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안을 채우는 음악들이 오늘따라 간질거렸다. 사실 오늘만은 아니고 요사이 쭈욱 그랬다. 카메라로 의미 없는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카운터 쪽으로 목을 쭉 빼어보니 지민씨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뭘 보는지 동그란 양쪽 광대가 실룩대며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달달한 기류가 그의 주변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요즘 연애하나! 이따 가서 놀려줘야지. 생각하며 눈을 돌리는데 곳곳에 붙어 앉은 커플들이 차례대로 보였다. 창가로 쏟아지는 볕에 그들의 애정 가득한 몸짓이 반짝 반짝 빛났다. 봄이, 왔구나. 봄이,
젠장.
손바닥으로 가려보아도 겉옷을 걸쳐보아도 이 달달한 기류를 피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너무나도 답답해졌다. 아이스커피 잔에 든 각얼음을 입 속에 집어넣고 마구 씹어댔다.
“넌 왜 만날 구석 자리에만 앉냐.”
얼굴 보자마자 불평을 한가득 늘어놓는 오늘의 약속 상대가 앞자리에 털썩 몸을 묻었다. 눈부신 창가 쪽을 한 번 쏘아본 그가 인상을 잔뜩 쓰며 하얀 얼굴에 손그늘을 만들었다. 얼음이 가득 차 있어 뭐라 대꾸도 못하고 입을 우물거리기만 하자 뭐하냐 너. 기가 차다는 듯 퉁박을 준다.
“...아으 이 시려.”
“아주 선배를 보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말이야.”
“새삼스럽게 뭘.”
“버릇이 없어요 버릇이, 니가 그러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거,”
“아이고, 늬예늬예, 죄송합니다, 민윤기 선배니임”
“까분다...오늘은 내가 특별히 봐주지.”
선심 쓰듯 말하는 윤기 선배와는 학창 시절 내내 푹 빠져 살았던 사진부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시종일관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도 좋은 카메라만 쥐어주면 벌떡 일어난다는 알아주는 기계 마니아이자, 말수가 적고 매우 시니컬하지만 가까운 이들에게는 몸속에 아줌마가 백 명은 사는 듯 잔소리가 끊이질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다짜고짜 할 얘기 있으니 만나자며 전화가 왔다. 신기하게도 그는 내가 복잡하거나 우울해 하는 타이밍을 기막히게 맞추어 연락을 해왔다. 애초에 사람을 살갑게 챙기지 못하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인이었다, 윤기 선배는.
“얼굴 꼴이 그게 뭐냐.”
“왜요, 나 오늘 풀 메이크업인데.”
“잠 못 자 요새?”
“...”
눈치는 또 빛의 속도보다 빠르셔서. 다크서클을 가린다고 가렸는데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며칠째 엉망이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며 결론도 안 날 생각을 하다 겨우 잠들면 요란한 꿈을 연속으로 꾸다가 잠들기 전보다 더한 피로로 가득한 몸을 무겁게 이끌고 아침을 맞이했다.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심란하니 작업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할 얘기가 뭐냐고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선배가 점퍼 주머니를 뒤적거려 티켓 한 장을 꺼냈다.
“와서 나 좀 찍어라”
입시에 별 관심 없어보이던 윤기 선배가 너무나 심드렁한 얼굴로 실용음악과 합격 소식을 알렸을 때, 나는 놀라서 마시고 있던 주스를 선배의 얼굴에 뿜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힙합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차근히 준비해왔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너는 나보다 더 무심한 인간이야. 얼굴에 튄 끈적한 주스를 닦아내며 선배는 말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배는 꾸준히 곡을 써서 팔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연을 기획했다. 그리고 가끔 이런 식으로 나를 공연에 초대, 라는 명목으로 불러들여 공연 후기에 첨부할 사진을 찍게 했다.
“일당 줘요?”
“...술?”
“고작?”
“아님 고기?”
“나를 뭘로 보고.”
“...”
“...”
“술과 고기?”
“콜.”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는데 공연도 보고 얻어먹기도 해보자 싶어서 오케이를 냅다 외쳤다. 선배가 티켓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내 카메라를 가져다가 사진들을 구경하며 입으로만 반색했다. 어쩐 일로 한 번에 콜이야?
“반지 팔아서 먹고 사는 게 힘들지, 후배님.”
“반지의 비읍자도 꺼내지 마요 열 받으니까,”
어지러운 머리를 털어내고 몸을 숙여 티켓을 집어 들었다. 에이치, 아이, 피, 에이치, 오...어딘지 모르게 글씨체가 낯익었다. 혀를 끌끌 차던 맞은편의 윤기선배가 갑자기 미간을 확 좁히며 카메라 액정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선배, 이 티켓.” “야, 이 사진.”
선배가 카메라를 쑥 들이밀었다. 내가 선배에게 내민 티켓은 지금 내 가방 속에도 같은 것으로 한 장 있다.
“니가 말한 정신 나간 손모델이 김남준이었어?”
“....선배가 왜 김남준씨랑 같이 공연을 해요???”
카라멜 푸딩 같은 머리꼭지를 가진 남자가 카메라 액정 속에서 나를 보며 속도 없이 웃고 있었다.
*
몽롱한 정신으로 씻고 나와 옷장 문을 열었다. 이렇게나 옷이 많은데 입을만한 건 어째서 안 보이는 걸까? 몇 개를 꺼내 번갈아 몸에 대어보다가 짜증이 나서 청바지에 니트를 대충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은 휴대폰을 슬쩍 노려보았다. 요란하게도 울어대던 휴대폰은 그 날 이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거울에 비추는 내 입매도 따라서 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좋아하니까요.
두통의 원인은 따로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치료 방법을 찾지는 못하고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다 결국 토요일을 맞이했다.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좋아하니까요.
‘그’ 김남준이 너를?? 어제 본 윤기 선배의 의아하면서도 짓궂은 한마디의 의미는 뭐였을까. 카메라 속 사진은 아마도 언젠가는 자신이 궁금해지게 될 거라는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던 때에 아무도 모르게 찍혀버린 것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알고 나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고백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던 저 말도, 달려오는 차를 피해 나를 아주 가까이 끌어당기며 마주쳤던 다급한 눈동자도, 작업실 앞까지 날 데려다주고 짧은 인사만 남긴채 제 갈길을 가던 뒷모습도, 다 너무나 신경쓰였다. 뭐라 설명도 변명도 없이 연락이 끊겨도 할 말은 없는 것이 맞았다. 그 뒤론 손 모델 촬영도 더 이상 없었고,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호감 간다는 뜻이었겠지.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왜 자꾸 혹시나 하고 떠올라서,
“뭐!!어쩌라고!!”
소리를 질러보아도 개운하지 않았다. 다 때려치우고 집에서 잠이나 잘까. 화장품이 얼룩덜룩 발린 우스꽝스런 얼굴이 거울 속에서 엉망으로 찌그러졌다.
*
어쨌거나 결국 클럽 앞에 도착한 것이다.
낡은 레드 카펫이 깔린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둥 둥 둥 둥 강한 힙합 비트가 몸 속으로 파고들 듯 울렸다. 입구에서 티켓팅을 하고 있었다. 윤기 선배가 준 티켓을 내밀자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래. 난 민윤기 사진 찍어주러 여기 온 거야. 저얼대 김남준 보러 온 거 아니야.
혼자 중얼중얼 별 모양의 귀여운 도장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까맣게 칠해진 클럽 내부를 하얗고 노란 사이키 조명이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간만이라 그런지 숨이 턱 막혔다. 규모는 예상보다 작았다. 근데 사람은 예상보다 많았다, 공연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술에 취한 사람들이.
인파에 밀려 파도처럼 넘실넘실 스테이지 한 가운데까지 옮겨왔다. 윤기 선배에게 연락을 미리 할 걸 그랬나. 여자치고는 적당히 큰 키인데도 주변을 에워싼 덩치들에 파묻힐 것만 같았다. 목에 건 카메라 스트랩을 꼭 쥐고서 최대한 안전한 자리를 물색한 뒤 휴대폰을 꺼낼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시야가 깜깜해졌다. 녹색 맥주병을 들고 음악에 맞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던 웬 백인이 내 팔을 갑자기 붙들고는 뭐라 뭐라 물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고개를 저으며 난처하게 웃어보였는데 팔을 놓아줄 생각을 안 한다. 헤실거리는 눈이 조금 풀려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뭐야 이건. 덜컥 겁이나 팔목에 비트는데 순간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한 팔로 안아왔다.
“실례합니다. 제 애인이랑 특별히 나눌 말이라도 있으신지...?”
머리 위에서 허스키하고 건조한 영어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렸다. 백인이 눈치를 보더니 두 손을 치켜 올리곤 겸연쩍게 웃었다. 팔이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어깨를 끌어안은 힘이 나를 잡아당겼다. 마치 덜미를 잡혀 끌려가듯 속절없이 뒷걸음질 쳤다. 목 아래로 강하게 둘러 안은 오른쪽 팔목과 다르게 어깨선 끝에서 세게 그러쥐지 못하고 머뭇대는 깨끗하고 기다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비교적 적게 몰린 클럽 구석의 조그만 칵테일 바 앞까지 다다랐을 때에서야 어깨가 자유로워졌다. 클럽 안의 음악이 부드러운 알앤비로 바뀌었다. 뻣뻣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술 취한 애들 앞에서 멍하니 있으면 어떡해요. 프로텍트를 해야지.”
빨간 스냅백 아래로 솟은 옆머리를 겸연쩍게 문지르며 불평하는, 역시나 김남준씨였다. 마주치지 않을 거란 기대는 아예 하질 않았었다.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더니 힐긋 눈을 마주치며 잘 지냈어요? 하고 묻는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아니 어쩌면 전보다 더 생기 넘치는 밋밋한 눈매에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동문서답을 하기로 했다.
“슈프림 홍보대사이신가봐요.”
“...칭찬 아니죠?”
“네.”
“와줘서 고마워요.”
“같이 공연하는 사람 중에 민윤기라고 알아요?”
“??윤기형이요?”
“네. 윤기 선배가 자기 사진 좀 찍어달라고 티켓을 주더라고요.”
아니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누가 봐도 되도 않는 땡깡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인데 지금!! 뇌보다 입이 먼저 움직이는 이 상황을 멈출 수가 없어 나는 속으로 계속 당황했다. 김남준씨의 표정에서 온기가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 보러 온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냥 놀러 온 거에요.”
“윤기형 보러 왔다면서요.”
“누가 보러 왔대요, 사진 찍어주러 왔다구요.”
“둘이 가까운 사이에요?”
“...내가 그걸 왜 그쪽한테 말해줘야 하는데요.”
“...그건 내가,”
“왜요 또 나 좋아한다면서 장난치려고?”
“...”
“김남준씨는 내가 우습나 봐요.”
“...”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
“재미없으니까 그만 둬요”
말을 늘어놓다 보니 애초에 가졌던 감정에 덕지덕지 이상한 것들이 붙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말실수하고 있다는 거 너무나 잘 알았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가벼운 장난에 넘어가 연애놀음 할 만큼 나는 한가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무엇보다 흔들리는 내 자신이 보기 싫었다.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성큼 다가온 김남준씨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을 해도 능글맞게 웃어넘기던 얼굴은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처럼 싸늘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몸을 틀어 그의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곧 내 팔목을 잡아챈 단단한 손길에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뿌리치려다 말고 나는 굳은 듯 섰다. 끈적하게 흐르던 클럽 안의 비트가 다시 빠르고 강렬하게 바뀌었다.
“내가 그쪽 좋아하는 게 장난이라고 누가 그래요.”
“...”
“우습게 보는 건 오히려 당신 아니야?”
시끄러운 와중에도 또박또박 귀에 꽂혀드는 김남준씨의 목소리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내 시선은 한 곳만을 향해 있었다. 언젠가 카페에서 빼앗기다시피 줘버린 빈티지한 은반지가, 아주 오래전부터 끼고 다녔던 것처럼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자연스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너는 나보다 더 무심한 인간이야.
윤기 선배의 오래된 타박이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쓸데없이 늘어지고 있네요. 기존의 中편을 中上으로 수정하고 원래 下편이었던 이번편을 中下로 올려봅니다. 이번에는 윤기 선배를 꼭 등장시키고 싶었는데요, 넣다보니 너무 신났나봐요 이야기의 절반이 윤기선배....헤헤 저는 사진속 합합보이 차림으로 들이(!)대는 남준이가 보고 싶었던 것 뿐인데 그건 대체 언제 나올텐가8ㅅ8 하편에서는 꼭 나오게 하고 끝내야 할텐데...그래도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참 그리고 남겨주시는 댓글들 모두 가슴 떨려하며 읽고 있고 가능하면 댓글도 달려고 노력중입니다ㅠㅠㅠㅠㅠㅠ감사합니다ㅠㅠㅠ엉어유ㅠㅠㅠ어느 글이었는지 지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독자님께서 아이디어를 어떻게 얻나? 라고 물어보신게 생각나서요. 아이디어...라기엔 민망하지만 저는 주로 글에 첨부하는 사진 속 옷차림이나 느낌 등에서 쓰고 싶은 장면을 떠올리는 편이에요. 특정한 장면을 두고 앞 뒤를 붙여나가는 스타일입니다. 사진 속 남준이의 분위기를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지만요ㅠㅠ에고 사담까지 이렇게 늘어질 일인가!
요즘 매일매일 귀와 눈과 마음이 충만하네요. 김남준 만세!! 다음주가 기다려집니다! (제 글도 좀 기다려지게 써야할텐데... )
암호닉 신청해주신
충전기 님, 꾸기 님, 벨 님, 나무 님, 코코몽 님, 목도리 님, 모니 님, 콩 님, 고딕 님 언제나 싸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