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닫히는 현관 문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바람의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윤설은 문지방에 서 있는 자신 곁에서 들릴 듯 말 듯 이어지는 상혁의 숨소리와
이상하리만큼 처연하고 이상하리만큼 간절하게만 들리는, 착각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만 들리는 원식의 목소리를 들으며 괜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움직일 듯 말 듯 쭈뼛거리는 그녀의 발끝을 보며 원식은 차가운 한숨을 억지로 눌렀고
괜한 긴장감과 이상한 기류에 적응 못하는 그녀의 위태로움을 보며,
아니, 혹시 그녀가 알아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상혁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물이 차오르듯 원식은 숨이 막혔다.
괘종시계의 시침 소리가 점점 크게만 들려오는 것 같았고,
선뜻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 그녀를 보며 그의 초조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미간 사이가 좁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초조하고 끔찍한 얼굴로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상혁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니.... 내심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왜..."
무엇이 문제냐는 듯 문득 그녀가 말했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정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윤설은 그저 입술을 삐죽대다 이내 손을 뻗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고
아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고
후에서야 그녀는 이야기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충분한 파도이기를 바랐다고.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증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고.
자신의 그 작은 뒤척거림이
책을 읽을 때 숨을 들이마시던 그 작은 쉼표가
애써 덤덤하게 말하던 그 모든 언어가
사실을 쪼개고 쪼개 건네고 싶던
자신의 마음이었음을
항상 말해주고 싶었는데
알게 해주고
싶었는데.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던 상혁은 그녀의 움직임에
애써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며 원식을 바라봤다.
원식의 그 검은 눈동자를,
차오르듯 채워지고 있는 그 눈동자를,
그 더럽게도 질투 나고 더럽게도 두려웠던 눈동자를 응시하며
상혁은 아무도 모를 생각에 빠졌다.
정당화를 하기에는 이미 너무 정당한 생각이었고
질책을 받기에는 그 어느 하나 탓할 것 없는 생각이었다.
아주 옳은 생각, 당연히 해야 하는 생각.
그 누가 되었든 해야만 하는 일.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그 후에 들리는 상혁의 목소리에 윤설은 고개를 돌렸다.
"가보겠습니다"
가보겠다는 그 한 마디가 이상하게도 영원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아
괜히 마음 한구석이 시려오는 것을 도무지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아무도 잡지 않은 그 손을 내리는 윤설을 보며
원식은 이례 없이 느껴지는 만족감에 문득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제 손을 뻗어 반쯤 내려간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고 아귀힘은 언제나 그렇듯 이례 없이 강했음에도
마냥 부드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다정함처럼.
그 다정함처럼.
원식은 그녀의 그 눈을, 검은 그 눈을 지긋이 바라보다 이내 상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상혁은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더 볼 일 없다는 듯한 걸음걸이로 뒤돌아 갔다.
괜히 원식의 눈이 득의양양하다 느껴져 기분이 나빴다.
윤설은 상혁이 남기고 간 그 향이 왠지 평소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더 차가운 것 같다고.
그게 마음에 걸린다고.
한참의 정적이 이어졌다.
아- 이상한 일이었다.
뭐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눈을 읽게 된다는 건,
그에게는 이상하고 또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눈은 말을 하고 있구나'
'나는 대답을 해야지'
"어딜 봐"
하고 원식은 말했다.
윤설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실루엣을 바라봤고,
문득 밀려오는 현기증과 갑자기 뚜렷해지는 그의 이목구비에 놀라 조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 그러니까 한순간 또렷하게 보인 그의 얼굴에,
이번에는 자신의 상상 속 그와 너무도 닮은 그 얼굴에 놀라 그녀는 숨을 들이 마셨다.
평생 멀어가기만 할 것 같은 그 눈동자가 그를 비춰냈기에,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그의 얼굴을 본 것만 같았기에 그녀의 가슴이 요동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구운몽처럼 생생하다가도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아 윤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온 어느 때보다도 짙은 블랙아웃에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 리 없는 원식은 잠깐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얼굴을 굳히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아... 조금 어지러워서요"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원식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만졌다.
그날 밤처럼 빛이 있음에도 그녀가 보지 못하게 될까 그는 조금 두려웠다.
전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던 일들이 문득 무서워진다는 건,
약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까.
아직 한 번도 그녀에게 하지 않은 그 한 마디 때문이었을까?
"차가워"
윤설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다 문득 쉽게 보여주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그 눈꼬리를 꿈에서 본 것만 같아서
원식은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햇살이 내리던 거실 소파에 맨발로 앉아
마주 앉아 담뱃대를 손에 쥔 자신을 보며
수줍은 듯 웃어 보이던 꿈속의 그녀...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없다 믿었던 건
불길에 짓물러가던 자신의 손가락이, 그 화상이,
전혀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원식은 생각했었다.
아프지 않았었으니까.
그때는 전혀 아프지 않았었으니까.
그녀의 고운 입술.
그 나긋한 목소리.
취해버릴 것만 같은
그 눈길.
"좋다"
윤설이 말했다.
"당신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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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 모든 행동들이 유혹이라는 걸 알면서 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면서 자연스레 흘려보내는 건지
원식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 수 없었듯,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또 왜 그가 이토록 초조해하는 것 같은지.
결국 한 가지만 확실할 뿐이었다.
서로에게 숨 막혀하고
또 서로에게 초조해하다 보면
끝은 언제나 꽤나 짙고 강렬하기 마련이었다.
이 둘도 그랬다.
그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는 것은 꽤나 짙고 강렬한 순간들뿐이었다.
예를 들어.
짙은 입맞춤.
강렬한 눈빛.
코를 감싸는 그의 향기와,
얼굴을 만지는 그녀의 손.
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모든 유혹.
그 이끌림.
숨이 가쁘게 쉬어지고
입술이 아프게 부딪히다 보면
결국 서로를 품안에 끌어안고
다신 오지 않을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원식은 그녀의 꼭 감인 눈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좋았고,
멀어간다 하여도 자신만큼은, 자신의 모습만큼은 또렷이 비추려 애를 쓰는
그 솔직하고 또 담담한 그녀의 눈동자가 좋았다.
... 말하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너에게 이 모든 말들을 하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결국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사랑한다 말해버리면 다 끝날 것 만 같았다.
사랑한다 말하는 순간 너도 사라질 것 같았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어머니가 그랬듯,
그 빛이 그랬듯,
모든 소음들이 그랬듯.
뒤집어지는 모래성처럼,
처음의 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까 봐.
또 혼자 남겨질까 봐.
... 어리석은 남자.
원식은 손을 뻗어 윤설을 끌어안았고,
윤설은 가만히 기대서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그의 마음이 이 심장소리만큼 정직하다면,
그렇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말해줘-'
하고 윤설은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요"
하고 먼저 말하는 것은 언제나 그녀였다.
그 말끝마다 걸려오는 커다란 감정에 원식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매번 커다란 무언가를 삼키듯 목이 갑갑했고,
아마 가슴속에 존재하는 검은 뱀의 똬리는
점점 더 커다랗게 변해가고만 있었다.
아마 영원히 갇혀 살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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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이 그의 향기로 가득했다.
담배 냄새 같기도 하고 알코올 냄새 같기도 하고,
가끔은 다정하고 또 대게 차가운 그 향은
언제나 취하듯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기 나름이었다.
영원한 저주처럼
계속 귓가에 속삭여지기 마련이었다.
"영화 볼까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기에
원식은 다시 한 번 불을 끄고는 스크린을 내렸다.
아무것도 틀지 않아 아직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다
문득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부드럽게 핥기도 했고,
가벼운 상처를 그녀의 목 언저리에 내기도 했다.
도망 치려 몸을 뒤로 빼는 윤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는 괜한 장난처럼 그럼에도 진지하게
꽤나 아프게도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그렇게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키스마저 너무 아이러니하다고,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홀리고 있다고
문득 윤설은 생각했다.
"아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디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원식은 물었다.
그의 방 안은 언제나처럼 어스름했고, 열린 커튼 사이로
은빛의 달빛이 희한한 무늬를 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은밀한 춤을 추듯,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듯.
"당신이 입 맞춘 모든 곳이..."
그녀가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원식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얕은 신음과 함께 한 번 더 그녀가 말했다.
"아파"
"그때도 아팠어?"
그가 물었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질문이었다.
"언제?"
"...맨 처음 내가 널 부른 날"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말을 하고 있는 그 눈동자를.
아팠을까...
아팠겠지...
윤설은 고개를 기울였고,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애써 깜빡였다.
그림자 같은 실루엣에 손을 뻗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어둠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어둠에게 전염되듯, 서로에게 걸려버리고 마는.
그런 저주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문득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의 저주라면 기꺼이.
"아팠어"
하고 윤설이 말했다.
원식은 떨리는 눈으로 제 곁의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의 두려움과 엄청난 초조함을 동반한 채.
등에 닿은 소파 팔걸이는 왠지 모르게 단단했고,
풀썩- 꺼진 쿠션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의 곁에 앉아있던 윤설은 손을 뻗어 원식의 얼굴을 만졌다.
아주 부드럽고 아주 가벼운 그 손길로 그녀는 천천히 그의 이마와
눈, 입술과 코를 훑어내려갔다.
책을 읽는 그 손길이 이내 그의 목에 닿은 순간,
원식은 애써 호흡을 멈추려 숨을 들이마셨다.
"많이 아팠어"
"..."
"당신의 손은 커다랗고"
"..."
"차갑고"
"..."
"단단하거든"
"..."
"알고 있어?"
문득 흘러내린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무릎을 세우고 일어난 그녀를 올려다보며 원식은 마른 숨을 삼켰다.
내려다보는 그 눈매가 괜히 야릇하게만 보여 귀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그의 존재의 더러움을 상기시켜주려는 듯 아프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알고 있어"
하고 그가 대답했다.
윤설은 그 대답에 가볍게 웃었고,
원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뱉었다.
"나쁜 사람이네"
그녀는 덤덤하게 말하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원식은 눈을 깜빡이다 이내 소파에서 일어났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윤설을 바라보다 이내 그 손목을 잡아끌었다.
윤설은 언제나 그랬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가쁜 발걸음으로 끌려왔고,
그녀의 모든 행동이 알면서 유혹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순순한 이끌림이었는지
정답을 모르겠다 이야기하던 원식은 이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영리한 유혹보다는 오롯이 솔직한 이야기만을 하는 그녀의 입술에,
그 의미와는 상관없이 끌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유혹이 아님에도 홀리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내리누르며
원식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고 윤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단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한
그 목소리로.
"나쁜 걸 알면서도 끌린 넌 얼마나 더 나쁘다는 거야... 응?"
아-
영원히 위에 있을 사람.
윤설은 긴장되는 듯 눈을 굴리다가 이내 꾹- 감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식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가빠지는 그녀의 숨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언제나처럼 다시 초조함이라는 굴레로 돌아오기 마련이었고,
초조했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두려웠기 때문에 하지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삭히게 만들었다.
변명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원을 함께 하고 싶었다.
원식은 숨을 삼키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이내 어울리지도 않는 그 다정함으로
왠지 모를 그 다정함으로,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윤설은 감은 눈을 살짝 뜨고는 원식의 실루엣을 애써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다.
억지로 숨겨놓은 모든 것들을
아주 간단히도 끄집어내는 그 솔직한 두 눈동자를...
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낮은 그 목소리.
애써 견뎌내는 그 숨소리.
꽉 막힌 초조함.
그의 질문.
처음으로 그의 입 밖으로 새어 나온 그 단어는
참으로 애석하고 또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하나의 질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질문으로.
"...그래도 나 사랑하지?"
그녀의 눈은 말을 하고 있구나
나는 대답을 해야지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
영원히 갇혀살아
<사슬 Chained Up - 빅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