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빈이 아닙니다."
... 예?
"... 나는, 원 입니다."
"이원. 이원 입니다."
... 둔기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 이런 것인가. 지금 그가 내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한빈, 그의 이름이다. 근데 한빈이 아니라니. 원이라니.
"저하, 송구하오나..."
"빈궁도 놀라지 않았습니까."
"제가 저 같지 않다는 것을요."
물론이지. 그렇게 사람 망신주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이러니까 놀라는게 당연하지.
"저하께서 이제야 저를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놀라진 않았습니다."
"... 빈궁, 귀신을 속이더라도 저는 못 속입니다."
"..... 뭐, 조금은! ...예. 조금은 놀랐...죠."
내 말에 피식 한번 웃던 그가 이제는 자기 옆으로 오라며 방석을 가리킨다. 그의 말에 따라 곁으로 다가가니 밥을 먹다 말고는 벼루에 먹을 갈아 종이에 한글자, 한글자를 써내려갔다.
"그대가 봐보세요. 과연 이 글씨가 한빈과 같다 생각하십니까."
그가 써내려간 글씨는 그야말로 정갈했다. 왕족 중에서도 글쓰기엔 능하지 못했던 한빈이였으나 자신을 원 이라고 칭하고 있는 그의 필체는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 그래서, 지금 그대가 한빈이 아니다. 저하가, 아니다. 라는 겁니까?"
"일국의 세자는 맞지요. 허나, 한빈은 아니라는겁니다."
"... 원, 이 원이다 라는 겁니까."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쉿, 하던 그가 다시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 눈빛이 참 오묘하게도 사람을 흔들게 만들었다.
"내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종묘와 사직이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그대를 보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이제와 그대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린 시절, 서책방에 놀러갔을 때 유난히 즐겨보았던 서책이 있었다. 그 책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내용은 아직도 생생하다.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아픔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그 책 내용 마지막엔 이러한 글귀도 쓰여져있었다. '누구나 가면을 쓰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그 가면을 벗길 권리는 없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이 구절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 단순한 시간교대일 뿐입니다. 그대에게 언젠가는 말해야 했던 것인데... 한빈 이 녀석이 그리 말재주가 좋지 않다보니..."
"한 몸에...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역시 빈궁은 똑똑하십니다. 뭐, 그런셈입니다. 이 한 몸에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겁니다. 한빈과, 나."
한빈, 본모습의 그가 언제 다시 나타나는지, 지금 이 모든 것을 누가누가 알고 있는 것인지, 언제부터 이러했는지. 궁금한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한꺼번에 내가 감당하기엔, 지금 이 사람에게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매번 쌀쌀맞았던 그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게는 또다른 행운일지도 모르니까.
"... 인정하고 또 적응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아는 사람은 김내관과 이제 그대까지. 둘 뿐입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저하!!! 어디계십니까!!'
"김내관이 날 찾나봅니다. 말도 안하고 나왔으니..."
"그냥, 나오신겁니까?"
"말했지않습니까. 빈궁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던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턱 끝으로는 내 방의 창을 가리키며. 에이, 설마.
"하나, 둘, 셋 하면 뛰어내리는겁니다. 아시겠지요?"
"...예, 예?"
"걱정마세요. 다치지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방 창을 열어 자기먼저 휙 뛰어내리더니, 밑에서 나더러 내려오라 손짓을 한다. 지금... 나더라 뛰어내리라고 여기를? 어려서 험하게 놀았다 하는 나도 창을 열고 뛰어내리거나 하지는 않았거늘.
"저도 뛰어내리지 않았습니까. 이거보세요, 안다칩니다. 뛰는 그댈 안아드릴테니 걱정마세요."
"허나, 무..무섭습니다"
"걱정마세요, 하나, 둘, 셋 하면 뛰어내리면 됩니다. 제가 안아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셋!"
그의 말에 에라 모르겠다 하며 뛰어내림과 동시에 단단한 무언가가 날 붙잡았다. 살포시 안긴듯한 느낌에 눈을 뜨고나면 날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한빈, 아니 그는 원이였다.
"다치지않게 해드린다 했지 않습니까. 이렇게, 안아드린다고."
"..."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그는, 이원. 이원이다.
조선에 별빛이 내린다
"저하, 함부로 그렇게 막 다니시면...!"
"알겠네, 알겠어. 이제 그만 하지? 귀에 딱지 앉겠네."
한빈의 까칠함과 원의 자유분방함은 진환을 옭아매기엔 충분했다. 헉헉 거리며 찬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쯤, 원은 나즈막히 진환을 불렀다.
"진환아."
"예, 저하."
"저잣거리에 가보지 않을테냐."
"저, 저하! 조강에 드셔야합니다"
원은 입술을 쭉 내밀고서는 터벅터벅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강따위. 원은 한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따분하고 갑갑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저하."
"왜."
"삐치셨습니까?"
"아마도 그런 듯 하다"
"... 원군이시니 이해해드리겠습니다. 허나,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미시 전에는 들어오셔야 합니다."
뾰로통했던 얼굴을 다시 피고선 환하게 웃어보이는 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뛰어가니 뒤따르던 진환 또한 열심히 달리기 시작한다.
"저하! 저하 조금만 천천히!! 체통을 지키셔야합니다!!!"
"그건 한빈이나 하지, 나는 그런거 모른다!"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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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환이를 내관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네... (미안해) 이제 한빈, 빈궁, 원 모두 제대로 나왔으니 (저만 잘 쓰면 되겠네요) 허허허. 글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너무 감사드리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