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잘지냈어?"
오랜만이라며 내 어깨를 툭, 치고 온 놈은 예상대로 전정국이였다. 전정국은 100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말끔히 차려입은 얼굴과 옷으로 상당히 새하얗게 변하여 나타난 모습이였다.
김태형은 낯선 자에 저절로 몸을 굳힌 상태였다. 그걸 나도 느꼈기에 그저 웃음으로만 답하며 건너편 소파를 가르켰다. 익숙하게 저벅저벅 걸어가 그 자리에 털썩 앉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전정국이였다.
슈가가 갖고있는 냄새는 솔냄새라면, 전정국이 갖고있는 냄새는 어렴풋한 박하향이 났다. 막상 뒤져보면 사탕 껍데기도 안나오는 판국이지만 그가 갖고있는 특유의 향기였기에 기억하고 기억해냈다.
박하향이 진득하게 훅 하고 훑고지나갔다. 나는 눈을 저절로 깜빡였다. 어쩌면 알레르기라고 쳐도 웃길 법했지만 박하향이 워낙에 강해서 눈을 간지럽혔다. 전정국은 뿌옇게 하얀 얼굴을 문질렀다.
김태형을 흘금 보고, 입을 열었다. 이번 라카로야. 내 말에 전정국은 동시에 다리를 꼬았고 김태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왜이렇게 험난하게만 느껴지는지. 어깨가 다 무거웠다.
오, 그래?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김태형의 모습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각을 잡는 듯한. 손에 깍지를 끼고 입가에 가져다대며 고찰하는 것 마냥 쳐다보는 전정국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나라도 전정국이 무서울 법했다. 한숨을 푹 쉬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시선이 내게 꽂혔고, 턱을 괴며 일부러 전정국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갔다왔어, 이번에는? 관심조차 없지만 있는 척.
전정국은 큰 눈을 깜빡이다가 깊게 드리워진 쌍커풀을 문질렀다. 잠깐동안 속쌍커풀이 겉쌍커풀로 바뀌었다. 곧 없어졌지만. 눈을 연신 깜빡이다가 곧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번에는 유럽을 갔다왔어. 프랑스, 영국. 그 두마디를 건네고나서 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뭔가 달라지는 것같은 분위기에 전정국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전정국은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 주변 모든이들이 전정국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정국은 오감을 지배하고 죽은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이고 남에게 속으로 말을 하고 모든 것을 암흑으로 물들여버리지는 못 했지만,
그렇게 겉으로 내놓지 못하는 능력이였지만 전정국은 실로 무섭고도 두려운 존재였다. 모든 뱀파이어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단 하나의 능력을 갖고있었다.
"너-"
"...네?"
"옛날에 VCR에서 활동한 적 있었어?"
피로 물들여버린 남의 기억을 들춰낼 수 있다. 그게 무엇이고 뭐든 간에 전정국은 남의 오래되건 말건 개의치 않고 훑어내릴 수 있었다. 즉, 남의 과거를 눈만 마주쳐도 마음만 먹으면 빼어낼 수 있었다.
전정국의 말에 김태형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뭔, 뭔소리예요? VCR이 뭔데요? 그의 더듬거리는 말을 듣고 전정국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하다는 무언의 징조였다. 입가를 조심스럽게 훔쳐냈다.
VCR. Vampire Committal Riot. 뱀파이어 수감 폭동모임. 여기저기 날뛰는 뱀파이어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생체실험에 넘기거나 잔인하게 죽이기로 소문난 단체였다. 단숨에 읽어낸 기억을 말했다.
김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전, VCR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뒷골목에서 살던 평범한 남자예요. 그리고 무언가를 요구하듯이 내게 눈을 맞춘다. 순식간에 틀어져버린 시각 속에 김태형의 눈동자가 붉었다.
미쳤다. 눈을 마구 비비고 다시 김태형을 쳐다보았다. 원상태의 감색눈동자가 그 눈안에 들어있었다. 입술을 불안하게 뜯어내리자 전정국이 쓰읍- 하고 혀를 찼다. 뭐든 행동을 멈추게 하고, 시작한다.
아니면 말고. 전정국은 의외로 쉽게 김태형을 놓아주었다. 잔뜩 각이 들어간 몸에서 힘이 쭈욱 빠지자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김태형은 어깨에 힘을 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라카로여서 그런지 몰라도 알 수 없는 동정심이 올라왔다. 영국이랑 프랑스 갔다왔다며. 말 좀 더 해봐. 재촉하듯이 몰아붙이는 내 말에 전정국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랩몬스터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100만분의 1꼴로 누구나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죄였다. 전정국네는 집안 대대로 정말 평범했지만 전정국의 형이 라카로를 찾는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인간을 학살했다.
그로인해 위원회에서는 단체로 모두 찬성하여 전정국네 집안에 저주를 심었다. 평생 모두에게 불려 손가락질을 당하고, 인간을 죽인 죗값을 받으며 그 능력을 숨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비운이 되어라.
그로 인해 전정국을 탐내는 뱀파이어들이 꽤나 많았지만 모두 그 전에 죽임을 당하거나 포기하였다. 무엇보다 내가 있었고, 슈가가 눈을 번뜩였다. 진 또한 가만히 있지않는 상태였으니까.
김태형은 입가를 더듬거리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정국은 손가락을 잠시 꺾으며 영국, 이라는 단어를 읊조렸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는 것 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다들 예의가 있어.
버킹엄궁전에 갔는데, 그 곳에서도 뱀파이어를 봐서 되게 묘했어. 영어를 쓰길래 나도 영어 좀 써봤지. 바람빠지는 웃음을 픽 짓더니 곧 턱을 괴며 탁자위에 쓰러뜨리듯이 올려놓은 과자를 집어들었다.
와작, 거리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김태형은 긴장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생각도 없었다. 다만 전정국이 갑작스럽게 돌아왔다는 것에 입이 벌려질 뿐이다. 어쩌면 예상되는 일인데 예민반응인걸까.
슈가는 지금 집 안에 없었다. 그냥 일어났는데 김태형만 눈을 똘망거리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길래 뒤늦게 일어났다. 옆에서 자고있었는데. 눈가를 벅벅 비비며 아침을 먹고 라카로와 산책을 했다.
라카로라서 항상 살인무기로 키워야한다는 생각은 아니다. 랩몬스터와 다른 사상을 갖고있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일것이다. 랩몬스터는 정말 단순히 라카로를 무기로 생각하고 있는 놈이였다.
나도 딱히 인간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구준회가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무튼, 아침에 라카로와 이야기를 간간히 나누면서 산책을 했다. 아침공기를 좋아하길래 나도 거부감은 없었고 서로 길만 잘 걷고 아침으로 먹을 것도 좀 사서 돌아왔다. 차가운 공기가 정신을 깨게했다.
김태형은 의외로 붙임성이 있었다. 여왕- 여왕-거리면서 나를 꾹 찌르고 퉁퉁거리는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였다. 곧 재잘거리며 혼잣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 그 놀라운 표정이 색달랐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이 정도라면. 구준회는 더 느렸고 그만큼 감정의 깊이가 깊었지만 김태형은 그것보다 빠르다. 아, 나도 미친. 왜 자꾸 구준회와 비교를 해대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아침산책 내일도 할래? 내 말에 김태형은 네, 하고 대답하며 냉장고를 정리했다. 자고로 김태형은 요리도 못했다. 그래서 그냥 정리만 맡긴셈이다. 머리를 한 번 흐트러놓아주자 작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죽일듯이 으르렁거렸는데 그것도 잠깐인걸까. 아니면 그냥 라카로라는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건지. 나중에 시간날때 물어봐야겠다고 홀로 다짐했다. 아마 빠르게 묻는편이 나을 것이다.
인간이란. 분명히 나뉘어진다. 그를 만나고, 만나지 않았고를 기준으로 해서. 그런걸 아직까지도 기억해내는 내가 안타깝고 불쌍하다. 씁쓸해져오는 입가를 간만에 들이켜보는 담배연기에 억지로 취한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전정국의 눈치가 달라졌다. 아직도 담배피네. 쩝쩝이며 한 저 짧은 한 마디에 무수한 의미가 담겨져있었다. 유일하게 랩몬스터도, 진도, 슈가도, 지민도, 제이홉도 따르지 않는 놈이다.
나를 따른다는 것에 엄청난 약점이 잡혀있냐는 질문도 여러번 받아봤다. 그 때마다 전정국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아니라, 다른 뱀파이어들이랑 다르니까 흥미롭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가가 벌겠다.
전정국이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청소년 시절을 진입해있었고 처음만났을 때 그는 각성을 한 상태였다. 그의 형 손에 잡혀 억지로 숨을 고르고 나를 노려보았었다. 나는 잿빛눈동자와 붉은 눈동자였다.
슈가는 노란 눈동자와 검정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전정국은 각성 전의 눈동자를 거의 보지 못했으나 강렬하게 박힌 기억 속 하나. 그의 각성 후 눈동자 색깔은 대서양의 바닷빛을 닮은 짓푸른색이였다.
막 사냥을 마친 듯 숨을 거칠게 쉬며 형을 노려보고 나를 쳐다봤었다. 그 때 진은 내 보호자로 미리 점찍어놓았던 걸까. 어릴때부터 같이 다녔다. 진은 아무말없이 나와 함께 전정국을 응시하고 있었다.
통제불능 새끼라서, 죄송합니다.
우리쪽 사람들보다 낮은 계급의 뱀파이어 출신인 전정국네 집안이였다. 형은 고개를 조아리며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투였다.
"프랑스는 여자들이 이뻤어. 금발의 미녀들."
"열심히 사냥도 했겠네."
"물론. 랩몬스터와 위원회 관련된 정보들은 싹다 긁어왔으니까 언제든지 물어봐."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다시 안 떠날꺼지?"
내 질문에 전정국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과자를 와작였다. 입가에 과자를 묻히고 먹는 습관은 여전했다. 그것을 털어내는 것도 잊을만큼 먹을 것에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는 너가.
집안의 저주를 떠안고 사는 건 나쁘지않다고 했지만 뒤돌아 서서, 아주 어릴 때 나몰래 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어린 애는 어린 애다. 어른인 척을 하지만 아이같은 심정은 차마 숨길 수가 없는거다.
천천히 보듬었고, 내 손으로 키운 새끼나 마찬가지지만 폭풍적으로 성장한 터라 내 키는 훌쩍 뛰어넘고 상상치도 못한 행동을 하며 나를 경악에 빠뜨리는 건 여전했다. 놀라울 정도로 머리도 비상했고.
전정국은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한번 스치듯이 빨고 빼내며 말을 다시 이었다. 여왕은 내가 안 떠났으면 좋겠구나. 어꺠를 으쓱이며 조심스럽게 자세를 고친다. 스륵, 스륵 소리를 내며 옷깃이 스친다.
그냥, 영국이랑 달랐어. 애초부터 냄새도 달랐고 거의 거리에는 인간 뿐이였지만 그 속에서 각성을 숨기고 있는 대단한 뱀파이어들도 무수히 많았고. 습격 당할 뻔했는데 여왕을 기억하는 놈들이 있었어.
방어목적으로 내 이름을 댔다는 것에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그럴 수도 있어.
너가 다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말에 전정국은 허여멀건 얼굴을 황급하게 풀었다. 그의 눈가는 항상 검게 번져있었다. 크고 둥근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렸다.
누구의 명령인데. 다 죽어가는 나도 살렸고, 현명하기로 소문난 여왕인데 내가 어찌 거부를 하겠어. 붉다 못해 뻘건 그의 입술이 혀로 쓸려내려간다.
조금씩 파고드는 그의 혀 속의 치아가 보였다. 주체할 수 없는 힘은 나도 이해하지만 아직까지도 피를 머금고 있으면 어떡해. 빨리 삼켜. 내 말에 그가 바로 침삼키듯이 넘겼다.
"무튼, 라카로 이름이 태형이라고 했지?"
전정국이 김태형에게 말을 걸었다. 김태형은 뒤늦게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곧 전정국이 말을 받아쳤다. 너 눈앞에 있는 여자가 어떤 존잰지는 알고 있지?
대충 들어서 안다고했다. 또 뭔 곤란한 질문을 할지. 무료하기만 한 점심시간이였다.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것도 뱀파이어들 사이에선 그닥 별것도 아니니까. 흘러내리는 소파시트를 끄집어냈다.
전정국은 오랜만에 여왕의 라카로를 봤다며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내가, 내가 인간들은 자주봤어도 여왕 라카로 볼때마다 흥분해서 미치겠다니까. 뱀파이어들은 '모로'가 높으면 미치잖아.
그걸 너도 느꼈구나. 슈가는 딱히 느끼려고 하는 눈치는 전혀 아니였다. 오히려 짜증을 내는 수준. 전정국은 구준회 이후론 처음이네...라고 읊조리며 김태형에게 단번에 다가갔다. 손가락이 닿았다.
또 멍청하게 구준회라는 석 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였다.
"딱히 뭔 생각하고 있진 않네."
"......."
"다만 상황설명이 좀 부족해서, 애가 지금 정신이 반 쯤 빠진채로 행동하고 있어."
전정국은 김태형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댄 상태에서 계속 죽죽 말을 이었다. 그의 분석이 날카로웠던걸까. 김태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버버, 를 시전했고 전정국이 또 말을 질질 끌고있었다.
최근에 누굴 떄린 흔적은 남아있고. 되게 너도 할말이 많은 인간이네, 전 라카로는 좀 친근하게 느껴져서 말이 통했거든. 누굴 디스하고 있자는 건지 알게모르게 말을 돌려말한다. 전정국은 그랬거든.
무튼, 여왕.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김태형한테 아직 상황설명 안했나봐, 완벽하기로 소문난 여왕이 왠일인지 모르겠지만 하루빨리 준비해서 설명하는게 좋을꺼야. 많이 혼란스러워하고있어.
그리고 2월 중반에 위원회도 있으니까.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짓푸른 빛으로 빛났다. 시도때도없이 각성해대는 데, 걱정안되는 놈이다. 자기통제도 철저하게 잘 받았다고 내가 여태껏 생각해왔다.
잊고있었어. 2월 중반에 위원회에서 랩몬스터를 만난다는 걸.
"알겠어."
"응, 그래야지. 점심먹었어?"
"아직 먹진 않았는데, 김...태형."
맨날 야, 너, 저기, 있잖아, 라카로, 당신, 저기요 라고 부르다가 그의 이름이 부자연스럽게 흘러나와 터졌다. 순식간에 전정국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묘한 비웃음을 짓고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지났는데도 구준회라는 석자 이름을 부르는 것은 꽤 편하다. 아무렇지 않게 부를 순 있지만 좋게 보진않았다. 특히 슈가가. 민윤기가. 그는 인간이라면 치를 떨고 싫어했다.
한 때 자신도 인간이였으면서. 내가 아직까지도 그 떄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다는 나약한 증거라서 전정국이 비웃는 걸까. 나도 인간이라면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구준회란 이름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그 기억 속에 갖혀있다는 것일지도 몰라. 여왕. 항상 과거일을 되돌아보며 늪으로 빠져들때, 당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1세기 전에 서로에게 걸었던 말도안되는 저주가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귀의 능력이 떨어졌고, 랩몬스터는 눈의 능력이 떨어진다. 귀로 최면을 걸고 저주를 내리는 것은 어느 뱀파이어나 할 수 있지만 곧 떨쳐내기 쉽상이다. 하지만 우리같은 놈들은 그게 달랐다.
폭주하던 나를 가까스로 잠재우고 서로 다투었다. 말로 화를 내고 서로를 공격하며 숨을 거칠게 뱉다가, 동시에 생각해낸 것은 서로에게 저주를 거는 것이였다.
그 때 이후로 간간히 과거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랩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했건만, 요즘들어서 영역이 넓어지고 매우 잘 들려온다.
랩몬스터는 눈으로 최면을 거는 능력이 퇴화되었다. 따라서 라카로를 꼬드기거나 혹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모로'의 능력을 측정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김태형보다 더 한 놈을 데려올 수도 있다.
"...왕, 여왕!"
"......"
어때, 여왕?
나를 따라서 세계를 부셔버리는 건 어때.
너도 세고, 나도 세니까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한번 뒤바껴보는것도 괜찮지 않아?
"미치겠네, 야! 여왕! 야, 야!"
"정신차려, 지금 뭔생각하는거야?"
"..어,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민윤기의 팔에 몸이 올라와 있었다. 몸은 바닥에 곤두박질 쳐있었음이 분명했고, 당황스러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고 있는 김태형의 눈을 전정국이 재빨리 가리고 있었다.
뭔 생각했어... 숨을 거칠게 쉬며 잠시 한 박자를 쉬고 나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쾌쾌한 땀냄새가 아닌 솔냄새가 진득하게 풍겨왔다. 아, 각성했구나. 노란 눈동자가 언뜻 보이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날 수록, 초 단위로 그의 팔힘이 들려온다. 더더욱 세져가는 탓에 그의 어깨에 내 얼굴을 푹 박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민윤기 또한 내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박아넣고 숨을 쉬었다.
한참동안 서로의 몸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나는 나대로, 슈가는 슈가대로 힘들었다. 방금까지 내 시야를 어지럽히고 귀를 농락한 랩몬스터가 생생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뒤로 젖힐 뻔했다.
곧 슈가는 내 뒷목을 잽싸게 잡아냈다. 여왕. 어딘가 뻥 뚫린 듯한 말로 나를 불렀다. 전정국의 표정이 뒤틀려있다. 천천히 시야를 가리던 눈을 치우던 김태형도 입가를 벌벌 떨고있었다.
슈가의 입가가 자잘하게 떨려오고, 그가 자꾸만 뭘 말하려다가 말았다. 입은 벌렸는데 숨만 약하게 들이쉬고, 울다 만 사람처럼 부스스하게 숨을 고른다.
"여왕..."
"...응."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진이, 다쳤어."
"뭐?"
"습격을, 받았어."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주면 어쩌자는 거야, 민윤기.
* * *
"진이 다쳤다고 전보가 왔어."
제이홉은 누우런 종이를 펄럭거리며 랩몬스터에게 던졌다. 랩몬스터는 그의 편지를 받아들고 날카로운 이를 이용해 묶인 리본을 뜯어냈다. 곧 편지가 펼쳐졌고 한 쪽 구석에 있던 지민이 튀어나왔다.
어디 다쳤다는거야? 심각하대? 어린 나이라 궁금한 것도 많을 때지. 제이홉은 그럴 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 제이홉! 머리쓰다듬지 말라고 했잖아! 짜증나는 새끼.
랩몬스터는 의외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찡그리고 편지를 읽어내렸다. 이건 또 뭔...같잖은 소린가. 혼탁의 예언가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쳤다는 것은 자신도 여왕도 꽤 큰 타격이였다.
여왕은 예언가를 통해 자신의 정보를 알고 예언가의 물건을 구입했으며, 예언가와 오래된 친구였다. 또한 자신도 예언가와 오래된 친구였고 여왕의 정보를 알았으며 물건을 구입한 조금, 복잡했다.
왜 갑자기 습격을... 홀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헝크러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홉이 랩몬스터에게 다가섰다. 아마 여왕은 지금 출발했을꺼야. 비스무리하게 그 쪽이랑 떨어져있는 거리니까.
그 말은 즉슨, 지금 당장 진에게로 가야된다는 것이였다.
랩몬스터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가서 만나면, 싸우는 건 허용되지 않을테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왕을 탐하고 싶을때인데 이건 좀 고문이지 않나.
이 상황에서도 장난이나 던지고있는 모습을 보며 제이홉은 허탈하게 웃었다. 물론 랩몬스터 딴에서는 굉장히 진지한 질문이겠지만 여전히 생각하는 사고는 여왕으로 보자면 멈춰지지 않았다.
정신차려. 제이홉은 따끔하게 충고했다.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건 여왕이 아니라, 진이야. 진이 다치고 진이 죽어가는 지경이야. 여왕은 2월 중반에 봐도 상관없단 걸 알면서도 그럴래?
랩몬스터는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자신들이 알고있는 뱀파이어들 중 가장 조용히 각성하기로 소문난 랩몬스터는 심신을 진정시키는데 온갖 집중을 가했다. 공기의 흐름이 찌그러들고있다.
한심하게 생각되다가도, 각성을 하고 곧 냉정하면서 여왕뺨치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때면 제이홉은 절로 소름이 돋았다. 각성 전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탓이 가장 크다.
자신의 숨과 지민의 숨도 같이 옥죄어오다가, 어느 한순간에 탁 풀리고 그제서야 지민이 켁켁대며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거리며 목을 부여잡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였다.
제이홉도 자잘하게 쿨럭거리며 몸을 숙였다가,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뱀파이어들은 공기의 흐름에 민감했고 상대의 능력이 가장 큰 적이였기 떄문이였다.
제이홉의 눈 앞에는, 갓 각성을 마친 랩몬스터가 숨을 내쉬며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주먹을 살짝 쥐고 쿵, 쿵 두들기며 뻘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랩몬스터, 제이홉.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절로 긴장되는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니 랩몬스터의 감겨진 눈이 떠졌다. 아....아. 지민은 입가를 벅벅 닦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얼마만의 각성인지 잘 모르겠네. 무뚝뚝하게 떨어지는 말투에서 냉철함이 스며나왔다. 장난을 걸지도 못할 정도였다. 다가서려던 지민은 곧 몸을 굳히고 황급히 구석으로 숨었다.
분명 붉은 눈이였는데! 뒤늦게 투덜거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퉁퉁거리는 지민은 그래도 자신을 쳐다볼까봐 두려운지 꾸물대고 있었다.
맞아, 랩몬스터의 각성 전 눈동자는 새빨간 붉은색이였다. 딱히 각성을 필요치않아하지만, 막상 마음 먹고 각성을 뽐내면 평소의 그와 전혀 달랐다.
드디어 여왕과 견줄 수 있는 힘을 되찾았다. 미루던 각성을 해냈다.
그들의 눈으로 보이는 랩몬스터의 눈동자는 잿빛이였다. 여왕의 각성 전 눈동자인 잿빛을.
"가자."
"아, 어."
저벅저벅 걸어가며 눈동자를 보랏빛으로 빛내던 랩몬스터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 닉네임 정리
가려진 왕자 - 랩몬스터
여왕 - 여주인공
여왕의 사제 - 슈가
라카로 - 태형
혼탁의 예언가 - 진
불멸의 기사 - 제이홉
어릿광대 - 지민
돌아온 탕자 - 정국
* 뱀파이어는 각성 후의 눈동자가 개인별로 다르다.
예를 들면,
랩몬스터와 여왕은 상극이다.
각성 전 -> 각성 후
보라색 -> 붉은색 (여왕)
붉은색 -> 보라색 (랩몬스터)
검은색 -> 노란색 (슈가)
검은색 -> 푸른색 (정국)
갈색 -> 초록색 (진)
남색 -> 회색 (제이홉)
갈색 -> 노란색 (지민)
* 여왕과 랩몬스터는 100년전, 여왕의 라카로를 잃고 분노하여 폭주하던 여왕을 겨우 말린 후 서로에게 저주를 걸었다.
* 정국의 능력은 상대방의 기억을 모조리 읽어낼 수 있다.
랩몬스터와 여왕은 오감의 능력을 지배할 수 있고,
제이홉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빨아들여 힘을 키울 수 있다.
진은 반쪽짜리로 상대의 능력을 측정하며 예언을 담당한다.
슈가는 남에게 입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으며, 한 가지가 더 숨겨져있다.
지민은 상대방의 시야를 어둠으로 가려버린다.
* 정국의 집안은 형의 무자비한 인간학살로 인해 저주를 받은 상태이고, 정국 이후로 자식이 없다.
즉 정국이 모든 저주를 받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상태.
* VCR : Vampire Committal Riot. 뱀파이어 수감 폭동모임.
* 암호닉 *
태아가 / 전정국 오빠 / 태형됴아 / 초딩입맛 / 그레이 / 김남준 / 봄날의너 / 설탕맛
예지앞서헕 / 꽃밭 / 새벽 / 여왕 / 으갸갹 / 다이 / 태카로 / 아카시아
개화 / 민침침 / 됴종이
오늘도 감사합니다 :ㅇ
작가에게 댓글은 큰 힘이되요!
많이 늦었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