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된지 이제 막 한달이 다 되었다.
여중을 다녔던터라 남여공학인 고등학교에 대해 기대감과 환상? 같은 것이 은연중에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감과는 달리 진짜 뭔 이상한 애들만 잔뜩이고
그나마도 분반이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아침잠이 많던 내가 지난 한달간 지각한 번 없이 잘 다닌다 싶었으나 결국 지각 일보직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미친!!!!!!!"
욕을 한번 시원하게 뱉어주고 앞머리를 삔으로 넘긴 후 세수와 양치를 1분만에 해내는 놀라운 장면을 연출한 후
잠옷으로 입고 있던 반팔 위에 셔츠와 조끼를 끼워 입었다.
춘추복을 막 입기 시작한 터라 아직 야자끝나면 쌀쌀할텐데 하는 그런 생각은 저 멀리 날리고 스타킹도 채 신지 못한 채 가방을 들고 뛰쳐나갔다.
준비를 거의 3분만에 컷하고 나온 덕분인지 아슬아슬 하긴 하지만 버스만 맞춰 탄다면 늦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 부응하듯 버스 정류장엔 같은 학교 교복들이 많이 보였다.
"아, 진짜 다행이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저 멀리 우리 학교로 가는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스하게 나의 바로 앞에 버스가 멈춰서고 그 많은 인파 중 내가 제일 먼저 버스를 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늦잠자서 제대로 씻지 못한 것 빼고는 오늘 운이 썩 나쁘지 않다 생각을 하며 버스에 올라타 카드를 찍으려는데,
"어???"
없다. 나의 치마 주머니에 있어야 할 카드지갑이 없다.
괜한 기대감으로 그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가방까지 뒤적거렸지만 없다.
"아, x발. 겁나 느리네."
"뭐야, 왜 안들어가"
뒤에선 나 때문에 길이 막혀 올라타지 못하는 학생들의 원성이 들리고, 기사 아저씨가 카드 없어? 하고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현금까지도 카드지갑에 우겨넣고 다니는 터라 주머니엔 짤짤이 동전 세개가 전부.
아, 결국 지각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학생 두 명이요."
하고 올라탔다.
뒤에서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니 무심하게 버스카드를 찍고 들어서는데 순간 뒤에 일행이 있나 살펴봤지만
그는 마이웨이로 그냥 홀로 버스 안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 섰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그 뒤로 쭉쭉 학생들이 타고 나도 그에 휩쓸려 안으로 들어서는데,
"아..."
난 균형감각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편이다.
키도 작다. 150 중반 정도?
그런 안타까운 조건에 마땅히 잡을 곳을 찾지 못했다.
겨우 팔을 뻗어 앞 사람 위에 있는 버스 손잡이를 부여 잡고 이내 버스가 출발하는데,
하필 운전을 험하게 하는 기사님이 걸린 덕분에 난 슬프게도 손잡이를 잡은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기 시작했다.
그때,
"어???"
사람들 사이에서 뻗어나온 손이 나의 팔을 잡고 휙, 잡아 당겼다.
어느새 난 버스 기둥을 붙잡고 있었고 나의 옆엔 팔을 당긴 사람이 서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얼굴을 보니 아까 내 버스 요금까지 내줬던 그 사람이다.
교복을 보니 같은 학교이길래 명찰을 확인하니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선배였다.
"아니야."
정말 작게 말해서 못 들었을 줄 알았는데 내가 고맙다고 한 걸 들었는지 대답하면서 환하게 웃는 그 였다.
아마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나에게 봄이 찾아 온 것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리고 학교로 향하는데, 자연스레 그 선배와 함께 걷게 되었다.
한 쪽 귀에 이어폰을 꼽고 무표정으로 학교를 향해 걷는데, 마치 인터넷 소설에서나 볼 법한 모양새였지만
왜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을 그렇게 묘사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 설레게 만들었다.
교실에 도착해 친구에게 호들갑을 떤 후 수업이 시작 돼 수업을 듣는데 하루 종일 그 얼굴이 눈에 어른거려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뭐, 물론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다음 날, 어제 그 난리를 친 덕분인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 어제 못 감은 머리까지 깨끗하게 감은 후 학교로 향했다.
어제 마주쳤던 그 사람을 혹여 다시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터덜터덜 학교로 향하다 교문에 이제 막 들어서려는데
"????????"
어제 만났던 그 사람이 교문에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완전 낯선 얼굴은 아니다 싶었는데 우리 학교 선도부였나보다.
평소 길을 다닐 때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편이라 선도부라 해도 얼굴을 잘 안보고 지나치니 기억이 날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선도부가 두 조로 나뉘어 격주로 서니 더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고..
어제 얼굴을 봐뒀으니 이제 익숙한 얼굴인지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지나가던 학생들을 보던 그 사람도 나를 발견했는지 눈이 마주쳤고, 인사를 하자니 뭔가 머슥하고 안하자니 어제 받은게 있어 고민하고 있는데
그 선배가 먼저 나에게 입모양으로 '안녕' 하고 인사해주었다.
선생님이 곁에 계시니 차마 소리내서 인사는 못하고 입모양만 뻥긋대며 나에게 인사하는데 또 한번 화사하게 웃어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발그레해져 고개만 살짝 까딱이고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선 교실에 먼저 와 있던 친구에게 매달려 눈이 마주쳤는데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며 얼굴을 붉힌 채 한참을 떠들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복도에 지나다니거나 급식실에서 한 두번씩 마주치게 될 때마다 어색하지만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고
하루 하루 조금 씩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그 선배를 향한 마음이 커져가고 있던 그 무렵, 내가 그 선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친구들 중 한 명이 교실 문을 벌컥 열고 뛰쳐 들어오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야, 이지은. 진짜 확실한 거 맞아?"
"아 진짜라고!! 원래 그 선배 인기 겁나 많잖아! 그래서 소문 쫙 퍼졌어!!!"
내 친구가 우리에게 들려 준 이야기는 그 선배와 같은 학년에 어떤 이쁘고 착한 언니가 둘이 썸을 탄다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 부터 둘이 같이 하교를 하고, 윗 선배들 사이에선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 혼자 마냥 일방적인건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울컥하는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니 옆에서 눈치보던 친구가 나의 팔을 살짝 잡으며
"ㅇ..야, 나 CA 같이 하는 오빠한테 한번 물어봐줄게. 그 오빠 발 넓어서 아마 어떻게 된건지 잘 알고 있을거야."
하고 나를 애써 달래주려는데 기분이 영 나아지질 않아 괜히 교과서만 몇 번 들춰봤다.
쉬는시간에 매점도 안가고 그냥 교실에만 있으니 그 선배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점심시간이 되었고, 친구들과 급식실로 향하던 난 어김없이 그 선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자연스레 그 선배와 안면을 튼 내 친구들은 당황한듯 날 바라보는데 난 그저 고개짓으로 인사만 하고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지나갔다.
멈칫 멈칫 하던 내 친구들이 이내 나를 따라 왔고 뒤에서 계속 쳐다보는 듯 했지만 난 돌아보지 않은 채 급식실로 향했다.
그렇게 며칠을 피해다니고, 마주쳐도 기분 나쁘지 않을 선에서 고개만 끄덕인 채 인사한 후 그 자리를 떴다.
노력에 노력을 더했지만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왔다.
같이 동아리하는 친구들과 함께 급식실에서 밥을 먹는데 딱 그 선배 무리가 우리 바로 옆 자리에 앉아버렸다.
같이 있던 친구들 중 남자애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형, 형 이러면서 반가워 했고 맨날 붙어다니는 친구 두명은 안절부절 못한 채 내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 선배는 소문을 확인사살 하듯 소문 속 그 여자 선배와 자리에 나란히 함께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면 먹고 있던 것이 그대로 얹힐 기분이라 대충 반찬 뒤적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에겐 속이 안좋아 먼저 올라가 쉬겠다는 말을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하루의 일정이 다 끝나고 청소시간에 나와 수정이는 음악실 청소라 음악실에서 청소를 막 시작하려는데,
"ㅇㅇㅇ!"
함께 밥 먹는 동아리 친구 중 한명인 백현이가 날 불러내더니 내 손에 무언갈 쥐어주었다.
"이거 뭔데?"
"이거, 민석이 형이 너 갖다주라던데? 나 줬으니까 간다!"
민석이라는 이름에 한번 심쿵, 손에 쥐어진 봉투 속 내용물을 보곤 끝내 주저 앉아버렸다.
그 안엔 소화제가 세 종류나 들어있었다.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다.
함께 다니는 무리의 친구들과 시험기간, 뭐 별거 있나 싶어 같이 고기나 먹으러 가자하고 학교 근처에 싸고 맛있기로 소문난 고기집에 갔다.
자리 잡고 앉아서 주문을 하고 난 후 서로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내 맞은 편 중 한 명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표정이 밝아지더니 한 쪽 팔까지 번쩍 들어가며 누군가를 반갑게 불렀다.
"어!! 민석이 형!!!!"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그걸 본 내 친구는 그저 내 허벅지 위로 손을 얹고 토닥였다.
눈치 없는 남자애들은 합석이니 뭐니 떠들더니 정말 옆 자리에 뒀던 가방까지 치워가며 선배와 선배 일행들을 앉혔고,
역시나 그 무리엔 썸이라던 선배 언니까지 동행되었었다.
늘 그랬듯 인사만 겨우 하고 앉아있다 선배의 웃음 소리에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가게 밖으로 나섰다.
밖에 배치되어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멍하니 길 건너편만 쳐다보고 있는데 내 옆에 누군가 앉았다.
물론 그 사람이 가게 문을 열고 나올 때 부터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부러 고집을 부려 정면만 바라봤다.
"ㅇㅇ야,"
쓸데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그간 속에 꾹 눌러왔던 것들이 펑 하고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까칠한 말투로 '왜요?' 하고 물으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냥 한번 씩 웃고 만다.
사람 설레게 해놓고 정작 썸은, 연애는 다른 사람과 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 그리고선 뭘 잘했다고 저렇게 이쁘게 웃는건지.
"너 지금 오해하고 있지?"
오해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나 싶은 마음 반, 내 마음을 마치 다 알고 있는듯한 눈치 반.
아마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잔뜩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무슨 오해요?' 하고 물으니 마치 날 귀여운 동생 취급하듯 또 한번 웃는다.
"뭐가 오해인데요? 제가 뭘 오해했는데요?"
"나 쟤랑 안 사겨. 쟤 내 사촌이야."
머리를 한대 후드려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괜히 내색하기 싫어 여전히 틱틱대며 그래서 어쩌라는 식으로 말을 하니 조금은 진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오해를 풀어야 우리가 그 전처럼 지낼 수 있는거잖아."
"예전처럼 반갑게 인사도 하고, 웃으면서 마주할 수 있잖아."
"지금도 인사 하고 있잖아요."
"너 최근들어 나한테 웃으면서 인사한 적 없잖아. 나 피해 다니기 바쁘잖아, 너."
정곡을 찔려 잠시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해요. 그러면 앞으론 인사 제대로 할게요."
"그럼 앞으로 인사할 때는 선배, 안녕하세요 말고 오빠, 안녕. 이렇게. 그렇게 해."
"네? 반말을 어떻게 해요.."
"괜찮아. 하다보면 익숙해져. 오빠 안녕부터 하나하나 해 나가면 돼."
그렇게 말을 하곤 날 보며 화사하게 웃는데 그때 확실하게 느꼈다.
아, 이 사람도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
어쩐지 올 해 벚꽃은 유난히 더 이쁠 것 같다.
마지막 공지 |
안녕하세요~! 민슈입니다! 지난 특별편에 댓글이 계속 달리고 아주 잠시지만 초록글에도 마실 다녀왔었어요!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댓 달아주셔서 정말 행복한 민슈입니다! 아마 오늘 이 글이 제가 글잡에서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아요.. (만우절 뻥 아니에여..) 원래는 이 내용이 후속작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도입부분만 가져다 단편으로 쓰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연재는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ㅠㅠㅠㅠ 뭔가 지난 썰들과는 다르게 문체를 바꿔보고 싶었는데 영 어색하고 이상하네요ㅠㅠㅠ 정말 많은 분들이 지난 시간동안 함께 해주신 덕분에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었어요! 1년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즐겁게 글 쓸수 있도록 함께 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이라 생각을 하니 좀 여러 생각이 많이 드네요..ㅠㅠㅠㅠ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글 솜씨나 재주에 비해 너무 많은 분들이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정말 잊지 못할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담고싶은 말은 참 많은데 다 담아지질 않아서 힘드네요ㅠㅠㅠ 다들 정말 한 사람 한 사람 다 고맙고 소중하고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ㅠㅠㅠㅠ
저 그동안 많이 아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늘 어디에 계시든 행복하시고 아프지 마시고 잘 지내요!!!! 마지막으로 저의 빙의글, 썰에 항상 주인공역으로 수고해준 우리 민석이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했던 것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성심 성의껏 알려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