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6 (생각할수록 좋아지는 사람)
하루하루를 놀고 먹고 자며 보내오던 내 생활에 더이상 자유는 없었다. 아직 멀었다 생각하던 개강은 어느새 하루 아침에 다가와 있었다. 오늘은 월요일, 10시에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첫 날부터 지각을 했다간 교수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될 것만 같아 알람을 더욱 이른 시간에 맞춰두어야 했다. 덕분에 일찍 일어나 조금은 여유롭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대략 2년 만에 가는 학교였다. 사실 설레는 마음보단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욱 컸다. 나와 같이 입학을 했던 동기들은 어느새 3학년, 4학년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지만, 난 2년씩이나 휴학을 한 탓에 이제 고작 2학년이었다. 막상 다시 학교를 다니자니 머리가 막막하고 앞이 깜깜했지만, 이러한 생각도 며칠 뒤면 과제에 치여 싸악 사라지게 될 터이니 상관은 없었다.
3월 초의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옷깃을 여며도 그 안을 파고드는 바람 탓에 절로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다행히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버스는 단 하나 뿐이었던지라,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놓치는 날엔 바로 지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래서 항상 더욱 일찍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야 했다. 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버스가 금방 도착했고, 항상 북적북적하기만 하던 버스 안이 한산했으니 말이다. 창가 쪽 자리에 살며시 앉곤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했다. 차창 너머로 빵집 하나가 보였다. 학교를 쉬는 2년 동안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었다. 조만간 한 번 찾아봬서 점장님께 인사라도 드리자 생각하며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학교 도착했다]
작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휴대폰 홀드를 열어보았다. 9시에 첫 수업이 잡혀있다던 김종인의 문자 메시지였다. 일찍 일어나 아직 졸음이 가득한 상태일 녀석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졸지 말고 수업 열심히 들어. 천천히 문자를 입력하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되도록이면 공강 날을 맞춰서 시간표를 짜자던 녀석의 제안은 안타깝게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요일이 공강이라던 녀석에게 맞춰 어떻게든 수요일 공강으로 시간표를 짜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의도치 않게 금요일 공강이 되어버린 시간표를 바라보며 지난 며칠은 하루종일 한숨만 포옥 내쉬었던 것 같다. 일주일 중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날이라곤 주말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져서였다.
[시간 날 때마다 연락해. 나 곧 수업 시작하겠다]
뒤이어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곤 답장을 보냈다. 그래. 수업 열심히 듣고, 밥도 맛있는 거 먹어.
*
일찍 일어난 탓이었을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탓이었을까, 버스 안에선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1학년 2학기 때였을까, 버스 안에서 졸다 세 정거장이나 지나치는 바람에 시원하게 지각을 해버린 전적이 있는 내게 버스 안에서 졸기란 정말이지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 중 하나에 속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잠을 깨기 위해 볼을 꼬집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이 쉽게 깨진 않았지만, 어느 한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시끌시끌해진 버스 안 분위기에 의해 졸음이 싸악- 달아나 버렸다. 한산하던 버스는 어느덧 많은 승객들로 인해 북적거리게 되었다. 그나마 앉아서 가니 망정이지, 이렇게 복잡한 버스 안에서 손잡이에만 의지한 채 서서 가기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다행히 다음 정류장은 학교였다. 슬쩍 손을 뻗어 벨을 누르곤 이어폰을 가지런히 정돈해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학교가 가까워지니 다시금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하는 것도 같았다.
*
오랜만에 걷는 길, 오랜만에 보는 학교 건물, 오랜만에 맡는 학교 냄새. 2년 만이라 낯설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학교는 꽤나 익숙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에 몸을 살짝 떨곤 겉옷 주머니 속에 손을 쏘옥 집어넣었다. 저어기 앞에 걸어가는 새내기로 보이는 여학생은 나풀거리는 치마가 신경 쓰이는 건지, 손으로 치마를 꼬옥 잡은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개강여신을 꿈꾸며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스타일링에 공을 들인 듯한 그녀의 모습에 살풋 웃음이 나왔다. 마치 대학교를 입학할 때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였다. 하루하루 예쁘게 꾸민 채 학교를 나가는 것도 며칠 뒤면 포기하게 되기 마련이지만….
*
수업 시작 시간은 10시. 지금은 9시 반을 갓 넘긴 시각…. 강의실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일찍 도착한 듯싶었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이른 시각이라지만 어떻게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을 수가 있는 거지…. 혹시 내가 강의실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이런저런 불안한 생각들이 치밀어, 다시 한 번 강의실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언제 도착한 건지 모를 문자 메시지가 화면에 작게 떠있었다.
[9시 넘었는데 교수님이 안 오셔. 이거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냐. 교수가 수업에 늦으면 어떡해]
투덜거리는 김종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아마 지금은 수업 중이겠지. 그럼 방해가 될 테니 답장은 나중에 보내야겠다. 귀엽게만 느껴지는 녀석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읽곤 시간표를 확인했다. 분명 이 강의실이 맞는데… 왜 아직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이 꺼져 어둡기만 한 강의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0분 남짓한 시간을 멍하니 강의실 앞에서만 보낼 순 없으니, 학교 안에 위치한 작은 카페로 가 잠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나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카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인테리어도 그대로, 메뉴판에 적힌 메뉴도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새로운 메뉴 몇 가지가 추가되었다는 것, 그 뿐이었다. 카페 안은 제법 한산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 이른 아침부터 무얼 사먹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왠지 아무 것도 사먹지 않고 자리에 앉아만 있기엔 눈치가 보여 아메리카노라도 주문을 해야 할 듯했다. 그래서, 가장 싼 메뉴인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음료가 나왔고, 빨대를 꽂아 한 모금을 들이키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15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좀만 앉아있다 슬슬 이동하면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몰랐는데, 오른 편 구석 자리엔 웬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얼음밖에 남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남자는 꽤나 말끔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까만 셔츠와 까만 머리가 그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도 같았다.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목구비가 큼지막하다는 건 쉽게 알 수가 있었다.
"……."
내 시선을 의식한 건지, 그가 내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왔다. 순간 마주쳐버린 시선에 황급히 눈을 돌리곤 애꿎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제 가방을 챙기는 듯싶던 그가 곧이어 내 앞을 지나쳐갔다. 그가 지나감과 동시에 알싸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
거의 수업이 시작할 시각에 맞춰 강의실을 들어섰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강의실은 어느새 학생들로 가득 차있었다. 너무 늦게 온 탓일까, 자리는 맨 뒤의 세 자리 뿐이었다. 되도록이면 앞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맨 뒷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아야 했다. 2년 휴학을 하고 오랜만에 학교에 온 탓인지, 아는 얼굴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상컨대, 이 수업은 왠지 다양한 나이대가 몰려있을 듯했다. 내용이 워낙 까다로우면서도 복잡한 부분이 많아 2학년 수업 치곤 어렵기 때문에 일부러 다음 학년 때 신청을 하는 사람도 많다던 어느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적게는 스물한 살, 많게는 스물여섯, 일곱…? 사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출석 부르겠습니다."
제 손목시계를 흘끗 보던 교수님께서 수업 시작 시간에 맞춰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셨다. 항상 겪어오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은 왠지 모르게 떨렸다. 교수님께서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실 때마다 각양각색의 목소리들이 대답을 했다. 그리곤 곧이어 강의실의 뒷 문이 열리며 지각생 한 명이 뒤늦게 모습을 비추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뒷 문 쪽으로 향했다. 교수님께 작게 목례를 하곤 빈 자리를 훑던 지각생이 내 쪽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옆 자리에 털썩 자리를 잡는다. 남은 자리라곤 나를 기준으로 양 옆 자리가 다였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그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옅은 담배 냄새와 독한 향수 냄새가 섞인 듯한 향이 풍겨왔다. 아까 카페에서 보았던 그 남자였다. 분명 나보다 먼저 카페를 나선 것 같은데, 그는 나보다 더욱 늦게 강의실에 들어섰다. 아마 흡연실을 다녀오느라 지각을 한 듯 보였다. 그나저나, 같은 국문학과였다니…. 사실 그리 놀랍진 않았지만, 기분이 살짝 오묘했다.
"도경수."
"네."
"다음부턴 지각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도경수. 그의 이름은 도경수였다. 교수님의 따끔한 충고에 작게 대답을 하던 그가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수업은 개인과제, 조별과제가 많아요. 워낙 자체로도 딱딱한 수업이긴 하지만, 여러분께 분명 도움이 될 수업이니… 어, 차근차근 잘 따라와줬음 해요."
교수님께서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셨다. 수업이 시작한 지 대략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조는 학생이 하나둘 보였다. 그런 학생들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가 주시는 건지, 교수님은 갑작스레 학생들의 수를 세기 시작하셨다.
"마침 딱 짝수네요."
흡족한 미소를 짓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시던 교수님이 덧붙여 말씀하셨다.
"조별과제는 무조건 두 명씩. 그 이상은 안돼요. 한 조당 두 명으로 인원을 잡는 것이 기본 규칙입니다. 직접 조를 지정해주진 않을 테니,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하도록 해요."
제법 단호하게 말을 마치신 교수님께선 다른 주제로 또다시 말을 꺼내시기 시작했다. 왠지 순탄하게 흘러갈 수업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첫 수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선 수업시간을 꽉꽉 채운 뒤에야 수업을 마쳐주셨다. 간단히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내주실 줄 알았는데… 괜한 기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쭈욱 기지개를 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미 강의실을 나선 듯했다.
[수업 끝나면 전화해]
휴대폰을 꺼내들어 김종인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곤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곤 아침에 향했던 카페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 수업은 1시…. 잠시 통화 좀 하고 밥을 먹으면 시간이 딱 될 듯했다. 카페 안은 아까와는 달리 제법 북적북적했다. 되도록이면 조용한 곳에서 통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어 조용하긴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울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 것에 애써 개의치 않곤 살짝 목을 가다듬으며 단축번호 0번을 꾸욱 눌렀다. 통화 연결음 소리가 얼마 가지 않아 뚝- 끊겼다. 그리곤 꽤나 반가우면서 달콤하게 느껴지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이제 수업 끝났어. 우리 교수님…, 첫 날인데도 시간 꽉꽉 채워서 끝내주셨어. 너무하셔."
투정 아닌 투정을 해보이는 내 목소리에, 휴대폰 너머로 김종인의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얼굴이 보고 싶었다.
- 밥은.
"이제 먹으려고. 너는?"
- 오늘 학식 별로라서 빵 사먹었어.
"에이, 밥을 먹었어야지."
- 하지만 학식이…
"알았어. 잘했어."
- 다음 수업 1시지.
"어떻게 알았어?"
- 나 네 시간표 외웠어.
"… 나도 못 외운 걸…."
내 시간표를 외웠다며 자랑스레 말하는 김종인에 조금은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당황스러움은 곧이어 설렘으로 바뀌어 절로 웃음을 짓게 했다. 아무렇지 않게 내 시간표를 외워 사소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떨렸다. 그리 대단한 행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겐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녀석이 사소하게 건네오는 말과 행동, 그 모든 것이.
- 오늘 네 스케줄 하나씩 다 읊어 봐.
"음…, 전화통화를 끊고 밥을 먹는다."
- 계속 이어서 해.
"밥을 먹고 1시 수업을 듣는다."
- 응.
"학교가 끝나면 집 근처 서점에 들러서 책을 하나 구입한다."
- 또.
"집에 간다."
- 아니지.
"맞는데?"
- 집 가기 전에 또 할 일 있잖아. 하나 빼먹었어.
"… 뭐지? 잃어버리지 않게 지갑을 가방 속에 넣는다?"
- 아, 그게 뭐야. 말고.
"…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인상을 찡그렸다. 책을 구입하고 집에 가기 전에 뭘 해야 하지. 무슨 할 일이 남았다는 거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애꿎은 하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려던 찰나, 다시금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종인이를 만난다.
"… 아, 방금 생각 했는데…."
- 됐어.
"미안…."
종인이를 만난다…. 종인이를 만난다라니…. 김종인의 입에서 그런 귀여운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귀여운 말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니, 정말이지 신기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간 부끄러워하며 앞으로 이런 모습을 다신 보여주지 않을 것만 같아 애매모호하게 넘어가야만 했다. 그건 살짝 아쉬웠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 내가 그랬지. 네 스케줄에 나 만나는 시간도 따로 추가해 놓으라고.
"… 딱 말하려 했는데, 네가 먼저 말을 해버렸어."
- 그런 변명 나한텐 안 통해.
사소한 문제로 잘 토라지곤 하는 김종인은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그러나 삐지는 모습마저 아이같이 귀엽게만 느껴져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동안 씩씩거리던 녀석 쪽에선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 왜.
"어디서… 만날까?"
- 어디긴. 네 집이지. 저녁 먹고 갈 거야.
퉁명스레 말해오는 녀석의 모습에 살풋 웃음이 터졌다. 그리곤 알겠다는 대답과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기곤 천천히 통화를 끊었다. 사실 계속 전화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라는 녀석의 말에 아쉽게도 빨리 끊어야 했다. 아무래도 남자친구로서의 김종인이 조금은 편해진 것도 같았다. 그렇다 해서 '어색함'이라는 감정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마음을 확인하던 그 날보단 녀석이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아마, 겉으론 틱틱대면서도 알게 모르게 나를 배려해주며 사소하게 이것저것 맞춰주는 녀석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
점심 식사론 학식을 먹었다. 메뉴는 된장찌개와 여러가지 밑반찬들이었다. 아침에도 된장찌개를 먹어 학식을 먹기가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빵으로만 때우긴 아쉬울 것도 같아 어쩔 수 없이 학식을 먹어야 했다. 밥을 혼자 먹는 건 정말 싫었지만, 아직 아는 얼굴이라곤 단 한 명도 없어 아쉽게도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다. 1학년 때 알고지내던 친구들, 선배들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날 수조차 없었다.
다행히 다음 수업은 제법 널널하게 진행이 되었다. 첫 날이니 간단히 수업에 대한 설명과 과제, 시험 방식에 대한 설명만으로 수업을 마쳐주겠다던 교수님의 한 마디에 강의실 안엔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거짓말처럼 수업은 꽤나 이른 시각에 끝이 났고, 신이 난 학생들은 교수님께 폴더 인사를 하며 강의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일찍 마치게 돼 정말이지 기분이 좋았다. 이제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사고….
버스 정류장에서 또 그를 보았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있던 '도경수'라는 남자. 카페에서 한 번, 강의실에서 한 번, 버스 정류장에서 또 한 번…. 벌써 세 번째 마주치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이리 자주 마주치는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곧이어 도착한 버스로 인해 그에 대한 생각은 싸악- 잊혀지게 되었다.
[끝났어ㅠㅠㅠㅠㅠㅠㅠㅠㅜ 행복해]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리로 가 털썩 앉곤 김종인에게 문자 메시지를 입력해 전송했다. 아직 수업 중인 건지, 녀석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휴대폰을 꼬옥 쥔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두 시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매일이 오늘 같았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꽤나 오랜만에 들르는 서점이었다. 예전엔 못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렀던 것 같은데, 어째 요즘은 서점을 들른 기억이 조금도 없었다.
"……."
오늘은 소설책 말고 에세이나 사볼까 생각하며 국내 에세이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하늘색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색이 유난히도 깨끗하고 맑게 보이는 이 책. 잊으려 애를 써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책이었다. 삿포로…. 그래, 삿포로. 언젠가 김종인은 내게 삿포로에 가자며 은근슬쩍 말을 건네왔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일까…. 고등학교 때니까…. '삿포로에 갈까요.'라는 말 속에 '당신을 좋아합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곤 얼마나 마음이 설렜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 사실을 알고 내게 그런 말을 해온 김종인에 너무나도 가슴이 떨렸다. 자연스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추억을 잠시 뒤로 하곤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어딘가 적혀있을 그 부분을 찾기 위해 천천히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아, 깜짝이야…."
그러다 문득, 뒤쪽에서 익숙한 향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것도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뒤를 돌자 거짓말처럼 보여오는 얼굴에 순간 간이 떨어질 뻔했다. 저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는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한 표정을 내비치던 김종인이 이내 피식 웃어보였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네가 가는 서점이 여기 말고 더 있냐."
"… 그런가."
"전화 했는데 못 들었어?"
"전화 했어? 아, 주머니 속에 있어서 못 들었나 보네."
서둘러 휴대폰을 들어보이는 나를 바라보던 김종인이 내 손에 들린 책을 슬쩍 빼앗아갔다. 그리곤 책의 표지를 살피더니 작게 인상을 찡그리기 시작한다.
"아, 이거."
그런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슬쩍, 아주 넌지시 물었다.
"… 기억나? 너 나한테 삿포로 같이 가자고 했었잖아."
"이 책 보고 했던 말이야."
"……."
"몰라, 쑥쓰럽다."
멋쩍은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책을 자리에 내려놓곤 다른 쪽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서있기만 하다 다시 책을 집어들곤 황급히 녀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외국 소설책 코너를 눈으로 훑고 있는 녀석의 팔에 팔짱을 꼈다.
"이 책 살 거야."
헤실헤실 웃으며 수줍게 말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런 나를 바라보던 김종인이 마지못해 덩달아 웃음을 지었다.
"오늘 이렇게 입고 학교 간 거야? 왜이리 멋있게 입고 갔어?"
"평소랑 다를 거 없는데 왜. 멋있어?"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어보이던 김종인이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멋있냐 물어오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멋있다는 사소한 칭찬 한 마디에도 녀석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작은 칭찬 하나에도 괜히 쑥쓰러워하면서 은근 기분이 좋다는 티를 내는 녀석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오늘 무슨 일 없었냐."
"응, 별거 없었어. 아, 오늘 학교 너무 일찍 도착해서 강의실 문이 안 열려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어. 강의실 밖에서 기다렸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사먹었어."
"점심은 학식 먹었고?"
"응, 학식. 된장찌개 나왔어."
"누구랑 먹었어."
"혼자 먹었지….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더라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좋았다. 나도 혼자 먹었어.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웃어보였다. 별거 아니지만, 이렇게 서로의 하루 일과를 보고하며 공감을 한다는 것이 좋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난 이런 일이 있었어. 서로의 하루를 하나하나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러한 생각도 잠시,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본 뒤 녀석의 손을 잡고 조금은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왜이리 으슥한 곳으로 가."
"서점인데 우리 너무 시끄러운 것 같아."
"그럼 귓속말로 할까."
꽤나 진지하게 말을 해오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살풋 웃어보였다. 그리곤 빽빽히 꽂혀있는 책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곧이어 뒤쪽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날인데 학교 안 온 사람도 있더라. 지각생도 꽤 많았어."
"아, 우리도 첫 수업엔 지각생 한 명 있었어."
"안 졸았냐."
"한 번도 안 졸았어. 너는? 졸았지?"
"안 졸았어. 내가 맨날 잠만 자는 줄 아나 보네."
틱틱대듯 답을 하던 김종인이 나를 따라 책을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아무런 대화 없이 여러 책들을 둘러보고만 있기도 어느새 몇 분이 흘렀을 때, 꽤나 신기하면서도 독특한 표지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씨익 웃으며 그 책을 꺼내들곤 김종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갑작스레 뒤에서 나를 안아오는 녀석 탓에 몸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듣던 뒤에서 안기. 백허그였다. 숨이 턱- 막혀오는 것도 같아 그저 가만히, 입술을 꾸욱 깨문 채 앞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았다.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책의 제목들이 흐물흐물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책을 들고있는 손엔 스르륵 힘이 풀려 자칫했다간 바닥에 책을 떨어뜨릴 것도 같았다. 잔뜩 어지러워진 마음을 애써 추스르기 위해 침을 꿀꺽 삼키곤 손에 더욱 힘을 줘 책을 쥐었다. 그리곤 곧이어, 꽤나 붉게 물든 마음에 다시금 불이라도 지피듯 녀석의 입술이 내 오른쪽 뺨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도 같았다.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이라도 된 양 벙찐 채 허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슬쩍 손을 들어 조심스레 볼을 어루만졌다. 짧게나마 부드러운 촉감이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쑥쓰러웠다. 누군가 자꾸만 머릿속과 마음속에 달달한 설탕을 뿌리는 것도 같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공장소에서 이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
"그냥, 예뻐 보여서."
바로 옆에서,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뒤에서 나를 꼬옥 안고있는 녀석의 품은 포근하면서도 따뜻했다.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그에 비례하듯 녀석에 대한 설렘과 떨림도 배로 증가하는 것만 같았다.
*
더보기 |
공공장소에서 저러면 안돼요.. 절대로요.. 다메요 다메..☆
지난 화에서 언급된 카페 알바생은 사실.. 아무도 아니에요.. 경수도 아니고.. 종인이의 질투심을 끌어내보고자 그냥..ㅎㅎㅎ 드디어 경수가 등장했네요! 자꾸 마주치는 건 그냥 우연이에요. 경수는 그냥 경수일 뿐이죠 :) 깊이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스폰지밥 / 러블리 / 두부 / 종이니 / 기화 / 핫초코 / 공삼이육 / 네네스노윙 / 지블리 / 로운 / 똥잠 / 알콩 / 아가야 / Paper / 세젤빛 / 꽯뚧쐛뢟 / 얍얍 / 늘봄 / 종이페이퍼 / 고구마 / 도비 / 똥강아지 / 두둠칫 / 복숭아 / 윤아얌 / 불가 / 제인 / 스누피 / 나니꺼 / 엑소더스 / 가그린 / 남사친 / 다예 / 가락 / 너눈 / XoXo / 봉봉 / 댜니 / 하리보 / 사랑둥이 / 녹차라떼 / 요거트 / 달달이 / 주계열성 / 됴루 / 토끼 / 구구가가 / 완두콩 / 니니야 / 종인아사랑해 / 우유퐁당 / 니나니나 / 거뉴경 / 똥백현 / 로리나 / 이레네 / 아이스티 / 이슬비 / 고답니니 / 텔라 / 종종걸음 / 윤슬 / 짱구여친 / 해피 / 온도니 / 찬샤 / 닻별 / 은하수 / 구글조닌 / 바닐라라떼 / 귤껍질 / 쮸쀼쮸쀼 / 기적 / DB / 라잇라잇 / 스파게티 / 안녕내게다가와 / 보노보노보 / 럽미라잇 / 만떼 / 치즈돈가스 / 꿀잼 / 몽글몽글 / 올봉 / 카이델라 / 뚱이 / 맴매맹 / 무주 / 니니니 / 왕 / 모찌 / 재브 / 민소쿠쨩 / 매일 / 듀퐁 / 엑소암내킁킁 / 희망 / 종니니 / 모카니니 / 머랭 / 서쥬니 / 테라피 / 말랑 / 고기만두 / 까까 / 면덕 / 2465 / 건빵 / 문보우 / 로로찡 / 배큥아리 / 릴리 / 첫눈 / 죠 / 털ㄴ업 / 꺄 / 꽃봄 / 고고싱 / 김콩 / 핫치킨 / 허니 / 요니요니 / 쁌쁌 / 다주 / 용큥 / 감자 / 별달구름 / 김준면25 / 호구 / 됴깡 / 만쥬 / 현미녹차 / 김종이ㄴ / 김까닥 / 큥큥 / 94 / 얄라리얄라셩 / 이레네 / 스무살의봄 / 뚜뚜 / 꾸루꾸루 / 리리 / 훈구리 / 타니 / 심쿵 / 규규 / 밥 / 큐피드 / 빵 / 몽이 / 콩부인 / 근댕 / 목도리 / 디보 / 나무 / 설레미 / 수시대박정시대박 / 시카고걸 / 체리 / 킴벌리 / 삼디다스 / 아플망고 / 콘치 / 무민이 / 니니짱 / 이과생 / 용이 / 니나노 / 데빌 / 롯데월드 / 종인이개 / 시매니저 / 0408 / 배리 / 스무살의봄 / 니니엄마 / 여니 / 크롱 / 럽미베베 / 모서리 / 런웨이 / 수기 / 형광등 / 썬다운 / 나랑 / 망고 / 라인 / 젤리냠냠큥 / 쓰리파이 / 퓨어 / 푸돌이 / 행쇼 / 부릉 / 럽럽럽 / 듀듀쥬 / 슨니야 / 허니잼 / 호이호잇 / 봄둥 / 수박마루 / 또해 / 알콩 / 보스 / 귬귬 / 초코파이 / 슈팅스타 / 현아꽃길만걷자 / 스누 / 3 / 짝짝 / 아이스크림 / 지은이 / 오징어 / 두근거려 / 마시멜로우 / 메리미 님 ♡
사랑합니다. (하트) / Ctrl+F로 암호닉을 쉽게 찾아보실 수 있어요! 혹시 누락 됐다, 하시는 분은 살짝쿵 댓글 남겨주세요 :)
암호닉 신청은 [ ] 요렇게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