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3 (파스텔 느낌)
그동안 어떤 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설명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무난하고 따분한 날의 연속이었다. 수능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공기놀이를 하고, 누군가는 원카드 게임을 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들의 귀차니즘과 무료함은 배로 증가하는 것도 같았다.
"이새끼다! 이새끼한테 조커 있어!"
"아, 미친…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
매일매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흘러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정시 원서 접수의 기간이 다가왔고, 느리게 갈 것만 같던 시간은 더욱더 빠르게 흘러가기 바빴다. 원서를 모두 접수했다는 건 정말이지 후련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불안하면서도 답답했다. 그저 원서만 접수해 놓았을 뿐이지, 확정된 결과가 나오기까진 아직 멀었다는 사실 탓이었다. 항상 그래왔겠지만, 방학 동안엔 더더욱 휴대폰을 손에 꼬옥 쥔 채 생활하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괜히 벌써부터 떨리는 것도 같았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을 지루한 날들의 반복이었지만서도, 시간은 꽤나 빠르게 흘렀다. 멀게만 느껴졌던 겨울방학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버렸으니 말이다.
그 날, 갑작스레 고백을 받았던 뒤로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다른 면으론 괜히 마음이 찜찜하기도 했다. 그래도 지난 몇 개월 동안 과외수업을 해준 고마운 선생님인데, 이렇게도 쉽게 인연이 끊어지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당장 지금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씁쓸함과 아쉬움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싹 사라지게 될 감정이었다. 그 정도로, 내게 박찬열이라는 사람에 대한 감정은 얕기만 했다.
*
3교시 쉬는시간. 교실 바닥에선 어김없이 공기놀이가 펼쳐지고 있었고, 교실을 나서려면 놀이에 방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조심 그들을 피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쉬는시간엔 딱히 할 일이 없어 바로 옆 반인 김종인의 반으로 향하곤 했다. 녀석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고작 10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달까. 쉬는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난 항상 녀석의 반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쉬는시간이면 김종인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거나, 오세훈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거나,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등굣길에, 어제 게임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며 오늘 학교에서 꿀잠을 잘 것도 같다는 말을 지나가듯 했었지. 아마 지금쯤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 안녕."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김종인은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오세훈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교실 안으로 발을 내딛는 내 모습을 먼저 발견한 오세훈이 살짝 손을 들어 인사를 해왔고, 그런 녀석에게 덩달아 어색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가만히 오세훈이 하는 말들을 들으며 무료히 앉아있기만 하던 김종인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리며 비어있는 녀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녀석의 짝꿍은 아마 오늘 등교를 하지 않은 건지, 책상 옆 가방걸이엔 책가방이 걸려있지 않았다.
"김종인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뭐?"
"아, 아니야. 미안."
가만히 나와 김종인을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던 오세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런 녀석에게 표정을 굳힌 채 되묻자, 황급히 사과를 해오며 괜히 머쓱해졌는지 제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김종인이 다시금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예전 같았다면 눈을 마주한 채 뭘 보냐며 녀석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을 테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옆구리를 콕콕 찌르기는 커녕, 녀석의 눈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녀석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럽고 쑥쓰러워 애꿎은 책상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책상 위엔 무언가가 적힌 A4용지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 살짝 손을 뻗어 종이를 집어들었다.
"이건 뭐야?"
까만 글씨보다 하얀 여백이 대부분인 종이를 훑었다. 하얀 종이엔 대한민국의 여러 지명들이 어지러이 적혀 있었으며, 의미 모를 시간과 교통수단까지 뒤죽박죽 적혀있어 해석을 하기도 애매했다.
"아, 방학 때 갈 여행 계획 좀 세우고 있었어."
"맞아."
"넌 아니라고. 왜 끼는데, 자꾸."
"나도 같이 가자니까. 나도 겨울 바다 구경하고 싶어."
마주보고 앉은 채 자꾸만 실랑이를 벌이는 김종인과 오세훈을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찼다. 그리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입술을 달싹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뭐, 셋이 가면 되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진 내 한마디에, 김종인과 오세훈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오세훈과는 달리, 김종인의 표정은 미세하게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둘도 없는 절친이면서 왜 여행은 같이 가기 싫어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
"나이스."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김종인을 놀려먹고자 얄밉게 구는 건지, 오세훈은 생글생글 웃어보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녀석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던 김종인이 마지못해 한숨을 길게 내쉬곤 A4용지를 뒤집어 깨끗한 뒷장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버리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기차 안에서 잠만 자게? 하긴, 김종인 넌 충분히 가능하겠다."
"불만이면 빠지든지."
"당연히 아침 일찍 가야지."
"몇 박으로 갈까."
"6박 7일?"
"… 넌 6박 7일로 가. 우린 1박 2일로 갈 테니까."
"장난이지, 인마."
"날짜는 언제로 할까."
"방학식 끝나자마자 기차역으로 직행."
"뒤져, 진짜."
"농담이지."
앞자리에 앉아 자꾸만 김종인의 신경을 긁어대던 오세훈이 입에 지퍼를 채우는 듯한 제스쳐를 해보이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다시 김종인에게 집중을 했다. 곧이어, 펜 뚜껑을 살짝 깨물며 고민을 하던 녀석이 입을 열였다.
"세부적인 건 나중에 정하자. 일단 1박 2일로 가는 건 확정."
"3박 4일 안 되냐? 2박 3일이라도…."
"오세훈 의견 묵살시켜."
"… 역시 김종인이야. 항상 내 기대를 저버린다니까."
"난 아예 너한테 기대조차 안 해."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야."
"목숨이 두 개면 자꾸 그렇게 까불어."
"… 충격."
답답하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종인에 오세훈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와 동시에 쉬는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갈게. 이따 집에 갈 때 봐."
김종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벌써 4교시 수업 시작이었다. 학교 안에서의 할 일은 없었지만, 정말이지 시간은 훌쩍 흘러가 버리는 듯했다.
*
4교시는 동아시아사 시간이었다. 제각각 흩어져 개인 행동을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시는 동아시아사 선생님이었던지라, 이번 수업시간은 모두 제 자리에 앉아 다같이 빙고 게임을 해야만 했다. 주제는 항상 선생님이 정하셨는데, 대부분의 빙고 게임이 그러하듯 지나치게 진부하고 식상한 주제였다. 5X5의 빙고이며, 주제는 우리반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빙고 게임을 하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야유를 보내던 아이들이었지만, 1등에겐 소정의 상품을 주겠다는 선생님의 멘트에, 게임이 시작되자 너나할것없이 열을 가하기 시작했다.
"자, 그 다음."
"음…, 김종인이요."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고, 반 아이들의 시선 또한 내게 집중되었다. 지금 딱 4빙고를 완성했으니, 5빙고가 되려면…
"김종인? 우리반 아니잖아. 옆 반 아니야?"
"뭐야. 네 남친 이름을 적으면 어떡하니."
이때까지도 난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됐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종인이 우리반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 왜…
"… 아, 죄송해요. 제가 잘못…"
머릿속이 김종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버린 탓일까, 녀석이 우리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빈 칸에 녀석의 이름을 적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낼 만한 내 말을 듣곤, 네 남친 이름을 적으면 어떡하냐며 장난스레 웃어보이는 선생님의 모습에 괜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신 좀 똑바로 차려야지, 차려야지 하면서도 어째 가면 갈수록 헛딴 생각이 늘어가는 것만 같았다.
*
4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담임선생님께서 종례를 하러 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어째 수능 전보다 교실에 일찍 들어오시는 것만 같은 선생님께선 오늘도 역시나 칼종례로 제 할 말만 딱딱 전달하시곤 먼저 교실을 나가셨다. 그에 신이 난 아이들 또한 각자 책가방을 챙겨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능이 끝나 더이상 할 게 없는 자랑스러운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 책가방이 아닌 작은 쇼핑백만 딸랑 들고 온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책가방이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무리 겨울방학과 졸업식이 바로 코 앞이라지만 저건 좀 아니지 않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교실 뒷문을 나섰다. 칼종례였던 우리반보다 더욱 앞서 녀석의 담임선생님께선 식칼종례 기술을 시전하셨던 건지, 김종인은 여유롭게 이어폰을 꽂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아직 나를 보지 못한 듯했다. 수능이 끝난 날을 기점으로 교복 차림이 불량하게 변한 대부분의 학생들과는 달리, 녀석은 넥타이 하나도 빼놓지 않은 채 지금까지 줄곧 단정히 교복을 입고 나오곤 했다. 어쩌면 당연한 건데, 고작 그게 뭐라고 사람 마음을 이렇게 설레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못 보게 될 녀석의 교복 차림이니, 남은 기간 동안 실컷 봐두라는 하늘의 작은 배려일까….
"뭐하냐, 거기 멍청이같이 서서."
"… 아, 이제 나왔거든."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김종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녀석의 무심한 한마디에 어색히 얼버무리듯 대답을 하자, 피식 웃으며 집에 가자는 손짓을 해보인다. 지금 시각은 1시 6분. 집에 가도 딱히 할 게 없을 심각하게 심심하고 무료할 시각이었다. 항상 같은 시간에 하교를 하고, 넘쳐나는 시간을 무엇으로 때울지도 이젠 막막했다. 남는 시간에 할 만한 재미있는 놀잇거리들도 점점 고갈이 되는 듯했다. 김종인과 이대로 헤어지기는 싫은데, 녀석과 할 만한 것이라곤 마땅한 게 없었다. 그건 아마 우리 사이가 친구와 연인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만 한정이 되어있기 때문이겠지. 만약 우리가 연인 사이였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저번에 수능이 끝나면 보여준다 했다가 보여주지 못했던 영화를 지금이라도 보여준다 말할까. 아님, 그냥 간단히 카페에 들러 한 시간만이라도 수다를 떨다 집에 가자 할까. 아님 김종인이 좋아하는 게임방이라도 가서… 생각에 생각이 더해질수록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해야 잘 했다는 소문이 날까. 도대체 뭘 하면….
이런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가운 겨울 바람은 세차기만 했다. 매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칼을 살짝 정돈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12월도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2월이 지나간다는 건, 새로운 해가 다가온다는 걸 의미하는 동시에 어느 누군가와의 시간이 끝이 난다는 걸 의미했다. 12월이 지나고 새로운 해의 1월이 다가오겠지. 그러고보니 김종인 생일도 1월인데…. 머릿속에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마인드 맵이 그려지고 있었다. 김종인의 생일은 1월 14일이었다. 아직 꽤나 많이 남은 시간이었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작년 생일 땐 미루고 미루다 꽤나 촉박하고도 엉성하게 녀석의 생일 선물을 준비했었다. 그땐 그게 너무나도 미안해 내년 생일엔 꼭 많은 시간을 투자해 근사한 생일 선물을 전해주겠노라, 마음 속으로 다짐까지 했었다. 까짓 거 생일 선물을 3주 전부터 미리 준비를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지. 오히려 좋다면 좋지, 나쁠 건 전혀 없었다.
"종이야."
"왜."
"오늘 오세훈이랑 PC방 가?"
"아니. 집에서 잠이나 자게."
"자지 말고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
"그냥, 마트나 뭐… 그런…."
갑작스레 멈춰진 내 걸음에, 방금까지 내 발걸음에 맞춰져 있던 김종인의 발걸음마저 덩달아 멈춰졌다. 사실 선물은 나 혼자 골라도 충분했지만, 녀석과 헤어지기가 싫었다. 알게 모르게 녀석의 취향을 알아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일 뿐더러, 조금이라도 같이 있을 수 있는 고마운 기회이기도 했으니 놓칠 순 없는 것이었다.
"… 싫어?"
"그러지 뭐."
귀찮다고 거절을 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마음을 졸이던 방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 제법 긍정적인 녀석의 대답으로 인해 한순간에 쓸모 없는 행동이 되어버렸다.
"살 거 있어?"
"그냥. 구경도 좀 하고…."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난 참 거짓말에 서툰 것 같다.
*
꽤나 넓은 대형 마트 안에 발을 내딛었다. 사람이 얼마 없을 줄 알았는데, 안은 제법 북적북적했다. 대부분 수능이 끝난 고3으로 보이는 한가한 학생들이었고, 장을 보러 나온 아주머니들도 간간이 보였다. 막상 오긴 왔는데, 뭐 어떤 것부터 구경을 하고 탐색을 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저 내 옆에 가만히 서서 주변만 훑고 있는 김종인에게 살짝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뭐 사게. 옷?"
"… 음, 그니까…."
사실 이 대형 마트에 와본 적은 별로 없었던지라, 몇 층에 무엇이 있는지에 관해선 무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어오는 녀석에게 애써 말 끝을 흐리며 다짜고짜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런 내게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오던 녀석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곤 곧이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밀폐된 공간 속 녀석과 단 둘이 있는 이 상황에 숨이 멎어버릴 것도 같았지만, 나쁘진 않았다.
*
분명 겨울인데 몸에선 땀이 났다. 몇 층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않은데, 단순히 내가 찾지를 못하는 건지 이 대형 마트엔 간단한 안내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도착한 3층엔 다행히 구경거리들이 많은 듯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시야에 들아온 향수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웬 향수."
향수 코너에 가까이 다가서자, 여러 향들이 뒤섞인 알 수 없는 향이 어지럽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여러 디자인의 남자 향수와 여자 향수가 가지런히 정리 되어있는 진열대를 바라보다, 짙은 남색의 향수를 집어들었다.
"이거 남자 향수야."
그런 내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김종인이 내 손에 들린 향수병을 가볍게 빼앗곤 여자 향수가 진열돼 있는 코너로 내 손목을 잡아 끌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보려는 건 여자 향수가 아니라 남자 향순데… 내 속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반응을 해오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김종인이 가져간 향수병을 다시 빼앗으려, 녀석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뻗었다.
"왜."
그러나 녀석의 손에 들린 향수병을 쉽게 빼앗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에 한숨을 포옥 내쉬곤 하는 수 없이 시향지 통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시향지 통엔 그 흔한 시향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시향지가 다 떨어지면 그 수량 만큼 더 채워두는 게 정상인데…, 시향지 통은 깨끗이 비워져 있기만 했다. 인상을 굳힌 채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에,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곤 머쓱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 너 그거 한 번 뿌려 봐."
"이거?"
"응, 딱 한 번만."
의아하다는듯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곤 제 손목의 안 쪽에 향수를 살짝 뿌렸다. 그리곤 제 손목을 내게 내밀어 보인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살며시 다가가 향을 맡아 보았다. 어째 향수병도 그렇게 생겼더라니, 향도 전형적인 남성의 향이었다. 제법 진하고 짙은 인상을 지닌 김종인에게 어울린다면 어울리는 향이었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운 듯한 향이었다. 그리곤 다시 진열대를 훑기 시작했다. 이번엔 사각형의 투명한 병이었다. 제법 심플한 디자인의 향수병을 대충 살피곤 내 손목의 안 쪽에 병을 가져다 대려던 찰나, 다시금 녀석에게 손목이 잡혀 버리고 말았다.
"왜 남자 향수를 뿌려."
"향 좀 맡아 보려고."
"그니까 왜 너한테 뿌리냐고."
"……."
"누구 주려고."
"……."
"사서 네가 뿌리려는 건 아니지?"
"… 그건 아니야."
아까와는 다른 쪽의 손목을 내밀며 저한테 뿌려 보라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잠시 멈칫하다 살포시 손목의 안 쪽에 향수를 뿌려 주었다. 방금 전 시향을 했던 향수와는 차원이 다른 은은한 향과 시원한 향이 코 끝을 맴돌았다. 전형적인 남자 향수와는 살짝 차별화 된 독특한 향, 은은함과 동시에 끝은 달콤한 향이었다. 어디 보자, 이 향수 이름이… 폴스미스 익스트림 포 맨 오드뚜왈렛…. 가격은…
"… 아…."
향수를 너무 만만하게 봤던 탓일까, 조그만 병에 담긴 항수였지만 가격은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향수 말고 다른 것도 추가해서 선물을 주고 싶은데…, 향수 하나만으로도 가격이 이렇게 나가다니.
"왜 한숨이야."
녀석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생일 땐 전해주지 못하더라도, 몇 개월 뒤면 있을 성년의 날에 전해주면 되는 것이니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닐 듯했다. 빠른 년생인 녀석에겐 해당되지 않을 성년의 날이겠지만, 미리 줘도 나쁠 건 없으니까…. 향수 이름만 기억해 두고 나중에 사줘야지.
"어쭈, 이제 말도 무시한다 이거지."
배시시 웃으며 제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톡 두드려오는 행동에 괜히 쑥쓰러워져 황급히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따라와 보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먼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다 덩달아 걸음을 옮겼고, 발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화장품 코너였다. 찾는 물건이 있냐는 직원의 물음에, 잠깐 구경 좀 하겠다며 쉽사리 직원을 떼어낸 녀석이 다시금 내 어깨에 제 팔을 걸쳐왔다.
"이제 곧 대학도 들어갈 건데, 화장품 하나 장만해야지."
"……."
"골라 봐.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선뜻 못 골라 주겠다."
"… 나?"
"뭐가."
"나 고르라고?"
"그럼 너지, 나야?"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아직 제대로 된 화장품을 살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에, 화장품을 골라 보라는 녀석의 말에 어떠한 행동을 보여야 할지 막막했다. 그동안 난 또래 여학생들과는 달리 썬크림과 틴트만을 가진 채 학교 생활을 해왔고, 평소 제대로 된 화장을 해본 적이 없어 화장품의 종류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
그저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어버리던 녀석이 샘플용 틴트를 하나 집어들더니 살며시 뚜껑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립스틱인가? 어, 뭐야. 아니네."
"틴트야."
"틴트?"
난생 처음 본 물건이라도 되는듯 틴트를 요리조리 신기하게 살펴보던 녀석이 내 손등에 틴트액을 살짝 묻혀 놓았다. 빨강과 분홍의 경계에 놓여있는 색상이었다. 왜 멋대로 내 손등에 틴트액을 묻혀 놓는 거냐며 따지고도 싶었지만, 먼저 말을 꺼낸 녀석 탓에 말문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 색 예쁘네."
"… 그러게."
"너랑 잘 어울릴 것 같다."
"……."
"사자."
"됐어. 나 틴트 있어."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따지면 옷은 있는데 왜 또 사."
"……."
"사주겠다는데 말이 많아. 그냥 받으면 되지."
포장이 된 새 틴트를 무작정 집어들더니 계산대로 향하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내가 예상했던 시나리오와 반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은근슬쩍 김종인의 취향을 알아내며 잔뜩 구경을 하곤 나중에 혼자 다시 이 곳에 들러 녀석의 취향대로 선물을 사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향수는 나중에 사기로 마음 먹었고, 이제 옷이 잔뜩 진열된 코너로 가 보려던 참이었는데… 마음 속으로 차근차근 세워두었던 계획이 모두 무너지고 만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 아, 진짜…."
"야, 받아."
"… 고마워."
"아직 별 생각 없으면, 다른 화장품은 나중에 사고."
"어…, 그래야지."
"하긴 뭐,"
"응?"
"넌 화장 안 해도…"
"……."
"… 아니야."
큼지막한 손으로 괜히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곤 먼저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녀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살짝 긴장을 해 손에 흥건하게 맺힌 땀을 교복 치마에 대충 닦아내곤, 녀석이 사준 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워서 어떻게 바르지. 포장도 뜯지 말고 그냥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 둘까….
정말이지 김종인은 타이밍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런 타이밍에 이런 말을 하면 마음이 떨리겠지, 설레겠지, 분명 좋아하겠지…. 그러나 녀석이 이런 타이밍을 알 리는 만무했다. 그냥 속에서 우러나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곧이곧대로 내뱉을 뿐이었다. 참 신기하지. 이젠 그냥 김종인의 모든 것이 좋았다. 녀석이 설레는 말과 행동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무 것도 아닌 녀석의 말과 행동에 내가 설레는 것이었다.
"안 와?"
"… 아, 미안. 틴트 이거… 유통기한 좀 확인하느라…."
"그거 유통기한도 있냐. 짧아? 짧으면 바꾸러 가고."
"아니야. 충분해."
녀석의 말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본래 내 의도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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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원 완결은 아마 30화가 될 것 같네요. 미리 말씀 드리자면.. 완결까지도 얘네는 사귀지 않아요.. 프롤로그에서 대학생이 된 현재까지도 아직 사이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걸 미리 밝혔는데, 그 이유도 여러분들께 희망고문을 안겨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 이에요.. 저도 참 답답하고 찌통이네요.. 왜 하필 프롤을 그렇게 썼을까..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큽...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행쇼하는 그날까지 열심히 달려나가 보아요..! 멀지 않았어요.. 우리 좀만 더.. 기다려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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