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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린꽃잎 전체글ll조회 3834l 1

 

 

반갑습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후작가의 새 일원이 된 무진이라고 합니다.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이니만큼 지켜야할 선은 있겠지만, 제가 아직 부족하여 미흡한 점이 많을 테니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가솔들의 얼굴 하나, 하나 시선을 두며 말하는 무진의 목소리에 묻어난 온화한 분위기에, 모여선 시종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비록 대개가 후작 가에 속한 자들로,높은 신분의 사람을 모시는데 이력이 난 이들이었지만 주인인 현이 특별히 까다롭지 않고 모난 구석이 없는 탓에 새롭게 맞이할 안주인에 대해 걱정하던 와중이었다.

 

그럼 첫 날이니만큼 각자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들어볼까요? 물론 이제 제가 들어왔으니 새롭게 꾸려나가야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대로 가려고 해요. 후작 가에서 훌륭히 지켜온 전통이 있을 테니까요. 후작님께서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셨지만

 

장난스럽게 찡긋 한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다정한 분이세요. 덧붙여진 말에 시종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치 않게 저희 같은 아랫사람들에게도 격을 차리시는 분이니, 한평생을 살게 될 신부에게는 얼마나 친절하실까. 흠 잡을 곳 없는 분이다. 물론...최근 몇 년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시기도 했지만... 그들의 시선이 저만치 떨어져 제 홀로 있는 영재에게 박혔다.

더러운 놈.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할 그가 아니라, 영재는 씁쓸히 웃었다.

 

먼저 주방을 담당하시는 분?”

 

가늘고 높은 소리에 몇 몇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제 할 일에 대해 설명한 후, 후작님은 이런 음식을 좋아하신다, 간을 약하게 해서 먹는다, 디저트는 항상 뭐를 드시고...

집중하는 표정의 무진에게 흐뭇한 미소로 일러두었다. 물론 요리를 하는 건 저들이지만 새신부인 그녀인지라 안다는 거에 의미가 있으리라. 그런 그들의 마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통하여, 다들 나오자마자 자신들이 하는 일보다는 후작의 취향에 대해 초점을 둔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가운데서 영재는 새롭게 알아가는 사실들을 저도 모르는 새 머리에 입력하는 중이었다.

5. 그가 이 성에 머무른 기간이었다. 그러니 기실 시종들만큼은 몰라도 이런 기본적인 것쯤은 알았어야 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의 얼굴이 어둠에 잠식되어졌다. 영재는 현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무슨 종류의 티를 즐기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 다음 분은?”

 

어느새 적막이 감도는 분위기 위로 따끔한 시선이 제게 향한다. 내 차례인가. 영재는 철심을 박은 듯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움직였다.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저는....”

 

상냥한 미소, 당당히 저를 응시하는 얼굴에 그는 자꾸만 작아졌다.

 

저는...그러니까..”

 

떼어진 입술 사이로 마른 한숨이 깃들었다. 뭐라 말해야 할까, 당신 앞에서...

갈라진 혀 사이로 느껴지는 단 내가 쓰게 입 안을 맴돈다. 꼭 쥔 손에 배인 땀이 기분 나쁘게 스며들었다. 그들을 무겁게 가르는 침묵에도 무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문득 제게 돋아난 가시를 인지했다. 악의 없는 저 하얀 얼굴이, 그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변할 것인가. 당신 역시 내게 더럽다며 욕을 할 건가. 실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내가 악하기 때문일까.

 

꼬리처럼 무는 상념은 그들 사이를 끼어든 말에 끊어졌다.

 

저건 그겁니다. 노예(奴隸). 진님께서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악랄하게 뱉어진 단어가 낙인을 찍었다. 평온을 가장한 낯이 균열을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자 제 자리를 찾아가듯 가면이 덧씌워진다.

 

..저도 이야기만 들었는데..그렇군요. 그래도 해야 할 바에 대해선 말을 해야 할 텐데요. 이제는 제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니까요.”

 

고고히 울러 퍼지는 말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진한 아가씨를 보는 냥 남몰래 혀를 찼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나봐. 하긴, 어린 아가씨이니...

웅성거리는 말은 귓가에 닿지 못하고 스러질만큼 작았으나, 그녀도 눈치는 있는지라 이상한 분위기를 간파해냈다.

 

제가 아직 부족하여...무슨 소리들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니 일러주시지 않겠어요? 노예라 하나 후작 가에 복속 된 몸. 아니, 그렇기에 더욱 더 제가 그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순하게 처진 눈매가 분노를 억누르는 듯 굳어졌다. 첫 날부터 소란은 일으키고 싶지 않은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 것인지 화를 낼 법한 상황에도 인내가 깊다.

 

, 그것이...진님이 듣기에는 다소 경망한 말이라..”

저는 오늘 혼인을 치룬 어엿한 성인이며, 후작 가의 안주인입니다. 혹시..이런 제가 미덥지 못하나요?”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니고....저 노예가 말입니다. 일반 노예가 아니라 후작님의 잠자리 상대를 하는 성노예라...”

....”

 

흘끗 저를 보는 시선에, 그 눈에 어린 감정을 파악할 뜸도 없이 영재는 눈을 감았다. 제게 쏟아지는 그것이 연민이든 혐오든 그 무엇이더라도 결코 유쾌할 리는 없을 감정을, 굳이 마주쳐야 할까.

 

...러면...”

 

충격에 떨리는 목소리가 당차게 말한 종전과 확연히 달라, 사람들 사이로 안타까운 탄성이 흘렀다. 뭔가 말할 듯 벌린 입이 할 말을 잃은 냥 다물어진다. 입술을 꾸욱 다문 무진이 초조하게 손을 매만졌다.

 

무슨...그러면...뭘 시켜야...”

 

안절부절 못하는 손이 구겨진 드레스를 말아 올린다. 창백히 질린 낯이 조금은 볼 법하다고, 그런 생각이 들어 영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른 그 얼굴에 담긴 미소가 사라지고, 침착한 태도 위에 드러난 초조함과 불안함. 영재로 인해 뒤바뀐 그 모습에서 그는 죄책감을 누르고 자라난 가학적인 희열을 느꼈다. 너 정말, 최악이다. 스스로에게 환멸이 들었다.

 

그냥 냅두는 게 좋습니다. 따로 말할 것도 없다면 이쯤에서 끝내시죠. , 후작님의 잠자리 취향을 물어보실 게 아니라면...”

 

저 혼자 낄낄거리며 하는 말은 혼잣말인 듯 했으나 적막함을 타고 홀을 흔들었다. 영재는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즉각 알아차렸다.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까맣게 탄 피부라, 혼인식으로 부족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 급하게 동원한 타지의 사람이었다. 그의 입은 즉각적으로 주위 시종들에 의해 막아졌으나 그 말을 못 들었을 리 없는 무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됐습니다. 당신은 제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습니다. 외지 사람인 것 같은데 비용은 모두 지불할 테니 당장 나가주시죠. 그리고 다른 분들도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차갑게 떨어진 그 말에 남자는 입을 실룩거리더니 자리를 박차며 나갔고 남은 사람들 또한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을 그녀에게 비추다 마지못해 움직였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무진이 한숨을 쉰다. 행복해야 할 얼굴에 진 얼룩이 그려졌다. 그러나 동요는 짧았다. 귀족가의 아가씨답게 제 표정을 잘 갈무리한 그녀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영재의 앞에 섰다. 설마 내게 정말 현의 잠자리에 대해 묻는 건 아니겠지. 영재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가만히 마주보았다. 물어 본다 해도 답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현은 항상 제가 원하는 대로 거칠 것 없이 행동했고, 그는 그저 받아내는 데 급급했으니 그조차 아는 것이 전무하다. , 심지어 이런 것조차 모르나.

그 무지에 그저 기가 막힌 영재는 곧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는 건 아는 대로 잔혹한 일이지. 제 스스로 창녀와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니.

 

하지만 무진이 꺼낸 말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도 없음에도 남이 듣기 민망한 말이라도 하듯 바짝 붙은 뒤 속삭이는 말이 이어진다.

 

“...이제는 제가 있으니..조금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전 그렇게 생각해요. 설사..아니라 해도 일단은 밤에 이루어지는 일이니까요.”

 

그러겠지. 맑은 눈의 그녀를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신부가 곁에 있는데....만에 하나 현이 기이한 취향에 집착해 저를 계속 품고 싶다 한 들 공식적으로 아내를 맞이한 이상 이 전처럼 행동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 측면에서 보면 매일 같이 이루어지는 폭력 같은 정사에 지친 영재에겐 다행이다 할 법 했다. 다만 그 사실에 오롯이 가져야 할 감정이 안도가 아닌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이래서야 창녀와 동등하게 취급되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비스듬한 미소가 입에 걸린다.

 

그러니 전 당신에게도 일을 배정하겠어요. 어렵진 않은 일이겠지만...”

 

망설이며 떨어진 소리에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왜 이렇게 조심히 대하는지 모르겠다. 한낱 노예일 뿐인 자신에게, 무서울 만치 착하지 않나. 묵묵히 듣는 그에게로 단어 하나가 찌를 듯이 귀를 파고 들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 , 저 청소를...부탁한다고 했어요.”

어디를.....”

 

떨리는 음성을, 부정을 바라는 눈빛을 눈치 채지 못하고 상냥한 음성이 뒤따랐다.

 

별탑이요.”

 

영재는 공포로 잘게 떨리는 몸을, 최초로 뚜렷이 발하는 제 동요 어린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하얗고 섬세한 손을 들은 그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곳에 머무른다고 들었는데 성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으니 효율 상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나직이 떨어진 음색에 깃든 악의 없는 친절에 그는 입술을 짓이겼다.

 

그래도 별탑은...그건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검은 돌담 사이에 껴 있는 시퍼런 이끼, 지저분한 잡초가 엉킨 대지 위에 우뚝 솟은 탑. 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나날이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영재는 지난 밤 바뀐 보금자리에 몸을 뉘면서도 어딘지 모를 섬뜩한 느낌에 편히 자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름값만큼 가까이 보이는 별들이 그를 숨 막히게 만들기에, 그래서...

 

비명. 너와 마주치던 그 순간

가녀린 그 손, 버둥대던 몸짓이 애달프게 허공을 휘젓는다.

 

시선. 간절한 바람을 타고 미처 닿지 못한 그 때에,

너는 내게 무언가 말하려 했었다.

 

“......!”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아요?”

 

걱정스럽게 제 안색을 살핀 그녀가 손수건을 건넨다. 떨리는 손길로 닦은 그가 숨을 진정시키곤 손수건을 다시 건넸다. , 빨아서 줘야 되나. 제 표정에 상냥하게 웃는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작게 미소 지은 무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후작님이 그 곳에 가실지도 모르니까...아무래도 걱정 돼서요. 성으로 부를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제 남편이 잘지도 모르는 공간이 청결하길 바란다는 건가. 설사 그게 노예와 질펀한 관계가 벌어지는 현장이라도? 영재는 그 지나칠 정도의 선함에 기가 질렸다.

그리고...그에 수긍하는 자신 또한, 기가 막혔다.

 

하아. 고통이 숨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의아한 그녀의 시선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청소...해야죠.”

 

오로지 그의 처지만 생각하는 그녀와 달리...결벽증이 있는 그라면 안 찾아올지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구역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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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후는 차차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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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우아ㅜㅠㅜㅜㅠㅠ신부가 착하긴 착하네요 ㅠ
10년 전
흩날린꽃잎
그렇죠ㅠㅠㅠ하나하나 남겨주신 댓글 감사합니다ㅠㅠ
10년 전
독자2
신부 너무 착하다..영재 불쌍해서 어떡해요ㅠㅠㅠㅠ
10년 전
흩날린꽃잎
안타깝죠ㅠㅠ...굴리면서 이런말하면 미안하지만...또르르..댓글감사합니다ㅠㅠ
10년 전
독자3
신부가..본성을 숨기고 있을것 같은 느낌..은 그냥 제느낌일뿐이겠죠ㅋ대현이가 저렇게 집착하고 안놔주는건 이유가 있는거겠죠 담편 기다리기 현기증나요ㅋㅋㅋㅋ
10년 전
흩날린꽃잎
무진은 보통 사람이 보기엔 좀 이해가 힘든 면이 있죠. 영재가 당연한거ㅠㅠ 내용은 아직 초반이니 서서히 윤곽이 드러날거에요 ㅎ.ㅎ 지켜봐주세요! 다음편은 내일 업뎃됩니다:D
10년 전
독자4
헐..재밌네요..다음편을기대합니다
10년 전
흩날린꽃잎
늦었네요ㅠㅠ지금 올릴게요. 댓글감사합니다.
10년 전
독자5
무진이 이상하게 친절한..큥 영재가 잘버틸수 있을까요ㅜ
10년 전
흩날린꽃잎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지만...꽃조차 피울지..지금으로선 참 힘들죠ㅠㅠ댓글감사합니다.
10년 전
독자6
갈수록 뒤가 궁금해지는 글이네요 요즘들어 본 글 중에서 제일 잘 써진 글 같아요
10년 전
흩날린꽃잎
어이쿠ㅠㅠㅠ과분한 칭찬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텐데요ㅠㅠㅠㅠ댓글도 정말 감사합니다!
10년 전
독자7
신부가 착해서 다행인건지ㅠㅠㅠㅠ영재 너무 불쌍해요
10년 전
흩날린꽃잎
그렇죠ㅠㅠ아무리 그래도 영재가 제일 불쌍하죠ㅠㅠ
10년 전
독자8
흐아 진짜ㅠㅠㅠ 이걸 어떻게 표현하죠?퓨ㅠㅠㅠ 속에서 막 휘몰아치는데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ㅠㅠ 별탑은 그저 높아서 멀리한 것이 아니었던가요?ㅠㅠ 그리고 신부가 착하면 착할수록 영재만 비참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ㅠㅠㅠ
10년 전
흩날린꽃잎
영재가 느끼는 걸 정말 잘 캐치해 주셨네요! 신부가 친절할 수록, 착하게 대할수록 영재는 스스로가 비참해지죠ㅠㅠ 사실 저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는데..스스로가 참 못되게 느껴지면서 차라리 상대방이 욕했으면, 싶더라구요. 참 끔찍한 감정입니다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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