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7 (이해하고, 또 이해하기)
"어…? 잠시만요, 아저씨! 저 여기서 내려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외치듯 말했다.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짜증을 내시던 버스 기사 아저씨께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죄송함을 전하곤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또 꾸벅꾸벅 조느라 안내 방송을 듣지 못한 건 물론 아니었지만, 창밖을 보며 딴 생각을 좀 하다 어쩔 수 없이 타이밍을 놓치게 된 것이었다. 요즘 왜이리 정신을 놓고 있는 건지, 내가 생각해도 참 의문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을 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께나 여러 승객들에게나 여러모로 민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자 은근한 창피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며 학교 쪽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수요일. 일주일의 중간쯤 되는 날이었다. 아직 수요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꽤나 잔인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오늘은 시간표가 제법 널널한 날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다행이었지만, 빨리 주말이 왔음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공강이라 아직 잠을 자고있는 건지, 김종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동안 충분히 자지 못한 잠을 공강 날 보충하겠다며 신이 난 채 말하던 녀석의 들뜬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난 금요일에 실컷 자야지. 오늘이랑 내일만 버티면 된다. 나와는 반대로 금요일에 풀강인 김종인을 어떻게 약올려줄까 생각하며 기분 좋은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첫 수업은 교양수업이었다. 따분하게만 느껴질 심리학을 신청한 이유는 단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전부터 꼭 한 번쯤은 배워보고 싶다 생각하던 것이어서였다. 첫 수업이라 그런지 조금은 떨리면서도 긴장이 되었다.
"……."
개강 날처럼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다행히 강의실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곤 안을 훑었다. 꽤나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의실 안은 절반이 넘는 학생들로 차있었다. 예상보다 많은 학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얼마 없다면 그래도 들어가기가 뻘쭘하진 않을 텐데…. 침을 꿀꺽 삼키곤 강의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당연하듯 익숙한 얼굴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중간쯤 위치한 자리에 털썩 앉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심플하기 그지 없던 상태 표시줄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조그맣게 떠있었다.
[배스킨 라빈스 마법사의 할로윈 사줄 김종인, ○○○ 구함]
오세훈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카톡을 잘 확인하지 않는 김종인의 특성을 파악해 일부러 문자 메시지로 제가 부탁하는 바를 보내온 오세훈은 제법 똑똑한 놈인 듯했다. 마음속으로 녀석의 영악함에 감탄하며 천천히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답장을 전송하곤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갑작스레 진동 소리가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폰 화면엔 '오세훈'이라는 이름이 떠있었다. 수업이 시작하기까진 아직 2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강의실 안에서 전화를 받을 순 없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제법 조용한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통화 버튼을 꾸욱 눌렀다.
"여보세요?"
- 야.
"안녕."
- 너 학교야?
"학교지. 곧 수업 시작해. 너는?"
- 나 지금 버슨데, 왠지 지각할 느낌이야.
"일찍 일찍 좀 다녀. 그러다 교수님한테 찍히면 어쩌려고."
- 사실 이미 찍혔음. 개강 날 지각을 해버렸거든. 오죽했으면 교수님이 내 이름을 외우셨겠냐. 아니, 이걸 영광이라 여겨야 할까? 좋아해야 하나?
"… 아니, 전혀…."
- 그런가.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뭐. 어쨌든 지금 기분이 정말 별로야.
"또 왜?"
- 지각할 느낌이라니까.
"……."
- 버스는 왜이리 막히는 거야. 마음 같아선 날아서 가고 싶어. 앗, 아저씨 들으실 수도 있으니 좀 작게 말해야겠다.
"…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우울한 기분 좀 달래줘. 아이스크림 하나면 돼.
"……."
- 김종인은 자? 수업 중이야? 답장이 없어.
"김종인 오늘 공강이야."
- 이야…, 부럽네. 난 오늘 풀강인데.
"… 힘내."
영양가 없는 대화들의 연속이었다. 짜증 가득한 오세훈의 말들을 듣다 보니 아직 수업을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 너 어째 귀찮아하는 말투야.
"아니, 그건 아니야."
정곡을 콕 찔러오는 오세훈의 목소리에 황급히 아니라며 대답을 했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녀석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역시 거짓말은 내게 맞지 않았다.
- 아, 수업 잘 들어라. 나 곧 내릴 듯해.
"너도 수업 열심히 들어. 졸지 말고."
- 사실 지금도 졸면서 통화 중이야.
"뭐라고?"
- 농담이지, 인마.
장난스레 들려오는 오세훈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간단히 대답을 하며 통화를 끊었다. 그리 오래 통화를 한 건 아니었지만, 휴대폰은 제법 뜨끈뜨끈했다. 휴대폰의 열기로 인해 따뜻해진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 펴곤 다시 강의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어느새 강의실 안엔 많은 학생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벌써 빈 자리가 두어 개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교수님께서 모습을 비추셨다. 가장 앞에 앉아있던 한 여학생이 먼저 인사를 해보였고, 곧이어 제각각의 목소리들이 교수님을 향해 덩달아 인사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다들 예쁘게 앉아있네요. 출석 부를게요."
선한 인상을 지닌 교수님은 중년의 여성 분이셨다. 겨자색 투피스와 가슴께에 달린 반짝이는 브로치가 그녀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도경수."
"네."
교수님께서 하나하나 출석을 부르실 때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대답을 했다. 그리곤 들려오는 꽤나 익숙한 이름 하나에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구석 자리에 있어 보지 못했던 건지, 익숙한 얼굴의 그가 있었다. 오늘도 역시 그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걸려 있지 않았다.
출석체크를 마치신 교수님은 과목에 대한 소개를 처음으로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셨다. 분명 초반엔 하하호호 웃으며 즐겁게 집중을 했지만, 어째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다 교수님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뜨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집중을 했고, 또 다시 졸았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눈이 감겨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자, 많이 졸리죠?"
그런 내 심경을 이해하신 건지, 교수님이 학생들을 쭈욱 훑으며 말씀하셨다. 다시 한 번 잠을 깨보자 생각하며 양쪽 볼을 살짝 때리곤 교수님의 말씀에 집중을 했다.
"지금부터 학과별로 자리를 좀 옮길게요. 만약 혼자인 사람은 손을 들어주세요."
교수님의 한 마디에 주위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이리저리 이동하며 자리를 옮기는 소리, 제 학과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소리,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소리 등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갑자기 학과별로 자리를 옮기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꽤나 의아하기만 했다. 조느라 잘 듣지 못해 그 이유에 대해선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같은 학과라곤 단 한 명밖에 아는 얼굴이 없는데….
"……."
일단 그가 앉아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도경수'라는 남자에게 다가가 뻘쭘하게 서있기만 하자, 곧이어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그… 뭐지, 같은 학과끼리 앉으래요. 저도 국어국문학과… 거든요…."
그런 나를 보며 큼지막한 눈을 꿈벅이기만 하던 그가 옆에 놓인 의자를 빼주었다. 간단히 감사의 뜻을 전하곤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말을 처음 건네보는 거라 무척 어색하고 불편했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가 가시방석이라도 된 듯했다. 같은 학과인 것도 놀라웠는데 이렇게 교양수업도 같은 걸 듣게 되다니, 정말이지 신기했다.
"잠시 쉬었다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화장실 다녀오실 분은 다녀오세요."
교수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몇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멍하니 강의실의 문을 바라보다 한숨을 작게 내쉬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지금쯤 일어났겠지,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메시지를 입력해 김종인에게 전송을 했다. 뭐해? 일어났어? 그리곤 휴대폰 메뉴를 이리저리 넘기며 여러 아이콘들을 살피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
"……."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강의실을 나섰다. 그가 나감과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어색함의 기류가 조금은 진정이 된 것도 같아 마음이 한결 편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곤 다시 휴대폰 홀드를 열었다. 별로 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배터리는 어느새 30퍼센트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그가 안으로 들어와 내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담배를 피우고 온 건지, 첫 날 보았던 그때와 같이 그에게선 미세한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또다시 나와 그의 사이를 감돌기 시작하는 어색한 기류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지금 이 상황이 내겐 너무나도 불편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항상 짧게만 느껴지던 쉬는시간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수업시간마냥 길게 느껴졌다. 그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다, 큰 맘 먹고 그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 혹시 학번… 아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원래 낯선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에겐 먼저 말을 거는 타입이 아니었던지라, 목소리가 조금은 떨렸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도톰한 입술을 열어 대답을 했다.
"스물일곱이요."
많아봤자 스물다섯을 예상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꽤나 예상 밖이었다. 전혀 스물일곱처럼 보이지 않는 동안 외모를 지닌 그가 조금은 놀랍게도 보였다. 스물일곱이면… 나랑 네 살 차이…. 마음속으로 작은 감탄을 내뱉곤 다시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4학년이세요?"
"네."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한참 어려요."
작게 말을 내뱉으며 어색히 웃어보였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교수님이 강의실 안에 모습을 비추셨다.
*
학과별로 모여 앉으라던 교수님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앉아야 했지만, 딱히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A4용지 한 장에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크게 적어놓고 조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발표를 하는, 그게 다였다. 꽤나 바르고 깔끔한 글씨체로 한 자 한 자 적어내리던 그는 원체 말이 없는 편인 것 같았다. 수업에 관한 내용이 아니면 먼저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다. 그게 꽤나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수업을 집중하는 데에 지장이 갈 만큼 크나큰 어색함은 아니었다.
길게만 느껴지던 교양수업이 끝이났고, 천천히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어느덧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아직까진 아는 얼굴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밥을 혼자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펐다. 곧 익숙해질 거라며 속으로 합리화를 해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굳게 먹곤 그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강의실을 나서려던 그가 나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점심 혼자 드세요? 만약 혼자 드시면… 저랑 같이 드실래요?"
사실 아직 편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이나마 말을 튼 사이니 같이 밥을 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넌지시 물은 것이었다. 그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싶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밥 생각이 없어서."
"… 아, 그러세요? 그럼 그냥…"
그의 대답에 허둥대며 말을 더듬었다. 그리곤 황급히 인사를 하곤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아니야. 가."
"네?"
"밥 먹자고."
간단히 답을 하곤 먼저 학생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덩달아 발걸음을 뗐다. 하마터면 창피해질 뻔한 순간이지만, 나름 배려를 해주는 듯한 그의 행동이 조금은 고맙게 느껴졌다.
*
웬만하면 밥을 먹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오늘 학식은 별로였다. 그래도 밥을 먹는 게 낫지 않겠냐는 그의 말에 애써 고개를 젓곤 편의점에서 빵과 딸기우유를 사먹었다. 밥 생각이 없다는 그는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구입해 마셨다. 그리곤 더이상 할 게 없어 천천히 강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와는 다른 수업이 잡혀있는 그는 바로 옆 강의실이라고 했다. 아직 위층에 머물러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딸기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카톡이 계속 오네요…."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선 짧은 진동이 연속으로 울렸다. 답장을 하기가 귀찮은 건지, 답장을 할 가치가 없는 내용인 건지 그는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기만 할 뿐, 더이상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엿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해 슬쩍 눈을 돌려 그의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박찬열…?"
분명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두어 번 비비곤 다시 그의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 이름이었다. 벙찐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저 동명이인이겠거늘 생각하며 마음을 다르게 잡고자 나름의 애를 썼다. 하지만 '박찬열'이라는 이름은 결코 흔한 이름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둘은 나이도 스물일곱으로 같았다. 그저 이런 저런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의아하게 말을 건네왔다.
"박찬열을 알아?"
그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곤 고개를 살짝 저었다.
"… 그냥 동명이인인가 봐요."
어색하게 웃으며 애매한 답을 해버렸다. 그리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뒤 버튼을 꾸욱 눌렀다. 얼마 안 있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확실하진 않지만, 박찬열과 도경수가 서로 알고 있는 사이라는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
뒷 수업은 정말이지 정신없이 졸았던 것 같다. 수업 자체가 따분한 내용인 건 분명 아니었지만, 수면제라도 먹은 양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봄이라 그런가….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춘곤증? 여러 생각으로 뒤덮인 머릿속이 조금은 어지러웠다. 작게 하품을 하곤 강의실을 나섰다. 그러고보니, 오늘 하루 김종인과 연락이 닿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내 홀드를 열어보았다. 도대체 언제 전원이 나간 건지, 휴대폰은 까만 화면만을 띄우고 있었다. 요즘들어 배터리도 금방 닳고…. 아무래도 휴대폰이 맛이 간 듯했다. 하긴, 2년도 넘게 썼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얼른 바꾸든가 해야지….
아쉽게도 녀석에겐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났으니 이제 마지막 스케줄인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 학교를 나서는 중이라는 보고를 하고도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일부턴 여분의 배터리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닫히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로 황급히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간발의 차로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고, 서둘러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죄송합… 어, 선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까만 머리의 말끔한 인상을 지닌 남자. 도경수였다. 선배도 방금 마친 거예요? 의아하게 묻는 내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일정한 속도로 줄어드는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바라보았다. 멈춰서는 층없이 한 번에 1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먼저 나설 때까지 문이 안 닫히게 버튼을 눌러주고 있던 그에게 감사의 멘트를 전하곤 그와 멀찍이 떨어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개강 날 들었던 첫 수업 있잖아요. 완전 빡셀 것 같지 않아요?"
"그럴 것 같더라."
"과제랑 발표도 많은 수업이라면서요…."
"죽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돼."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듯 답하는 그를 보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리곤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옮겨 걸음을 뗐다.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또다시 찾아온 정적에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 정말 싫은데….
"너 자꾸 입술 깨무네."
"네?"
"아까부터 봤어. 틈만 나면 입술 깨물잖아."
"… 아."
"그거 고쳐라. 안 좋은 버릇이야."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작은 버릇 중 하나인 입술 깨무는 걸 그가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데…, 마냥 신기했다. 그저 어벙벙한 상태로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보여왔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더욱 크게 뜨곤 그 모습에 집중을 했다.
"……."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더욱 선명히, 자세히 보여오는 얼굴에 환히 웃음을 지었다.
"간다."
"네? 아, 안녕히 가세요. 오늘 여러모로 감사했어요."
그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곤 걸음을 제법 빠르게 옮겼다. 그런 나를 보자마자 덩달아 환히 웃어보이던 김종인이 팔을 넓게 벌렸다. 그 모습에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곤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넓게 벌리고 있던 팔이 조금은 무안해졌는지, 녀석이 행동을 거두곤 애꿎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녀석을 보며 작게 웃음을 짓곤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나보다 한참이나 큰 녀석의 손은 언제나 잡기 버거웠지만, 오히려 그러한 느낌이 좋았다.
"왜 안 안겨."
"여기 학교잖아."
"학교에서 안으면 안 되는 거야?"
"안 되지, 그럼."
"휴대폰은 왜 꺼져있어. 배터리 없어?"
"응. 나 아무래도 휴대폰 바꿔야 될 것 같아….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
"나랑 같이 바꿔."
"커플 폰?"
씨익 웃으며 김종인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던 녀석이 손에 깍지를 껴왔다.
"오늘 정확히 1시 28분에 일어났다."
"… 대박이다."
"연락 안돼서 무슨 일 있나 싶었어. 데리러 가는데 혹시 길 엇갈리면 어쩌지, 걱정도 됐고."
"… 내일부턴 배터리 꽉꽉 채워서 갈게."
작게 말을 하곤 천천히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7분 뒤면 도착한다는 안내 화면을 보곤 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덩달아 옆 자리에 털썩 앉으며 가만히 내 손을 만지작거리던 김종인이 툭 내뱉듯 말을 건네왔다.
"아까 그 남자 누구야."
"응?"
"너랑 같이 나오던 남자."
"아…, 같은 과 선배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거든."
"친해?"
"아니, 친한 건 아니고…. 교양 같은 거 들어. 그냥 말 몇 번 나눠본 게 다야."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듯싶더니 다시금 입술을 뗐다.
"밥은 뭐 먹었어."
"빵이랑 우유…. 학식 별로였어."
"혼자?"
"아니, 오늘은 혼자 안 먹었어."
"그럼 누구랑 먹었어. 친구랑?"
"아…, 선배랑."
"아까 그?"
"응, 아까 그 선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작게 인상을 굳히던 김종인이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가만히 녀석의 옆 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녀석의 입술을 살살 어루만졌다.
"왜그래…."
그저 눈을 꿈뻑이며 앞만 바라보고 있는 녀석에게선 어떠한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괜히 기가 죽는 것도 같아 입을 꾸욱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어느새 5분 가량이 흘렀을 때, 버스가 도착했다. 손을 잡고 일어나 내 몫까지 한 번에 요금을 찍던 녀석이 천천히 안을 살피곤 비어있는 두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창가 쪽 자리에 털썩 앉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놓는 녀석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리 심통이 난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꼬옥 맞잡고 있는 손….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나 하던 유치한 장난을 걸면 어이가 없어서라도 웃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씨익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곧이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오는 모습에 검지손가락을 뻗어 녀석의 볼을 콕 찔렀다.
"……."
그런 나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않던 김종인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무 반응이 없는 녀석의 모습에 괜한 창피함이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애써 무시하곤 녀석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김종인."
"……."
"화났어?"
"……."
"종이야."
"……."
"… 종인아."
"……."
"니니야."
"……."
"… 니니~"
없는 애교까지 끌어내 꽤나 어색하게 녀석을 부르자 그제서야 웃음이 터진 건지, 녀석이 작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뒤늦게 창피함이 밀려와 어색히 웃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나를 보며 잠시 뜸을 들이던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선배, 나이가 어떻게 돼."
"어…, 스물일곱이라 하셨어."
"4학년?"
"응, 4학년."
"아."
"… 근데 왜 자꾸 그 선배를…"
"그냥. 가깝게 안 지냈음 좋겠어."
"… 그냥 선배인데?"
"그냥 선배든 뭐든. 난 싫어."
"……."
"질투난다고."
"… 에이, 그게 왜."
"왜냐니. 당연한 거 아니야?"
"……."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넌 안 그래?"
"……."
"내가 이상한 거냐."
"……."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속도 좁고 질투도 많아."
"……."
"너한테 아는 선배가 생겨서 수업도 같이 듣고 밥도 같이 먹는다는 건 충분히 좋은 일인데,"
"……."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어."
나를 향해 건네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기만 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나도 녀석과 같은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선배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학교를 나서는 김종인…. 당연하듯 질투심이 느껴졌다. 그저 아주 잠시라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사소한 문제를 난 왜 시작부터 따지고 봤을까, 하는 후회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버스는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 또한 금방 다다를 수 있었다. 집까지 데려다주는 와중에도 입을 꾸욱 다물고만 있던 김종인의 모습에 나 또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로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고, 잡고 있던 손을 놓곤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이다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해,"
"……."
"이해 못 해줘서."
"……."
"앞으론 유의할게…."
"……."
"네가 이상한 거 아니야. 분명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난 질투 했을 거야."
웅얼거리듯 말을 건네곤 시선을 내려 애꿎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기가 조금은 어색해서였다.
"안아줘."
그저 바닥만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는 내게 김종인이 툭 내뱉듯 말을 건네왔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본 뒤 가까이 다가가 녀석의 허리에 조심스레 팔을 둘렀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인 건지, 녀석은 가면 갈수록 귀여워지는 것만 같았다. 나보다 한참이나 키가 큰 녀석을 끌어안는다는 건 당연하듯 내겐 벅찬 행동이었다. 녀석이 어깨를 포근히 감싸오자, 오히려 내가 안겨버린 셈이 되어버렸다. 그저 녀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곤 팔에 더욱 힘을 줘 허리를 감쌌다. 누누이 느끼는 거지만, 김종인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난 날보다 키가 훨씬 커져 있었다. 당시엔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먼 훗날 너와 내가 이렇게 꼬옥 끌어안고 있을 거라곤.
"들어가."
김종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들어가라는 말을 해놓곤 제 품에서 놓아줄 생각을 않는 녀석의 모습에 살풋 웃음이 나왔다. 그리곤, 슬쩍 등을 토닥여주며 조심스레 녀석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더 오랜 시간을 같이 있고 싶었지만, 알고 지내던 선배와 약속이 잡혀 버렸다는 녀석의 말에 아쉽게도 금방 헤어져야 했다. 배싯 웃으며 손을 흔들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녀석의 향이 코끝을 맴도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방금 헤어졌는데…, 벌써 보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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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른 시간에 찾아왔네요 :) 저녁 시간인데 다들 저녁 맛있게 드세요! 지금 다들 시험기간이죠.. 이미 끝나신 분들도 계실 거고, 아직 끝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실 거예요. 다들 화이팅하세요! 이렇게 멀리서나마 제가 응원하고 있을게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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