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중아와 양키스 - 풍문으로 들었소
"으으..."
쌀쌀함에 잠을 깼다. 금새 잠들 수 있길 바라며 발끝에 있을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리려 했지만 좀처럼 발 끝에 느껴지는 게 없었다. 침대 아래로 떨어졌나 싶어 팔을 침대 아래로 뻗었다. 바둥거리듯 휘둘었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어디간 거야. 한껏 얼굴을 찡그린 채 눈을 떴다.
...여기 어디야?
나는 정신을 뻐뜩 차리고 일어났다. 처음 보는 광경에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고 두리번 거렸다. 처음 보는 곳이다. 우리 집이 아니다. 내가 어제 뭘 했지... 속상함에 꽃집을 일찍 닫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을 마셨다. 3차까지 쭉쭉 달리고 친구들이 나를 택시를 태워 보냈다. 집 앞까지 왔다, 그리고... 모른다. 하나도.
지끈거리는 머리, 울렁이는 속. 화장실에서 모든 걸 게워내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일단 내 겉 상태는 별 일 없었다. 어제 입고 나간 그대로였다. 가방도 잘 메어져 있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고 나는 어떻게 들어온 걸까. 왜 내 머리는 나빠서 기억이 나질 않은 걸까, 왜... 왜!!!!
"일어났나보군."
"......"
"......"
"누, 누구......"
그때였다. 어디선가 샤워 가운을 걸친 남자가 나타났다. 인상이 존나 무섭게 생겨 위축되었고 무서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아무 말 없이. 저기, 내 말 좀... 두려움이 한껏 치솟았다.
"알아도 좋을 거 없으니까,"
"......"
"나가."
'쾅쾅쾅-!'
'형님!! 저희 왔습니다요!'
"......"
"......"
그냥 나가라는 감사한 말이 끝나자마자 두껍지만 밝은 목소리가 바깥 너머로 들렸다. 나는 좀 더 움츠렸고 남자는 동공이 흔들렸다. 뭐, 뭐야. 마치 내 생명끈과 같게 느껴진 가방끈을 꽉 잡았다.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내 앞에 선 남자가 욕을 짓거리는 것 같았다.
"형님! 저희 왔습니......"
"......"
"......"
"혀, 형님..."
왜, 깡패 영화를 보면 깡패들이 꽃무니 셔츠에 검은 정장바지 입고 있지 않던가. 순 뻥인 것 같았던 그 모습은 실제였다. 산만한 등치의 남자들이 쏟아지듯 집 안으로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나와 남자를 번갈아보며 얼굴이 창백해지는 꼴이 되었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보고 나가라던, 아마 집주인인 남자는 아까보다 얼굴이 더 굳어져 있었다. 일단 말하자면, 나는 존나 좆됐다.
"형님..."
"......"
"여자... 생기셨습니까......?"
집 안으로 들어온 덩치 큰 깡패 날라리들 중에서, 조금은 체구가 작고 귀염상인 남자가 나와 집주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존나 여자라뇨. 제가 여자는 맞지만 그런 의미의 여자는 아닙니다. 내가 대신 말하고 싶었지만 이 삭막한 분위기에서 입이라도 열었다간 저 덩치들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았다. 떨리는 손이 주체를 못했다. 정적이 흐르고, 가운을 입은 남자가 얼굴을 한껏 굳인 채로 나를 쳐다봤다. 지릴 것 같은 눈빛이 두려움을 더해주었다.
"...나가."
"......"
"안 들리나? 나가라고."
나를 향한 그 말에 나는 덩치 깡패들 사이로 떨며 그 집을 뛰쳐나왔다.
***
허겁지겁 집을 나와 보니 내가 들어간 곳은 당연하게도 아파트가 아니었다. 아침 저녁으로 내 잠을 깨운 원인인 공사를 했던, 그 집이었다. 내가 미쳤지, 미쳐도 곱게 미치지 못했지. 나오면서 집 앞에 세워진 검은 차량들을 보며 지릴 뻔한 걸 꾹 참고 바로 옆인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유, 육 층. 육 층!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 우리 집이 몇 층인지도 잊어먹을 정도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걸 보며 숨을 쉬었다. 진짜 나는... 나는 왜 사는가. 무슨 깡으로 형님이라 불리는 깡패의 집에 들어가서 퍽이나 잘도 잤던 것인가.
술이 웬수다 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섰다. 아침상을 차리고 있는 엄마를 보니, 울고 싶었다.
"너 왜 집 안 들어왔어!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 거야?"
"으응..."
"그럼 전화라도 하지. 걱정했잖아."
"미안... 바로 자가지고. 세훈이는?"
"친구들 만나러 나갔지."
"그래...... 헐."
'......누구,'
'야 이 오세훈 개놈아. 안 자면서 문은 왜 늦게 열어!!!!!!!'
제발 꿈이라고 말해 줘요.
'내 새끼...'
'......'
'아침에 누나가 용돈 못 줘서 미안하다... 개새꺄 누나가 쫀나게 미안하다!!!!!'
'......허.'
'2만원 모자랐지? 흐으... 누나가 미안해... 돈 못 버는 누나라 미안해...'
'......'
'자, 여기 오만워언...'
'...이봐요.'
'이거면 됐지...? 밥은 먹고 다니냐.....'
새벽에 있던 일이, 모두 꿈이었다고 제발 말해 달라구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새벽에 있었던 그 일들이 모두 기억이 났다. 아파트 입구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집의 대문. 우리 집 도어락인 줄 알았던 그 집의 도어락. 내 동생 세훈인 줄 알았던... 그 남자.
"뒤져라 오징어!!!!!! 죽어 마땅한 년!!!!!!!!"
내 기억엔 세훈인 줄 알고 볼도 딱 잡고 막 그랬던 것 같은데. 기억하고 싶지 않을 걸 기억한 탓에 나는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벽에 머릴 박았고 엄마는 드디어 미친 거냐며 방문을 두드렸다. 급히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대자 엄마는 다시 드라마를 시청하러 간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옆 건물이라지만 안 마주치면 되는 거 아닌가? 그쪽으로 안 가면 되는 거고. 어차피 꽃집도 그 방향은 아니니까. 애써 침착하며 나를 세뇌시켰다. 앞으로 영원히 안 마주치면 돼.
***
그 여자가 나가고 나서 형님의 집 안은 더욱더 조용해졌다.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정적이 흐르고, 형님이 한숨을 푹 쉬시며 방 안으로 들어가셨다. 우리는 서로 소곤대다 쇼파에 앉으며 본격적으로 금방 그 여자에 대해 얘기했다.
"백현이 형, 형님 진짜 여자 생긴 걸까여."
"근데 분위기 좀 그렇지 않았냐? 막 나가라고 하고."
"형님이 원래 표현을 잘 못 하시잖아여."
"하긴 그렇지. 백현이 니 생각은 어떠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 말에 준면이 형은 '네가 제일 마초잖아.' 라며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초가 아니라 인기가 많은 거란 걸 왜 몰라주는 걸까. 쇼파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지려다, 형님이 자주 애용하시는 쿠션이란 걸 깨닫고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근데 왜 이렇게 축축하지.
"아무튼 간에, 형님 기분 별로 안 좋아보이는데 말 꺼내진 말자고 다들. 알겠냐?"
"네엡!!!!!!"
힘찬 대답과 함께 형님이 방 안에서 나오셨다. 검은 꽃무늬 셔츠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면 맞으려나. 앞장 선 형님의 뒤로 따까리들이 차례대로 나갔다.
형님, 사실 저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봤습니다. 형님의 귀가 새빨개져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형님의 그 멜랑꼴리를 위하여!
백현은 홀로 뿌듯해 하며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
***
- 진짜야?
"어... 믿고 싶지 않지만 진짜야."
- 세상에. 새해부터 이게 뭔 일이야.
꽃집에 지갑을 두고 온 게 생각나 가게에 들린 참이었다. 집구석에 털어놓기엔 스케일이 큰 얘기이다 보니 인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걸 털어놓았다. 친구는 경악을 하며 나보고 미쳤다고 소릴 질렀다. 그럴만 해... 보통 사람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니까. 수다를 길게 떨다보니 어느새 아홉 시가 넘었다. 전화를 끊고 가게 정리를 하고 불을 껐다. 이번 주까지 웨딩홀 부케를 마감해야 할 텐데. 여러 생각들을 하며 꽃집 문을 닫았고, 뒤를 돈 순간
"......"
"......헉."
안 마주치면 그만이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깡패 집주인이 보였다.
"아, 어, 음....."
"......"
온갖 어색한 티를 내며 서있었다. 남자는 다시금 굳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나는 다시 쫄았다. 아까 그 덩치들이 이 남자에게 형님, 형님 했다는 것은 이 사람이 대장이라는 건데... 두려우면서도 피해를 끼친 게 마음에 걸렸다. 사과를 해, 말어. 하기엔 무섭고 안 하기엔 양심에 찔리고. 이미 아는 척을 해버리긴 했지만 돌아서면 끝이라고 생각을 해도, 남의 쇼파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잠을 자던 게 떠올랐다. 나는 개미똥꾸멍만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
그리고 내 말은 무색하게도 뒤를 돌아 가버리는 남자 때문에 말 끝을 잇지 못하게 허공에 뱉게 된 셈이 되었다. 그냥 무시하고 싶은 건가. 그래도 사과하려는 거였는데... 체한 것 같이 뒤숭숭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또 어색하게 같은 방향이란 말이지. 거리를 두며 걷는 게 이렇게 어려웠나. 좀 빨리 걷는가 싶으면 느리게 걷고. 그러다보니 멈칫 멈칫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갈 거면 좀 제대로 가든가... 뒤에서 걷는 사람 생각도 안 해 주네. 입으로 못 뱉을 말, 속으로만 궁시렁 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따라 멈추었다. 왜지, 왜 멈추지. 나 따라가는 거 아닌데. 우리집 가는 건데. 이미 변명 거리를 생각해놓고 있는데 남자가 뒤를 돌았다. 눈이 딱 마주쳤다. 매서웠다. 나도 모르게 생각만 하고 있던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따라 가는 거 절대 아니에요. 저희 집 방향이랑 똑같아서...!"
"......"
"...아니, 오해하실까 봐......"
"......"
남자는 가만히 서있었다. 찌질한 내가 괜히 찔린 건가 싶어 쪽팔렸지만 이때를 기회 삼아 조심스레 다가갔다.
"새벽, 그니까 아침에 있던 모든 일은 죄송해요. 제가 너무 취해서..."
"......"
"취해도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죄송해요."
"......"
"......"
"...네."
고등학생 시절 야자를 튄 다음 날 선생님께 죄를 고한 것과 지금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다 남자의 대답에 천천히 고갤 들었다.
"알,... 알겠다고요."
"......"
눈을 못 마주치고 동공에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가만히 있질 못하는 남자였다.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 덕에 열심히 써보려구요. 벤츠남은 저녁에 끄적끄적...나 두목쓰 사담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