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0 (능구렁이 남친)
오늘은 당연하듯 눈이 일찍 뜨였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이렇게 일찍 일어났던 적은 없는데, 김종인과 데이트를 하는 중요한 날이니만큼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알람을 맞춰놓은 건 물론 아니었다. 어제 영상 통화를 끊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으니, 알람까지 맞추고 잘 여력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데이트 날이라는 걸 이렇게 무의식 중에도 떠올리고 있다니…, 나도 참 놀라웠다.
오늘은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설레고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데이트를 처음 해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처럼 너도 그럴까. 너도 막 떨리고 긴장이 될까. 의도치 않게 자꾸만 스멀스멀 자라나기 시작하는 생각들에 살풋 미소를 짓곤 이른 시간부터 분주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샤워를 한 뒤 머리를 감았고, 물기가 가득한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 채 옷장 문을 열어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치마는 저번에 입었던 거고, 저 치마는 요번에 입었던 거고….
"……."
그렇게 5분 동안을 멍하니 앉아 옷장 안을 훑고 있을 때, 잠잠하던 휴대폰에서 긴 진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살포시 놓인 채 제 위치를 알리기 시작하는 휴대폰을 슬쩍 집어들어 번쩍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엔 '종인이' 라는 세 글자가 띄워져 있었고, 그와 동시에 빨라지기 시작하는 심박수에 작게 심호흡을 하며 통화 버튼을 꾸욱 눌렀다.
"여보세요?"
- 뭐야. 일어났네. 늦잠 잘까 봐 모닝콜 해주려 했더니.
"나 완전 일찍 일어났어! 어제 너보다 일찍 자서 그런가? 눈이 엄청 빨리 뜨이더라고…. 근데 너도 일찍 일어났네."
- 일찍 일어나서 난 내 집 가야지. 어제 오세훈 집에서 잤잖아.
"아, 맞다. 그럼 지금 집에 가고 있는 중이야?"
- 그렇지.
"그렇구나. 오세훈은 아직 자고 있겠네."
- 코도 골면서 잘 자고 있다. 실수로 다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는데, 안 깨더라.
"… 대박이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거 아니야?"
제법 감탄스레 말을 내뱉곤 작게 웃어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김종인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머리카락의 끝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물방울들이 살짝씩 바지를 적셔왔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덜 마른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녀석의 목소리에만 집중을 했다. 안 그래도 다정히 느껴지는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올 때면 더욱 부드럽고 간지럽게 느껴졌다. 녀석의 둥그런 목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황급히 입술을 떼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종인아, 오늘 뭐 입을 거야?"
- 종인아?
"… 어? 왜?"
- 네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
-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뭐 입을까.
"… 어…."
- 어….
"음…?"
- 음?
"… 따라 하지 마."
- 따라 할 거야.
"……."
- 네가 좋아하는 옷 입을게.
휴대폰 너머로 녀석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간질이는 것도 같은 웃음에, 괜히 얼굴을 붉히곤 다른 쪽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이따 보자. 아침 꼭 챙겨 먹어.
"어? 아, 알았어. 너도 꼭 먹어야 돼. 알지?"
- 알지.
집 도착했다. 무심히 말을 해오는 김종인에게 작게 웃음을 짓곤 간단히 끝인사를 건넨 뒤 전화통화를 끊었다. 그리곤,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오겠다던 녀석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금 옷장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남색 와이셔츠를 입고 오겠지. 그럼 난…. 어떻게든 커플처럼 보이는, 제법 비슷하면서도 어울릴 만한 옷을 찾기 위해 옷장 안을 샅샅이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러다 결국 발견해낸 옷은, 녀석의 옷차림과 어울릴 듯 말 듯한 하얀 블라우스와 남색 플레어 스커트였다. 요즘 커플들 사이에 유행하는 시밀러룩, 트윈룩처럼 깔끔하게 맞춰서 입어보고도 싶은데…. 가만히 앉아 눈을 꿈뻑이고만 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그냥 예쁘게 보이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약속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떨리고 설렜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상대가 김종인인 이상 내 마음은 한시도 잠잠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녀석을 만난다는 단순한 떨림보다, 예쁘게 꾸민 내 모습을 어떻게 봐줄까에 대한 떨림이 더욱 앞서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까만 TV 화면에 내 모습이 비쳤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가지런히 한 쪽으로 넘겼다. 오랜만에 한 하얗고 작은 귀걸이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 후우…."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옷 매무새를 정돈한 뒤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었다. 심호흡을 하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을 만큼 정말이지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약속 시간까진 대략 5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항상 이른 시간에 벌써 우리 집 앞에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김종인은, 왠지 오늘도 마찬가지일 듯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살며시 현관 문을 열었고, 밖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김종인은 벌써 도착해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기대선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보니, 아마 게임 중인 듯했다. 그 모습이 마치 고등학생 시절 매일이다시피 이어지던 풋풋한 모습과도 같이 느껴져 피식 웃으며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가 섰다.
"… 나 왔어."
"어? 아,"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애니팡 게임을 하고 있던 김종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런 내 인기척을 느낀 녀석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내게 시선을 옮겨왔고, 녀석과 자연스레 마주쳐진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시원하게 올려진 앞머리와, 그동안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동그란 이마가 꽤나 남자답게 보였다. 내가 그런 남자 헤어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시선을 옮기는 곳마다 녀석은 온통 내 마음을 뒤죽박죽 엉겨붙게 만들었다. 두 번쯤 걷은 듯한 와이셔츠 소매, 팔뚝 위로 살짝 드러난 힘줄, 손목에 느슨하게 채워진 까만 손목 시계….
"우리 그냥, 집에서 데이트 할까."
그저 묵묵히 녀석의 옷차림만 살피며 마음속으로 감탄을 내뱉고 있을 때, 김종인의 낮은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어 녀석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너 이렇게 예쁜 모습, 나만 봐야겠어."
"……."
"많이 돌아다니면 안 되겠다."
제법 부끄럽게 들려오는 몇 마디를 묵묵히 듣고만 있다 어색히 웃으며 김종인의 큼지막한 손을 잡았다. 쑥쓰럽고 민망하긴 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게 봐 주었구나. 제법 신경을 쓰고 나왔다는 걸 알아 주었구나.
아침을 먹었냐는 내 말에 김종인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인증샷까지 찍으란 말을 했던 건 물론 아니었지만, 녀석은 깨끗이 비워진 밥그릇과 숟가락을 들어 셀카를 찍었더랬다.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귀여워 실실 웃으며 녀석의 팔에 팔짱을 꼈다. 나 이 사진 카톡으로 보내 줘.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내게 녀석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은 근처 초밥 집에서 해결을 했다. 맛에 비해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데이트의 필수 코스와도 같은 영화관은 오늘 하루 토스를 하곤, 맛있게 배도 채웠겠다 소화를 시킬 겸 꼬옥 손을 잡은 채 사이 좋게 시내를 거닐었다. 한창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쬘 시간이라 그런지 머리가 뜨겁긴 했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꼬옥 맞잡은 손에 슬슬 땀이 차는 듯도 했지만, 놓고 싶지가 않았다.
"덥지."
"응? 아, 조금. 우리 어디 좀 쉬었다 갈까?"
"카페?"
"그래, 카페."
가까이 위치한 카페를 가리키며 말을 하는 김종인에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이끌리듯 안으로 걸음을 옮겨오던 녀석이 피식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뒤 내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어깨에 둘러진 팔을 흘끗 보며 조심스레 녀석의 손끝을 잡았고, 메뉴판을 훑기 시작했다.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먹을 건데…, 아메리카노를 싫어하는 김종인은 아마 아이스 초코를 먹겠지?"
"아니야. 레몬에이드야."
내 말에 피식 웃으며 단호히 말을 내뱉던 김종인이 간단히 주문을 마치곤 구석에 위치한 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나무로 된 원형 테이블은 제법 작고 심플한 모양새였다. 먼저 자리에 털썩 앉아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녀석이 다른 쪽 손을 테이블 위로 척- 하며 올려놓았다. 그런 녀석의 얼굴과 테이블 위로 올려진 커다란 손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다 작게 웃음을 짓곤 녀석의 손바닥 위로 내 손을 살포시 겹쳤다. 그런 내 손을 꼬옥 잡으며 피식 미소를 짓던 녀석이 천천히 입술을 떼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부채 하나 사줄까. 엄청 큰 부채."
"엄청 큰 부채?"
꽤나 진지한 어투로 말을 해오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살풋 웃어보였다. 그러더니 곧이어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주기 시작한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날씨는 제법 따뜻하다 못해 덥게만 느껴졌다. 그나마 카페 안은 시원했다. 원래 더위를 많이 타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김종인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거닐어서 그런지, 콧잔등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 우리 그거 사자."
"응? 뭘?"
"커플 티."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듯 어떤 단어를 말해오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 환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연인들만 한다는, 웬만큼 가깝고 친밀해야만 한다는 커플 티셔츠 맞추기…. 남자친구와 커플룩을 입고 싶어하는 내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녀석은 제법 무심하고도 다정히 말을 건네왔다. 그런 녀석에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곤 양쪽 손으로 녀석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나 남자친구 생기면 커플 티 꼭 한 번 입어보고 싶었어. 이렇게 똑같은 티셔츠…."
"커플 운동화."
"으으, 좋아!"
"커플 손목 시계."
"아, 좋지!"
"커플링."
"와, 좋아 좋아."
"나."
"진짜 좋아! … 엥?"
뜬금 없는 녀석의 한 마디에 고개를 갸웃해 보이자, 피식 웃으며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온다. 그저 벙찐 채 김종인을 바라보기만 하다 잠시나마 꼬집혔던 볼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진동벨이 울렸고,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주문 나온 음료를 들고와 다시 내 맞은 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녀석이 건네준 차디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곤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옅게 미소를 짓던 녀석이 덩달아 레몬에이드를 길게 한 모금 마셨고, 내게 음료를 건네왔다.
"마셔 봐. 맛있다."
*
그렇게 늦은 봄의 더위는 까맣게 잊은 채 시내에 위치한 옷가게들을 군데군데 살피기 시작했다. 이 옷은 색이 너무 어둡다. 저 옷은 길이가 너무 길다. 그 옷은 패턴이 마음에 안 든다.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면서 배운 알뜰살뜰한 지혜들을 총집합해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내기 바빴다. 그런 날 보며 연신 웃음을 지어보이던 김종인은 그저 묵묵히 내 말을 따르고만 있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돌아다녔을까, 점점 지치면서 허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줄까, 라며 내 어깨를 감싸안는 녀석에게 작게 고개를 젓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제법 큰 옷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어왔고, 잠깐 둘러보겠다는 말만 건넨 뒤 천천히 티셔츠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어때.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분홍색…. 너 분홍색 입을 수 있어?"
"아니."
개구지게 웃으며 내게 티셔츠를 대보던 녀석이, 내가 건넨 한 마디에 이내 표정을 굳히곤 다시 분홍색 티셔츠를 원래 위치에 걸어두었다.
"다른 색상도 있어요. 하늘색으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직원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왔고, 그런 직원의 말에 작게 탄성을 내뱉곤 바로 뒤에 걸려있는 같은 디자인의 하늘색 티셔츠를 꺼내들었다. 가슴께에 아주 조그맣게 강아지 모양으로 수가 놓인 심플한 디자인의 티셔츠였다. 강아지를 좋아라하는 김종인은 아마 이 강아지 캐릭터를 보고 티셔츠를 골라든 듯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웃겨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직원에게 사이즈를 요청했다.
"네, 잠시만요. 두 분 사이즈로 가져다 드릴게요."
"전 분홍색 아니고 하늘색이에요, 하늘색."
걸음을 옮기는 직원의 뒷모습에다 대고 다급하게 외치듯 말하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푸스스 웃음을 지었다. 남자라 그런지, 분홍색 티셔츠를 입기가 조금은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같이 하늘색 하면 안 되냐. 똑같은 색으로 하자."
"똑같이 분홍색?"
"아니, 하늘색…."
내 팔을 붙잡고 말을 하는 김종인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녀석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게 낯설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져 자꾸만 녀석을 놀리고도 싶었다. 이런 재미로 누군가를 놀려먹는 거구나. 항상 날 놀리는 김종인의 심정을, 항상 김종인을 놀리는 오세훈의 심정을 백 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그냥 하늘색으로 두 개 주세요."
그러나, 녀석을 놀려먹으려는 마음을 곱게 접곤 조심스레 직원을 향해 말을 건넸다. 곧이어, 비닐 포장에 싸인 하늘색 티셔츠 두 개를 사이즈별로 꺼내든 뒤 계산대로 걸음을 옮기는 직원을 따라 발걸음을 뗐다. 아무렇지 않게 제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는 김종인을 멍하니 바라보다 황급히 손을 뻗어 녀석의 행동을 제지했다.
"내가 계산할래, 내가."
매번 데이트를 할 때마다 제 돈으로 계산을 하는 김종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급하게 말을 했다. 그리곤 서둘러 지갑을 꺼내 직원이 부르는 값을 제법 시원하게 지불했다. 그저 벙찐 채 가만히 서서 내 행동을 바라보기만 하던 녀석이 마지못해 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가자! 예쁜 쇼핑백에 담긴 같은 티셔츠 두 개를 바라보며 녀석에게 말했다. 그런 내 말에 연신 웃음을 짓던 녀석이 다시금 어깨에 팔을 둘러오기 시작했다.
*
커플 티셔츠를 고르느라 시간을 너무 소비했던 탓인지, 밖은 살짝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 쪽 손으론 예쁜 쇼핑백을 달랑달랑 들고, 또 다른 쪽 손으론 따뜻한 녀석의 손을 꼬옥 잡고 거리를 거닌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하고 즐거웠다. 옷가게를 나선 뒤론 자유롭게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근처에 위치한 화장품 가게로 들어가 김종인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녀석의 새끼손가락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발라 보기도 했고, 맞은 편에 위치한 악세서리 전문점으로 들어가 김종인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 어린이용 미미공주 장난감 반지를 녀석의 새끼손가락에 끼워넣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반지는 너무나도 작아 녀석의 새끼손가락 한 마디에만 걸쳐졌다. 가만히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리던 녀석의 모습은, 아마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듯했다.
그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넓은 공원. 넓디 넓은 공원 안엔 운동을 하시는 어르신들, 산책을 하는 젊은 사람들,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저녁 하늘은 아까와 같이 제법 맑았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느리게 걸음을 옮기기만 하던 김종인이 이내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아끌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있기만 하자, 덩달아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녀석이 작게 고개를 갸웃하곤 제 무릎을 툭툭 치며 말을 건네왔다.
"여기 앉게?"
"… 아,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툭 던져오는 김종인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옆 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살짝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조심스레 정돈해주던 녀석이 살풋 웃어보였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약간은 쌀쌀한 저녁 공기를 마시는 게 좋았다.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내겐 전부 특별한 선물과도 같이 느껴졌다. 김종인과 함께 하는 매 순간 1분 1초가 모두.
"할 말 있다고 했지, 내가."
"아, 맞아. 무슨 할 말?"
무심히 눈을 꿈뻑이며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는 김종인의 옆 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크나큰 나무의 그림자와 저녁 어둠에 가려 녀석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순 없었지만, 낮은 목소리 만큼은 여느 때보다 또렷이 들려왔다. 그저 도톰한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뜯고 있을 때, 녀석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어제 너 데려다주고 집 가는 길에, 그 여자애 만났어."
"여자애?"
"송… 뭐였더라."
"송…? 민희? 송민희?"
"아, 걔. 그 여자애."
한동안 잊고 살던, 아예 내 기억 속 작은 파편으로도 남아있지 않던 이름이었다. 새까맣게 잊고 지내온 탓일까, 그 이름이 제법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아이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기는 커녕, 오히려 나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이름 세 글자만 들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치밀기 시작했다. 그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김종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건진 나도 모르겠는데, 엄청 취한 모습이었어."
"… 그래서?"
"집에서 하루만 자게 해달래."
"네 집에서?"
"응."
"그래서?"
"싫다 했어. 근데 모텔까지 데려다 달라는 거야."
"… 어…? 뭐야…. 왜…."
"그냥 뿌리치고 집에 가려 했는데, 혹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봐 큰 맘 먹고 모텔까지 데려다 줬어."
"… 응."
"근데 자고 가라는 거야, 나더러."
"……."
"노리고 왔는지, 피임 도구도 다 갖고 있더라."
"……."
"그래서 심한 말 몇 마디 해주고 그냥 나와 버렸어."
어제 있었던 일들을 딱딱한 어투로 늘어놓는 김종인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물론 김종인에 대한 불안감은 아니었고, 아직 포기를 못한 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불순한 의도로 김종인에게 접근을 해오는 송민희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괜히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날 빤히 바라보던 김종인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왔고, 천천히 시선을 옮겨 녀석과 눈을 마주했다.
"칭찬 받으려고 하는 소리 아니야."
"……."
"우리 서로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 응."
"숨기고 말고 할 거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건 맞는데,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
"……."
"너 걱정할 것도 같아서 일부러 말 안 하려 했는데,"
"……."
"내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이런 건 너랑 다 공유를 하고 싶어서, 그래서 말했어."
"……."
"걱정 안 해도 되고, 불안해 하지 않아도 돼."
"……."
"나 믿지."
"… 응, 걱정 안 해."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불안감과 두려움이 뒤엉킨 애매모호한 감정으로 가득하던 마음속이, 나를 달래주는 듯한 김종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결 편안해졌다. 사실 달래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제 진심을 전해왔을 뿐이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믿음이 서렸고,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그냥 넘어가도 되었을 일을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아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녀석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커녕, 오히려 단단한 믿음만이 샘솟게 되었다. 이런 믿음직한 남자가 내 애인이라는 것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 기분 나빠. 왜 너한테 그러는 거야…."
인상을 잔뜩 찡그리곤 김종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짓곤 부드럽게 앞머리를 정돈해주는 녀석의 손길이 좋아,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네 거야."
"뭐가?"
"내가."
요즘 오세훈에게 능구렁이 멘트 과외라도 받는 건지, 뜻밖의 상황에 심장 어택을 당해버리고 말았다. 다시금 콩닥콩닥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잠시라도 진정시키고자,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기대있던 머리를 떼곤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 궁금한 거 있어."
"뭐."
"너 휴대폰에… 나 뭐라고 저장되어 있어?"
"몰라."
"… 모른다고?"
"아니, 뭐…."
"… 왜 머뭇거려…."
"말 안 해."
"뭐야…. 왜?"
"별로 안 하고 싶어."
"… 치사하다."
"넌 뭔데."
"응?"
"나 뭐라고 저장해 놨어."
"… 종인이."
"그거 예전에 내가 바꿔놓은 거잖아. 설마 그게 아직까지 그대로…."
"… 그래서 오늘 바꾸려고."
어색히 말을 내뱉곤 느긋하게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연락처 목록으로 들어가 녀석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옅게 인상을 굳힌 채 같이 내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낮게 말을 건네왔다.
"하트 세 개."
"응?"
"난 너 하트 세 개로 저장해 놨어."
"하얀 하트? 아님, 검정 하트?"
"둘 다 아니야."
"엥? 그럼 무슨 하트야?"
"좀 더 고급진 하트 있어. 반짝반짝 빛나는 거."
"… 그런 게 있다고? 김종인 휴대폰은 슈퍼폰인가 봐."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며 녀석을 향해 말을 건네곤 수정 버튼을 꾸욱 눌렀다. 도대체 뭐라고 저장을 하면 좋을지, 약간의 감도 잡히지가 않았다.
"뭐라고 저장할까? 막 귀엽게 해보고도 싶은데…."
"종이. 너 맨날 나 그렇게 부르잖아."
"그거 말고…. 종종이는 어때?"
"종종이가 뭐야."
"… 귀여운데."
"너도 나랑 똑같이 해."
"난 반짝반짝 빛나는 하트가…. 아, 설마 이거 말한 거야?"
"어, 이거."
"이거 너무 튄다…."
"튀라고 한 건데."
휴대폰에 설치가 되어있는 이모티콘들을 가만히 훑고만 있을 때, 혹시 이건가… 싶은 이모티콘이 눈에 들어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녀석을 향해 물었다. 그런 내 물음에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오는 모습이 꽤나 웃겼다. 그런 날 바라보기만 하다,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쏘옥 가져가 제 멋대로 수정을 하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이럴 땐 정말이지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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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카탬클쓰 화보 보셨나요.. 종인이.. 왜이리 예쁘죠... 전 오늘 밤 여기 누우려구요.. 하..... 그냥 울어야겠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예쁘잖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차, 저번 편도 초록글의 영광에 올랐더라구요.. 보잘 것 없는 제 글을 이렇게나 많이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ㅠㅠ 정말 정말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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