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한 듯, 넓은 소파에 벌렁 드러누운 채 다리를 꼬고 발끝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정국을 찾기 위해 청룡궁으로 들어서던 윤기는 소파 위로 비죽 튀어나온 발 끝을 발견하고 또 이 자식이 여기로 피신했구나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소파의 앞으로 돌아온 윤기가 누워있는 지민을 보고서는 한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기 니 방 아니에요."
"알아. 아는데 눈 좀 감아주죠?"
말이 끝나자마자 매섭게 돌아오는 말에는 일렁이는 사방신의 기운이 담겨 있어 윤기가 말없이 뒤로 물러나더라도 충분히 이해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윤기는 보좌관들 중에서 제일 성깔이 더러웠고 -물론 이는 자신이 보필하는 청룡, 정국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민이 거의 한 달째 계속 이러는 중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윤기가 입을 열었다.
"아니 봐주는 것도 한두번이지, 왜 멀쩡한 네 궁 놔두고 여기 와 있는 건데?"
"그야 청룡궁이 내 파장을 그나마 상쇄시키니까잖아요. 아씨 진짜, 이것도 몇 번째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지민이 벌컥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 새 떠진 눈은 주홍색으로 변해져 있어 지민이 제대로 열받아있다는 걸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저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게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윤기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들어맞은 듯 자리에서 일어난 지민이 화가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씨발 내 깔따구 언제 나타나!
장기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느라 입이 험해진 지민의 욕설을 듣고서도 윤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네가 나가서 좀 찾으라니까?"
"내가? 내가 나가라고? 나 지금 힘 억누르는 것만 해도 힘들어. 나갔다가 큰일내면 어떡하라고?"
허, 하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코웃음치는 지민의 모습에 윤기가 그럼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계승식 날 이후로 계속 네 보좌관을 찾고 있잖아. 그런데 시간이 이렇게까지 지났는데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하는 건?
"이제 너 말고는 파장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야."
윤기의 말에 지민이 입술을 꾹 깨문다.
전대 사방신들에게서 각기 힘을 물려받아 현 사방신이 되는 날이었던 계승식도 거의 4개월 전이었다. 자신이 현대 주작으로 각성함과 동시에 각성했었을, 어디 박혀있는지 모를 보좌관의 기운을 일반 천인들이 감지할 수 있는 최대 기한도 이미 예전에 넘긴 것을 알고 있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지민을 보고선 윤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준이나 태형이나 다 찾고 있는 거 너도 알잖아. 심지어 걔네들은 너랑 아예 반대라서 그 힘을 감지하려면 정말 어렵고."
"............."
"그나마 너 빼고 파장을 눈치챌 수 있는 정국이도, 지금은 봄이니 일하느라 바쁘고."
"............"
"너 말로만 일 낸다 어쩐다 하면서 아직은 충분히 억누를 수 있는 거 알아, 지민아."
윤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다가 진짜 큰일나기 전에 서둘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건넨 후 지나쳐가는 윤기를 뒤로 하고 지민은 다시 눈을 감은 채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민윤기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는 아직 여름이 다가오지 않았기에 어찌저찌 버틸 수 있었겠으나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면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만일 그 전에 찾지 못한다면...
입술을 잘근 깨문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룡궁을 나갔다. 그리고 저 멀리 활활 타오르는 불로 뒤덮인 주작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릴 듯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은 지민이 발을 들이자 순식간에 사라져 평소와 같은 모습을 나타냈다.
* *
20XX, 3월, 대한민국.
날씨, 맑음. 너무 맑아서 짜증남.
어제 늦게까지 카페 뒷정리까지 하고 퇴근한 뒤라 피곤해서 아침 늦게까지 자고 일어난 나는 습관적으로 티비를 키며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작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라 정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세상에 일거리는 많고, 안타깝게도 갑질하는 곳도 많지만 다행히도 내가 일하는 카페는 사장님도 착하고 돈도 꼬박꼬박 잘 주시는 그런 좋은 곳이었다.
"내가 인복은 없어도, 일 복은 좋지."
물론 카페 일이 맨 처음부터 쉬웠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해왔던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하면 좋았다. 사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지만 손님이 주문하는 것을 받고 만들고 그러다보니 커피에 관심이 가서 이 쪽으로 공부할까, 하는 생각도 요즘 슬슬 떠오르고 있었다.
"바리스타 하고 싶다..."
정작 바리스타를 통과한 같은 카페에서 일하는 언니는 막상 해보니 이 길이 아닌 것 같다 뭐다 하며 카페 일을 접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진짜 뭐 하면 좋을까. 21살, 많은 사람들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야 할 나이겠지만 나는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사실 다니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다닌다. 고아 인생이 그렇지 뭐, 딱히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보육원에서 나온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 혼자 사는 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조용한 아침을 먹는 건 외로웠던 지라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티비를 켜는 게 습관이 되었다. 주방에서 식빵을 대충 집어 잼을 성의없이 발라댄 후 거실로 돌아왔다.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는 또 산불이 났다며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이번 대 청룡은 일처리 진짜 못하네. 산불이 벌써 몇 번째야?"
그렇게 작게 헐뜯으며 잼이 발라진 빵을 야금 뜯어먹었다. 청룡, 이라. 누가 들으면 넌 그걸 믿는 쪽이냐고 물어올 터였다.
믿거나 말거나 격으로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주제들은 항상 있는 법이다. 귀신의 유무, 외계인의 유무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우려먹기 좋은 주제로는 우리나라의 계절을 관장하는 사방신들의 존재 유무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 동양사상에 나오는 청룡, 주작, 백호, 현무 이것들 말이다. 그들 사방신이 우리나라를 보살펴주고, 물, 불, 흙, 바람 등을 다루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게끔 젊은 날을 바쳐 희생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방신들의 주제는 항상 어딜 가나 입 밖으로 꺼내지면 말하기 좋은 말할거리가 되곤 했었다.
사람들은 '사방신은 정말 있다' 라는 쪽과 '사방신은 없다 구라쟁이들아' 라는 쪽으로 나뉘어졌다. 사방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은 20-22년에 한 번씩 하루종일, 24시간 내내 밤처럼 몹시 어두워지는 괴이한 현상과 가끔 동해에 나타나는 거대한 뱀의 존재를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사방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은 암전되는 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거대한 뱀은 다른 걸 뱀으로 착각한 거라고 주장했다. 양 측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훨씬 더 많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나는-
사방신 따위는 없다는 쪽이다. 만일 그들이 정말 있다면 이렇게 거지같은 봄을 선사해 주진 않았겠지.
처음으로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바람피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도 사귄지 한 달 만에.
"개자식......"
헤어진 건... 헤어진 게 맞겠지, 그 뒤로 연락하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헤어진 건 일주일 전인데 생각해보니 또 열이 뻗쳐서 욕을 지껄였다. 나쁜 새끼,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문지방에 새끼발가락이나 콱 찧어버려라. 먹다가 생각하니 너무 짜증이 나서 식빵을 입 안에 꾸역꾸역 밀어넣고서는 전투적으로 씹어댔다. 내 입안에 들어있는 빵 쪼가리를 그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상쾌해야 할 아침부터 급속도로 기분이 저하되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해서 혹시나 그 새낀가 해서 들여다봤다. 이제와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봤자 용서해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소원과는 다르게 서연이한테서 온 메세지였다.
- 오늘 3시, 맞지?
남자친구가 바람핀 채 연락두절까지 된 여자친구의 상황에 놓여진 나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친구와의 연락을 취소하고 청승맞게 주저앉아 술을 벗삼아 우는 거겠지만 나는 달랐다. 껄껄껄 웃으며 핸드폰을 꾹꾹 눌렀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란 말일세. 난 걔랑 사귄 적도 없다고?"
이것은 정신승리가 아니다.
입으로는 전 남자친구, 아니 남자친구라는 타이틀도 아깝다, 암튼 그 놈에 대한 욕설을 한바가지로 퍼붓고 있었지만, 손가락을 착실하게 놀려 대답해주었다. 친구는 죄가 없으니까.
- ㅇㅇ.
- ㅇㅋ. 늦지 마라.
얘는 내가 지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알고서도 말하는 걸까. 나는 시간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직 10시 40분. 시간 많이 남았다. 어차피 약속장소까지 가는 데에는 시간도 별로 안 걸린다. 벽에 등을 댄 채 무기력하게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 분.. 십 분... 뭐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멍을 때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봐야겠다."
만인의 연인인 하울을 생각하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티비를 끄고 노트북을 켰다.
* *
"박지민 못 봤어?"
슥 나타나서는 물어오는 태형의 말에 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가 어딜 갔지. 태형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박지민이 주작궁에 있을 리가 없으니 그 곳은 애초부터 제외해두고, 요즘 박지민이 무단침입해서 늘러붙고 있다던 청룡궁에 가서 샅샅이 흝어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쑤시고 돌아다니다가 포기한 후, 남준과 게임을 하기로 한 걸 기억해내고 현무궁에 들린 후 또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 지금 그들이 있는 이 곳은 말만 '궁'이지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예전처럼 고풍지고 위엄있게 꾸며놓고 궁 안에서는 꼭 예복을 갖추어 입고 다니며 돌아다니고 그런 건 1900년대까지였다. 이미 모든 게 많이 바뀐 마당에 그렇게 구닥다리처럼 할 필요는 없었다. 김태형이 지금 한 손에 최신 스마트폰을 들고 들어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또한, 예전과 달리 사방신들이 입는 옷에 대해 제한도 없었다. 남준은 자신의 옷이 시커먼 게 꼭 저승사자 같다며 계승식 이후로는 입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태형은 뽀대난다고 백호 의복을 잘 입고 돌아다녔다.
청룡궁에 지민을 찾으러 들어간 태형은 평소처럼 딴 길로 새서 새로 들어온 발 마사지기에 두 발을 맡긴 채 누워서 한 시간을 보냈다. 두 눈을 감은 채 목적도 잊고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던 태형을 발견한 정국이 아 시발,을 선두로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댔다.
'내 집에서 꺼지라고.'
'너무 박하네 우리 청룡님. 지민이는 허락해주면서 왜 나는 안 돼?'
'좀 닥치고 나가. 백호궁 안에 홍수 일으켜 줘?'
안 그래도 봄이라 가뜩이나 매일매일 힘이 뭉텅이로 빠져나가 예민한 정국을 윤기가 타이밍 좋게 붙들어와 자칫하면 큰 싸움으로 일어날 뻔한 상황을 중재시켰다. 발 마사지기가 유난히 마음에 든 태형은 아쉽게 입을 쩝쩝 다시고는 현무궁으로 향한 것이었다.
남준이 부르는 대로 옆에 다가온 태형은 사막 지대로 맵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서는 눈을 살짝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편하게 쓸어넘겼다. 난 빨간 스포츠카, 멋있으니깐. 그럼 나는 노란색. 얼굴은 한없이 진지해 보여 누가보면 도원에 나타난 하늘 괴수들을 처리하는가 하고 생각할 만했지만 실상, 거대한 궁 한 쪽 측면을 몽땅 차지한 스크린의 내용은 레이싱 게임이었다.
"근데 박지민은 왜 찾는데?"
그러다 문득 지민을 왜 찾았나 궁금해진 남준이 스타트 버튼을 누르기 전에 태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태형이 미간을 살풋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걔가 김석진이 아끼던 숲 날려먹었어."
"진짜?"
남준이 커진 눈으로 되묻는다. 김석진은 애정을 주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동물들을 기르던가, 나무를 기르던가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어릴 적부터 남서쪽 경계 부분에서 녹색 수풀을 거의 20년이 넘게 키워왔다. 태형은 항상 입버릇처럼 자신을 보고
'태형아, 얘네가 너보다 한 살 적은데 왜 넌 키가 얘네들보다 훨씬 작아?'
하고 놀려대던 석진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튼 석진은 한 달에 한 번씩, 아니면 적어도 세 달에 한 번씩은 그 숲을 갔다오곤 했는데 며칠 전에 그 숲을 갔다오고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가 제 숲을 다 태워버렸다며 거의 넋이 나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석진의 말을 듣고 가 보니 정말 한가운데가 새카맣게 불타 있었다. 20년이 넘게 애지중지하며 키워온 숲의 절반이 죽어나간 사실에 한동안 멍하니 있던 석진은 이렇게 한 사람은 박지민밖에 없다며 잡아오라고 개진상을 떨어댔고 결국 태형은 지민을 잡아 석진의 앞에 데려다놓기 위해 찾아나섰던 것이었다.
"무원에 간 거 아니야?"
"그건 아니던데. 내가 방금 거기 갔다 왔거든."
어디선가 대신 대답하는 말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야구모자를 벗으며 들어오는 정호석의 꼴을 보아하니 또 지상에서 놀고 온 모양이었다. 저런 꼴을 볼 때마다 태형은 좀 못마땅했다. 어차피 사신 자리를 이어받았기에 그간 지상 세계에 나갈 수 없었던 제한 시간이 풀려 이제는 원한다면 마음대로 내려갈 수 있기는 했다. 김석진도 그걸 알고 계승식 후부터 한 번 갔다오자고 계속 조르고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태형은 내려갔다 올 마음이 없었다. 민윤기도 전정국을 도와주다보니 내려갈 시간이 없고, -물론 민윤기 그 자신이 지상 세계에 관심이 없긴 했지만- 해서 안심하고 있었지만 정호석이 이렇게 맘대로 지상세계와 천상계를, 밥먹듯이 왔다갔다 하는 걸 알면 김석진이 또 발광할 것이 분명했다.
"천인 맞아? 천인이 무슨 저렇게 지상인 같담."
"너가 김남준도 아니면서 왜 난리야, 얜 괜찮다잖아."
호석이 남준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태형은 또 눈을 치켜떴지만 남준은 도통 게임을 시작하지 않는 태형을 짜증스레 바라보다가 멋대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쐐앵 하고 달려나가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빨간 스포츠카를 운전하고 있던 태형의 귀로 호석의 목소리가 다시금 휙 날아왔다.
"근데 나 나갔던 때도 지민이 계속 도원에 없었던 거 같은데?"
"뭐?"
"지상에 내려갔나 봐."
태평스레 말하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내용은 기함할 만하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박지민이?!"
* *
"야이!"
저 쪽에서 걸어오는 서연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새 옷을 산 모양이었다. 너 또 옷 샀어? 그러자 어깨를 으쓱인다. 저번부터 너무 눈에 밟혀서 샀지. 내 옆에 다가와 팔짱을 낀 서연이가 하품을 크게 한 후 말을 잇는다.
"개강하고 처음 본다. 우리 어디가?"
"그러게. 음.. 카페에서 좀 있다가 영화나 보러 갈래?"
"그러지 뭐."
주변에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프라푸치노를 시키고 서연이는 바닐라 라떼를 시켰다. 카페 알바를 하는지라 솔직히 카페는 지겹긴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갈 곳도 없다. 최소한 두 시간은 앉아있으려 마음먹었기에 최대한 구석으로 간 우리들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 수업끝나고 바로 온 거야? 내 물음에 서연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학기는 어때?"
"팀플 벌써 있다."
'팀플'이라는 말에 손등에 닭살이 오도도 돋아났다. 비록 난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서연이가 말하는 팀플레이, 즉 조별과제를 들으면 정말 내가 그간 만나온 진상 손님들을 대하는 게 더 낫다 싶을 정도였다. 시도때도 없이 만나고, 프리라이딩에 발표 떠넘기기 등등. 나는 그새 나온 음료수를 받아들고 온 후 다시 자리에 앉으며 서연이에게 애도를 표했다.
"애도."
"게다가 한 명이 진짜 노답보스야. 나 이번학기 망한 거 같아. 어떡해?"
"아니야, 그래도 네가 말한 저번 후드남보다는 낫겠지."
"....후드남보다 더한 거 같은 느낌이야."
절망적인 대답에 나는 입을 닫은 채 음료수만을 들이켰다. 금세 얼굴에 빗금이 쳐져 있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선 난 말없이 손을 뻗어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한숨을 푸욱, 쉰 채 기분 전환을 삼을 요량인지 라떼를 한 모금 들이킨 서연이는 내 근황을 물어왔고 나도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버렸다.
"너 서준이랑은 어때? 잘 되어가? 이제 곧 있으면 50일...."
"일주일 전에 헤어졌어."
"되는...어?"
"걔가 바람폈거든."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고서는 다시 음료수를 쭉쭉 빨아들였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울컥한 감정 전혀, 하나도 없다. 일주일간 청승떨지도 않고 알바도 잘 나갔다. 울었던 적? 없다. 하지만 매우 평온한 내 심경과는 달리 눈앞에 있는 서연이는 전혀 다른 표정이다. 김여주,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사귄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게 말이 되는...
말이 되고 안 될 것도 없었다. 정말 그럴 수 있다. 바람을 필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게 내 남자친구였던 게 문제였고. 아무튼 그럴 수 있는 일이었기에 서연이가 저렇게 나보다도 더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건 왜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진짜 아무런 생각이 안 든다."
"야."
"정말이라니까, 나 일주일 전에도 안 울고, 어제도 안 울고, 오늘 아침에도 안 울었다고."
"김여주,"
"그러니까 나는....."
첫 연애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도 타격이 없다 이거야.
"진짜 아무렇지...않다...ㄱ....."
망할.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음료수를 집고 있던 손등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진짜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이러지. 말 없이 눈물만 주르르륵 쏟고 있는 내 모습에 당황한 건지 서연이는 손만 이리저리 허둥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도 이런 내가 이해가 안 되어서 짜증이 났다.
정말, 한서준이 바람피는 걸 알고 문자와 전화폭탄을 날리고 이틀동안 그걸 다 씹혔을 때도 이렇게 침통하지 않았고, 헤어질까? 하고 은근슬쩍 나에게 결정을 떠넘기는 치졸한 짓에도 눈물이 나지 않았으며, 그 뒤로도 정말, 연락 한 통 없는 걸 알고서도 슬프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면서 괜히 감수성에 젖어 있던 게 지금 나오나 보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안 괜찮아........흐으윽,"
정말 배신감 따위는 하나도 안 느껴지긴 개뿔.
날 전적으로 달래줄 친구가 눈앞에 있자 눈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진짜 싫어, 짜증나, 죽여버리고 싶어 걔, 걔는 왜 그렇게 뻔뻔한 거야....
첫 연애의 경험이 이렇게 쓰다면 애초부터 필요없었다. 나는 딸꾹질을 하며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런 나를 보고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서둘러 휴지를 뜯어 건네주는 서연이에게서 휴지를 받아들고서 닦아냈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일주일 동안 묵혀왔던 걸 이 자리에서 쏟아내겠다는 듯.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고 있느라 내 어깨를 잡아오는 손이 서연이의 손인줄만 알고 있었다.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말이다.
"잠깐, 실례."
".....?"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돌리자 타오르는 주황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려 달라붙은 속눈썹 사이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키스 좀 할게요."
내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내 입술 위를 부드럽게 덮어와, 말을 잇지 못했다.
주작, 박지민. 21세.
관장하는 계절: 여름.
특이사항: 보좌관이 없다.
.... 찾은 것 같다.
* * *
암호닉 신청 받아요!