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빠져나간 듯 나도 기억하지 못한 상태로 방 안에 돌아온 나는 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엿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소름끼치는 내용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못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말을 들어버린 나는 차마 그에게 사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나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침대 위에 올라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주변 시야가 모두 차단되자 머리가 더 아파왔다. 나는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지난 날의 장면들이 무작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가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의 전정국, 모닥불 앞에 동그랗게 앉아 밤 늦게까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린 얼굴, 약간 짜증이 난 듯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내미는 모습, 궁에 도착했을 때의 당당하게 서 있던 뒷모습. 내가 떠올리는 장면들 속에서 모든 전정국들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미소짓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나 사 실 너 에 게 숨 긴 게 있 어. 난 너 의 적 이 야.
그 말을 중얼거리자 나를 향해 웃어보이던 전정국의 얼굴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예리한 칼을 꺼내 내 목에 들이댔다.
"헉....!"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던 전정국은 내가 눈을 뜸과 동시에 사라지고 없었다. 환상이었다는 걸 알지만, 진짜를 겪었던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생각만 해도 다시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해 나는 양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방금 전의 일로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위험천만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감히 겁도 없이 오래 속이며 그의 곁에서 웃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게다가, 털어놓으면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니.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애초부터,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그를 좋아하지만 계속 같이 있는다면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볼썽사납게 잔뜩 구겨진 이불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의 시간이 모두 꿈이었고,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
딸각. 조용히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으나 나는 이불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나? 중얼거리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조금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내 앞까지 다가온 전정국은 잠시 서성이는 듯 하더니 머리 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천천히 걷어냈다.
"....정말 자네."
낮게 읊조리는 내용에, 나는 눈을 천천히 떴다. 고요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던 전정국은 눈을 뜬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묻어나왔다.
"내가 깨웠어요?"
"아니요, 안 자고 있었어요."
조용히 대답하는 내 말에 그는 안심이 되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우며 내 옆에 걸터앉았다. 다행이다, 잘 자고 있었는데 내가 깨워버린 줄 알았죠. 전정국은 손끝으로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더니 어두운 내 얼굴을 보고선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축 쳐져 있어요.
"어디 아파요?"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허리를 숙여 이마와 이마를 맞대어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떨어졌다. 큰 손으로 내 이마를 다시 짚어본 전정국은 영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열은 없는데."
"안 아파요. 그냥, 누워있었어요."
심심해서 누워있었던 것 뿐이에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 말을 듣고서 그는 잠깐 웃어보였다. 그렇게 누워있으면 재밌어요? 더 심심할 거 같은데. 볼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치는 행동에도 나는 딱히 반응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지라 그저 가만히 있었다. 평소와 다른 내 반응에 그는 멋쩍었던 건지 손을 거두어갔다.
"보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반응이 차갑네요."
".........."
"귀찮다고 일어나지도 않고."
나는 눈동자를 굴려 전정국을 올려다보았다. 귀찮아서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정국은 내가 몸을 일으키자 또 말은 잘 듣는다며 놀려대고 있었다.
저렇게 지금 내 앞에서는 웃고 있는 전정국과, 나라를 싹 다 밀어버리겠다는 전정국은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를 잠시 보고 있다가 나는 시선을 내렸다.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 숨기는 거 있어요?"
"......네?"
"아니면 왜 이렇게 나를 못 봐요."
순간 들려온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든 나는 티 없이 맑은 검은 눈동자를 보고서는 속으로 신음을 뱉었다. 내가 숨기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는 줄 알았으나, 저 눈동자는 내가 숨기고 있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눈이었다.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었다. 나는 그저 옅게 미소를 짓다가, 내 입술을 그의 입술 위에 가만히 포갰다.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은 감아버린 채였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그는 놀란 듯 가만히 있었으나, 곧 내 뒷목을 끌어안은 채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서로의 숨결과 추억을 공유하는 우리는, 한 쪽은 모든 걸 드러내보이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진심을 숨기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입맞춤은 그가 먼저 입술을 떼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여운을 즐기고 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전보다 진해져 있었다. 내 목덜미를 쓸고 지나간 전정국은 입을 열었다.
"...말할 게 있어요."
".............."
"연화궁의 주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진지한 말에 나는 전정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답이 없는 날 보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번 전투에서만 이기면, 곧 전쟁은 끝나요."
눈 앞으로 황폐해져버린 나의 나라가 떠올랐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그 비극을 한가운데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 전정국은 손을 뻗어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잔인한 말과는 달리 더없이 따뜻한 그의 손.
"그럼 나는 황위에 오르게 되겠죠. 황제가 되면, 터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권세 있는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앉혀야 할 거에요."
"..............."
"하지만 그건 단지 황위를 위해서만 하는 일이에요, 나에게는 은인만 있으면 돼요. 내가 마음을 줄 상대는 너뿐이니까."
".............."
"비록 황후의 자리에는 올려줄 수 없지만, 연화궁의 주인이 되어 나의 곁에 있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내 손을 들어올려, 네 번째 손가락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방금 보여주었던 행동으로, 전정국이 내게 한 말이 곧 청혼과도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은 나를, 권세 있는 여식들을 뒤로 하고 많은 반대들까지 싸그리 무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건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이 나라 황후의 자리는 나에게 줄 수 없지만, 자신이 마음을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후궁이 되어서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해줄 수 있느냐를 묻고 있었다.
- 그럴 자신이 없으면, 거절하세요.
왜 이 때 김석진이 말한 게 떠오르는 걸까. 그는 이걸 예상하고 말했던 경고했던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 귀신같은 감각으로 전정국이 나를 궁에 들이기로 결정했단 걸 알아차리고 내게 왔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전정국을 쳐다보았다. 그가 내게 연화궁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말했을 때부터, 더 확연히 정신이 들어버렸다. 그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는 날 지켜보던 전정국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대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천천히 대답해도 좋아요."
그렇게 말한 후 전정국은 몸을 기울여 내게 가까이 해 왔다. 검은 머리칼이 약하게 흔들리며 내 시야 밑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다 입을 열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말하고 있는 나도 소름끼칠 정도로 덤덤했다.
".....곧 있을 전투에, 직접 나가신다는 건가요?"
"네. 사흘 뒤에 떠날 겁니다. 내가 돌아오면 그 때 대답을 줘도 좋고."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살내음을 맡고 있던 그의 자세 때문에, 대답해줄 때마다 낮게 울리는 목울대가 그대로 느껴졌다. 전정국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내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벽에다 시선을 고정하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몸이 상하진 않으실 지 걱정이 돼요. 다치시거나, 저번처럼 지반이 무너지거나 하면..."
"내 실력 알잖아요. 그리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실력이 출중하셔도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건 전략도 큰 몫을 하니까요... 혹시 적 측이 허점을 파들어서 네가 다치면 어떻게 해.."
"그런 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번 전투를 지휘하는 적 측 중에 한 명이, 제 신하니까요."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나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첩자를 보냈었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내가 있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 뒤로? 내 머릿속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말투는 더없이 평온했다. 사흘 뒤에 일어날 전투에 사용할 전략은, 제 신하가 제안한 것입니다. 적들은 자신들이 이길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걸 모르고 있죠.
"미리 손발을 맞춰놨습니다. 이기는 건 정해져 있고, 난 다치지 않을 겁니다."
"............."
"그러니 은인은 날 기다리면서 대답을 정하기만 하면 돼요."
전정국이 몸을 뗀 체 날 바라보았다. 맑은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내 말이 혼란스러울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어차피 나도 이제 준비하느라 바쁠 테니 찾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많이 생각해보고, 내가 돌아오면 그 때 대답을 해줘요.
"은인을 믿어요."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거라고...
그렇게 중얼거린 전정국은 내 눈, 코, 입에 차례대로 짧게 입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자요. 전정국이 방을 나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편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
바닥에 긴 치맛자락이 끌렸다. 나는 시녀를 앞세운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걸음이 멈추는 곳에는 전정국이 있겠지. 날 어느 방 앞에까지 데려다 준 시녀는 다 왔다고 말하며 허리를 굽혔다.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도 전정국은 무엇에 집중한 듯 날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나는 시녀에게 고갯짓을 했다. 문이 닫히고 나서, 나는 목소리를 냈다. 바쁘신가 봅니다.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줄 수 있으신가요."
그제서야 고개를 든 전정국은 날 보고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짓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 나는, 전정국의 앞에 가까워져서야 발을 멈췄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궁금증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할 말이 뭔가요.
"어제,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거, 그 질문이요."
"네."
"오래 기다리실 필요 없어요."
나는 전정국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보잘것 없는 저에게,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전정국에게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고개가 들려지고, 내게 다가온 전정국이 짧게 키스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가득 묻어나와 있었다. 전정국이 내게서 듣고 싶어하던 말은 이뿐이었겠지만, 나는 아직 말할 게 더 남아있었다. 굽히지 않고 당당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해야 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다만, 부탁드릴게 하나 있습니다. 전정국은 부탁이 있다는 말에도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부탁? 그야 당연히 들어줄 수 있죠.
"뭡니까."
"저를, 전쟁터에 같이 데려가 주세요."
뜬금없는 말에 전정국의 눈썹이 확 들어올려졌다. 조금 전에 내보이고 있던 간질거리는 감정들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낭패감과 당황, 그리고 약간의 화남이 들어가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빛에서부터 거절하겠다는 답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았다. 고개를 꼿꼿이 든 채 내 의견을 말했다.
"저도 전투에 참여시켜달란 말은 물론,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후방에 위치해 있을게요. 그러면 괜찮잖아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별도의 호위는 없어도 돼요. 어차피 안전할 테니까요."
"내가 왜 은인을 데려가야 하는데요, 죽음이 나뒹구는 땅에. 전투에 참가했던 건 과거일 뿐, 더 이상은 데려가지 않습니다."
전정국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차피 이 말을 하려고 생각했을 때부터 그가 완강하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내가 여자인 걸 알아차린 이후부터는 전쟁터에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꼭 같이 나가야 했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무슨 일을 써서라도 그가 나를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게 만들어야 했다.
"전하가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승리의 소식도 제일 먼저 듣고 싶고요."
"안 됩니다."
"어차피 이기고 돌아오실 걸 알지만, 혼자서 혹여나 하며 마음 졸이면서 기다리는 건 싫어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인데, 모르는 곳에 널 혼자 보내기 싫다고!"
나는 강하게 소리쳤다. 전정국은 나의 이런 반응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말아쥔 채 말을 토해냈다. 왜, 나는 불안하게 여기서 혼자 있어야만 하는 건데.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승리가 정해져 있는 거라면, 너는 내게 좋은 소식만을 가져다 줄 거잖아. 나도, 나도....
말은 명확하게 끝맺지 못했다. 하면 할수록 내가 말하고 있는 게 진심인지, 거짓인지 나 자신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려서. 내 목소리가 잠시 멈췄지만 전정국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 방에서, 허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름의 도박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
허락해줄까, 허락해주지 않을까. 방에 가만히 앉은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전정국은 과연 나를 같이 데리고 가 줄까. 열리지 않는 방문만을 계속 쳐다보았다. 승률없는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도 걸어보았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0에 가까운 숫자를 믿었다. 그를 이성적인 말로 설득시키는 것보다는 감성적인 마음에 호소하는 게 그나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제발, 제발.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였다. 날 여기서 내보내 줘. 허락해 줘.
마침내,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열렸다.
"............."
앉아있는 날 바라본 전정국의 얼굴은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방문을 닫고 그는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내려보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곤 입술을 떼었다.
"호위와 함께 후방에만 머물러있겠다는 조건으로,"
"...아."
"무슨 일이 있어도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약속할게. 약속한다는 내 말에도 전정국은 안심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난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내 손에 순순히 딸려오는 그에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허락해줘서 고맙다고, 많이 좋아한다는 내 마음은 말해주려고. 또 그 동시에 내가 숨기고 있는 마음이 들키지 않기를 빌며.
미안해.
가볍게 맞닿아오는 내 입술 위에 멈춰 있던 전정국은 고개를 옆으로 비틀며 내 입안에 있던 숨을 앗아갔다. 불안함, 갈증, 담겨있는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 전정국이 날 뒤로 밀어눕혔다. 풀썩. 침대가 부드럽게 출렁였다. 반쯤 누워있는 내 팔 양 옆으로는 그의 단단한 두 팔이 자리잡았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갈증이 가득 차 있었다. 전정국은 허리를 숙여 내 귓가를 살짝 깨물곤, 목과 그 주변에다 제 얼굴을 파묻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는 그의 행동으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전정국은 미약한 신음을 목 속으로 삼킬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끌어안은 채, 낮아진 전정국의 목소리를 들었다.
"승리하고 돌아온 그날 밤, 은인을 안을 거에요."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게 온전히 느껴지고 있어서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 때를 위해서, 참을래요. 전정국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와 닿아있던 몸을 뗐다. 완전히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로 그는 여전히 날 감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눈을 하고 어지러이 흩어져 있을 내 머리카락들을 손 끝에서 가지고 놀다가 살며시 내려놓았다.
"난 먼저 선발대로 출발할 테니, 푹 쉰 후 후발대로 따라와요."
"네."
순순히 대답하자, 전정국은 웃었다. 예쁘네. 그는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아넣었다.
나에게 있어서 축복은 그날 널 만난 일이야.
-
선발대로 나보다 앞서 떠난 전정국을 뒤로 하고,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나는 새벽에 눈을 떴다. 궁 안에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는 공중에서 흔들리는 몇 개의 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정확한 숫자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오십명쯤 되어 보였을까. 맨 앞에 서 있던 말을 익숙하게 잡아 올라탄 나는 출발 의사를 묻는 박지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행동을 보고선 바로 짧게 명령을 내린 후, 점차 속도를 내어 궁을 빠져나가는 박지민의 뒤를 따라 성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전하께서 용케도 허락해주셨네요."
어느 정도 선을 지나 말의 속도를 늦춘 내 옆으로 다가온 박지민이 말을 걸었다. 원래라면 궁에 남아있었어야 할 박지민은 난데없이 후방에서 나를 호위하라는 전정국의 명 때문에 계획에는 없던 일정이 생겨 짜증을 낼 법도 했으나,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니면 체념한 건지 별다른 짜증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불편할 정도로 괜찮냐고 계속 물어볼 정도였으니.
나는 박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은 헤어지면 약간 아쉬울 법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오늘만은 나를 호위하라는 명 때문에 실전에 나온 것일 뿐, 평소에는 궁을 지키고 있는다고 하니 앞으로 만약에라도 그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 나는 웃어보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 그에게 물었다.
"저 때문에 여기까지 나오셨는데 화 안 내세요?"
"제가요?"
내 말에 박지민은 손 끝으로 자신을 짚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손사래를 친다. 제가 왜 화를 내요, 저는 괜찮아요. 다만, 여주님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죠. 전하께서 제게 신신당부 하셨다니까요? 혹시 모르니까 긴장의 끈 놓지 말라고. 아무리 뒤에 떨어져 있지만 만일의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랬겠지. 아마도 박지민이 최대의 걸림돌이 될 듯 했다. 이 사람의 눈을 피해서 몰래 나갈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내 옆에서 떨어져있을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거의 없었기에, 강제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나는 박지민이 타고 있는 말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 거의 다 왔네요."
앞을 확인하던 박지민의 목소리가 밝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산과 그 앞에 경사진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전하는 바쁘시답니다."
"그렇겠죠."
앞으로 예정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나는 유독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구름이 많아서야 해가 제대로 뜰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의 시선이 하늘로 향해 있다는 것을 보고, 같이 하늘을 쳐다본 박지민이 말했다.
"구름이 많네요."
"그러게요,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그러면 유리하죠. 작전이 쉽게 먹힐 테니까요."
전략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전정국이 알려주지 않았던 채라 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비만 안 오면 완벽할 텐데."
저렇게 흐려서야 만일의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겠어요.
그 말을 듣자 내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던 전정국을 처음 봤을때가 떠올랐다. 비가 세차게 퍼붓는 날, 적을 베어넘기던 그의 모습이. 오늘이 마지막인데. 첫 만남과 헤어지는 날이 비슷한 게 웃기면서도 슬펐다. 내가 힘없이 웃자, 박지민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렇게 계속 있지 말고, 이제 들어가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흔들리는 촛불에 내가 들고 있던 자그마한 단도가 빛을 냈다. 한동안 단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나는 그것을 품 안으로 감추어 넣었다. 그러다가 천이 펄럭이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전정국이었다. 옷차림까지 모두 전쟁에 나갈 준비를 끝마친 그는 나를 보자 성큼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를 맞아주었다.
"바쁜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가기 전에 보고 싶어서."
멋쩍게 웃어보인 전정국은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전에는 이런 일 없었는데, 머리와는 달리 발이 맘대로 움직이더라고요. 전정국이 변명하는 어투로 말했다. 나는 가볍게 웃어버렸다. 다리에 감사해야겠어요, 덕분에 와주셨으니까요.
"언제 나가요?"
내 물음에 전정국이 대답했다. 곧이에요. 정말 조금 있으면 시작되니까.
"시간이 별로 없네요.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회의가 길어져서."
"괜찮아요. 그래도 얼굴 봤잖아요."
그를 다독였지만, 사실 그 말은 나 자신에게 한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마지막이더라도 얼굴을 봤으니 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어주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환하게. 전정국은 나를 확 끌어안았다. 두근 두근. 일정하게 뛰는 그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내 귀에 대고 그는 어떤 말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리고 몸을 떼고서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승리해서 돌아올게요."
"..네."
아쉬운 듯 하면서도 칼같이 몸을 돌리는 전정국을 쫓아 나는 막사를 나갔다. 최대한 잘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모습까지는 당연히 볼 수 없었다. 완벽히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내가 손이 떨릴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펴자, 손톱자국이 깊게 나버려 있었다. 패였던 네 개의 자국은 곧 사라졌다. 전정국과 있던 시간들처럼.
독자님들 감사해요 |
제가 답글 다는 시간을 좀 많이 쓰는 편이라... 막 길게 쓰는 편이 아닌데도 시간이 좀 걸리드라구요..ㅜ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터라 스토리를 빨리 이끌어나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마음대로 판단해보았습니다..사실은...스포 문제도 있어서(눈물줄줄) 답글을 못달아드렸어요ㅠㅠ기다렸을 분들께는 죄송합니다ㅜㅜ저 달린 댓글들 정말루 감사하게 읽고 있어요ㅠㅠㅠㅠㅠ으윽...어떡하지...사랑의 총알 빵야빵야 이렇게 하면 되나욧..(쭈구리
다음화로 1부 완결입니다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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