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5 (삿포로에 갈까요)
카페에서 오세훈과의 짧은 만남을 가진 후로 PC방을 향하려다 말았다. 수능이 곧장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별다른 할 일이 없는 날이면 게임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행히도 금세 생각을 고쳐 PC방이 아닌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아 근데 생각해보니, 오늘부터 이벤트 기간이라 아이템을 공짜로 준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 어."
게임과 PC방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부풀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문득 앞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들어졌다.
"안녕."
하얀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채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있던 박찬열이 먼저 인사를 걸어왔다. 검정색 슬랙스에 하얀 와이셔츠, 머리칼을 세워 왁스로 스타일링을 한 헤어까지…. 마치 데이트를 하고 온 사람이라도 되는 양 꾸밈 가득한 그에게선 은근한 향수 냄새도 풍겨왔다. 대충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해보이자, 배시시 웃으며 제 백팩 속에서 얇은 프린트물을 꺼내기 시작한다.
"아, 이건 내가 집에서 정리해온 고사성어들이거든.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한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
"음…, 사실 오늘 ○○이가 보충수업 좀 해달라 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못 하게 됐거든. 이미 준비 다 끝내고 나왔는데 문자가 왔더라. 오늘 바빠서 못 하겠다고."
"아."
"그래서 그냥 나온 김에 카페에서 내 할 일이나 했지. 너희한테 알려줄 내용도 몇 번 더 점검해 보고."
"여자친구랑 어디 데이트라도 갔다 오신 줄 알았어요."
"여자친구? 하하, 내가 여자친구가 어디 있어."
"하긴. 여자친구도 있는데 걔한테 접근한 거면, 그건 큰일날 놈이죠."
"응?"
고작 보충수업 때문에 만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트라도 가는 사람인 것처럼 꾸미고 나왔다는 건 분명 잘 보이기 위해서였겠지. 멋있어 보이고 싶었겠지. 속이 뻔히 보이는 박찬열의 모습에 괜히 화가 났다. 사실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박찬열이 옷을 얼마나 멋있게 입었든, 헤어 손질을 얼마나 깔끔하게 했든,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난 그저 그 둘의 사이에 낀… 아니, 사실 끼어있지도 않은 인물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건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요."
"……."
"저번에 저 빼고 둘이 벚꽃 구경하러 갔었잖아요."
"응."
"그때 걔한테 키스 왜 했어요?"
꽤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당황을 한 건지, 한참 동안 말을 아끼던 박찬열이 작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당당한 모습마저 짜증이 났고 재수가 없었다.
"하든 말든. 종인이 네가…"
"저번에 말했거든요. 저 원래 걔한텐 오지랖 넓다고."
"아, 그래. 그랬지."
"그니까 제가 참견을 하든 뭘 하든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음, 종인아."
"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네."
"뭐가요."
"너 ○○이 좋아하는 거 맞지?"
"싫어하진 않아요."
내 대답에 박찬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 작게 인상을 쓰는 박찬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이자, 곧이어 굳게 닫혀있던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난 좋아하거든."
"……."
"만약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을 품고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까 다행이야."
"싫어하진 않는다 했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란 말은 안 했는데요."
"하하, 뭐라고?"
"정신 차리세요. 걔 아직 고딩이거든요."
"하하, 내가 무슨 서른 넘은 아저씨인 줄 아나 보네."
"그래도 안 좋은 시선으로 보이는 건 사실이잖아요."
"안 좋은 시선?"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는 건 아니지만, 아직 열아홉 살이라구요. 성인 아니에요."
"……."
"주변에 여자 없어요? 그 얼굴에 여자들이 대시도 안 해요?"
"종인아."
"걔한테 잘 보이려 애쓰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결국 얻는 게 뭔데요? 은팔찌밖에 더 있어요?"
"……."
"안그래도 지금 수능 때문에 예민한 애 건들지 말아요."
"……."
"지켜보는 나는 더 짜증나니까."
손에 들려있던 프린트물이 손바닥에 맺혀있던 땀으로 인해 살짝 젖어버린 듯했다. 우글쭈글해진 프린트물을 대충 반으로 접곤 부채질을 했다. 괜히 열이 올라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더웠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멍청이같이 서있는 박찬열을 흘끗 바라봤다 다시 시선을 옮겼다. 반듯하고 깔끔한 차림새와는 달리 표정은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껏 차려입은 박찬열의 모습에 단순히 짜증이 났다. 나도 저렇게 앞머리 올리고 정장 입으면 멋있어. 박찬열만큼 키가 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큰 축에 속해. 아직 고딩이라 안 꾸미고 다녀서 그렇지, 나도 큰맘 먹고 한 번 제대로 꾸며 보면 난리난다고. 박찬열보다 훨씬 멋있고 잘생겨질 수 있어.
"아, 프린트물 하나 더 주세요. ○○이꺼."
*
개학. 짧고도 길었던 여름방학이 끝이 났고, 드디어 개학이 다가왔다. 대략 30일 동안의 방학 기간이 끝난 뒤에 입는 교복은 늘 새롭게 느껴진다. 매일이다시피 입던 교복을, 30일 동안의 텀을 두고 다시 입는 거라 그런 것이겠지. 그래봤자 바로 내일이면 다시 익숙해질 게 뻔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조금은 서늘해진 듯한 날씨 탓에 얇은 가디건 하나를 걸쳐야 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게 하복 하나만 걸치고 나온 김종인은 이정도는 끄떡 없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러다 또 감기 걸리지. 방학 때 감기몸살 한 번 심하게 걸려놓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닭살 하나 돋지 않은 녀석의 매끈한 팔이 놀랍기만 했다.
"아, 오늘 4교시 문학이야. 망했어. 점심 늦게 먹게 생겼다."
"어차피 너 늦장 부리다 늦게 가잖아."
"그래도 요즘엔 안 그러잖아. 너도 영어 듣기 한답시고 나 기다리게 하면서."
"맨날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듯 녀석이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제법 오랜만인 등굣길이 조금은 낯설었다. 아직 아침잠에 취한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학생들이 대다수였으며, 고3으로 보이는 안경 낀 남학생은 영어 단어장을 눈으로 훑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학교가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왠지 수능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감이 다시금 가중되는 것만 같았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탁탁한 공기와 딱딱한 분위기가 날 맞아줄 것이고, 그 답답한 공간에서 1교시부터 시작해 7교시까지 수업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또 보충 수업을…. 정말이지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은 왜이리 힘들고 고단한 학교 생활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어느 나라는 4시에 귀가를 하라는 것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한바탕 난리를 벌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이런 나라도 있는 것이었다. 각각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긴 하지만….
어른들은 누누이 말하곤 했다. 고등학생 시절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이건 후문이지만, 난 그 사실을 스무살이 되고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
드르륵, 교실 뒷문을 열었다. 30일간의 여름방학이 끝난 후의 교실 모양은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몇몇 상위권 학생들은 여느 때처럼 제 자리에 반듯이 앉아 부족한 부분을 메꿔나가고 있었고, 평소 공부에 열정을 쏟는 것 같지 않아 보이던 몇몇 학생들도 자리에 앉아 문제집을 풀어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지각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듷들이 자리에 앉아있는 탓에 마치 지각이라도 한 것 같은 찝찝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참, 우리 시간표 바꼈대."
"시간표?"
"응. 1교시 영어독해가 체육으로."
"뭐? 우리 오늘 체육 안 들었잖아."
"내일 체육을 오늘 한다던데. 대신 영어독해는 내일 해. 두 개가 바뀐 거야."
"… 나 체육복 없는데."
"빌려."
제법 단호한 옆짝꿍의 말투와 목소리에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어쩜 자기 일 아니라고 저렇게 무심할 수가 있는 건지. 하긴, 평소 시간표나 수업에 대한 얘기가 아닌 지극히도 사적인 얘기는 단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던 아이였으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
마치 저는 체육복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제 가방 속에서 체육복을 꺼내 책상 위에 척- 하니 올려놓는 녀석의 행동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자애가 어떻게 저리 얄미울 수가 있는 건지….
*
자습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옆 반으로 향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의 반이었다. 자습시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자리에 앉아 제 할 일을 하는 딱딱한 모습에, 왠지 교실 문을 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문이 열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올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아쉬운대로 까치발을 들고 창문을 통해 교실 안을 쭈욱 훑기 시작했다. 하필 창가쪽에 앉아있어 따로 불러내기도 힘들 듯했다. 이렇게 계속 쳐다보면 누구든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의식하고 이쪽을 바라봐 주던데… 아무래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걸 보니 난 아무래도 지극히 소심한 사람이었나 보다. 결국 얻은 것 하나 없이 아까운 시간만 소비했다. 10분의 쉬는시간 중 4분을 허무하게 소비해버렸다.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시간과 운동장으로 나가는 시간을 합하면 족히 5분은 투자해야 하는데…. 수업 시작까지 몇 분은 늦더라도 일단 체육복은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체육복을 입고있는 무리들 사이에 혼자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쪽팔릴 만한 일이었다.
시간도 촉박했던터라 최대한 가까운 반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또다른 옆 반인 김종인의 반. 녀석의 반에 내가 아는 여학생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은 찬 물 더운 물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만약 아는 여학생이 없다면 녀석에게 부탁을 해서….
"……."
쉬는시간도 고작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디를 간 건지, 녀석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시나리오와는 너무나도 다른 상황이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럴 때 오세훈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역시 절친인 김종인과 오세훈은 함께 교실을 나섰겠지. 오세훈 자리도 비어있는 걸 보니, 100퍼센트였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교실 안을 둘러보니 역시 내가 아는 여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기껏 해봐야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모르는…. 이러고 가만히 있어봤자 해결될 거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시간만 매정히 흘러간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많이 크겠지만 김종인 꺼라도 가져와 한 시간만 입어버릴까, 생각하면서도 정작 실행에까지 옮기진 못했다. 분명 화를 낼 게 뻔했다. 아님 그냥 간단한 메모라도 남겨놓고 녀석의 체육복을…. 오늘따라 왠지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정말이지 이럴 땐 집으로 순간이동을 해 체육복을 가져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물이나 실내화 가방을 놓고 오는 날이면 누구든 하는 생각. 집으로 순간이동 하고 싶다.
*
하는 수 없이 말끔한 교복 차림으로 운동장을 향해야 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스탠드 앞에 줄을 지어 서있었다. 도대체 다들 어떻게 체육복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오늘은 체육 수업이 없는 날인데 어떻게 다들 체육복을 챙겨올 생각을 한 걸까. 아님 친구들한테 빌려온 건가? 그래도 두세 명, 아니 하다 못해 한 명 쯤은 나와 똑같이 교복을 입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이럴 땐 단합심이 대단하다. 나 빼고 전부 체육복이라니….
수능을 앞두고 있는 고3에게 운동장에서 하는 체육 수업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운동장을 50분 뛰는 것보다 교실에 앉아 영어독해 지문을 세 개 이상 해석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지. 그런 와중에 체육이라니….
*
분명 운동장 다섯 바퀴를 돌고 오라는 엄청난 벌을 내리실 거라 막연히 생각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선생님은 제법 약한 벌을 내려주셨… 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앉았다 일어나기 100회. 정말이지, 교복 치마를 입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배려 따위 없으신 분이다. 70회부터 점점 다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하더니 정신이 혼미해져왔고, 억지로 100회를 채운 뒤 교실로 향하는 다리 또한 후들거렸다. 차라리 운동장을 몇 바퀴 뛰는 게 더 나았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겪어낸 일이었고,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런 일을 후회해서 뭐할까. 가장 미련한 행동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를 하는 것.
계단을 오르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다. 왜 하필 맨 꼭대기 층에 3학년 교실들이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위치를 선정한 건지 궁금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실의 위치도 그와 비례하듯 층수가 높아졌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그리고 고등학교마저도….
"어? 안녕."
3층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앞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네온 사내는 예상대로 오세훈이었다. 역시 녀석의 옆엔 김종인도 같이….
"어디 갔다 와? 1교시 체육이었어?"
"아…."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체육이었다면서 왜 교복을 입고 있어? 없으면 빌리기라도 하지 그랬어. 라는 대답을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아 어설프게 웃어보이자, 녀석은 가볍게 넘어가버린다. 단순한 건지, 별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세훈의 옆에 가만히 서있던 김종인이 나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갸웃해 보이는 모습에 이유 모를 긴장감도 드는 듯했다. 둘은 체육복 바지 위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각자 제 피부톤에 걸맞은 색상을 입기로 정했던 건지, 오세훈은 흰색, 김종인은 검은색이었다.
"다음 시간 체육인가 보네."
"귀찮아."
"넌 안 귀찮은 게 뭐야."
"치킨 주문하는 ㄱ… 아, 됐고. 이따 보자. 열공해."
열공하라는 말을 남기며 내 머리칼을 잔뜩 헤집어놓는 김종인의 손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머리 헝클어놓는 거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라고 누누이 말을 해줘도 어쩜 매번 한결 같은 건지….
"안녕. 공부 열심히 해."
곧이어 오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김종인이 먼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런 김종인의 뒷모습에다 대고 같이 가자며 가벼운 짜증을 내는 오세훈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세훈은 차가운 인상과는 다르게 은근한 허당기가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화가 되는 것만 같았다. 뻐근하고 후들거리던 다리를 수업 내내 조금이라도 움직여주지 않았어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걸을 때마다 다리가 너무나도 아팠다. 아마 내일이 되면 더 아파지겠지…. 짜증난다. 하필 오늘 김종인이 학생증을 집에 놓고와버린 바람에 점심과 석식을 급식이 아닌 매점 음식을 먹어야 했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급식실보다 먼 매점으로 향하느라 다리가 상당히 아팠다. 녀석에게 체육시간에 벌을 받았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잔소리로 돌아올 여러 말들을 피하고 싶었달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야간 자율학습이 없는 날이다. 사실 고3에게 야간 자율학습이란 있으나 없으나 그게 그거였지만, 그래도 집에 일찍 갈 수 있다는 건 수능이 바로 다음날이라 할지라도 기분 좋은 것이었다. 저녁 식사로 김종인과 매점에서 컵라면과 탄산 음료를 사먹곤 교실로 올라와 책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공부할 사회탐구 문제집을 가져가기 위해 사물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교복 치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벌써 집에 갈 준비를 마친 건지, 딱딱한 어투로 카톡을 보내온 녀석 탓에 준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전형적인 한국인이다. 성격이 이렇게 급해서야 원…. 녀석에 대한 온갖 짜증이란 짜증을 표정으로 잔뜩 표출해내며 문득 복도쪽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심히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김종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나오라는 손짓을 해보이며 안 그럼 먼저 가겠다는 제스쳐까지 보여주는 녀석에게 입술을 삐죽이곤 서둘러 책가방을 멘 뒤 교실을 나섰다.
"일찍도 나온다."
제 앞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내 어깨에 거칠게 팔을 걸쳐오는 녀석 탓에 살짝 휘청거릴 뻔했다. 그리 늦게 나온 거라 생각한 건 아닌데, 곧이어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나자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너무 여유를 부리다 늦게 나왔구나, 내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올, 종이가 쏘는 거?"
"뭐래. 당연 더치페이지."
"치."
자연스럽게 넘어가주나 보려 했더니 역시 녀석은 약간의 틈도 주지 않는다. 하여간 여러 의미로 대단한 놈이다.
*
날이 더워지면서 자주 찾곤 했던 배스킨 라빈스에 또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물론 요즘은 다시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했지만, 아이스크림은 오히려 추울 때 먹는 게 제맛이니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메뉴를 스캔하곤 평소 즐겨 먹던 민트초코를 고른 김종인이 내게 시선을 옮긴 채 말을 꺼냈다.
"넌 뭐."
"어? 아, 난… 음, 너랑 같은 거."
"따라쟁이."
"… 뭐?"
"민트초코 두 개요."
*
작은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들곤 빈 자리들 중 하나를 정해 털썩 앉았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녀석이 스푼을 입에 문 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왠지 방금 전 내 몫까지 돈을 지불해주던 녀석의 행동이 떠올라 지갑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행동에 녀석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제 손을 내 앞에 척-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 까먹을 뻔했네."
지갑 괜히 꺼냈나… 라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건 도리니까. 어차피 김종인이 나한테 돈을 쓴 적도… 생각해보면 상당히 많으니까. 라는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지갑 속에서 천원짜리 두 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내 녀석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녀석이 내 앞에 펼쳐 보이고 있던 제 손을 다시 가져가며 푸스스 웃어보인다. 그 모습이 조금은 어리둥절해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턱짓으로 내 아이스크림을 가리킨다.
"다 녹는다."
돈이 쥐여진 손이 가만히 허공에 놓인 채 갈 곳을 잃어버린 셈이 되어 괜스레 민망해졌다. 어색하게 웃으며 살며시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곤 스푼을 집어들었다. 사주겠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 아이스크림 가게도 정말 자주 오는 것 같았다. 거의 단골 손님이라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마 졸업을 하고 나면 이 장소도 추억의 장소가 되어버리겠지. 야간 자율학습이 없는 날이면 매번 출석을 해 싱글 레귤러를 사먹던… 그러나 가끔 김종인과 파인트나 쿼터를 사서 나눠 먹기도 했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있는 날에도 가끔은 녀석과 이 곳에 들러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든 채 귀가를 하곤 했었다. 이제 불과 몇 개월 뒤면 그럴 수도 없을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건 정말 싫은데, 막상 다가와버리면 그땐 얼마나 싫을까.
"아, 곧 수시 원서 접수하겠다."
"그러네."
"넌 어디 어디 쓸 거야?"
"몰라. 아직 안 정했는데."
"아직도?"
"응, 아직도."
김종인이 느리게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녀석을 따라 작게 고개를 주억여 보이자, 녀석이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네온다.
"넌?"
"뭐, 나도 아직…."
"뭐야. 다 정해놓은 것처럼 말하더니."
"… 아직 고민 중이야. 미치겠어."
곧 있을 수시 원서 접수를 떠올리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제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꾹꾹 눌러오기 시작했고, 그런 녀석의 행동에 다시 인상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인상 쓰지 마."
"… 알았어."
"지금은 힘들겠지만 뭐, 곧 끝나니까."
"… 그치."
"응."
"아, 넌 꿈이 뭐야? 지금껏 너랑 지내왔으면서도 난 네 꿈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
"세계 일주."
"… 장난 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일단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부터 다녀올 생각이야. 군대 갔다 오면."
"… 진심이야? 왜이리 진지해? 아, 그래도 일본은 가지마. 방사능 득실득실…."
"일본을 제일 먼저 가보려 했는데."
"진짜? 왜?"
"삿포로 눈 축제 보고 싶어."
"… 네가 그런 거에 관심있어 할 줄은 몰랐네."
꽤나 감성적인 말을 꺼내놓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며 배싯 웃어 보였다. 이렇게 보니 은근 달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삿포로 눈 축제가 보고 싶다니. 녀석이 조금은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같이 갈래?"
"응?"
"삿포로."
"둘이?"
"그럼 둘이 가지, 셋이 가?"
"… 아."
정말로 가게 될 수 있을진 아직 미지수였지만,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녀석의 목소리와 말투, 표정이 모두 진지하게만 느껴져 장난으로 그냥 하는 말 같아 보이진 않았다. 삿포로…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해외 여행을 김종인과 함께 한다는 것도 나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기쁘고 좋을 듯했다. 정말 정말.
"너 오늘 체육복 집에 놓고 왔냐."
"… 뭐라고?"
"1교시 체육이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왜 몰라."
"……."
"벌 받았어?"
"그냥… 앉았다 일어나기 100번."
"그거 힘든데."
"괜찮았어, 나름."
"체육복 놓고 왔으면 다른 반에서 빌렸어야지."
"… 좀 그런 사정이…."
"무슨 사정."
꽤나 단호한 녀석의 답에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머쓱히 웃으며 테이블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녀석이 다시금 말을 잇기 시작한다.
"내꺼라도 빌리러 오지 그랬어."
"반에 너 없었어."
"사물함 속에 체육복 있었는데, 그냥 가져가지."
"… 말도 없이 그냥 가져와버리면 화낼까 봐."
"누가. 내가?"
"……."
"그런 거로 화를 왜 내."
어이없다는 듯한 김종인의 말투에,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괜히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도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곧이어 또다시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도 오늘처럼 체육복 없을 때 다른 반에서 빌리기 좀 그러면, 그냥 내꺼 가져가. 말 안 하고 가져가도 뭐라 안 해."
"……."
"그런 거 가지고 화를 내진 않아. 날 뭘로 보고."
슬쩍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기가 조금은 어색해 반쯤 남아있는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입 안에 쏘옥 집어넣었다.
"어쭈, 대답 안 한다 이거지."
"아, 알았어. 다음부턴 체육복… 꼭 가지고 다닐 거야."
웅얼거리듯 말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이 피식 웃어버린다. 저 웃음의 의미를 알 순 없었지만, 조금은 창피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
'삿포로 눈 축제 보고 싶어.'
'같이 갈래?'
'삿포로.'
집에 와서도 아까 녀석이 꺼냈던 간결한 몇 마디 말이 자꾸만 떠올라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삿포로 눈 축제'라는 것이 궁금하기에 앞서 '삿포로'라는 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 곳이며 축제길래 김종인이…. 그래서 딱 10분만 검색을 해보자, 생각하며 침대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초록창에 접속해 '삿포로'라는 지명을 검색했다. 그러나 역시 너무 포괄적이었다. '삿포로'라고 검색을 하는 것은 마치 '서울'이라 검색하는 것과도 같이 너무나도 포괄적인 개념이었고, 막연한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삿포로' 뒤에 '여행'이라는 두 글자를 추가하려 'ㅇ'을 입력했다. 그러자, 바로 아래엔 '삿포로에 갈까요.'라는 문구가 자동으로 떴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며 왜 그렇게 뜨는 것인지 궁금해 그 짧은 문장을 검색해 보았다. 삿포로에 갈까요…? 삿포로에 갈까요….
"……."
어느 책의 한 구절이었다.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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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오랜만이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들 보고 싶었어요.. 혹시 저를 잊으신 건 아니죠? 누누이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사라지지 않아요..! 완결이 날 때까지.. 완결.. 꼭 나야죠.. 연애도, 결혼도 꼭 해야죠☆ 제가 요즘 너무 바쁘네요..ㅠㅠㅠ 자주 오려 노력은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용서해주세요..ㅠㅠㅠㅠㅠ 그래도 앞으론 하루라도 더 빨리 오려 더더욱 노력해 보려구요! 저도 독자분들 자주 자주 보고 싶으니까요 :) 아, 이제 저녁 시간인데 다들 저녁 맛있게 드세요! 저도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네요..
스폰지밥/러블리/두부/종이니/기화/핫초코/공삼이육/네네스노윙/지블리/로운/똥잠/알콩/아가야/Paper/세젤빛/꽯뚧쐛뢟/얍얍/늘봄/종이페이퍼/고구마/도비/똥강아지/두둠칫/복숭아/윤아얌/불가/제인/스누피/나니꺼/엑소더스/가그린/남사친 님 ♡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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