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은 한꺼번에 듣기를 추천해드립니다♡)
하루는 뜰에가서 놀다, 하루는 저자에 가서 놀다. 하루는 강가에서 놀다가. 어쩌다보니 사신은 무슨, 우리 둘은 동네 소꿉친구 마냥 즐기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혜선이가 손님 맞을 때는 밖에서 잠자코 기다리며 우물가랑 말싸움하다가, 최근에는 부엌간에 있는 귀신이랑도 말붙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사신들이 다들 이러는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나 나름대로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한 나흘 정도 지났을 무렵, 오늘도 혜선이와 저자에 가 이런저런 장신구들 구경을 하고 오는 길이였다. 모레에는 저 쪽에 새로 생길 장신구 가게에 가기로 약속까지 했다. 시간이 됨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자 혜선이 또한 가야한다며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이제 저도 익숙해진걸까, 내가. 뭐 물론 처음부터 어색해하는 기미가 없기는 했었다.
"이만 들어가봐야겠습니다. 기다리실거죠?"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역시나 한결같이 그 예쁜 미소로 화답하고 뒤돌아선 모습까지 보다 뒤뜰 정자에 털썩 앉았다. 가만히 앉아있다 주머니 속에서 조그만 책 하나를 꺼냈다. 사신계 법도를 축소하여 적어놓은 것인데, 가장 첫 장에 쓰여진 말에 한숨부터 지어졌다. '냉정함을 잃지 말 것.' 냉정함. 고개를 젓다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냉정함은 무슨. 나는 이미 틀려먹었거늘. 이마를 짚고는 정자 위로 올라오는 개미 한마리만 바라보았다. 제 몸보다 큰 듯한 먹이를 가지고 잘도 기어가네.
"어, 어!!"
"사, 살려주세요!! 살려, 살..!!"
그런 것도 잠시,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듣고 있으니, 우물가 쪽에서 나는 소리인듯 했다. 무슨 일인...
"여기 사람 빠져요!! 사람 빠진다고!"
사람 빠진 ... 우물. 우물가.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사고를 쳐."
한 치도 쉴 틈을 안주냐 무슨. 한숨을 훅 쉬고 다시 일어났다. 어차피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 우물가에 다가가 내려다보니, 물을 뜨려던 월매를 잡아채 끌어내리고 있는 우물가 처녀가 보였다. 아직 얘는 갈 때도 안되었건만. 잡아내리는 처자의 손을 붙잡았다. 내 손에 울부짖으며 놓으란다.
"이 손 놓거라. 너가 이러지 않아도 인간은 언젠가 죽어."
"언젠가 죽는 목숨, 일찍 죽는다고 별 다를 게 있어요?"
이미 분노에 가득 차 있기에 말로 그 화를 달래기는 역부족일듯 싶다. 어떡할까, 잠깐 생각하다 다른 잡귀들처럼 월매를 잡고 있는 손에 입김을 후, 불었다. 물론, 날려보낼 정도는 아니고 따가울 정도로만.
"아악!"
불자마자 따가운 것에 손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다시 월매는 우물 밖으로 머리를 빼내었다. 나를 향해 매섭게 쳐다보는 것에 주머니에서 준이가 귀신들 달래는데 좋다며 내게 몇개 넣어주었던 이름모를 과자를 던졌다. 받아먹자마자 금새 또 기분이 풀어진다. 단순한 것. 그러니 질투가 나 니 목숨도 단칼에 끊어버린게지?
"좋냐?"
"... 그래도 나리는 싫어요 지금."
"아직 갈 때가 아닌 자를 데려가면 너 또한 천상에서 두번 죽는거나 똑같아."
"그러라지요."
저저, 심술보.
"근데. 월매는 싫어하면서 혜선이는 왜 아무렇지 않아해? 둘이 친하던데."
"... 혜선이는 그냥 안타까워서."
그 어린 나이에 부모 다 잃고 들어와서 이 고생 저 고생 다 한걸 내가 알거든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아주 어릴 적 빚쟁이들에게 쫓기다 돌아가셨다 합니다. 저는 이 곳, 한양에 두고 말입니다.'
혜선의 과거를 떠올리니 또 안쓰러워짐에 우물도, 나도 숙연해졌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물은 그 말과 함께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그 낭랑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근데 나리. 나 이거 하나만 더 주면 안되나?"
그 말에 어이없이 쳐다보다 이마를 툭 밀쳤다. 아! 하며 신경질을 내는 것에 입김 부는 시늉을 하니 꺅 소리를 지르며 지 우물로 들어가버린다. 저저 망령도 불쌍히 여기는데. 나 참. ... 빨리 일하고 싶다 했던거 취소, 취소할래. 힘든거 같아, 좀 ... 많이.
"어이!"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익숙한 목소리에 들으니 여기는 무슨 일인지 준이가 보였다. 혈색 가득히 고운 한복을 입은 준이. 준이는 정 4품이기 때문에 지상계에서 인간의 몸으로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언제 그 쯤 되나. 부러운 눈길을 보내다 여기는 무슨 일이냐는 말에 내 등부터 토닥이기 시작한다. 뭐야 이건 괜히 기분 나쁘게.
"너 무슨 사고쳤냐?"
"무슨 사고."
"사황제 님께서 불러, 너."
"... 나를?"
나를 부른다는 말에 온몸의 촉각이 곤두세워지는 느낌이다. 뭐, 뭐 설마 내가 아까 속마음으로 지껄인거 다 들은건 아니지? 놀란 마음에 그대로 얼어붙으니 준이가 날 보며 깔깔거리고 웃기 시작한다.
"뭐야, 왜 웃어."
"야야, 뭘 그렇게 놀라냐? 누가 보면 내가 너 잡아가는 줄 알겠네."
"사황제님이 나 부른다며."
"어. 뭐 그건 맞는데. 별 거 아닌거 같애. 예정보다 일정이 앞당겨지거나, 느려지거나. 그 둘 중 하나겠지."
"... 어디 확률이 더 높을거 같은데 넌."
"... 뭐... 백이면 백, 앞당겨진거겠지. 대부분 불려서 가보면 앞당겨져서 오거든."
앞당겨진다. ... 앞당겨진다고.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눈 앞에 돌덩이를 그냥 뻥 차버리려다, 저기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에 관두었다. 짜증내는 것에 나를 유심히 보던 준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 왜 싫어해? 보통 일 빨리 끝나면 다들 좋아하던데."
"... ... 아 뭐. ... 아냐, 아무것도."
내 말에 별 다른 말 않고 얼른 올라가보라며 등 떠미는 것에, 알겠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가에서 내려와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준이가 날 다시 불러세웠다. 걱정된다는듯한 눈빛으로.
"... 지켜, 냉정함."
"... 응."
지켜야지. 냉정함.
사신
"혜선, 요즘 아주 얼굴에 꽃이 폈다?"
"그러게. 요 며칠동안 웃음기가 끊이질 않는다니까."
다른 기녀들의 말에 그저 수줍게 웃어보이는 혜선이다. 얼마 후 자신을 데리고 갈 사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혜선은 자꾸만 한빈에게 마음이 갔다. 가끔 둘이 있을 때면 사신인건지, 아니면 그저 시간 많아 기녀 한 명 놀리고 싶어하는 양반가 자제인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혜선은 둘 중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벌써 마음은 한빈이라는 그 자체에 기울고 있었으니까.
"아 맞다. 월매 걔, 우물에 빠질 뻔 했다며 방금?"
"그니까 그 말이 맞다니까. 우물가 귀신 얘기 말야!"
"우물가 귀신?"
처음 듣는 얘기에 혜선 또한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그래도 말해줄 참이었는지 그 중 한명이 술술 얘기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 전에, 홍주 언니 있잖아."
"아, 그... 스스로 목숨 끊었다던?"
"그 언니가 월매를 그렇게 싫어했대. 전에 자주 왔던 진환선비님 때문에."
"나도 몇 번 봤었어. 둘이 싸우는거."
진환. 워낙 점잖게 생겨서는 기방을 어찌나 들락날락 거리던지. 또 어느 집 자제길래 돈이 그렇게 많은지 올 때마다 기녀들에게 돈을 뿌렸었다지. 사람 얼굴 잘 기억하지 않는 혜선 조차 그를 기억함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듣네, 그 이름.
"진환 선비님은 월매를 더 예뻐하고, 홍주 언니는 진환 선비님을 너무 좋아하고. 엮이고 엮인거지. 언제는 월매 옷을 입고 홍주 언니가 진환 선비님을 맞았나봐. 술에 잔뜩 취해서 향만으로 월매인줄 알았던거지. 근데 다음 날에 월매가 그 사실을 진환 선비님한테 다 일러바친거야. 얄밉게도. 그 뒤로 진환 선비님은 홍주 언니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대. 전에는 살짝 관심이라도 가지더니."
"뭐 둘 다 똑같은데? 옷 입은 홍주나, 그걸 일러바친 월매나."
"거기서 끝나면 그만인데, 또 월매가 그런 애겠냐? 홍주 언니 앞에서 알짱알짱 댄거지. 진환 선비님 옆에 꼭 끼고서."
"그 뭐야, 그 때 진환 선비님이랑 같이 있을때 월매가 홍주한테 그랬잖아."
'어, 언니!'
'... 선비님 오셨어요.'
'...'
'언니 오늘은 제 옷 입었네요? 왜, 오늘도 내 옷입지 그랬어요. 그게 더 예쁠텐데.'
'내 향도 나고. 안그래요 언니?'
"얄미울 짓 했네."
그들의 얘기에 혜선은 어떤 맞장구나, 덧말 없이 장신구함만 만지며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원래의 혜선이였다. 누가 누구 험담을 하던, 무슨 얘기를 하던간에 잠자코 듣는 일. 그러다가도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에 차가운 눈빛으로 문을 응시했다. 약간의 그림자가 비춰지는 것이, 월매인듯 했다. 월매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이 다른 기녀들은 한참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혜선은 묵묵히 월매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었다. 월매의 손 끝이 떨리다, 주먹을 쥐고 만다. 그 모습을 보며 왠지 며칠 전 곧 죽음이 드리워졌다는 소식을 듣던 자기 모습같아보여 더욱 표정이 굳어지는 혜선이였다.
"도저히 못참다가, 우물가 옆 나무에 목매달았대. 그 뒤로 한이 쌓여서 우물가에서 월매 집어넣을 때만 기다린다 하더라고."
"그래서 오늘...!"
"너네 조심해야돼. 월매 향만 나도 죽는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얘기가 거의 끝나자,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기방 안으로 월매가 들어왔다. 애써 아무렇지 않으려는 그 표정이 안쓰러워만 보였다. 귀는 실컷 빨개져있는데. 혜선이 그 모습을 보다 자리에 일어나 월매에게 웃으며 부탁했다.
"월매야, 나 모레에 네 옷 좀 빌려주라. 모레에 약속이 있어서."
"... 혜, 혜선아."
"... ... 어?"
혜선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기녀들은 일시정지. 온통 그 말을 한 혜선과 당황하는 월매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혜선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빌려달라며 이제는 보채기까지 했다.
"응? 빌려줘. 너 옷 예쁜거 많잖아. 언젠가 한번은 빌려 입어보고 싶었었어."
당황하던 월매가 조심히 입을 떼었다.
"... 괜찮... 겠어?"
"뭐를?"
"... ... 여기서 얘기 다 들었잖아."
"난 괜찮아."
자기는 괜찮다며, 그럼 빌려주는걸로? 자기 혼자 약속 확인까지 다 해버린 혜선이 사뿐히 방을 나섰다. 혜선이 나간 방 안은 그저 놀람과 냉랭함이 맴돌 뿐이였다. 혜선이가 월매 옷을 빌려 입는대. 모레에는 혜선이 옆으로 가서도 안되겠네. 다시 또 웅성거림이 커지고 있었다.
"... 어차피 죽을 목숨이건만."
'... 저 좋은 곳으로 가는 거지요?'
"... ... 하."
큰 한숨만이 혜선을 감싸고만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지만, 평정을 유지하려 했는데 자꾸만 두려워지는 것이 못내 걸린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엄마 아빠 너무 보고싶어서 일찍 가는 것 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고작 열여덟. 흐르는 눈물을 누가 볼까 급히 훔쳐낸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들판의 막 돋아난 힘없는 싹보다 여려보였다.
"어디 보자..."
제발 늦춰졌기를. 아주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미뤄졌기를. 사황제의 입술이 한번 더 떼이기 전까지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생전엔 이런 기도도 많이 했었으려나. 생전 기억이 있어야 말이지. 얼마 안있어 황제의 입술이 느리게 떼어졌다. 제발. 제발.
"오늘이 나흘째.. 이틀 남았구나."
"... ... 지금 ... 이틀이라 하셨습니까."
"예정보다 많이 앞당겨졌구나."
"... ... 하, 하아."
온 몸의 힘이 쫙 다 빠지는 기분에 그대로 주저 앉고 말았다. 어떻게, 어떻게 석 달에서 한순간에 이틀이 될 수 있단 말인지. 주저앉은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사황제는 내 쪽으로 다가와앉아서는 내 어깨를 잡았다.
"... 안타까워 이러는 것이냐."
"... ..."
"사신계 법도에 가장 첫째가 무엇이더냐. 읊거라."
"... 냉정함을, ... 잃지말라하였습니다."
"그게 너의 역할이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망령이 가는 길을 보살피는 것. 알겠더냐."
"... ... ... 예, 폐하."
후들거리는 다리로 궁을 나와 하계로 내려가자마자 다시 보이는 '영주각' 에 머리가 아찔했다. 영원한 주인, 무엇을 말이더냐. 어떤 것에 영원한 주인이 있기는 했던건지. 초점이 풀린 눈은 아무 의욕도 생기지가 않았다.
"... 나, 나리?"
"... ..."
어딜 다녀오는건지 한 손에는 은방울꽃을 가득 쥐고 걸어오는 혜선이가 보였다. 노을빛에 비춰진 모습이 예쁘면서도 아련해보이는 것에 또 가슴 한 켠이 쑤셔온다.
"...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까 기다린다 하셨으면서."
"... ... 아, 위에 잠깐."
아 그렇구나 ... 하며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뜸들이는 것에 잠자코 바라보고 있으려니, 천천히 두 입술을 떼었다.
"... 저, 나리."
"... ..."
"이거, 받으세요."
어쩌다 받게 된 은방울꽃을 보고있는데, 수줍은듯 내게 이어 말했다.
"그 은방울꽃말이 순애에요."
"... 고민 많이 했는데, 그나마 가장 제 마음같아서요."
"... ... 나리. 저 일찍 죽던, 나중에 죽던간에 상관은 없는데요."
"지금 나리를 좋아하..."
"... 지켜, 냉정함."
"그게 너의 역할이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망령이 가는 길을 보살피는 것. 알겠더냐."
"... 그만."
"... ..."
내 말에 그대로 얼어붙은 혜선이 날 불안하다는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흔들려서는 안돼. 애써 감정없는 눈빛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상처줄거라는거 아는데. 안그래도 상처 많은 아이 또 상처주게 하고 싶진 않은데.
"... 나는 망령을 보살피기 위해 온 것이지, 인간과 연정을 쌓으려 온 것이 아니야."
"... ... 이만 들어가거라. 곧 해가 저물테니."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에 치마를 꼭 쥐고선 날 한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들어가버리는 혜선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불러 안고싶건만. 그럴 수 없다는 것에 또 한번 가슴이 미어진다.
"미안하구나. 그러지 못해서."
한빈의 손에 들렸던 은방울꽃이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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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52 입니다! 저번 화에서 여주가 아직 안나왔다는 사실에 독자님들 멘붕 오신 것 같아요...! (어떡하지) 지금 조선시대 배경은 과거, 나중에 나올 현재는 2015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늘도 '사신' 봐주신 모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암호닉 (암호닉 신청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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