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이것은 예지몽(豫知夢)이었다. 그것도 지독한 흉몽.
꿈을 스치고 지나간 몸이 지끈거렸다. 슬픔이 박씨의 온몸을 찔러댔다.
으슬으슬 오한이 들어 장옷을 집어들고 몸을 여몄다.
오늘따라 시리도록 푸른 새벽의 하늘이 서럽다.
"……다녀왔습니다."
끼익하는 대문 소리에, 대청 마루에서 박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8척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올라간 눈꼬리와 작고 새초롬한 입술, 새하얀 피부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아름다움을 더해간다.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택운의 모습을 보고, 박씨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숨을 푸욱 하고 내쉬었다.
"이놈아,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다 온 것이야? 기척도 없이."
"오랜만에 장에 다녀왔습니다. 방에만 있으려니 무료해서…."
박씨는 그런 택운의 얼굴을 조용히 보다 눈가에 깊게 그인 생채기들과 터져서 피가 말라붙은 입가에 눈쌀을 찌푸렸다.
그래, 멀쩡히 들어오는 게 이상한 것이지.
이 썩을 인간들이 또 운이를 건드렸구나.
"얼굴은 왜 또 그 지경이냐. 싸돌아다니다 들어 올 것이라면 내 눈에 그런 꼴 보이지 말거라."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무서워 너를 꽁꽁 숨겨야만 했다.
너를 비추는 탐욕과 질투에 물든 시선에서 떼어내고 싶었어.
그녀와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를 어쩌면 좋으냐, 운아.
택운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벽에 기대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손을 들어 입가의 상처를 쓸었다. 몹시 쓰렸지만, 가슴의 고통보다는 덜 아팠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고통이기에 육체의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만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어린 날 혼자 장터에 나갔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절대로 허가하지 않았던 박씨였기에, 몰래 담을 넘었다.
세상 밖을 혼자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박씨와 함께 나갔을 때에도, 그녀는 보자기로 제 얼굴과 귀를 꽁꽁 감싼 후 업어 나가곤 했다.
길을 걸었다.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흙길에, 이름 모를 푸성귀가 자라나는 들판까지.
하지만, 세상의 아름다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린 저에게 돌을 던졌고, 여자들은 욕설을 퍼부어댔다.
돌아 온 저를 보고 박씨는 눈물을 흘렸다. 저는 그때까지도 그들이 왜 그러는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얼굴에 주륵하고 흘러 내리는 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지독한 핏줄기는,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택운은 덤덤하게 눈을 떴다. 그 눈동자에 체념의 빛이 스친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밖에서 조용하게 울리는 박씨의 음성에, 택운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길게 부딫혔다.
그들의 눈동자는 똑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박씨가 자리에 풀썩-하고 앉았다. 가지고 들어온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택운을 바라봤다.
네 놈은, 언제 보아도 예쁘구나.
"…네 어미가 내가 아니라는 것은 너도 짐작하고 있었겠지."
"……."
"입 싼 마을 인간들이 하는 소리를 너도 훔쳐 들었을 것 아니냐."
"……."
"네 어미는 이 나라 최고 기생이었던 홍련이다. 아니."
"……."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었지.
"세화. 세화란다. 그녀의 참 이름이다."
"…세화……."
택운의 여릿한 목소리가 박씨의 가슴을 울렸다.
세화야. 너의 아들이 이렇게 컸구나. 어쩌면 너보다 더 아름답게.
……
아름다워 서러웁다.
피실피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의 인생 살이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아이 억울해. 박씨가 작게 소리쳤다.
"들려주마. 네 어미의 삶을."
어쩌면 더 일찍 말 해줄 것을. 네가 커 가며 받을 아픔이 너무 길었구나.
운아. 그녀를 용서해라. 아니, 용서해야만 해.
그녀의 외로움을 기억해 줄 사람이 나 혼자라면…. 그녀가 너무 가엾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