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산들 바람에 원식과 홍련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아찔하게 흘러드는 원식의 향에 취할 것만 같았다.
"참으로 아름답소."
"아……."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아름답다고 했지언정, 이토록 행복했던 적이 있었는가.
"그대는 역시 기녀인가보오."
"……."
홍련은 아차 싶어 자신을 내려다 보았다. 영락없는 기생의 옷차림.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평소의 차림새로 나섰건만.
빼도 박도 못하게 기생으로 탄로 나 버렸구나. 연모하는 사람의 앞에서까지.
"그대는 여전히 그 차림새가 어울리는 듯 하오."
"…예?"
'여전히'라니? 분명 여전히라고 하였다.
홍련의 멍한 표정에 원식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이오? 하하하, 하기사. 5년의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요. 게다가 스쳐 지나간 운명이었으니."
"5년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5년 전 이곳에서 만난 적이 있소. 그것도 딱 이맘 때 쯤이었을테니, 거 참 신기할 노릇이오."
"……."
"당신은 이곳에서 울고 있었소. 아름다운 여인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는 사내는 하마터면 억장이 무너질 뻔 했소."
"……."
"당신의 눈가를 닦아준 그 날 이후로, 나는 선 잠조차 잔 적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만났구려."
그대의 꿈을 꾼 것도, 그대를 그리워 한 것도…. 까닭이 있어서 였구나.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나는 연못에 뛰어들었던 그 날. 당신에 대한 기억을 잊고 대신 꿈으로 당신을 떠올리려 하였구나.
"세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만날 수 있겠소? 용무를 보는 도중 잠시 이곳에 들린 것이라."
"예. 알겠사옵니다."
"그럼."
그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응시한다. 하염없이.
당신은 한낱 기생에게도 예를 차리는 분이시군요.
뒤돌아 가는 그의 복장은 대충 보아도 영락없는 높디 높은 양반의 차림새였다. 그것은 곧,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뜻하기도 했다.
"홍련아. 왜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이냐?"
"…아……."
"귀신이라도 본 것이냐? 하얗게 질려서는."
"재향아. 나…. 그 사람을 만났어."
"무슨 사람?"
"꿈에 나왔던. 그 사람. 헛 것이 아니야."
"…그게 참 말이야? 그 사내가….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야?"
"그래.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었어."
황홀한 당신은. 나의 사내.
-
그 후 원식과 홍련은 틈만 나면 만남을 가졌다.
홍련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하며 원식을 옭아맸다.
재향은 허구헌날 원식이 연화루에 찾아 와 홍련과 함께 기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찝찝했다.
저러다 피치 못 할 사정으로 관계가 끊어져 버린다면, 가장 상처 받을 것은 홍련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뒤, 그 피치 못 할 사정은 머지않아 생기고 말았다.
덜덜 떨려온다. 불안감이 온몸을 꿰어찼다.
원식에게 말을 해야 할까. 만약 말을 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 곁에 남아줄까.
어느 날부터 배가 불러 오기 시작했다. 속도 좋지 않았다. 음식의 곁에만 가도 구토가 밀려왔다.
뱃살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몸을 가꿔왔고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던 홍련이었기에 그런 것은 더더욱 이유가 되지 못했다.
남은 이유는 하나.
원식과 1년 전부터 관계를 가져왔다. 그리고 원식 말고는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다.
원식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재향아."
"응, 왜?"
"나…. 그분의 아이를 가진 것 같아."
쨍그랑.
그릇을 닦던 재향의 손에서 그릇이 미끄러졌다.
재향은 서슬 퍼런 눈을 하고서는 벌떡하고 일어나 홍련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어쩌다 그런 것이야!? 어쩌다가!"
"……."
"그 양반.. 꽤 신분이 있는 지체 높은 양반이야! 네 아이를 감쌀 정도의 여유는 없어!"
"흑. 으…."
"그 사람에게 너는 한낱 기생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 진작에… 인연을 끊었어야지."
홍련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하는 재향의 가슴도 찢어졌다.
재향은 뒤돌아 나가 버렸다.
그 사내, 그곳에 있겠지.
가는 재향의 뒷모습에 원식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세상이 핑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화, 당신의 아이를 가졌소."
"……뭐요?"
"당신의 씨를 받아 당신의 아이를 가졌소. 이제 어쩔 테요?"
오늘도 변함 없이 꽃밭에서 꽃의 내음을 만끽하고 있는 원식에게 터벅터벅 다가간 재향은 다짜고짜 소리쳤다.
그런 재향을 막아선 하인들이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재향의 말에 원식은 당황했다. 하인들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소."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는 것입니까!? 당신의 아기를 가졌소! 세화가! 세화가!"
"……."
자, 이제 당신은 어쩔 거야. 세화의 곁에 남아 줄 자신이 있어?
-
원식은 그 날 이후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화루에도, 꽃밭에도, 세화에게도.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재향이 원식의 가채를 수소문해서 가 보았으나 이미 떠난지 오래라고 하였다.
아마 먼 곳으로 떠났을 것이라고. 그 집에 남아 잔재를 치우는 하인들이 말했다.
그 새 떠나버리다니.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었구나.
충격을 받은 홍련은 연화루에 틀어박혀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았다.
더 이상 기녀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홍련에게 화가 난 행수 어르신은 약간의 재물을 주며 홍련을 연화루에서 쫒아내었다.
그에 이 때다 싶어 마을 여자들은 재향이 없는 틈만 타면 홍련을 매질했다.
홍련은 생각했다. 어디에 가던 무슨 일을 당하던 이 아이만은 살게 하겠다고.
죽을 힘을 다해서 배를 끌어 안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홍련의 배는 점점 크게 부풀었고, 산기가 다가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주거라."
"흐으… 윽! 윽…!"
"세화야. 세화야. 조금만."
"으… 으윽! 아악!"
응애-하고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집안을 쩌렁히 울리는 당찬 울음에 땀에 젖은 재향의 입꼬리가 슬픈 호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사내놈이구나.
재향은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받아 들고 홍련에게 안겨 주었다.
"참 예쁘구나."
"너를 닮아 참으로 예쁜 사내아이다."
"재향아. 하…."
"세화야. 세화야! 왜 그러느냐, 응?"
"이 아이의 이름은……. 택운이로 지어다오."
"……."
"정… 택운. 으로."
차마 그 분의 성이 아닌, 나의 성을 잇는 것이 살아 생전 평생의 한으로 남는구나.
"세화야. 세화야."
"나는……. 이제 편안히 쉬고 싶구나."
아가야. 너를 지켜주지 못한 채 홀로 떠나는 어미를 용서하지 마라. 하늘에서는 그분의 모습이 보이려나. 부질 없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 남을 재향에게 미안해 눈물 한 줄기가 흘러 내린다.
눈 앞이 하얗다. 당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당신의 품에 안긴다. 몹시 따뜻해…….
세화가 숨을 거둔 그 자리에는 그 간의 추억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