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바라기
“ 오랜만이야. ”
가로수길에 나란하게 서 있는 벚나무의 가지마다 한겨울 내내 외로이 있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화사한 벚꽃이 피어나 네 환한 웃음을 받쳐주고 있었다. 언제 벚꽃이 피었더라, 네가 건네오는 인사의 손을 마주잡고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어보이며 어렴풋이 웃어보였다. 자주 지나다니던 길임에도 벚꽃이 피어난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네 옆에 나란히 서서 나를 올려다보는 꼬마 아이도 신기했고.
“ 아빠. ”
내 시선을 느꼈는지 네 다리를 붙든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데, 그 눈동자에 두려움을 가득 안고 있는게 귀여웠다. 그러면서도 네가 제 아빠임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아빠, 아빠, 라며 너를 찾는 간절한 목소리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 앞에 자리한 네가 이 아이의 아빠라는 건 잘 알 수 있는데.
“ 잘 지냈어? ”
“ …그럭저럭. ”
“ 아, 넌 처음 보지? 우리 원식이. 올해 4살이야. ”
잘 지냈냐고 물어봐주는 네가 고맙게만 느껴져 고개를 끄덕이자, 무거운 분위기를 그냥 두지 못하는 성격은 여전한 모양인지 호들갑을 떨며 네가 소개시켜준 아이는 첫인상과 같이 귀여웠다. 이름도, 외모도, 그리고 여전히 두려움을 안고 있는 저 눈빛도. 그래, 딱 너한테서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게 티가 나는 아이였다. 너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아이. 자기 소개를 하라며 부추기는 너에게 난생 처음 반항이라는 것을 할 정도로 나를 경계하는 모양새가 예전의 나와 무척이나 닮아 있어 미워할 수도 없었다. 아니, 아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미워할 수가 없는 건가.
“ 싫어, 싫다고. 아빠 미워! ”
“ 원식아! ”
“ 차학연, 완전 애 아빠 다 됐네. 아니면 이제 아저씨인가? ”
“ 너까지 이러기야? ”
근처에 있을게 분명한 카페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로 가로수길에 나란히 서서 흩날리는 벚꽃잎을 배경으로 나누는 대화도 꽤 할 만했다. 첫 반항이 충격적이기라도 한 건지 연신 아이를 흘긋거리는 탓에 나와의 대화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아마 아빠가 되면 제일 먼저 딸바보, 혹은 아들바보라고 불리울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그게 내 눈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으니 재미있었다. 적어도 어린 날에는 자주 상상하고는 하던 풍경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으니까.
“ 귀엽네, 둘 다. ”
“ …잘 지내? ”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괜찮구나, 싶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와중에 네가 물어온 말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 놀랍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바람결에 따라 제 자신을 감추지도 못하고 흐드러지는 벚꽃잎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에게로 저절로 시선이 옮겨졌다. 행복. 둘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였다. 나는 과연 행복할까. 문득 내 자신에게 물어보는 말들이 낯설게만 느껴져 답은 내리지 못하고 바보같이 웃었다. 너는 과연, 내 웃음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일까. 그게 궁금하기도 했다.
“ 별빛아, 사실은 …. ”
“ 아빠. 엄마는? ”
“ 어? 어, 그게 …. 원식아, 잠깐만. 응? ”
“ 엄마 보여준다며, 엄마! ”
엄마? 네 엄마는 죽었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겨우 막은 채로 혹시나 네가 눈치 채지는 않았을까, 곁눈질로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말들에 놀랐는지 횡설수설하는 너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자, 앞에서 저를 달래려 애쓰는 너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금방이라도 울 듯이 가슴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를 보니 괜히 울리고 싶어져 뭐라 더 말하려던 나는 아이를 달래려 애쓴 채 내게로 돌아서지 않는 네 뒷모습이 처량하게만 느껴져서. 아니, 내 자신이 처량해 보일까봐 무서워서 그만둬버렸다.
언제까지 엄마가 없다는 걸 모른 채로 네 품 안에 갇혀 살아가게 될까,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짖궂은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너는 언제까지 저 아이를 속일 수 있을까. 사실은 그게 더 궁금했다. 나를 속였던 것처럼 저 아이도 속여갈까. 그렇게 되면 저 아이도 행복했던 것들은 모두 잊고 나처럼 망가져 버리게 될까.
“ 학연아. ”
“ 미안해, 별빛아. 내가 이러려던게 아닌데 …. 하. ”
오랜만에 보는 난감한 네 표정이 보기 좋았다. 정확히 3년 만이었다. 단 하룻밤. 그 불장난으로 인해 나를 버리고, 제 아이를 가졌다는 이에게로 뒤돌아섰던 네가 정확히 1년 후에 내게 나타나 사실은 모든게 거짓이었다며 울었던 그 날로부터 3년. 갑작스런 사고로 그리 곱기만 하던 아내가 죽은지도 3년. 그리고 제 핏줄이 아님을 알면서도 온갖 사랑을 베풀어가며 아이를 키워낸지도 3년. 3년 새에 너는 많이 유약해져 있었다. 덕분에 모든 것이 새롭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 감정이 고맙기까지 했다.
“ 엄마라고 소개해줘도 돼. 괜찮아. ”
“ 뭐? ”
“ 애초에 그러려고 만난 거잖아, 괜찮아. 내가 노력할게. ”
당황스러움에 잿빛으로 물들어버린 네 얼굴이 우스웠다. 노력할게. 물론, 네 옆에 서서 나를 경계하는 저 아이를 사랑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엄마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어. 네가 나를 떠난 5년이란 시간동안 나를 위한 감옥 안에서 그것을 지켜내고 있었으니까.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던 말을 다시 한 번 되뇌다보니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 괜찮, 겠어 …? ”
조심스레 물어오는 너에게 고갯짓을 함으로써 긍정의 답을 내린 뒤에야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내 웃는 얼굴을 보고는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는 아이는 여전히, 귀여웠다. 그래도 마귀할멈은 아닌데, 저런 식으로까지 반응해줘야 할까.
“ 괜찮아. ”
내 조그마한 긍정이 네 표정에 생기를 불어넣어줬다는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내 자신이 나를 위한 감옥에 갇혀 살았던만큼 너도 나라는 감옥에 갇혀 살기를 원해왔는데, 이렇게 손 쉽게 네 스스로 감옥으로 걸어올지를 몰랐기 때문에. 봐, 결국엔 너도 나한테 올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어. 내가 그 날, 네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처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네가 없는 5년간 내게 일어났던 일들과 앞으로 너에게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줘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은, 살아있었다면 네 옆에 선 아이와 같은 나이였을게 분명한 너와 나의 귀여운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줘야만 하겠지.
학연아, 너는 모든 얘기를 듣고 난 뒤에도 울면 안 돼. 절대로. 알았지? 우는 건 여태껏 내가 해왔으니까, 추락하는 건 네가 해야만 해.
사랑해, 학연아.
- 독백 (獨白)
노래 듣다가 그냥 흐름대로 써본거라. 음 ㅠ 그러고보니 이런 시점은 처음 써보는 듯하네요! 부족한 글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해요.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