * *
하루 종일 아프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반장에게 미리 말을 해둔 덕분에 수업시간 내내 책상 위에 팔을 베개 삼아 엎드려 있는 내 모습에도 선생님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바로 옆자리의 김동혁에게서 짝궁, 하고 두어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더니 김동혁 또한 입을 꾹 다물었다.
김동혁이 자리를 비우자 그제서야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날 발견한 구준회가 손에 들고 있던 바나나 우유를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많이 아프냐? "
" 응. "
" 어디가 아픈데. "
" 감기. "
" 목에 그건 뭐냐. "
내 목덜미에 붙은 거즈를 바라보는 구준회의 시선에 대답 대신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바나나 우유 나 주는 거야? 하고 묻는 내 질문에 구준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 우유를 주는 김에 빵까지 사다 주는 센스는 없구나. "
" 그 우유도 다시 가져가는 수가 있다. "
" 농담도 못 하나. "
우유를 양손으로 꽉 쥐곤 살짝 웃자 구준회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쉬어라. 짧은 말과 함께 구준회가 제 자리로 돌아갔고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팔 대신 두꺼운 책을 베개 삼아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수업 종 울렸는데…. 아직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김동혁의 자리 쪽을 바라보고 누워서 빈 의자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는 필통도 없었고 책도 없었다. 아무 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김동혁의 책상을 잠깐 바라보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도 온 몸에 기운이 없었다. 잠을 자도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다. 하품을 살짝 하곤 어깨 위로 덮고 있던 체육복 상의를 조금 더 당겨 덮었다.
잠귀신에 홀린 듯 또 그렇게 잠에 빠져들 무렵, 비어있던 옆자리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김동혁 왔구나. 나는 잠에 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자세는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꽤나 깊게 들었었나 보다. 책을 베고 있던 고개를 들며 미처 다 뜨지 못한 눈을 살짝 비비곤 교실 안을 바라보자 교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어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교실 안을 둘러보던 내 시선이 내 옆자리에서 멈췄다. 몇 일 전부터 계속해서 읽고 있는 듯한 그 붉은색 표지의 책을 덮은 김동혁이 날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 일어났어? "
" 다들 어디 갔어? "
" 집. "
" 뭐? "
" 수업 끝났어. "
" 말도 안 돼. "
내가 그렇게나 많이 잤단 말야? 내 중얼거림에 김동혁이 피식 웃었다. 곤히 자길래 안 깨웠어. 깨우려던 애들도 있었는데 내가 깨우지 말라고도 했고.
김동혁의 말에 김동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너는 왜 안 갔어? 하고 묻자 김동혁이 그 지긋한 시선으로 나와 눈을 맞춰왔다.
" 너 기다렸어. "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마주하고 있으니 괜히 목 언저리가 따끔거리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내 손이 또 오른 쪽 목덜미로 올라갔다. 거즈 위를 감싸듯 덮은 내 손을 향해 시선을 옮긴 김동혁의 눈빛이 약간 바뀌었다. 또 저 특유의, 뭔가가 재미 있다는 표정이었다. 저 표정이 왠지 기분이 나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봐. "
" ……. "
"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궁금한 건가? "
" ……. "
아무런 대답 없이 김동혁을 바라보자 김동혁이 의자에 앉은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터 앉았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김동혁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김동혁은 마치 재미 있는 게임을 한다는 투로 내게 말을 걸었다.
" 좋아. 궁금한 거 물어볼 기회를 줄게. "
" ……. "
" 우리 둘 밖에 없으니까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어. "
말을 마친 김동혁이 책상 위에 올려둔 제 손가락을 까딱였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책상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치는 듯 움직이는 김동혁의 손가락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올려 김동혁을 바라보았다. 겨우 입을 연 내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 대체 네 정체가 뭐야. "
" 겨우 그게 질문이야? 김동혁이잖아. "
" 그런 거 말고. "
" 그럼? "
" …네 진짜 정체는 뭐야. "
" 진짜 정체? "
내 말에 김동혁이 진짜 정체? 하고 되물으며 웃었다. 그리곤 허공에 떠있던 제 다리를 조금 전까지 제가 앉아있던 의자에 올렸다.
"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
" ……. "
" 밤새 고민을 해 봤는데 답을 모르겠어. "
" 그래? "
" 아니. 사실 하나가 있긴 한데…. "
그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답인걸.
차마 마지막 말은 입밖으로 내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김동혁이 별안간 킥킥 웃음을 뱉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하고 웃으며 묻는 그 목소리에 대답 없이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뭘까. 나는 왜 얘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조금 전 김동혁이 제게 질문을 해도 된다고 얘기했을 때부터 머리 속에서는 이상하게도 경보가 울렸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친해지지도 말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짧게 한숨을 내쉬곤 잠깐 머뭇거리다가 옆에 걸린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렸다. 아무 말 없이 내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는 김동혁의 시선을 애써 지우며 책들을 내 가방 안으로 한 권씩 넣었다.
가방을 다 챙긴 뒤 집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때,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김동혁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크게 울려왔다.
'스무고개 할래?'
" 뭐? "
되묻는 내 목소리에 김동혁이 피식 웃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방금… 김동혁은 입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놀란 나머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로 김동혁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김동혁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울렸다.
'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
" …지금 이거 무슨 소리야? "
' 나는 네 목에 두 개의 구멍을 만들 수도 있어요. '
" 뭐야… 그만해! "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김동혁을 향해 작게 소리치자 김동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 하고 되묻는 김동혁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책상을 잡고 있는 내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한 걸음을 더 물러서려는데 또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죽지 않습니다. '
" ……대체 이게 어떻게…. "
' 아, 나는 빛을 싫어해요. '
" ……. "
' 이 정도면 힌트 되게 많이 준 건데. 더 줘야 해? '
여전히 김동혁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김동혁의 목소리가 머리 속을 떠다녔다.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섣불리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김동혁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건지 피실피실 웃으며 나를 바라보곤 눈만 깜빡였다. 대답을 독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그럼 마지막 힌트까지 줄게. '
" ……. "
' 나는 피를 먹습니다. '
" ……. "
' 나는 무엇일까요? '
질문을 마친 김동혁의 목소리에 꾹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잠깐 날 바라보던 김동혁은 그제야 뭔지 모르겠어? 하고 제 입을 움직여 내게 물어왔다. 그 오묘한 목소리, 그리고 내게 닿아있는 진득한 그 시선에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떨리는 눈으로 겨우 그 시선을 마주한 뒤 입을 열었다.
" …뱀파이어? "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누르듯 말하는 내 대답을 들은 김동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하고 터져나온 김동혁의 웃음소리는 지금 입고 있는 교복에 어울리는 딱 고등학생의 웃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김동혁의 웃음이 점점 잦아들고,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김동혁은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몸을 작게 떨자 김동혁이 피식 웃으며 제 손가락을 내 입술 위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상처가 났었던, 이제는 딱지가 앉은 내 입술 위를 엄지로 살살 쓸며 말했다.
" That's right, pretty. "
BBB : Blood, Boy, Bad
♡
사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준 독방 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 사랑해요 ♡
안녕! uriel 이에요
오후에 글을 이미 하나 올리고 간 탓에 이 글은 내일 올릴까 싶었는데 그래도 이 bgm과 글의 분위기, 세쿠시한 동혁이, 심장이 찌르르한 이 느낌은 밤에 느끼는 것이 제 맛일 것 같아서 새벽에 가져왔어요!
오늘 두 개 가져왔으니 내일은 쉴 테야.. (소근소근)
저는 이런 bgm을 참 좋아해요, 오르골 소리가 나타내는 그 특유의 신비롭고 공포스러운 분위기
근데 안타깝게도 bgm이 중간에 뚝 끊기는게 함정.. 어디서 주워온 bgm이라 전곡 버전을 못 찾았지만 그냥 올려요, 무한대로 자동 재생이 될 거라 믿으며 (아련)
오늘 글에서는 BBB중 Bad가 잘 느껴졌으려나! 모르겠어요 ㅎ_ㅎ
중간에 나온 진환이가 바로 그 정체 모를 남자! 진환이 시선도 느끼시라고 처음으로 중간에 사진도 넣어보았네요!
뭔가 오늘 글을 쓰면서 느낀 건데 지금까지 썼던 많은 글들 중에서 저는 단편들이 가장 쉽게 써지는 것 같아요
준회버전 아가씨도 정말 막힘 없이 썼었는데 이 글도 누가 마치 글을 쓰라고 시키는 것처럼 머리 속에서 줄줄줄.. 저는 정말 어쩔 수 없는 판타지 망상쟁이인가 보아요 ㅎㅎㅎㅎㅎㅎㅎ 흐
제 이쁜이들 다들 동동이 꿈 꾸길! 잘 자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