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른다. 둘이 잘 해보거라."
너희를 내가 나중에 벌 할 것이다. 나에게 모욕을 주었다. 중얼중얼. 저게 무슨 나랑 동갑이야. 옛날이었으면 벌써 결혼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이제야 이해가 좀 됐다. 성격이 저런데 강제로 결혼 시킨다고 할 애인가. 주던지 말던지. 내가 조선시대에 갈 일이 없는데 무슨. 퍽 엄하게 얘기하면서 손으로는 끄적거리며 낙서를 하는 꼴이 웃겼다. 흘깃 본 공책이 어제보다 상태는 양호하다. 이런 면으로 보면 금방 익히는 건 석진과 같은 것 같은데, 왜 저럴까.
또 뭘 가르쳐야 하나, 막상 또 알려주려 하니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도 막막하고. 석진이야 궁금한 게 있으면 알아서 해결하는 편인 듯 하니까 편하긴 한데, 정국이 문제다. 너가 문제라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또 이렇게 하루가 의미 없이 흘러 가는구나. 아이고 부질없다. 그나저나, 앞으로 얼마나 더 얘네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거야. 이렇게 평생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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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잠든거지. 그 후로 딱히 특별한 일은 없이 지나갔다. 매일 궁금한 것이 하나씩 생기는 정국의 궁금증을 풀어주다가 반나절이 지나가기를 몇 일 동안 반복한 것 같은데. 왜 잠든 기억이 없지. 한대 얻어 맞은 것 처럼 욱씬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빨간 도포를 입고 아빠 다리를 한 채 앉아 있는 정국이 나를 쳐다 보았다. 얘는 왜 내가 자고 일어날 때마다 앞에 와 있는거야. 눈을 비비면서 잠을 쫓아내려 애쓰는데, 순간 느낌이 싸했다. 빨간 도포를 갑자기 왜.
"일어났느냐."
아, 일어나긴 했는데. 여긴 어디지. 익숙한 집 배경이 아니라, 사극에서 볼 것만 같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왕의 방이다. 여기를 뭐라고 했더라. 고개를 돌리니, 석진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석진이 입고 있는 건, 어느 곳과 다름 없이 호위무사들이 공통으로 입는 옷일 거고. 오늘이 몇 일이지. 지금 얘네가 나 납치한 건가. 사실 전정국하고 김석진은 배우인데 여자 역할이 없어서 나를 서프라이즈로 데려 온 것이고, 지난 몇 일 동안 있었던 일들이 전부 촬영 된…… 아니 이런 미친. 머리가 아픈 게 진짜 얻어 맞은 건가, 생각이 제대로 안 돌아가네. 무슨 말도 안 돼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 파악을 하려 노력하는 날 보는 정국도 따라 웃었다. 근데 저 웃음이 뭔가 좀 사악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계속해서 굴렸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규칙을 정하고, 몇 가지 더 알려주고. 정국이 궁금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석진이 차려주는 밥을 맛있게 먹다가. 그러고 매일 똑같이 잠들었고, 어제는. 그러니까, 어제는. 어제도 분명히 평소와 똑같이 잠든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내가 자는 동안 무언가 옮겨지는 느낌이 났던가. 아닌데, 나는 누가 건드리면 잘 깨는 편이다. 그러면 혹시 석진이 먹을 거에 수면제를 탔다거나. 석진의 온화한 얼굴을 보아하니 그런 이유는 없다. 아니면 진짜 우리를 벌 하겠다는 정국의 강한 생각이 현실화 된 걸까. 아니 이게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말이 될 리가. 오랜만에 생각이 많아지니 머리가 지끈 거렸다. 머리는 왜 아픈거지. 어디에 부딪혔나. 혹은 안 났는데. 그렇게 정신 없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계속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있던 정국이 얘기 했다.
"조선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러고는 다시 씩 웃는다. 왜 갑자기 오한이 드는 걸까. 설마 벌 주겠다는 말 진짜는 아니겠지. 무슨 주객전도. 상황이 갑자기 뒤 바뀐 탓에 불안감만 밀려 들어왔다. 이제는 내가 괴한의 입장이었으니까.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왜 죄송하다고 해야 할 것 같냐.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날 뒤로 하고 정국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고개로 까닥, 하며 오라는 신호를 보내기에 일단 가긴 갔는데. 화선지와 붓이 올려져 있다. 이건 또 뭐라 해야하지. 책상, 이라고 해야하나. 아직 상황 파악도 덜 했는데 혼자서 무언가를 계속 하는 정국. 그러더니 화선지에 크게 무언가를 적는다. 뭔가 싶어서 보는데,
[규칙 다섯 조항]
설마. 굳어진 내 표정을 보면서 개구쟁이처럼 웃는 정국. 야, 너 그렇게 속 좁은 애 아니잖아……. 그래도 몇 일 동안 너를 재워주고 먹여주고 한 게 누군데. 그러거나 말거나, 정국은 간만에 신나 보였다. 일주일 동안의 내 노고가 이렇게 사라지다니. 석진을 쳐다보아도 자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다.
"첫째, 일단 왕인 나의 말을 잘 들을 것."
불응 할 시, 수라상 대상에서 제외. 둘째,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 셋째, 궐 외의 외출은 허락을 받을 것. 넷째, 말을 낮추지 말 것. 나만 낮출 것이다. 끝으로, 궐내 연애 금지. 보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저거 왜 익숙할까. 그나저나 수라상 제외라니. 여기 진짜 조선시대인가.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한 상황에 벙쪄있자 정국이 집중 하라는 듯 탁자를 한번 탁 친다. 저것도 익숙하고.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곤. 아, 나한테 배운 거구나. 내가 미쳤지. 그래 무슨 갑질을 하겠다고 내가.
정말 말도 안 돼는 상황이지마는 이 와중에 과거 나에 대한 후회가 물 밀 듯 밀려왔다. 내가 막 모질게 대하고 소리 조금 질렀다고 똑같이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곤장 안 때린다는 게 어디야. 곤장을 맞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엉덩이가 얼얼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끔찍해라. 정국은 씩 웃으면서 조항 다섯가지를 반듯하게 적은 화선지를 벽 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였다.
"내 궐 안 모든 곳에 이 것을 붙이려고 했으나,"
너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이 곳에만 걸 것이다. 하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정국. 아, 예. 감사합니다. 황송하네요. 그나저나 뭐지, 알고 있었던 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국을 쳐다보자, 왜 쳐다보냐는 표정으로 날 마주한다.
"혹시, 조선시대로 돌아 온 이유를 알고 있어?"
"네 번째 조항이 뭐였더냐."
"요."
속 좁은 새끼 맞네. 한마디 하려다가 숨을 크게 쉬며 참고 애써 웃어보였다. 정국이 잠시 고민하더니, 시큰둥하게 말한다. 일주일 격차로 왔다갔다 하는 모양이다. 그것이 확실해지려면 일단 일주일은 여기서 있어야 하겠지. 그 일주일 동안, 조항을 잘 지키길 바란다. 나도 그러하였으니.
그래 일주일. 일주일 뒤에도 현대로 안 돌아가면 나 진짜 혀 깨물고 죽어버릴거야. 얘 완전 폭군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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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만년 만에 돌아 온 조선시대 썰입니다 8ㅅ8 저를 매우 치셔도 좋아요.. 할말이 없슴다.
작품 여러개를 연재하겠다고 당당하게 선포해 놓고는 이렇게 수습을 하지 못하다니.. (마른 세수)
요즘 답글도 못 달아 드리는 것 같아 너무너무 죄송한 마음 뿐이에요.
더 좋은 작품을 쓰겠다고 하면서도 계속 부족한 작품만 내놓는 것 같아 그것도 죄송하구요..
원래 글을 쓰면서 필체가 다듬어지고 더 성장해야하는 법인데 저는 왜 이 모양인지 (한숨) (먼산)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항상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