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1 (이 밤, 너와 함께)
[네, 그럼 이따 그 강의실에서 봐요.]
어렵사리 알게 된 도경수 선배의 연락처로 간단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며 펜을 집어들었다. 정말이지 바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중간고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번 수업이 오늘의 마지막 수업인 만큼 집에 가자마자 공부를 하겠노라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일정에 조그마한 차질이 생긴 건지, 제법 어려운 내용의 조별과제를 오늘에서야 내주신 교수님 때문이었다. 한 조의 인원은 무조건 두 명이어야 된다며 첫 수업 때부터 누누이 강조를 하시던 교수님은, 하고 싶은 사람과 같이 과제를 하라며 제법 인심을 쓰듯 말씀을 하셨다.
'저, 선배…. 저랑 같이 하실래요? 과제….'
그나마 말을 몇 번이라도 나눠본 전적이 있으니 다른 사람과 하는 것보단 편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바로 옆에 앉아있는 그에게 말을 건넸었다.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은 마지막 수업의 쉬는시간이었다. 오늘 내주신 조별과제긴 하지만, 계속 미루다간 시험 공부를 하는 데 방해가 될 것도 같아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밤을 새서라도 과제를 완벽히 끝내 놓자며 말이다. 제법 당돌한 내 제안에 그는 알겠다며 긍정의 답장을 보내왔고, 수업이 끝난 뒤 빈 강의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늦게까지 조별과제에 시달릴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도 같았지만, 애써 마음속으로 합리화를 했다. 슬쩍 휴대폰 홀드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대략 5분밖에 남지 않은 쉬는시간 동안 무얼 할까, 골똘히 생각을 하다 김종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교수님의 등장으로 아쉽게도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 넣어야 했지만, 고작 5분 동안의 짧은 메신저 대화로도 괜스레 마음이 설레고 기뻤다. 술을 그닥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잘 마시지도 못하는 나지만, 왠지 오늘은 약간의 알코올을 섭취하고도 싶은 날이었다. 술은, 언제 끝날지 모를 조별과제의 피곤함과 고단함을 털어내기 위한 일종의 해결책인 것이었다. 하루종일 김종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잠깐이나마 얼굴도 볼 겸 같이 술도 마시고…. 그러고보니, 단 둘이 술을 마셔본 기억이 없었다. 가끔씩 갖던 술자리엔 항상 오세훈이 껴있었으니, 단 둘이 술을 먹는다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듯했다. 원체 쓴 맛을 싫어하는 김종인은, 당연하듯 '술'이라는 것에도 거리를 두었다.
'네 술버릇도 알고 싶어.'
'난 그런 거 없어.'
'에이….'
'에이는 무슨 에이야.'
'나중에 한 번 김종인 만취하게 만들어 봐야지.'
'큰일 날 소리 하네. 술 싫어.'
'쳇.'
지난 번 나눴던 짧은 대화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녀석의 술버릇을 캐치해낼 날이 이렇게 빨리 다가오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미소가 지어졌다.
*
수업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꾸벅꾸벅 졸고야 말았다. 주위가 어수선해짐과 동시에 하나둘 의자를 끄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수업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제법 침침한 눈을 두어 번 세게 꿈뻑이곤 서둘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끝나면 연락하지 말고, 끝나갈 때쯤 연락해. 학교 앞으로 데리러 갈게.]
몇 분 전 도착한 김종인의 메시지를 훑곤 살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긍정의 메시지를 입력하며 하트를 두어 개 붙여 답장을 전송했다. 데리러 오는 건 물론 고맙고 좋았지만, 피곤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여기까지 걸음을 해온다는 게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일단 알겠다며 답장을 보내긴 했지만, 버스 안에서 연락을 해야겠다 다짐하며 그가 기다리고 있을 빈 강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굳게 닫혀있는 강의실의 문을 살며시 열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해왔고, 작게 목례를 하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을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넣던 그가 아무렇지 않게 의자를 빼주었다. 그런 그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엔 여러 문구들이 끄적여진 A4용지 몇 장과 삼색 볼펜이 하나 놓여 있었다.
"너 기다리는 동안 혼자 생각 좀 해봤는데,"
"……."
"막막해."
"……."
"교수가 말하는 게 뭔지 제대로 파악도 안 되고, 그냥 감이 안 잡혀."
"… 솔직히 교수님 너무해요. 안그래도 지금 시험 공부 때문에 머리 터질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 조별과제를…."
한탄 아닌 한탄을 해보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처음부터 막막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예상이 딱 들어맞으니 조금은 놀랍기도 하면서 괜히 슬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흘끗 바라보며 커다란 눈을 꿈뻑이기만 하던 그가 턱을 괴곤 손가락으로 제 아랫입술을 뜯기 시작했다. 도톰한 아랫입술에선 곧이어 동그랗게 피가 맺혔고,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는 혀로 입술을 쓸었다.
"……."
어색한 공기가 그와 내 주변을 감돌기 시작했다. 어느 누군가가 말을 꺼내놓지 않으면 이런 딱딱하고 불편한 기류가 차올랐다. 그저 곁눈질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헛기침을 하곤 전공서적을 꺼내 펼쳤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허벅지 쪽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휴대폰 진동 소리였다. 허공에 시선을 옮겨놓은 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그의 눈치를 흘끗 보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심각하게 보고 싶다.]
김종인의 문자 메시지였다. 제법 간결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제대로 얻어맞은 것마냥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의도치 않은 순간에 이런 문자를 보내올 때면 더더욱 그랬다. 나도 모르게 번지는 웃음을 애써 가라앉히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빨리 끝낼게! 최대한 빨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휴대폰 화면만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휴대폰을 집어 넣었고, A4용지에 다시금 무언갈 끄적이기 시작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무래도 고전소설보단 현대소설이 나을 테니까…"
이런저런 말을 조리있게 늘어놓기 시작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포스트잇에 메모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PPT 제일 첫 부분엔 이 내용을 넣고, 이건 제일 마지막에 넣자."
"어어, 마지막은 이 내용 아니었… 아, 맞구나. 죄송해요…."
작게 죄송함을 전하곤, 다시금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 넣었다.
*
조별과제인 만큼 그에게 민폐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며 열심히 PPT 내용을 정리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앞 부분이었고, 최대한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펜을 잡은 손에 땀이 찰 정도로 묵묵히 필기만 하고 있자니,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졸음을 깨보고자 양쪽 볼을 살짝 때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수험생들에게 졸음은 최악. 그러나, 그건 대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어…, 깜짝이야…."
졸음과의 사투를 스스로 이겨내고자 온갖 수를 썼지만, 그 짧은 사이 졸음에 뒤덮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푸욱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손등에 닿아오는 차가운 느낌에 흠칫 놀라 황급히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기까진 정확히 몇십 초의 시간이 걸렸다. 내 앞엔 차디찬 캔커피 하나가 놓여 있었고, 비어있던 옆 자리에 다시 그가 털썩 앉았다. 그러더니 제 짐을 챙기기 시작하며 내게 시선을 옮겨온다. 흡연실을 다녀온 건지, 그에게선 옅은 담배 향이 느껴졌다.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몰랐는데, 어느새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 감사합니다."
"짐 챙겨."
"… 벌써 가게요? 아직 끝나려면 멀었…"
"PPT까지 만들려면 오늘 밤 새야 돼. 대충 틀은 다 잡아 놨으니까, 각자 집에서 만들어도 될 것 같아."
"… 아."
요란하게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는 제 휴대폰을 흘끗 확인하던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 머뭇거리며 캔커피를 챙겨들곤 서둘러 가방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밖은 제법 어두웠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약간은 쌀쌀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조금만 걸으면 버스 정류장이니 상관은 없었다. 조금을 걸어 도착한 버스 정류장엔 아무도 없었다. 약속이 있다는 그는 반대 편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7분 뒤에 도착할 것이라는 버스 안내 화면을 바라보며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했다. 그리곤 김종인에게 메시지를 작성해 전송했다.
[나 끝났어.. 버스 기다리는 중이야.]
전송이 완료됐다는 알림을 확인한 뒤 평소 즐겨 듣는 노래를 재생시켰고, 곧이어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마음속으로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기도 잠시, 흐르던 음악이 뚝 끊기며 긴 진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엔 반짝이는 하트 세 개가 띄워져 있었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입술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하는 웃음을 애써 꾸욱 삼키곤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식상하기 그지 없는 인사말 뒤에 녀석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간지럽히듯-
- 내가 끝날 때쯤 연락하라 했지.
"너 여기까지 오려면 힘들잖아. 그래서 그냥…."
- 뭐가 힘들어. 버스만 타면 금방인데.
"아, 그래도…."
- 과제는 어떻게 됐어.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 사실 아직 덜 끝났어. 오늘은 기본적인 틀만 잡아놨고, PPT는 각자 만들어서 합치기로 했어. 선배도 약속 있다고 하시고…."
- 선배랑 같은 조냐. 너한테 막 다 맡기고 그러진 않고?
"응, 아니지. 그때 그 선배야. 네가 나 데리러 온 날 우연히 마주쳤던…."
- … 아.
"어? 나 버스 왔어!"
- 어디로 갈까. 맥주 마시자며.
"아, 맞아. 집에서 마실 거니까…, 음…."
- 너 내리는 정류장으로 갈게. 네가 탄 버스보다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어.
단호한 목소리에 살풋 웃음을 지으며 버스에 올라 카드 단말기에 지갑을 찍었다. 이제 고작 380원밖에 남지 않았다는 조그마한 알림을 확인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빈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직 녀석과의 전화통화는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 휴대폰을 고쳐잡곤 다시금 녀석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나 창가 쪽에 앉았다?"
- …….
"……."
- 칭찬해 달라고?
"… 아니, 그게 아니고…."
- 그래, 잘했다.
굳이 칭찬을 해달라는 의도로 말을 건넨 건 분명 아니었지만, 집으로 향한다는 기쁨에 젖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말이었다. 그런 내 말에, 녀석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칭찬의 멘트를 건네왔다. 낮은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창피함으로 인해 절로 붉어지기 시작하는 얼굴이 유리창에 비쳐왔다. 그런 내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짓곤 삐진 척 말을 내뱉었다.
"에라이, 끊어…."
- 뭘 끊어. 갑자기 왜 심통이야.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손가락으로 애꿎은 유리창을 문지르고 있을 때, 다시금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그렇게 삐지면 귀엽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 뭐라고?"
- 못 들었으면 끝이야.
"완전… 치사하네."
꽤나 단호한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도착했는데 나 안 보이면 전화해.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천천히 통화를 끊었다. 순식간에 끊긴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어색히 웃음을 지었다. 점점 까맣게 변하기 시작하는 하늘이 유난히 예쁘게 보였다.
*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버린 정류장. 당연하듯 김종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정류장을 누비다 휴대폰을 꺼내들어 녀석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익숙한 인영에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한 쪽을 빼낸 녀석이 이내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녀석의 손을 맞잡곤 집 근처에 위치한 편의점으로 가 여러 과자들과 빵들을 골랐다. 그리곤 가장 중요한 캔맥주 몇 개와 소주 두 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왜이리 많이 사.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아니야, 아니야. 남으면 나중에 먹지 뭐.'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있었던 건 아니지.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건…'
'에이, 아니라니까.'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을 해오던 김종인에게 세차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작게 내뱉어진 한숨엔 약간의 걱정감이 서려 있는 것도 같았다. 물론, 그 만큼의 술을 모두 먹을 자신은 죽어도 없었다. 그저 내 목적은 하나였다. 김종인의 취한 모습을… 아니, 김종인의 술버릇 알아내기. 간단히 캔맥주 하나로 시작하고 끝내려던 내 의도와는 달리, 갑작스레 피어난 욕심으로 인해 제법 판을 크게 벌일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겐 미안했지만, 절대 사실대로 말할 순 없는 비밀이었다.
그렇게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했고, 먼저 들어가라며 현관 문의 손잡이를 잡고있던 녀석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집 주인은 난데, 마치 녀석의 집에 온 것마냥 느껴져 기분이 새로웠다.
"… 너무 많이 산 것 같다. 이걸 어떻게 다 마셔. 너 분명 내일 죽어나."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술도 못 마시면서 무턱대고 이렇게 많이 사서 먹으면 안 되는 거 알아, 몰라."
"모르지롱."
"혼나, 진짜."
소파에 앉아 편의점 봉투 속에 담긴 술들과 과자들을 하나씩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김종인이 불평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런 녀석의 말에 제법 얄밉게 대답을 하자,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경고를 해온다. 그 모습이 무서워 황급히 입을 다물곤 천천히 녀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게 시선을 옮겨오던 녀석이 살며시 내 손목을 잡아 제 옆 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다. 잔뜩 좁혀진 미간과 까만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조금만 먹자."
"……."
"대답 안 하지."
"……."
"조금만 먹는 거야. 알았지."
"… 네에."
마지못해 작게 대답을 하곤 거실 바닥에 내려앉았다. 옷을 갈아입고 올까, 라는 생각이 조금씩 치밀었지만, 입을 바지라곤 김종인이 싫어하는 짧은 반바지밖에 없어 포기를 해야 했다.
"……."
"……."
안주로 무슨 과자를 뜯을지를 고민하며 테이블 위를 이리저리 훑고만 있는 내 뒷통수로 녀석의 짙은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고, 그저 소파에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녀석과 시선이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녀석이 기지개를 켜며 내 옆으로 내려와 털썩 앉았다.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슬쩍 웃으며 캔맥주의 뚜껑을 따 녀석에게 건넸고, 맥주 안주의 대명사인 새우깡을 뜯었다. 그리곤 아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컵 두 개를 가져왔다.
"여기엔 소주를 마셔야지."
"… 소주 꼭 마셔야 되냐."
"그럼, 그럼."
김종인의 한 마디에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녀석이 제 손에 들린 맥주캔을 내게 내밀어 보였다.
"건배."
녀석의 말에 덩달아 맥주캔을 집어들곤 짠- 하고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입구를 입에 가져다대며 한 모금 크게 들이키던 녀석이, 제 윗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로 훑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침을 꼴깍 삼키곤 덩달아 한 모금을 마셨다. 살짝 쓴 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지만, 제법 차디찬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작게 인상을 찡그리는 나를 바라보며 살풋 웃음을 짓던 녀석이 과자 하나를 집어 내 입 안에 쏘옥 넣어주었다.
"우리 단 둘이 술 마셔보는 건 진짜… 처음…"
어색하게 말을 내뱉곤 더욱 어색히 웃어보였다. 그런 날 보며 피식 웃어버리던 녀석이 슬쩍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그 작은 손길에 입술을 꾸욱 깨물곤 손을 뻗어 초록색 병을 집어들었다. 매번 느끼는 손길임에도 불구하고 매일이다시피 떨리고 설렜다.
"왜 벌써 소주병을 집어들어."
"맥주랑 소주랑 섞어 먹으면 맛있대."
"누가."
"오세훈이."
"대신 빨리 취하잖아. 몸에도 안 좋아."
뚜껑을 따려는 내 행동을 제지하며 제법 딱딱하게 말을 하던 김종인이 내 손에 들린 소주병을 빼앗아갔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소주병의 뚜껑을 열어 두 개의 종이컵에 적당량을 따르기 시작한다.
"딱 이만큼만 먹고 끝내자. 난 내일 공강이지만, 넌 아니잖아."
소주병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나를 바라보며 제법 단호히 건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그 안엔 약간의 압박감이 깃들어 있었다. 종이컵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슬쩍 녀석을 바라보았다.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단 둘이 앉아 술을 마시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작년 이맘때쯤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꽤나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새삼 신기해. 너랑 내가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술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는 거."
조곤조곤 말을 내뱉곤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의 몇 배나 되는 쓰디쓴 맛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면, 정말이지 목이 탈 것만 같았다.
"넌 몰랐겠지만, 나 고등학생 때 마음 고생 엄청 했어."
"……."
"근데 지금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이렇게 사소하게나마 매일 만나서 간단히 대화도 나누고, 서로 있었던 일을 공유도 하고…."
"……."
"네가 그랬지. 넌 남들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무심하고 무뚝뚝하다고."
"……."
"많이 어색하고 서툴 거라고."
"……."
"근데 전혀 아니야. 너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멋있어."
"……."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멋있는 남자친구라고 표현을 해주고 싶은데, 나한텐 그게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거야."
"……."
"너처럼 나도 처음이잖아. 그래서 어떻게 표현을 해줘야 할지, 어떤식으로 내 마음을 전해야 할지… 너무 막막할 때가 많아."
"……."
"근데, 그래서 더 좋아. 네가 내 처음이라 좋고, 너랑 이것저것 처음을 함께 한다는 게… 정말 행복해."
그냥 한 번쯤은 내 진심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저 마음속에 꽁꽁 숨겨둔 채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솔직한 마음을, 한 번쯤은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김종인의 모습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같아 다시금 종이컵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제법 길게 한 모금을 마신 뒤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내 모습에 녀석이 덩달아 투명한 액체에 입술을 적셨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옮겨놓았다. 원래 술을 마시면 남들과는 달리 반응이 바로바로 오는 나였던지라, 슬슬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도 같았다.
"근데… 가끔 막 불안해."
"뭐가."
"네가 떠나버리면 어쩌지… 하고."
"… 내가 왜 떠나."
"다들 그러잖아. 첫사랑은 이뤄지기 어렵다고…."
"……."
"종인이는 내 첫사랑인데,"
"……."
"내가 진짜 좋아하는데,"
"……."
"예상치 못한 순간에 권태라는 게 찾아올 수도 있는 거고…."
"……."
"모든 연인들은 먼 훗날 있을 이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잖아. 서로 사랑만 하기에도 바쁜 시간인데."
"……."
"물론 나도 그래. 그런데… 진짜 예쁘게 사귀던 연인들이 어느새 헤어져있고 그런 걸 보면, 막 마음이 이상해져."
"……."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사이가 되게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는 걸 보면, 기분이 되게 이상해."
"……."
"난 너랑 헤어지기 싫은데, 먼 훗날 우리도 그런 사이가 되어서 영영 멀어질까 봐… 솔직히 겁나."
슬슬 술 기운이 도는 것도 같았다. 얼마 안 마셨는데, 정말 얼마 안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취중진담'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했다. 술김에 고백을 하고, 술김에 할 말 못할 말을 전부 내뱉어 버리고…. 술은 참 좋은 게 못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은연중에 하던 나약한 생각을 이렇게 술김에 하나씩 내뱉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조금씩 아파오는 머리에,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
그런 내게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왜이리 불안한 생각을 해."
"……."
"나 어디 안 떠나."
"……."
"첫사랑은 이뤄지기 어렵다는 그런 말, 왜 믿어."
"……."
"그런 거 믿는 거 아니야."
"……."
"난 보란 듯이 너랑 연애하고, 보란 듯이 너랑 결혼도 할 거야."
"……."
"권태, 올 수도 있지."
"……."
"너랑 나라고 해서 그런 게 안 올 거란 확신은 없어."
"……."
"근데, 이겨내면 되는 거잖아."
"……."
"고작 그런 거 하나 못 이겨내고 헤어지기엔,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
"……."
"몇 년 동안 짝사랑도 해왔어."
"……."
"어렵게 이어진 만큼, 소중히 할 거야."
"……."
"나 어디 안 떠나. 걱정 안 해도 돼."
무덤덤한 목소리로 하나둘 꺼내놓는 진심을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그동안 괜한 걱정을 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불안한 마음을 잔잔히 달래주는 목소리에 코끝이 찡해지는 것도 같았다. 부드럽게 안심을 시켜주는 듯한 모습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 나도 어디 안 떠나. 나 네가 너무 좋아서…"
물기어린 눈동자로 김종인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건넸다. 술 기운 탓일까, 나와 지그시 눈을 마주하던 녀석의 얼굴이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입을 꾸욱 다물어야 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버린 얼굴에,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좋아해."
"……."
"많이."
김종인의 낮은 목소리가 거실 안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너무나도 당황해 시선을 요리조리 움직이기도 잠시, 곧이어 녀석이 내게 입술을 포개왔다.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 내 정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던 술 기운이 싸악 달아나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녀석을 바라보았고, 묵묵히 입을 맞춰오던 녀석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순간에 건네온 고백,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누는 키스.
"……."
내 입술을 머금은 녀석의 도톰한 입술에선 알싸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저 이 순간이 달달한 꿈과 같이 느껴졌다. 묵묵히 내 아랫입술만을 빨아들이며 작게 깨물던 녀석은, 이 와중에도 나를 아껴주듯 조심스러웠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살짝 열린 입술을 가르고 말랑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 느낌이 이질적이면서도 낯설어, 제법 서툴게 녀석을 받아들였다. 맞닿은 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타액으로 번진 입술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입술로, 혀로 전해져오는 낯선 감각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도 같았다.
좋아해, 많이.
김종인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마음속을, 귓가를 간지럽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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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버릇 알아보자 해놓고 자기가 더 취해버렸네요.. 또륵..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요ㅠㅠ 덥지 않으세요? 제 방은 왜이리 더운 거죠.. 에어컨 하나에 의지하며 자야겠어요.. 너무 더워요.. 덥지만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여름 감기라고 무시해선 안 돼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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