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독스입니다!
한달 안지났는데 제가 와서 놀라신 건 아니시겠죠?(혼자찔림)
너무 전개나 연재가 더딘것 같아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
기다려주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훌쩍)
그래서 오늘은 진도를 쭉쭉 빼 왔습니다!
오늘만큼은 찌통 지민이는 살포시 넣어.. 아니 반정도만 넣어 주시고
윤기랑 짝짝꿍을 해보자구요!
쓰다가 집중 안되면 윤기 사진을 찾아봤는데,
정말이지 윤기는 심장에 해로워요
“비 올 건가봐.”
요즘 하늘은 맑은 날이 없었다. 장마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 수도 없게 하루걸러 하루 비가 내리는 식이었다. 오늘도 역시 꾸물거리는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만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뒤에서 정호석이 자꾸만 툭툭 건들었다. 귀찮다고 어깨를 튕겨내도 바스락거리는 장난은 계속 되었다. ‘장마 지나간 거 아니었냐.’ 그러다 누군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엔 영혼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저기압 고기압 나부랭이가 어쩌고 저째서 내려갔던 장마전선이 다시 올라온대. 지금 장마기간이라고 하지 않았었냐. 근데 비도 오다말다 했잖아. 오늘은 맑을 거라더니, 이게 뭐야. 일기예보 맨날 틀려.”
그렇지. 일기예보가 정확히 들어맞았던 적이 없었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니 정호석이 옆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 올까, 아마 비 오겠지. 내 조근거리는 목소리에 정호석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주시하던 정호석은 다리를 덜덜 떨다 ‘이 우산 쓸 일 생기겠네.’ 라며 내 책상 옆에 걸린 우산을 발끝으로 툭 건들었다. 나는 흔들거리는 우산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쨍한 파란색 우산은 그 누구도 연상 시킬 수가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등교한 교실에서 나를 반기고 있던 것은 책상 위에 올라있던 주인 모를 우산이었다. 당연 정호석의 우산인 줄 알았는데, 정호석은 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누가 올려놨는지 물어도 고개만 모로 저을 뿐, 우산을 책상위에 올려놓은 사람을 본 목격자가 없었다. 잃어버린 거라면 찾으러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책상 옆에 걸어놓았던 우산은 4교시가 지나가는 내내 그대로였다. 한참 보다 호기심에 우산을 찬찬히 둘러봤더니 손잡이에 'M‘이라는 알파벳 대문자가 적혀있었다.
“이니셜일까.”
“M자가 들어가는 사람을 찾다보면, 전교생의 5분의 1쯤 되지 않을까.”
“그치. 써 놓으려면 이니셜을 다 써놓지, 이렇게만 써놓으면 자기 우산인 줄 어떻게 알라고.”
정호석은 이왕 그렇게 된 거 그냥 나더러 쓰라고 했다. ‘비 온다고 분명 그랬는데 배짱 좋게 우산도 안 들고 온건 뭐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옆구리를 푹 찌르며 배짱 좋은 게 아니라 깜빡한 거라고 해명했다. 정호석은 그런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안 들린다며 귀를 틀어 막은 정호석을 보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얄미워.
괜히 걸려있는 우산을 무릎으로 툭 건들었다. 고리에 매달려 달랑이는 모습이 꼭 놀이기구를 연상시켰다. 놀러 가고 싶다. 흔들리는 우산을 손으로 잡아 멈추니, 써져있던 이니셜이 눈에 도드라져 들어왔다. M. 반듯하게 적힌 글자를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참 낯이 익은 글자라고 생각했는데, 집중력은 쉽게 흐트러졌다.
“일교시 문학, 사교시 원어민 수업이랑 바뀐대!”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김태형의 말에 금방 탄성을 내지르며 좀 전에 하고 있었던 생각들을 깔끔히 치워버렸다.
“아, 발표 준비 덜했는데!”
나는 항상 그게 문제였다.
Love Like Sugar
W. 독스
08
간간히 찾아오는 생리통에 오늘 하루는 엉망이었다. 셋째 날이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날씨 때문인지 온몸이 찌뿌듯한 게 아랫배가 영 편하지를 않았다. 물기 묻은 손을 털며 교실로 들어오니 종례가 한참이었다. 어디 있다 이제 들어오느냐는 담임선생님의 불호령에 잠깐 화장실에 갔었다고 대답하고 얼른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은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못 본 사이 살이 좀 빠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밖에 비 많이 오고 있으니까 꼭 우산 쓰고 가고, 우산 없는 애들은 있는 애들 손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쥐어줘서 얻어 쓰고 가고.”
“네!”
“자식들,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대답 잘 하는 거 봐라. 반장, 인사.”
우렁찬 대답과 함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던 애들은 우르르 한꺼번에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미 복도는 현관으로 향하고 있는 애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많은 인파에 끼어 어깨를 치이고 싶지 않아 느지막하게 갈 채비를 하고 가방을 등에 맨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허전함을 느꼈다.
“박지민은?”
“화장실 간다고 나갔는데. 아직 안 들어 왔나.”
“기다려?”
“아니, 먼저 가라고 하긴 했어.”
훑어본 박지민의 책상 위엔 가방도 없었다. ‘이 새끼, 화장실 간대놓고 몰래 먼저 간 거 아냐?’ 혀를 쯧 차는 정호석의 말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어 어깨를 으쓱였다. 책상 옆에 걸려있는 우산을 챙겨들고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정리했다. 느린 걸음으로 교실을 나서니 휑하게 비어있는 신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도 박지민의 신발은 없었다. 먼저 가버렸나 보네. 쩝― 입맛을 다시고 내 신발을 찾아 발 하나를 끼워 넣었을 때, 숙인 시야 안으로 큰 발 하나가 들어왔다.
“끝났어?”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 올리니 누가 봐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민윤기가 서있었다. 놀란 눈으로 옆에 서있던 정호석을 쳐다보니, 정호석 역시도 놀란 표정으로 나와 민윤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호석은 내가 민윤기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게 떠올랐다. 해명을 원하는 정호석의 눈을 애써 피하자 상황을 눈치 챈 민윤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정호석.’ 그에 정호석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정호석은 나와 민윤기를 한참 번갈아보다 먼저 가보겠다며 신발을 갈아 신고 자리를 피했다. 당황함에 눈만 껌벅이고 있는 나를 웃는 얼굴로 내려다보던 민윤기는 많이 놀랐냐며 나를 걱정했다. 고개를 슬슬 저으니 다행이라며 껄껄 웃었다. 성큼성큼, 내 옆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민윤기는 거침이 없었다.
민윤기의 손엔 우산이 없었다. ‘우산 없어?’ 물으니 민윤기는 웃으면서 빈 손을 보여줬다. 크고 하얀 손을 보다 민윤기의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민윤기’ 단정하게 적혀있는 이름을 보니 뇌리에 스치는 무언가가 있어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들어 올렸다. ‘M’ 민윤기의 이름엔 M자가 들어갔다.
“이거 네가 가져다 놓은 거야?”
눈앞으로 들어 올린 우산에 흠칫 놀라던 민윤기는 내가 보여주는 우산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는 살짝 주춤대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하지 못한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더니, 민윤기는 어색함이 감도는 얼굴로 ‘내 꺼야.’ 하고 말했다.
“너랑 우산 같이 쓰고 가고 싶어서.”
그리고 해맑게 웃어버려서 나는 더는 아무것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민윤기의 미소 하나에 나는 더운 햇볕 아래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따라 웃자 민윤기는 비가 더 거세어지기 전에 서둘러 가자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품에 안긴 꼴로 불편이 걷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민윤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를 썼다. 현관으로 나오니 비는 정말이지 우렁차게 내리고 있었다. 거의 우산을 뚫어버릴 기세인 빗줄기를 보면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 진짜 많이 온다.’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민윤기의 목소리에 섞인 심장이 쿵쿵쿵 뛰어대는 소리가 내 심장 소리인지, 민윤기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펼친 우산은 생각보다 작았다. 손잡이를 다부지게 잡은 민윤기는 내 어깨를 끌어 당기며 빗속으로 섞여들었다. 우산을 두드리며 떨어지는 빗속에서 신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걸었다.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 민윤기의 오른쪽 어깨는 이미 젖어있었다.
“더 붙어. 너 비 맞는 거 같아.”
“상관없어.”
“그래도.”
“내가 더 꽉 안아 줬으면 좋겠어?”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짓궂은 말을 해대는 민윤기 때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넘어진다며 앞을 보라는 민윤기의 말을 듣고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어깨에 얹어진 민윤기의 손이 따뜻했다. 내린 비로 떨어진 체온을 막아주려는 것처럼 뜨끈한 손이 내 어깨를 크게 감싸고 있었다. 농구공을 튕기던 손을 멀리서 보기만 했지, 이렇게 가까이서 그것도 내 어깨를 감싸 쥔 모습으로 보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새삼 느껴지는 사실에 괜히 감개무량해서 미소를 지으니, 민윤기는 그런 나를 보며 왜 웃느냐 물으면서 따라 웃었다.
“신발 젖겠다.”
“그러게.”
“계속 비 오면 신발 잘 안 마를 텐데.”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민윤기가 너무 좋아서 심장이 간지러웠다. 아까부터 지칠 줄을 모르고 뛰는 심장이 이젠 아프기도 한 것 같아서, 옆에 선 민윤기의 옷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셔츠가 당겨지는 느낌에 고개를 숙여보던 민윤기는 끝에 달린 내 손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내가 젖지 않도록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였다.
“왜 자꾸 내 쪽으로 기울여.”
“너 젖을까봐.”
“나도 괜찮으니까, 너도 써. 우리 반반씩 젖으면 되잖아.”
“나는 되는데, 너는 안돼.”
“왜?”
“넌 여자니까.”
민윤기의 대답에 또랑또랑한 눈으로 올려다봤더니, 민윤기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마주 내려다보았다. 민윤기는 우산을 쥐고 있던 손의 검지 손을 펴 내 교복 셔츠를 가리키더니 ‘너는 이것 밖에 안 입었잖아.’ 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내려다본 내 옷은 물이 닿으면 젖어 투명하게 변해버리는 재질의 ‘교복’ 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아― 하고 탄성을 내지었다. 그에 민윤기는 크게 웃으며 끝에 ‘귀여워.’ 라고 말을 흘렸다.
집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아쉽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는지, 민윤기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 라고 물었다.
“응? 왜?”
“아까보다 걸음이 느려져서.”
“어? 아닌데?”
“나랑 더 있고 싶지.”
질문을 회피하지 못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민윤기의 스타일이 이제 제법 익숙해졌는지, 꽤 아무렇지 않게 나는 웃는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민윤기는 망설임 없이 우리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동이 가까워질수록 내 어깨를 감싸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유리문 앞에 멈춰 서서 민윤기는 나를 돌려세웠다. 마주보고 서게 된 그를 올려다보는데, 우리의 거리가 꽤 가까웠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비 내리는 날, 그 특유의 냄새에 서로의 향기가 섞여 묘한 긴장감을 조성시키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민윤기의 눈빛이 더 그윽한 것 같기도 하고. 느리게 눈꺼풀을 감았다 뜨니,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민윤기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분명 민윤기의 시선이 내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빼지도 박지도 못할 사실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듯, 머리가 핑핑 돌고 있었다. 민윤기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지는가 싶은 착각이 들었을 땐, 이미 그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와있는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민윤기의 떨리는 숨이 서로의 위태로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후우…….”
민윤기는 결국 내 어깨로 턱을 괴었다. 내게 기댄 듯 한 모습으로 민윤기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도 잊고 있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심장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마냥 세차게 뛰고 있었다.
“미안.”
귀 옆에서 민윤기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대답도 않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 어깨를 잡았다.
“갑자기 네가 너무 예뻐서.”
“……….”
“내가 무슨 짓 더 하기 전에 얼른 들어가. 춥겠다.”
그리고는 급하게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날 밀어 넣었다. 밀쳐지 듯 건물 안으로 들어오게 된 나는 닫힌 유리문 너머의 민윤기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민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빗속으로 들어갔다. 파란 우산이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좀 전의 휘몰아치던 그 기분과 느낌은 마치 장마가 아닌,
태풍 같았다.
*
비는 어김없이 내렸다. 어제 비가 왔으니 오늘은 안 오지 않을까 했던 기대를 묵살시키듯, 빗줄기는 거세기만 했다. 날씨 탓인지 원래부터 듣기 싫었던 수업이 더욱 듣기 싫은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와 재미없는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를 불러주는 엄마의 목소리 같았다. 선생님을 향해 쉼 없이 목 인사를 해대는 애들의 머리통엔 어김없이 분필조각이 날아가 꽂혔다.
턱을 괴고 앉아서 줄곧 쳐다보고 있던 곳은 비어있는 책상이었다. 늘 앉아있던 박지민의 넓은 등짝이 오늘은 없었다. 삼 교시 수업이 한창인데 아직까지도 비어있는 걸 보면 정말 오늘은 결석을 할 모양인건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떤 연락에도 답이 없는 박지민이 결석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봐도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열심히 필기 중이던 정호석을 두드렸다. 유난히 조용한 수업 분위기 탓에 귓속말로 물어보진 못하고 수학책 귀퉁이에 작게 글씨를 적었다.
[박지민 오늘 결석?]
그러자 정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왜?’ 라고 물으니 정호석은 힐끗 선생님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 내 글씨 밑으로 글을 적었다.
[어제 비 많이 맞아서 감기가 심하게 왔대.]
[박지민이랑 연락 돼? 나는 안 되던데?]
[나도 안 돼. 집으로 전화해서 어머님한테 여쭤봤었어.]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써진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면서 비를 얼마나 맞았기에― 하고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비어있는 박지민의 책상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웬만해서는 잘 아프지 않는 애라서 더 걱정이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면 보충학습도 끝이지? 다음 주 마지막 수업 때 성취도 평가 볼 테니까 다들 배운 내용 공부 열심히 해올 수 있도록.”
그 사이 수업은 끝이 났다. 시험을 보겠다는 선생님의 말에 실내가 술렁거렸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펴놓았던 책을 덮으려다 정호석에게 시험범위를 물어봤다. 친절하게 쪽수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정호석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우쭈쭈 오구 잘한다― 하고 칭찬을 해주다 괜히 딱밤을 한 대 얻어맞았다. 별로 아프지는 않은 이마를 문지르며 책을 가방으로 챙겨 넣었다. 비도 오는데, 집에 가면 잠이나 자겠지 싶어 오늘은 도서관이나 가볼 생각이었다.
“진짜 왜 아플까.”
“어? 뭐라고?”
“분명 어제 같이 학교 올 때 자기 우산 들고 왔으니까 비와도 상관없다고 그랬는데, 왜 비를 맞고 갔지.”
정호석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이다 갑자기 번뜩 뭔가가 생각날 것 같아 허리를 쭉 폈다. 뭐지, 뭘까. 분명 뭔가가 떠오를 것처럼 그랬는데.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다가 잃은 기분이었다. 뭐지,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지.
“우산 챙겼다고 해놓고 안 챙긴 건가. 아닌데,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게까지 멍청한 놈은 아닌데.”
계속 되는 정호석의 혼잣말에 머리가 찌르르 아팠다. 쏟아진 두통에 또 금방 하던 생각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머리가 아파서 오늘 도서관은 갈 수 있을까. 이젠 그게 새로운 고민이 되었다.
*
비가 와서 인지, 여름방학이기 때문인지. 도서관 안은 사람이 얼마 없어 한산했다. 덕분에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한창 수학 문제를 가지고 끙끙 앓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짜증이 나던 찰나 마치 구세주 같은 손길에 서둘러 확인한 핸드폰엔 민윤기가 보낸 문자가 와 있었다.
[어디야?]
세 글자에도 웃음이 나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어.’ 빠르게 답장을 보내고 금방 돌아올 답장을 기다리며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진동이 울리지 않아 난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자기가 기다린다고 답장 빨리하라고 그래놓고. 투덜대는 소리를 민윤기는 듣지 못한 다는 걸 알면서도 궁시렁 거렸다. 꼭 어린 애가 뒤돌아서서 흘겨보는 것 같은 꼴이었다.
내팽개쳤던 샤프를 다시 집어 들었다. 잠깐 벗어났던 수학에 다시 점점 빠져들 때 즈음, 내 앞 자리에 누군가가 의자를 꺼내어 앉는 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사람을 확인하니, 그 자리엔 너무 반가운 민윤기가 있었다.
“뭐야? 어떻게 왔어?”
“네가 도서관에 있다며.”
“어디 도서관이라고는 말 안 했었는데?”
“그냥, 여기에 있을 것 같았어.”
의자를 고쳐 앉으며 메고 왔던 가방을 내려놓는 민윤기도 나처럼 수학 공부를 하려는지 이면지 뭉치와 교과서를 꺼내 놓았다. 민윤기가 하는 행동을 말없이 보고만 있었더니, 나와 눈을 맞춰준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도서관 데이트야?”
그 말에 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야,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진짜잖아. 소설 속에서만 보던 장면이 눈앞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위해 양 볼을 손으로 가리자, 민윤기는 푸스스 웃었다. ‘너 진짜 귀엽다.’ 그리고 말하는데, 그 말엔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뻥―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자꾸 그런 빈말 하지 마.”
“빈말 아닌데?”
“빈말 맞잖아.”
“빈말 아니야. 너 진짜 귀여워.”
살면서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본 게 미운 일곱 살 이후로 대체 몇 년 만인지.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민윤기의 시선을 피해 책으로 고개를 푹 박아버렸을 때에도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빨리 공부해.’ 결국 눈을 맞추지 못하고 떨 듯 말한 내 목소리에 민윤기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버거워 죽겠는데, 민윤기는 자꾸 그런 내 심장 위에서 트램펄린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또 말이 없었다. 나도 수학문제를 풀다보니 대화를 잊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행동이긴 했지만, 상대가 민윤기이다 보니까 나는 또 그게 신경 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 앉아 공부만 하는 게 좀 섭섭하기도 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내어다본 민윤기는 뭐가 그렇게 열심인지, 나와 눈 한번을 맞춰주지 않았다. 민윤기는 A4 용지 위로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긴 선들을 쭉쭉 그리는 모습을 보고 그래프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우리 시험범위에 그래프가 나오는 건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 다시 내 책에 집중했다. 그게 뭐든 간에, 민윤기는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민윤기만 쳐다보고 있었던 게 살짝 민망해졌기 때문이었다.
공부는 계속 이어졌다. 점점 집중력이 흐트러져 갈 때 즈음, 맞은편에서 내 쪽으로 웬 종이 같은 게 넘어왔다. 긴 선들과 짧은 선들이 어울려 그려진 A4 용지는 아래쪽이 살짝 접혀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렸더니, 이번엔 민윤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다리 게임 하자.”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선들이 뭔가 싶었는데, 다시 보니까 사다리 게임이었다. 1부터 4까지의 숫자가 적힌 사다리 게임. 그로써 이 살짝 접힌 부분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걸리는 벌칙 같은 게 있겠구나― 짐작이 갔다.
“뭐가 나오는데?”
“음, 비밀. 일단 먼저 골라봐.”
주제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다리 게임을 하자고 했다. 무슨 이런 생뚱맞은 일이 있나 싶어 어안이 벙벙했지만, 눈을 반쯤 접고 웃고 있는 민윤기의 얼굴을 보면 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뭐가 뭔지도 모르니까, 번호를 고르는 데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난 2번.”
“2번?”
민윤기는 2번 부분의 접힌 종이를 살짝 내려줬다. 숨어있던 글자가 나타나자 나는 민윤기의 손에 살짝 가려진 글자를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잘해줄게]
나온 글자는 먹는 것도, 벌칙도 아니었다.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면서 민윤기는 그냥 웃기만 했다.
“이게 뭐야?”
“이제 나도 하나 고를게.”
“이거 주제가 뭔데?”
“일단 봐봐.”
민윤기는 4번을 선택했다.
[김탄소]
“이제 네 차례야.”
사람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어렴풋이 다음 상황이 짐작이 갔지만, 섣부르게 확신을 할 순 없었다. 그러나 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고 있는 건 확신할 수가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남은 숫자를 골랐다. 3번. 내 손끝이 숫자를 가리키자 그 줄을 따라 옅은 선을 그리며 내려가는 민윤기의 샤프펜 끝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가슴은 쿵쾅쿵쾅. 머리는 어질어질. 꼭 바이킹을 타고 내린 사람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좋아해]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거의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민윤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내 표정을 살피듯 얼굴을 유심히 보던 민윤기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마지막 하나 남았네. 내 차례지?’ 그리고 마지막 남은 1번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홀로 가려져있는 종이를 거둬냈다. 모든 게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하얀 민윤기의 손끝이 숨은 글자를 찾아내는 순간, 꼭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게 된 아이같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사귀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얼어있는 나를 보며 민윤기는 숨죽여 웃었지만, 그도 나만큼이나 떨고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자 민윤기는 전보다 더 밝게 웃었지만, 그 입술 끝이 파르르 떨어버려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 민윤기의 물음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잘해줄게, 김탄소. 좋아해. 사귀자.”
민윤기는 나온 글자들을 순서대로 읽었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제는 고백.’ 까만 눈으로 내게 말했다. 그에 과연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닌지를 의심했다. 눈을 깜박이고만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고 뭐고 할 게 없었다. 이토록 기다리고 바래왔던 순간이 왔는데, 훈련 잘 된 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고갯짓에 민윤기는 웃었다. 그리고 큰 손에 제 얼굴을 묻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나 떨었었어.”
그리고 내뱉는 말이 너무 인간적이고 귀여워서, 그만 여기가 도서관이었다는 것도 잊고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놀란 민윤기가 토끼 눈으로 나를 보고 나서야,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목례를 했다.
하늘을 나는 요정인줄 알았던 민윤기가 내 손바닥 위로 내려앉아 날개옷을 벗어놓는 순간,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대 민윤기를 놓치지 않기로. 이 시간을 놓치지 않기로.
글을 쓰는 제게 원동력이 되어 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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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사랑해 나랑 사귀자
어쩌면 이 말로 다 한 줄 알았지
미안해 고마워 너를 믿을게
분명 더 해야하는 말이 있었는데도 말이야
* 혹시 암호닉 빠지신 분은 댓글로 저를 때려주세요! 몹시 심하게 쳐주세요!
* 전에 선키스 후고백 한다 그랬는데, 아직 키스는 좀 무, 무리다요! (꽁지빠지게 내뺀다)
* 저 고백장면, 나름대로 귀엽고 풋풋하고 사랑스럽고 설레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제 손으로는 무린가봐요(절레절레)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쪽) 오타나 탈자는 애교로(찡긋) 댓글로 알려주시면 더욱 좋아요
* 암호닉 신청 방법은 따로 없어요. 그냥 던지고 도망가시면 쫓아가서 뽀뽀해드립니다. 지구 끝까지(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