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닿았다 떨어지는 구준회와 눈이 마주쳤다. 구준회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숨을 죽인 채로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 안에 우리가 있다는 의심을 거둔 건지 방의 불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선배가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확실하게 들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 * *
결국 우리는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그대로 지켜낸 채로 본사 7층에 도착했다.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몇 명의 선배들이 웃으며 나와 구준회를 맞았다. 수고 했어. 너희가 3등이야. 그 말에 그제야 온 몸의 긴장이 풀렸다. 배시시 웃으며 선배가 내민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컵 안에는 커피가 담겨져 있었다. 먼저 받은 컵을 옆에 있던 구준회에게 내밀자 구준회가 고개를 저었다. 난 커피 안 먹어.
팀웍을 기르기 위한 이 게임 아닌 게임에서 성공을 거둔 팀은 결국 5팀이 전부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저조한 성적이었는지 선배들은 웃으며 우리를 위로했다. 더불어 성공한 5팀에 대한 포상도 주어졌다.
" 모두 수고했다. 성공한 5팀의 팀원들에게는 포상의 의미로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훈련을 하루 빠질 수 있는 이용권을 주겠다. 언제든 쉬고 싶은 날이 있다면 하루 쯤은 쉬어도 좋다는 의미야. "
" 그게 뭐야…. "
말이 포상이지 어차피 못 쓸 이용권이나 다름 없었다. 선배들 앞에서 저 이용권을 쓰겠단 말을 어떻게 해. 가만히 선배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술을 삐죽이곤 팔에 감겨져 있는 클라이언트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팔에 채우는 것도 혼자 안 되서 낑낑거렸는데 푸는 것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을 한 손으로 팔찌만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하얀 손 하나가 내 팔을 잡았다. 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구준회가 아무런 말도 없이 한 손으로는 내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능숙하게 팔찌를 풀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루 종일 내 팔에 채워져 있던 클라이언트 팔찌가 풀렸다. 괜히 허전한 느낌에 그 곳을 다른 손으로 쓸어보았다. 내 팔찌와 제 팔에서 풀어낸 경호원 팔찌를 함께 손에 든 구준회가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 반납하고 올게. "
" 아, 응. "
게임이 끝나고 클라이언트도 끝나자 구준회는 금새 다시 반말로 돌아왔다. 말 놓지 말랬는데 저러네. 그래도 뭐, 하루 종일 같이 있어서 그런지 구준회의 반말이 처음처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우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까전 일에 대해서는 둘 다 입을 꾹 다문 상태였다. 선배에게 가서 팔찌를 내미는 구준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옆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팔찌 반납까지 마친 사람들은 기숙사로 돌아가도록.
반납을 끝낸 구준회는 나를 한 번 힐끔이더니 인사도 없이 그대로 기숙사로 향했다. 인사라도 좀 하면 어디가 덧나나…. 분명 나 봤으면서. 참 살갑지 않은 구준회의 태도에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구준회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종일 멀리서만 얼굴을 비추던 김한빈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김한빈을 밉지 않게 살짝 흘겨보자 김한빈이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었다.
" 미안, 미안. "
" 네 휴대폰에는 알람 기능이 없어? "
" 있지. 근데 잘 땐 알람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걸 어떡해. 너 나갈 때라도 전화 좀 해주지. "
" 나도 오늘 정신 없었어. 아침에 정신 못 차리고 명찰도 거꾸로 달고 왔다니까. "
내 말에 김한빈이 킥킥 웃었다. 김한빈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한층 더 멀어진 구준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김한빈의 시선도 구준회에게로 옮겨갔다.
" 저 사람이 네 파트너? "
" 응. 구준회. "
" 어떤 사람이야? 괜찮아? 겉모습은 꽤나 훈훈하던데. "
" 글쎄. "
아직 잘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답을 하는데 어째서 아까 전의 장면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내게 닿은 구준회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느낌이 여전히 내 입술 위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더니 정말 열이 오르긴 한 건지 김한빈이 날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너, 얼굴은 왜 빨개졌어?
* * *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자 방 가운데에는 아직 다 풀지 못 한 짐들이 담긴 상자들이 가득했다. 반은 내 짐일테고 반은 룸메이트의 짐이겠지…. 내 이름이 크게 적혀진 박스들을 하나씩 풀어 책상 서랍, 책장, 옷장에 채워넣었다. 박스에 있던 짐을 대충 다 풀고는 침대 위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옷장을 정리하며 옷은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푹신한 이불의 느낌과 내 이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향기가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자고 싶다. 피곤한 하루였어. 손등으로 졸음이 쏟아지는 눈을 부비는데 때 마침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 안녕. 네가 내 룸메이트? "
오후에 본사에서 들었던 선배의 목소리에 얼른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섰다. 처음 보는 내 룸메이트는 아까 전, 본사에서 내게 커피가 담긴 잔을 내밀던 여자 선배였다. 편한 복장의 선배는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온 건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몸을 꾸벅 숙이는 날 보던 선배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 난 그런 거 싫어해. "
" 아…. "
" 잘 지내보자. "
" 네. 잘 부탁드려요. "
" 입사 기념으로 맥주 한 잔 어때? "
머리를 털다 말고 내게 물어오는 선배의 목소리에 웃으며 좋아요, 하고 답했다. 때 마침 울리는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배는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대며 내게 말했다. 밑에서 맥주 좀 사다 줄래? 카드는 내 책상 위에 있으니까 그걸로 사. 네 돈 쓰지 말고. 아, 이왕이면 많이 사와라.
전화를 받으러 나간 선배의 모습을 따라 눈을 옮기다가 선배의 책상 위에 올려진 카드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곤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모자를 머리에 씌우며 신발장에 미리 놓아둔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처음으로 와보는 기숙사의 편의점은 생각 보다 꽤 넓었다. 1층에 위치한 이 곳은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의 중간에 위치했고, 덕분에 남자와 여자 모두가 이용할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하는 인사를 받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곧장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총총 옮겼다. 맥주가 꽉 채워진 냉장고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종류도 종류지만 얼마나 사가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많이…는 어느 정도지. 잠깐을 고민하다가 맥주 네 캔을 품에 안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품에는 맥주를 안은 채로 몸을 돌리는데 내 뒤에서 맥주를 향해 손을 뻗던 누군가와 부딫혔다. 죄송합니다, 하는 사과와 함께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자 하얀 얼굴의 구준회가 날 바라보았다. 구준회의 차림도 나 못지 않게 편한 차림이었다. 아래에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고, 위에는 회색 집업의 지퍼를 반쯤 채운 채로 머리 위에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얼떨결에 마주하게 된 구준회와 내 사이가 너무 가깝다는 걸 느끼고 나서야 그에게서 재빨리 몸을 떨어트렸다.
" 안녕. "
" 네. "
짧은 대답과 함께 구준회는 냉장고에서 내가 꺼낸 것과 같은 맥주를 한 캔 꺼냈다. 너도 맥주 마시게? 내 물음에 구준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착한 계산대에서 품에 안은 맥주를 내려놓았다. 바코드를 찍는 동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는 알바생이 금액을 얘기하길 기다리며 카드를 확인하는데, 얼레? 이 카드는… 대체 뭐람? 당연히 체크 카드를 들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내 손에 들린 카드는 다름 아닌 방키였다. 순간 당황해서 카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게 알바생은 00원입니다, 하고 말해왔다.
" 어… 그게…. "
" 네? "
" 죄송한데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착각하고 다른 카드를 들고와서요. "
내 말에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알바생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갔다 올…. "
계산대에서 벗어나 다시 방으로 가려던 내 팔을 구준회가 붙잡았다. 그리곤 제가 들고 있던 맥주와 카드를 같이 내려놓았다. 이걸로 같이 계산해주세요. 예상치도 못한 구준회의 말에 몸을 틀어서 구준회를 올려다보자 구준회는 계산이 되는 것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나를 한 번 힐끔였다. 그리고는 살짝 인상을 쓰곤 내게 말했다.
" 그만 좀 봐. "
계산이 끝난 뒤 구준회에는 맥주가 담긴 검은 봉투를 내게 건넸다. 고마워. 내가 내일 꼭 갚을게. 내 말에 구준회는 됐어, 하는 말과 함께 제 손에 들려있던 맥주 캔을 땄다. 맥주 캔이 오픈되는 특유의 시원한 소리가 작게 울려왔다.
편의점에서 나와 기숙사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구준회는 남자 기숙사의 엘리베이터를 눌렀고, 나는 바로 옆에 위치한 여자 기숙사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 내 쪽의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건지 알림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먼저 갈게. 옆을 한 번 힐끔이며 인사를 하곤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실었다. 나란히 한 방향을 보고 서있던 구준회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서게 되었다.
" 내일 봐. "
마주한 얼굴을 향해 인사를 하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내게 닿아오는 구준회의 시선을 느끼며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덜컹일 때 즈음 구준회가 제 입에 맥주캔을 가져다 대려다 말고 피식 웃었다. 때 마침 옮겨다니던 내 시선이 구준회에게 닿자 구준회는 맥주캔을 제 입에서 떨어트리며 날 바라보고 말했다. 잘 자. 구준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닫혔다.
뭐지, 방금? 잘 자라고 한 건가? 나한테…?
잘 자, 그 한 마디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한 층 한 층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동안 내내 가슴이 이상하게도 간질거렸다.
* * *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어제와 다르게 검은 정장이 아닌 편한 차림이었다. 길게 풀어진 머리를 위로 올려 묶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자, 함께 내려온 룸메이트 선배가 내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훈련 잘 해. 격려의 말과 함께 선배는 다른 선배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훈련 시간이 가까워지자 강당 안에 제법 많은 동기들이 모였다. 앞에 선 선배들을 바라보며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는데, 어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내 옆에 다가와 섰다. 힐끔 옆을 바라보자 예상했던 얼굴이었다. 오늘의 구준회는 왠지 어제보다 더 하얗고 피곤해 보였다. 가볍게 제 목을 돌려 몸을 푸는 구준회는 내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로 앞만 바라보았다.
" 표정이 좀 별로인 것 같은데. "
" 잠을 못 자서. "
무표정한 얼굴로 날 한 번 힐끔이며 대답하는 구준회를 바라보다가 나도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정이 없는 말투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어제 하루 같이 있었다고 나름대로 저런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오늘 훈련은 기초 체력 테스트와 가깝다는 말과 함께 강당 안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각 구역별로 다른 종목을 검사하였고, 구준회와 내가 가장 먼저 오게 된 구역은 윗몸 일으키기였다. 먼저 온 팀들이 각자 제 파트너와 함께 매트 위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했다. 그 다음 타임에 다른 조들과 함께 하게 된 나와 구준회는 대기라인에 선 채로 다른 팀들이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다들 하나같이 윗몸 일으키기를 잘했다. 어마어마한 속도에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옆에 선 구준회를 올려다보았다.
" 윗몸 일으키기 잘 해? "
내 물음에 웬일로 구준회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앞서 하던 팀들의 시간이 끝나고 우리 팀을 포함한 몇 팀이 매트 위로 올라갔다. 구준회가 먼저 시작을 하기 위해 누웠고, 나는 구준회의 다리 쪽에서 그 다리를 품에 꼭 안은 채로 갯수를 세기 위해 마른 침을 삼켰다.
시작, 하는 소리와 함께 구준회가 몸을 일으켰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구준회의 얼굴과 마주하는 기분은 정말이지 묘했다. 시간이 갈수록 거친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는데 갯수를 세야함에도 불구하고 내 고개는 자꾸만 구준회를 피해 옆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러다 올라오는 구준회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찰나에 나는 죄를 짓다 걸린 사람처럼 재빨리 눈을 피했다.
1분의 시간이 끝나고 구준회와 나는 자리를 바꿔 앉았다. 내 다리를 꼭 잡고 있는 구준회는 힘이 든 건지 인상을 쓰곤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시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움직이는데 가까워 졌다 멀어졌다 하는 구준회의 숨소리가 자꾸만 신경쓰였다. 더불어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 닿아오는 구준회의 눈길, 모든게 신경쓰여서 제대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결국 평소보다 적은 수와 함께 1분이 끝이 났다.
" 다음 팀들 대기하도록. "
결과를 정리하는 선배의 모습을 힐끔이다 몸을 일으켰다. 헝크러진 머리를 다시 묶기 위해 풀어낸 머리끈을 입술로 물곤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다시 위로 틀어올렸다. 뒤늦게 신발을 고쳐신은 구준회는 내가 머리 묶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 입에서 머리끈을 빼내었다.
" 생각보다 꽤 하네. "
" 뭐야, 머리끈 줘. "
" 이런 거 입에 무는 습관 안 좋아. "
구준회의 말에 올린 머리를 한 손으로 고정하곤 그 손에서 내 머리끈을 낚아챘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해 묶으며 구준회의 시선을 피해 중얼거렸다.
" …평소보단 못 했어. 다른 게 신경쓰이지만 않았으면 더 많이 했을 거야. "
내 말에 구준회는 신경 쓰이는 거? 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나 싶어서 구준회를 잠깐 바라보다 금새 다시 시선을 피했다. 얘는 아까 그 상황이 안 이상했나…. 나만 묘했던 건가. 나만 과민 반응을 하는 건가 싶어서 입을 꾹 다물곤 아무런 대답도 않으며 묶은 머리만 만지작거리는데, 정리를 끝낸 선배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 구준회 00개, --- 00개. 맞지? "
" 네. "
" 수고 했어. 이제 저쪽으로 가면 돼. 아, 그리고. "
" 네? "
" 훈련 중에는 서로에게 존댓말 하도록. "
말을 마친 선배가 구준회와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 선배가 가고 존댓말이라는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구준회를 보자 웃음이 터져서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살짝 인상을 쓴 채로 날 내려다보던 구준회는 몸을 돌려 먼저 걸음을 옮기며 내게 한 마디를 뱉었다. 뭐 해요? 빨리 안 오고.
* * *
훈련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을 겨우 이끌어 개인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몸을 이끌었다. 남자 사물함과는 반대 쪽에 있는 여자 사물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할 만큼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안쪽으로 들어가자 몇 개의 사물함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열려진 사물함 안에서 뭔가를 애타게 찾는 동기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내 옆에 있는 동기 한 명의 팔을 잡고 무슨 일이에요? 하고 묻자 동기가 인상을 쓰곤 답했다.
" 누가 사물함을 털었어요. "
" 네? "
" 그쪽 사물함은 확인 해 봤어요? "
동기의 말에 그제야 내 사물함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물함 문을 당기자 분명 훈련을 가기 전에 잠궈두었던 사물함이 쉽게 열렸다. 그제서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한 마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니겠지. 불안한 손길로 사물함 안을 더듬거리는데, 당연히 손에 잡혀야 할 물건이 잡히지 않았다. 없어….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 내 지갑…. "
혼자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 위로 여기저기서 지갑을 찾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내 지갑만 없어졌어. 나도. 내 지갑도 없어. 꽤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건지 상황을 진정시키지 못한 선배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저지른 짓이야?
뭔가에 홀린듯 내 걸음은 밖으로 움직였다. 밖으로 나가는 내 걸음과는 반대로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내 지갑 화단에 버려져 있더라. …화단? 딱히 목적지가 없었던 내 걸음은 망설임 없이 화단으로 향했다.
" 안 되는데…. "
거기에 사진이 있는데. 거기밖에 없는데. 화단을 향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오직 지갑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들 범인이 누구냐며 저마다 화를 내기 바빴지만 나는 화조차도 나지 않았다. 사진만 찾으면 돼. 지갑은 안 찾아도 돼. 그 사진만, 제발.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온 나는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온 구준회와 마주했다. 내 얼빠진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준회는 뭐야, 하고 짧게 물음 아닌 물음을 던졌다. 그런 구준회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지나치자 구준회가 내 팔을 잡아 나를 멈춰세웠다.
" 너 왜 이래? "
" 지갑 찾아야해…. "
" 지갑? "
" 다들 지갑이 없어졌어. 화단에서 찾은 사람이 있대. 찾아야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제발…. "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는 내 말에 구준회가 내 팔을 놓았다. 팔이 놓아짐과 동시에 화단으로 걸음을 옮겨 구석구석을 살폈다. 처음으로 와보는 이쪽 화단은 넓기도 굉장히 넓었다. 일찍 피어있는 꽃도 보였지만 그런게 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홀린 사람처럼 지갑을 찾는 내게 구준회가 물었다.
" 어떻게 생긴 지갑인데. "
" 분홍색이야. 좀 길고, 어, 무늬가…. "
내 말을 듣고있던 구준회는 알았다는 의미인지 고개를 끄덕이곤 나와 함께 화단을 뒤지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함께 지갑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갑은 도무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아찔해지는 기분에 숙였던 몸을 일으키다말고 휘청이는 나를 구준회가 잡았다. 양 손으로 내 몸을 단단히 지지한 구준회는 인상을 쓴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 야. "
" ……. "
" 일단은 들어가서 샤워하고 옷 갈아 입어. "
" 안 돼. 지갑 찾아야 해. "
" 그깟 지갑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너 지금 땀에 절은 옷 입고 몇 시간동안 밖에 이러고 있었는 줄 알아? "
" …그깟 지갑? "
" 그래. 그깟 지갑. "
"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 "
그 안에 뭐가 들었는데!
기운 없이 소리치는 내 목소리에 구준회가 날 꽉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날 잡은 구준회의 손을 쳐내고 다시 다른 쪽 화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김한빈의 모습에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찾았어? 하고 묻자 김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 못 찾으면 어떡하지, 한빈아…. "
" 찾을 수 있어. 일단은 너 씻으러 가. "
" 싫어. "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찾고 있을게. 그러니까 씻고 와, 어? "
고개를 저으려다가 다정하게 날 달래오는 김한빈의 목소리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 하고 대답하자 김한빈이 내 어깨를 한 번 쓸었다. 구준회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런 나와 김한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친 뒤 젖어있지 않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의 물기만 대충 다 털어낸 후에 다시 화단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자 입구에 서있는 구준회의 모습이 보였다. 보고도 일부러 못본 척 구준회를 지나치는데 구준회가 야, 하고 나를 불러왔다. 그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자 또 다시 구준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찾았어. "
그제야 움직이던 걸음을 제 자리에 멈췄다. 뒤를 돌아 구준회를 바라보며 뭐? 하고 되묻는데, 구준회의 손에 들려있는 익숙한 분홍색 지갑이 보인다. 입술을 꾹 깨물곤 재빨리 구준회에게로 걸음을 옮겨 그 지갑을 낚아챘다. 다급한 손길로 지갑을 열어 가장 안쪽 주머니를 확인하는데,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진 사진을 확인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와 동시에 온 몸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초점 없던 내 눈동자에 그제야 초점이 생긴 걸 바라본 구준회는 조금 놀란 건지 주저 앉은 날 일으켜서 바로 옆 벤치에 앉혔다.
" …어디서 찾았어? "
" 화단. 현금이나 카드 없어진 건 없는지 확인…. "
" 됐어. 이거만 있으면 돼. "
사진을 양손으로 꼭 쥐고 바라보자, 뭐라고 물으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던 구준회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 위로 뭔가를 덮었다.
" 이러고 나올 거 같더라니. "
" …어? "
" 머리 말려. "
" ……. "
" 안 그럼 감기 걸려. "
머리 위에 덮어진 것을 손으로 끌어내리자 연노랑색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조금 전 준회의 손에서 지갑을 낚아챌 때, 들고있던 손에 이 노란색 수건도 함께 쥐어져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수건을 손에 쥔 채로 구준회를 올려다보자 구준회는 금방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겨 들어갔다. 그런 구준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안녕하세요! uriel 입니다
반응이 좋았던 준회 버전 아가씨 2편을 들고 왔어요 요새 준회도 제 마음 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사랑둥이 중 한 명..♡
글 속에 나오는 경호원, 훈련에 관한 정보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저런 분야에 관한 정보가 없어요 ㅠ_ㅠ 그냥 재미를 위한 글이니까 재미로만 봐주셨으면 합니다
암호닉 정리를 안 한 지도 꽤 되었네요! 얼른 지원이 아가씨 다음 편을 들고오며 암호닉 정리도 해야할 것 같고, 음 곰곰히 생각해보면 할 게 참 많아요
참, 늦게나마 말씀드리지만 BBB 속 동혁이 캐릭터는 제가 본 판타지 소설의 집합체에요!
뱀파이어하면 빠질 수 없는 트와일라잇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도 많고, 또 다른 제 사랑 판타지 소설 두어 개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도 있어요
동혁이를 주인공으로 그려보고 싶어서 쓴 글이니까 그냥 동혁이의 느낌, 글의 재미만 느껴주셨으면 합니다! ㅎ_ㅎ
약속이 있는 날은 늘 이렇게 일찍 글 올리고 나가는 것 같아요 준회 아가씨 보고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길!
제 이쁜이들 사랑해요 쪽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